| 작가 연구 | 안영희 | 신작 시 |
환절 외 2편
그루터기만 남은
겨울 논, 고추밭 무덤 위 두껍게 층을 이뤘던
산마을의 눈이 녹고 있다
털목도리를 풀어내고 있는 내 맘처럼
동토의 결박에서 풀려나는 지난해의 낙엽들도
괜찮다, 뭐 괜찮아… 스스로도 모르게 수용하며
해체의 큰 잠 속으로 슬픔 없이 빠져드는 것 같다
못 박힌 자리 으르릉대며
바람 속에 뜯고 뜯어 날린 건
살과 피의 갈증, 돌아보니 삶은 구도였었구나!
얼음장 풀리는 우수雨水의 도랑물 속에 서서
갈대들은 끄덕이는가
스러져 가는 빛 뿌렁지까지 부시게도 환해져서
털돕바의 단추를 풀 듯, 가죽의 장갑을 뽑아내듯
올무에 죄어진 허무의 운명도
뭐 그냥
풀어 내버릴 것 같은, 삶과 죽음의 악수
환절換節
부산 가는 기차
눈앞에서 일행을 놓치고
가까스로 다음의 기차에 올라앉아서
남녘의 저 도시는
어찌하여 내게 연고가 없었나, 생각하다가
ㅡ부산 가고 있다,
행여 조카야, ㅇㅇㅇ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면 찍어다오
책 한 권 전하고 싶구나, 죽기 전에,
해질 무렵에사 겨우 뜬
ㅡ…그 양반 사업 망하고 나서는 요
자식들하고도 연락 끊긴 지 오래라네요, 이모ㅡ
멀리에서 온 조카의 답신을 읽다가
차창 너머로
물살물살 남실대며 지나가는 소만小滿 무렵의 무논들을
보았다,
아 그 먼저 내 생애에서 5월의 저 물 찬 논배미 같던 한 사람이
영영 지나가 버렸음을 알았다
어쩌다 스치는 모퉁이마다 만조의 물비늘 반짝반짝
눈만 그리 부시더니
치명 문장
막무가내 유예되고 있는 선고를
오직 입 다물고,
다만 입 처닫고 기다리고 있는데,
목숨의 비루함이
그물망 안에서 붉게붉게 진저릴 치고 있는데
아침나절부터 거기 무슨 장이 선 거냐?
대학병원 암 병동 앞의 대기실, 통유리 한 장 창으로
빤히 건너다보고 있네
꾸역꾸역 팔도에서 떼 몰려든 이쪽의 인파를
초췌한 겨울 창경궁이
어제저녁 티비 앞에서 네가 조바심쳤던
사랑과 격정 그 열망 따위들은
집 나간 지 벌써 백 년, 백골들의 허상놀이였을 뿐이야
화악! 불판 위에서 지지직 지지직 쫄고 있는
내 피를 식히네
단 한 판 인 거, 라
차고 휘몰리는 암병동 대기실 유리창에
치명 문장으로 떠서, 겨울 창경궁이
| 작가 연구 | 안영희 | 근작 시 |
생물 선생님 외 3편
매일 걸었어요 어린 강아지를 데리고
시계市界 너머까지 망망히 열린 유휴지 둘레 길을
포플러 아름드리나무들을 따라서
그곳에다 밭을 일구는 신축아파트 주민들 중
내게 가끔은 푸성귀를 뜯어가도 좋다고 허락한 사람은
생물 선생 출신이라 했어요
그러나 이내 대형마트 신축을 위해
그 땅은 갈아엎어지고
어느 새벽녘 누가 물감통 잘못 엎지르고 간 듯
야산 입구 쓰레기 뒹굴던 땅뙈기 한쪽이 돌연
초록으로 부풀어 있었어요 그곳에 박혀있는 희끗해진 뒤통수 하나도 보았어요
아하 그러면 그렇지, 고갤 끄덕이며 스친 이후
앗긴 산책길을 찾아 매일 마을의 바깥까지 이슬 젖히는
들짐승이 된 나는
돌연 호되게 소리치고 선 젊은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를 향해 경사의 맹지 언덕을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머리칼이 하얗게 센 한 사람을 보았어요
딱 걸린 현장 범인 양 단 한마디 항변도 못 하는
생물 선생을 보았어요, 그 손에 들려있는 한 자루 호미가
내 목울대를 뜨겁게 했어요
소만
홍천 가는 국도 아래
남실남실 물이 찬 논배미들과
이내 모내기로 실려 나갈 못자리들이
눈에 묻어올 듯 초록이네
모내기 날 고모집의 툇마루
다져 올린 고봉밥과 간 고등어 한 토막씩이 올라앉은
감자조림의 밥상이, 걷어붙인 일꾼들의 종아리와
햇목화 빛 햇빛이 보이네
…지금은 폐가가 된 집,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의 충만한 생의 풍경들이
부시게 깃을 쳐대고 있네
저녁이 오면
저 물찬 논배미마다 개구리들이 영원처럼, 영원처럼
울겠지
뭐 하자고 찾아왔는지 저어만큼서 바라만 보다가 가던
소년들이 있었던 열일곱, 그 저녁들처럼
소만小滿,
믿을 수 없이 차오른 이 물의 절기는 얼마나 많이
죽은 자리들을 다시 채우려나
ㅡ갑시다, 거기!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헛되이 녹슨 빗장 젖히는 소리
약속 방기한 동안 그 가슴자리 되돌릴 수 없는
천수답天水畓이 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마중물을 붓는다
고모집 마을에는
언제라도 찰찰 넘실대는 공동우물이
있었으나
물동이로 이어서 나르기엔 우물은 산으로 잇대 인
막다른 고샅 끝에 있었으므로
어느 해 마침내 정개 앞에다
펌프를 박았네 그러나 물은 좀체 쏟아지질 않았네
몇 바가지씩 마중물을 붓고 숨이 차도록
펌프질을 해대지 않으면
내 손 발가락 끝마디들 곧잘 노랗게 죽고
하반신이 추워서 자고 일어나면 걷네,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걷는 동안
빙하기로 떨어진 내 차디찬 지체들에 충전되어오는
생기를 감지하네,
구불구불한 하지의 정맥 다발들도 피돌기를 시작하는가
마침내 당도한 마중물을 만나
정지해 있으면 한사코 달아나는 生
가까스로 불러 데려오는 마중물을 붓네,
자고 깨면 들어다가 놓네, 놓네 동력에다가
내 몸뚱이
내 맘속의 크리스마스
우리 집은
바라크로 지붕을 인 피난민 마을과
마을의 뒤로는 긴 둑을 끼고 아득하도록
보리밭이 펼쳐진 광천동에 있었네
이른 아침 약국 문을 열고 비질을 하러 나간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네
얘, 어서 나와 봐! 누가 너한테 카드를 넣고 갔다아!
함박눈 뭉텅뭉텅 내리던 간밤
햇목화솜이불인 양 품어 안으며 잠 속으로 미끌어 들었던
처마 아래까지 와서 불러주던, 마을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캐럴!
밤 깊도록 엎드려서 그리고, 다시 그렸을 카드에
정작 내 이름 한 자를 틀리게 쓴 채,
잠 깊은 유리문 틈새에 끼워 넣고 간 그 남학생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 하며 살까
남도의 그 도시엔 오늘 밤도 펑펑 솜사탕 뭉친 양 눈이 쏟고,
은색금색초록빨강 우체국 근처 문방구엔
이국적 풍경의 색색 카드들이 줄줄이 걸리고
캐럴송과 한껏 상기한 행복들 붐비는 거리 한켠,
과묵히 늙은 우체국 앞마당에서
지금도 빨간 우체통은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 다리를 묻고
기다리고 있을까 하염없이 하염없이
돌아보면
이슬, 이슬방울들 너머 열일곱 살을
안영희 | 1990년 시집 등단.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어쩌자고 제비꽃』 『내 마음의 습지』 『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 서정시선집 『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 산문집 『슬픔이 익다』. 2021년 문예바다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