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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조선 사람들이 대개 기피했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특히 초기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 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고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 때 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며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 황제가 사용했으며, 순종 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이어서 사용했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제318호, 제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지하1층에 전시되어 있다.[14]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는데,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고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15]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라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했고,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 순종황제어차(캐딜락)# |
| 순정효황후어차(다임러)# |
고종은 커피를 매우 좋아해 '고종께서는 고히차를 즐기셨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17] 커피 맛에도 굉장히 민감했는데, 김홍륙 독차 사건 당시 아편을 탄 커피를 한모금만에 맛이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바로 뱉어내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아들 순종은 커피가 익숙지 않다보니 그대로 다량을 들이켰다가 심하게 구토하며 기절하고, 며칠 동안 혈변을 보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고종이 커피를 처음 접한 시기에 대해서는 아관파천 시기로 보고 있다.
식혜 또한 정말 많이 먹었다. 특별히 소나무 사이사이 돌틈에서 나오는 좋은 석간수(石間水)라는 물을 받아다가 쌀을 삭혀서 식혜로 만들어서 먹었다는데, 너무너무 즐겨 아침새벽(새벽 4~6시)에도 먹고 저녁 밤참(저녁 9~11시)에도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당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냉장고의 영향으로 사시사철 즐길 수 있게 된 냉면 역시 많이 먹었다.
시대상 사치품 중 하나인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도량형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1894년(고종 31년), 국제미터원기와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도입해 왔다. 국제적으로 미터협약이 체결된 지 19년 만이라는 이른 시기이다.
일본 메이지 천황과 1852년생 동갑이다. 생일은 고종이 양력 9월 8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고종이 먼저 태어났다. 똑같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왕실에 서양 음식을 도입해 즐겨먹기 시작한 시기도 비슷해서, 고종은 커피와 각종 서양 디저트를 즐겼고 메이지 천황도 일본에서 1200년간 이어진 육식 금지령을 깨고 서양식 고기 요리를 즐겼다. 심지어 메이지 천황은 서양식 고기와 서양식 과자를 너무 즐겨먹은 탓에 비만과 당뇨에 걸렸고 합병증이 악화되어 59세의 나이로 고종보다 먼저 서거했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언문 글씨체는 잘 남아 있지 않으나, 고종의 주치의 올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에게 손수 써 준 족자에서 대강 확인할 수 있다. #, #, # 족자 본문의 내용은 "投[18]良濟堯帝時巫咸(투양제요제시무함)"인데, 한문과 동아시아 역사에 익숙지 않고 한글과 한국어만 어느 정도 아는 서양 선교사를 위해 친절하게도 언문 풀이를 달아 둔 듯하다.[19]
됴흔 약을 가지고 잘 쓰ᄂᆞᆫ 법은 팔쳔삼ᄇᆡᆨ팔십여 년 젼에 요라는 황뎨 ᄯᅢ에 텬하에 뎨일되는 무함이라ᄂᆞᆫ 의원과 ᄀᆞᆺ도다[20]
(좋은 약을 가지고 잘 쓰는 법은 8380여 년 전의 '요(堯)'라는 황제 때에 천하에 제일가는 '무함(巫咸)'이라는 의원과 같도다.)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또 암살의 위협으로 안색이 어둡고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고 한다.[21]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외국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고종이 벌인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후 한국 병합의 걸림돌로 판단한 고종을 폐위시켰다.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공표하는 게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양모인 신정왕후 조씨의 삼년상을 치를 때, 동구릉과 왕실 사이에 전신선을 놓고 3년간 전화로 곡을 했다. 아들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고종 자신과 아내의 삼년상을 치를 때 전화로 해야 했다.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와플, 카스텔라 등 달고 담백하며 깔끔한 음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음료로는 식혜, 사이다, 커피[22]를 주로 즐겼으며 술은 전혀 못 했다고 한다. 또 수라상에는 백반(白飯)과 홍반(紅飯, 팥물밥)이 함께 오르는데, 고종은 늘 백반만 먹었고 홍반은 공기 뚜껑조차 안 열었다고[23]. 여름에는 주로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등이 올랐고 겨울에는 냉면, 아이스크림 등이 주로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여름엔 따뜻한 것을 즐기고 겨울엔 차가운 것을 즐긴 듯하다.[24] 유독 냉면을 먹을 때는 면치기를 했다는데, 원래 전통 예법상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옳으나, 냉면만큼은 예외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야 더 맛있다고 상궁들에게 이야기했다 한다. # 이렇듯 식사 예절이 그 시대 군주치고는 여유로웠던 편이라 식사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상궁들을 불러 칭찬도 했을 정도. 반대로 순종은 식사 중에 전혀 말이 없었다. # 순종은 독차 사건 후유증으로 틀니를 껴야 했기에 잇몸이 약해서 상궁들이 순종의 깍두기는 삶은 무로 담갔다.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전통적인 반청 감정도 있었던 만큼, 청에 파병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 의화단 운동 진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고종에게 파병을 제안하였고, 고종 역시 적극 검토했던 것. 이어 고종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청으로의 파병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전력 부족을 이유로 만류한 후, 본국에는 사뭇 조롱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무인 이성계의 후손들로 대대로 장대한 체격을 가진 조선 왕실에서 보기 드문 단신이다. 물론 모든 왕들의 체격과 외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25] 태종처럼 팔다리가 파리하다거나 영조처럼 호리호리한 체형이라는 기록이 남은 경우도 있으나 고종처럼 150cm대 단신임이 명확한 사례는 유일하다. 하다못해 아들 순종도 160cm는 넘겼고 의친왕은 그보다도 큰데...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150cm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아마도 할아버지 남연군 대에 들어서야 효종 직계의 왕실 종친으로 편입된 인평대군의 후손인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연군 가계는 인평대군의 적장자 복녕군의 후손이긴 하지만 그 차남 의원군 가계로 내려왔고, 또 그 중에서도 방계에 방계인 집안이었다.[26] 조선 후기 성리학적 적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서자는 말 할 것도 없고 적중자들도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어졌으니 좋은 신붓감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데, 심지어 고종의 생물학적 현조부인 안흥군 숙은 차자에 청각장애인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문제가 심각했다.[27] 사실 숙종 이후의 조선왕실이 직계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후궁 소생으로 이어져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28] 이러면 왕의 취향 같은 부분도 있지만 경화사족층에서 벗어난 유전자풀의 다양성 확보 측면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29]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 조선이라는 국호가 유지된 시기에 왕으로 즉위한 마지막 국왕이자 중국 청나라 제후국으로서 공식 집무복인 붉은 곤룡포(홍룡포)를 입고 왕으로 재위한 마지막 국왕이기도 하다.[30] 따라서 이 때문에 역대 한국사 군주 중에서 복식 변화가 극단적으로 잦았던 유일한 인물인데[31] 재위 초중반[32]에는 여느 국왕과 다름없는 붉은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한 전통 조선 임금으로 나오다가 중간에[33] 대조선국 대군주 시절에는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복식 개혁에 따라 청나라 제후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징으로 흑룡포를 임시 도입하면서 홍룡포와 병행 착용하다가 재위 후반으로 가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상징인 황룡포로 바뀌더니 여기에 이어서 1900년 이후 재위 말기에는 서양식 대원수 제복을 입고 짧은 머리와 양복 차림의 근대 국가 수장으로 180도 변신한 모습으로 나오는 등 가장 변화가 심했던 격동의 조선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위에 오른 이후 극명하게 다른 스타일로 이미지를 3번 이상이나 변신한 국왕은 고종이 한국사에서 유일하다.
역대 조선 국왕 중에서 공식 국가 명칭과 본인의 직함이 가장 격동적으로 변했던 유일한 국왕이기도 하다. 고종은 1863년 12월(철종 14년)에 즉위한 이후 갑오개혁 시기까지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보내다가 갑오개혁 이후 국호를 대조선국으로 변경하고 직함을 국왕에서 대군주로 바꾼 다음에[34][35] 1897년 10월에 완전히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직함을 변경해 초대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에 역대 조선 왕 및 한국사 군주 중에서 가장 국호와 직함 변화가 잦았던 유일한 국왕이다.[36] 1910년 7월 경술국치 망국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가가 조선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덕수궁 이태왕의 직위를 가지게 된다.
만약 죽지 않고 종신했다면 영조의 52년 재위기간을 넘어선 55년간 재위한 왕일 예정이었다.
[1] 광무 5년 신축(1901) '33. 안영중의 방술' 편에 수록[2] 내시들이 관리한다.[3] 참고로 명나라의 말제였던 숭정제도 내탕금을 지나치게 모아서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할 때쯤엔 돈이 안 나와서 약탈을 했다고 하는 만큼 내탕금은 국가를 위해 쓰였다고 보는 시각도 많은 반면 고종의 내탕금은 적재적소에 쓰일 새도 없이 나라가 망해버렸다.[4] 한화 3억 5천만 원인데, 현재 가치는 더욱 높을 것이다.[5]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종이란 시호 자체는 굉장히 좋은 시호 축에 속한다.[6]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7] 사실 이것도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해서 44년이지 사망년도인 1919년까지 자리에 있었다면 56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을 기록하게 되어 52년을 재위했던 영조의 기록을 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일제의 고종 독살설이 사실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재위 60년을 넘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8]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그러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기록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였다. 게다가 애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도 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9] 대체역사에서 고종이 나오는 경우 독자들은 군밤, 군밤이, 군밤왕이라고 부르며, 아예 제목에 군밤이 들어가는 <고종, 군밤의 왕>이라는 소설도 나왔다.[10] 정확히는 황율(黃栗).[11]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12] 단, 광서제는 서태후의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 실패했다. 청의 잠재적 국력에도 불구하고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면서 이 현상은 심해졌다.[13] '전등'은 아니다. 일본, 중국, 인도에는 이미 초기형 전구인 아크등 가로등이 도입된 상태였다.[14] 이 다임러 리무진을 국립고궁박물관 측에서 복원하여 운행하는 행사를 개최하려 했으나, 예산 문제로 취소되었다.[15] 1910년대 초에 10대밖에 만들지 않아 보관된 과거 조지 5세가 타던 차량 1대 외에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또 있었던 것이다.[16] 이 때문에 경복궁 내부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카페에서 와플을 팔면서 '고종이 즐겼던 와플'이라는 홍보 문구를 적극적으로 걸고 있다.[17] 포르투갈어의 영향으로 고히, 또는 고히차라고 불렀다.[18] 족자에는 '投'의 이체자인 '𭠘(⿰扌𪠲 또는 ⿰扌⿱口又)'로 쓰여 있다.[19] 본문의 한문에도 "투량뎨요뎨시무함"이라고 각 한자마다 당대 기준 한자음 표기를 한글로 써 두었다.[20] 족자를 자세히 보면 '요', '무함' 등의 고유 명사에는 줄이 그여 있다. 원문이 우종서(오른쪽부터의 세로쓰기)라 글자 오른쪽에 그여 있다.[21]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어리하게 생겼다고 좀 디스하고 있다.[22]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셨다. 이를 안 김홍륙이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집어넣어 독살을 시도했으나 고종은 하도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커피에 익숙해서 맛이 이상한 것을 간파하고 바로 뱉어버렸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은 이 커피를 마시고 한동안 각혈과 혈변에 시달리는 등 정말 크게 고생했다. 이후 고종은 김홍륙을 교수형에 처했다.[23] 수라상에는 물림상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손 안 댄 홍반과 남은 음식은 궁녀와 환관의 몫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도 물림상은 깨끗하게 줘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어서 반찬 덜어먹을 젓가락을 따로 두고 먹었다. 고종과 순종이 홍반을 안 먹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순정효황후 윤씨는 홍반도 잘 먹었다.[24] 사실 냉면 자체가 원래는 추운 겨울에 바깥의 마루 위에 육수를 두어 살얼음으로 만들고 그 살얼음 육수에 면을 말아 후끈후끈한 온돌방 안에서 먹는 음식이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그대로 정착한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미군의 원조로 염가에 공급된 밀가루로 만들어 부산 향토 음식으로 정착시킨 것이 그 유명한 밀면이다.[25] 정확히는 모든 왕들의 어진이 그려졌고 당대 조선의 초상화 특성상 그 자체로도 체격과 외모를 파악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이나 용두산 대화재로 대부분이 타버렸다.[26] 인평대군-(적장자)복녕군 욱-(적차자)의원군 혁-(적차자)안흥군 숙-(적장자)진익-(적차자)병원-(적차자)남연군 구(은신군 양자 입적)-(적차자)흥선군 하응[27] 안흥군은 사촌형제들과 친형 이유일까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졸지에 인평대군계의 봉사손이 되지만 이건 40대가 다 되어서의 일이다.[28] 영조(숙빈 최씨), 사도세자(영빈 이씨), 순조(수빈 박씨), 철종(숙빈 임씨 소생 은언군의 서자 전계군의 아들)[29] 실제로 위의 각주에서 언급된 왕의 친모들 중에 간택후궁은 수빈 박씨 하나뿐이며 그 외에는 모두 궁녀 출신이다.[30] 순종은 실권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이 앉힌 존재이자 애당초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온전히 즉위한 첫 번째 황제이기 때문에 재위 증에 복식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31] 고려 충렬왕때 원 간섭기가 본격화되면서 재위 중에 변발컷을 하고 호복으로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 중기까지는 청룡포를 공식 집무복으로 입다가 세종 후반에 붉은 홍룡포를 도입해 고종 초중기까지 이어지는 등 고려 충렬왕과 조선 세종은 복식이 딱 한번만 변했기 때문에 역대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 3번 이상(홍룡포-흑룡포-황룡포-대원수 제복)이나 복식이 변한 케이스는 고종이 유일하다.[32] 1863~1894년[33] 1894~1897년[34] 대조선국 대군주 시절 대표적으로 을미사변(1895)과 아관파천(1896)이 발생하기도 했다.[35] 엄밀히 따지면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마지막 조선 국왕으로 시작해 초대 대군주로 개편한 군주이자 동시에 마지막 대군주인 유일한 계보를 가진 군주이며 당시 고종은 황제로 선포하기 이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청나라 제후국에서 벗어난 독립국임을 알리되 아직 대한제국 정식 선포 이전까지 어느 정도 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임시로 존재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초대 대군주에서 2대 대군주로 계보가 이어지지 못한 건 본인의 재위 시기에 황제로 격상하였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게 되었고, 이 시기에 복식은 여전히 국왕 시절 붉은 곤룡포를 유지하면서 흑룡포를 임시 도입해 공식 집무복으로 병행 착용하면서 호칭도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한단계 격상되었다.[36] 역대 조선 왕 중에서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 태조 이성계가 잠시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건 아직 국호가 확정이 안된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이를 제외한 역대 조선 국왕 중에서 재위 중에 직함과 국호 모두가 2번 이상 바뀐 사례는 고종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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