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9월15일김녕김씨 충의공 파 대종회 회신 문
羅山書院(나산서원)
경주시 양남면 나산1길 27
이 나산서원은 조선 초기 6대 임금 단종 복위를 모의하시다가 순설하신 사육신 백촌
김 문기(?~1456)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腏享之所 (철향지소)이다.
김문기(金文起)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으로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1426년(조선 세종8년)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인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로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 병조정랑(兵曹正郞) 경창부소윤(慶昌府少尹)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 수승문원판사(守承文院判事)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겸지병조사(兼知兵曹事) 병조참의(兵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함길도 관찰사(觀察使) 형조참판(刑曹參判) 함길도절제사(節制使)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工曹判書兼三軍都鎭撫)를 두루 지내셨다.
선생은 문무를 모두 갖춘 당대의 명궁이고 전락 가였으며 1456(세조2년) 6월 단종 단종복위 모의를 주동하시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순절하시고 아드님이신 군수(郡守) 공 현석(玄錫)도 연좌로 죽임을 당하셨다. 선생은 영조 때 신원복관 작 되시고 1778(정조2년)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으셨고 1791년 영월 장릉 충신 단에 배향되셨다. 1977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는 500년 동안 야사에 의해 묻혀 있던 선생의 충절을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학술적 연구와 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선생을 세조 조에 가려진 육신중의 한분으로 판정 현창하였다.
본 서원은 백촌선생의 5세손 송와(松窩)공 휘 제학(提鶴 1576~1648)의 후손들이 1780년(정조 4년) 나산리462-2 일대(새말 新里)에 나산사(羅山祠)를 건립하고 백촌 선조의 영령(英靈)을 모시고 후손들을 교육을 하였는데 1870년 (고종6년)에 서원철패 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36년 현 위치에 나산서당을 새로이 건립 하였고 1999년에 영남유림의 공의(公議)로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하기로 하고 경주시의 보조와 사림과 후손들의 지원으로 숭절사(崇節祠),병충재(秉忠齋),강의재(講義齋),전사청(典祀廳),수덕문(修德門)를 중수하고 2010년 서원의 낙성과 봉안 고유를 하였다.
이곳 나산 입향조이신 通德郞(통덕랑) 송와(松窩) 공께서 1592년 3월 영동에서 나산으로 오신 내력을 기록한 33자(字)의 지석(誌石)이 2019년에 합동묘원을 조성하면서 입향조 아들(子) 휘 선일(善鎰)산소 상석 밑에서 발굴되어 서원 내 숭절사(崇節祠) 아래 모셨다.
매년 음력3월 중해일(中亥日)직후 일요일을 정일(定日)로 하여 유림봉사로 제향(제享)을 모시고 있다.
2023년9월15일김녕김씨 충의공 파 대종회 회신 문
羅山書院(나산서원) 나산서원연혁 안내글 예문
경주시 양남면 나산1길 27
이 나산서원은 조선 초기 6대 임금 단종 선위에 즈음하여 충의를 다하신(순절하신) 사육신 백촌김 문기(139?~1456)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腏享之所 (철향지소)이다.
절의의 사육신 김 문기선생의 본관은 김녕김씨 9세손이며 충의공파조이시다.
조선4대 세종(世宗)8년 서기1426년 생원(生員)시와 문과에 급제로 초임에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인 한림(翰林)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 함길도도진무(都鎭撫) 수승문원판사(守承文院判事) 수겸지형조사(守兼知刑曺事) 병조참의(兵曹參議)등이다.
5대 문종 대에는 수석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6대 단종 대에는 함길도 관찰사(觀察使) 형조참판(刑曹參判)경원부사(慶源府使)등이며 백촌선생은 문관이면서 당대제일의 명궁(名弓)이어셨다 한다.
1456년(세조2) 갑진조에 팔도관찰사,절제사,처치사에게 내린 선유문(宣諭文)에 이개,성삼문,박평년,하위지,유성원,김문기,박중림,성승,권자진,유흥부,박정,송석동,윤영손,최득지,최치지,박기년,박대년 17인등의 반역음모선유문은 후세(숙종,영조,정조)에 단종의 충신으로 복관 작 되었으며 1791(정조15)년 강원도영월 단종의 장릉 장판옥(藏版屋)에 목숨을 바친 정단(正壇) 충신위(忠臣位)32인과 조사위(朝士位)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44인 여인위(女人位)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位牌)에 김문기 자(子)현감 현석도 연좌되어 함께 모셔져 있다.
사육신에 대한 잘 못 전해 내려온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여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 문기선생을 사육신으로 판정하여 사육신공원에 허장(虛葬)을 모시었으며 기념비는 의성춘산 대사리 덕양서원에 모서져 있다.
본 서원은 충의공 문기의 5세손 휘 제학(提鶴 丙子72세1576~1648)후손들이 정조4년 경자(1780)년에 나산리462-2일대(새말)에 나산사(羅山祠)강당으로 건립(建立)하여 백촌 선조의 영령(英靈)을 모시고 후손들의 교육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1870년 고종6년에 서원철패 령으로 2년 후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936(병자)년 현 위치에 나산서당으로 새로이 건립 하였고 1999년에 경주시의 보조와 사림과 후손들의 지원으로 숭절사,병충재,강의재,전사청,수덕문를 세우면서 2010년(경인)에 서원으로 승격 봉안고유 하였다.
이곳 숭절사 아래 나산 입향조 通德郞(통덕랑) 송와 공 제학 할아버지께 임진년(1592)3월 영동에서 나산으로 오신 기록인33자(字)의 지석(誌石)을 2019년에 합동묘원을 조성하면서 발굴되어 비각(碑)에 모셔져 있다.
매년 음력3월 중해일 직후 일요일을 정일(定日)로 하여 유림봉사로 제향(祭享)을 모시고 있다.
1980년대 영인본 나산서당(나산사)
1999년 나산 서당
본원을 중심으로 숭절사를 새롭게 짓고 백촌 조 봉안
2010년 나산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2020드론사진)
나산서당 본체 모습
철향지소: 출저 동경속지 내용
학덕이 있는 사람을 분묘나 서원에 소중이 두어 모시다.
동경속지(東京續誌)기록 1권 125p
기록내용
羅山祠는 在 陽南面 羅山里 五龍山 下 하니 金文起
腏享之所라 正廟庚子에 建하야 高宗庚午에 掇리러니
己亥에 重建하야 以 釋茶禮로 享之하다
한글
나산사는 재 양남면 나산리 오용산 하 하니 김 문기
철향지소라 정묘경자(1780)에 건 하야 고종경오(1870)에
철 리러니 기해(1935)에 중건하야 이 석차례로 향지 하다.
철향지소 구분
醊 제사 이름철(의이를 지킨 생육신)= 醊享之所(철향지소)
腏 살바를 철(죽음으로 충의를 다한 사육신)= 腏享之所(철향지소)
享祭(향제)에 올일體豚(체돈)
조선 초기역사에 수 십 년 전부터 사육신(死六臣)의 정통성에 관한논란으로
성 삼문, 하 위지, 이 개, 박 팽연, 류 성원, 유 응부, 여섯 분 중 유 응부 사육신은
지금까지 역사에 잘못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전고대방 내용(강효석)의 인물 사(史) 기록
과 남 효온(야사)이 쓴 추강전의 오류임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널리 공개됨으로 억울하게 역사에 왜곡되어 묻혀 버릴 뿐 한 백촌 김 문기선생을 1977년 역사편찬위원회의에서 선생을 사육신으로 바르게 현창되어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모시고 의절사에도 위패를 봉안 해 지금까지 현창 해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 사이버공간이나 이야기로 여러분에게도 잘 알려진 분이여러지역에 배향되어 모셔오고 있지만, 우리의 향토에 있는 나산서원(羅山書院)에 배향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알고 있는 분들이 드물 것이다.
삼짇날 길일이다 음3월3일 지석33자
33천 하늘의 신 도리천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현상(선덕여왕)
1,독립선언문 33인 서명, 2,새해 종로보신각33번 3,인체의 척추뼈 33개
4,불국사 백운교, 청운교33계단, 5,은하수별자리33자리, 6,첨성대 33단
지석33字
우리의뿌리
알지 계림김씨→경순왕 子→은열후→수성군후 →봉기4子→
시흥 김녕김씨 관조→
9세손 문기(충의공파조)→
김 문기 사육신
충의공파 백촌선생의 복권은?
14세손 논학의 손자(관16, 파8세손 )이휘는 백촌조 복권을 위해 신문고 제도의 폐지에도
不問曲直(불문곡직)하고 북을 치니 한양 안 날리가 낫던것이다.
그리하여 숙종43년(1717년1월9일)신원(伸寃)의 실마리를 하시었고
숙종임금님께서 복원하여라는 명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복원절차를 다 해 놓고 안타깝게도 16세 이휘조께서
한양 여사(旅舍)에서 70세에 여사(旅死)하시고 숙종임금에서
왕권이 영조임금대로 바뀌게 되었다.
여기 이휘 조 18세손 정구 손자는 할아버지마저 객사하시고 애타게 기다려도 신원 복관작(復官爵)소식이 없자
13세손 영시 조( 상주관아 )→14세손 1, 논학 2,弟 제학 (영동관아)-----14형제
전해 내려온 애기로 (괴산문중카페 참고) 1592년 임진왜란 時 14세손 논학 조는
합천 황계로 둘째 제학은 나산(羅山)로 은둔 생활을 하였다.
→
준비중 글
첫댓글 우리의 뿌리~~알지 계림김씨 ~~~수성군후 ~~ 봉기(붕기4子) 오류 입니다.
그리고 김녕김씨 관조 휘 시흥 분을 1세라 칭함은 오류라 생각 됩니다. 김녕김씨 "관조"라
함이 맞을듯 합니다.
얘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