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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聖經)을 구약성경(舊約聖經)과 신약성경(新約聖經)으로 나누며, “구(舊)”는 오래되었다는 뜻이고 “약(約)”은 “약속”과 “언약”을 뜻합니다. “신(新)”은 새롭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舊約聖經)은 예수님께서 나시기 전에 기록된 오래된 것이고 신약성경(新約聖經)은 예수님께서 나신 후에 기록된 새로운 약속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표시하기 위해, 구약성경은 까만색으로 표시해 놓았고 신약성경은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나시기 700년 전에 기록되었고 이사야 예언자가 기록한 책입니다.
“예언(豫言)”이라는 한자어는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인데 미래에 있을 일들을 미리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豫言者)는 7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잖습니까? 한 시간 뒤 일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1년 이후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10년 이후의 일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100년도 아니고 700년 뒤에 있을 일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과 같이 된 것을 후대에 사는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1년 뒤의 일도 알 수 없기에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700년 뒤 일을 그에게 보이신 까닭에 미리 기록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미래의 일을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처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700년 뒤에 태어날 어떤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2'. ‘고난의 종과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3) 고난의 종 메시아께서는 불신앙의 세대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 “누가 우리의 보고(report)에 믿었고, 야훼의 팔이 누구 위에 덮개를 벗김을 받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믿었느냐?”에 대한 맞는 대답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 53장 1절에 “누가 믿었느냐?”라고 기록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그런 뜻입니다.
이사야는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전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은 “우리의 보고서”라는 뜻입니다. 대학교에 다니면 학생들은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이런 보고서를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그는 그 앞에 부드러운 어린 가지 같이 올라왔고 마름의 땅으로부터(out of) 그 뿌리(a root)와 같으며(like), 윤곽(form)이 그에게 없고 존엄이 없고 우리가 그를 보겠으며 생김새가 없고 우리가 그를 탐내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2-9절은 ‘하나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내용입니다.
2절은 메시아께서 고난 겪으시기 전에 처할 천한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 2절에 “자라나기를”이라고 번역된 말은 “올라왔다”를 뜻합니다. “그가 올라왔다”라는 말은 영어로 “성장하다”(grow up)로 번역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앞에서 부드러운 새싹처럼 성장하였습니다.
씨를 심으면 씨에서 흙을 뚫고 올라오는 것을 “싹”이라고 하잖습니까? 새싹의 특성은 부드럽다는 것이며, 건들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합니다. 그게 커서 나무가 되면 그 나무가 줄기가 굵어서 안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땅에서 막 올라온 부드러운 새싹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를 마른 땅으로부터 뿌리와 같은 자로 예언하였는데, 그는 비옥한 땅이 아니라 메마르고 척박한 땅으로부터 뿌리와 같습니다.
흙이 언제나 촉촉하고 물기가 있으면 식물이 물을 흡수하고 자랍니다. 식물이 풍부한 물 때문에 잘 자랍니다.
비옥하고 기름진 땅에 박힌 뿌리는 그 땅의 덕을 많이 입게 됩니다. “마른 땅으로부터 뿌리”는 그 땅으로부터 아무 덕을 입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환경에 힘입어 덕을 입지 못하고 살며, 그를 믿는 자들도 뿌리 박힌 세상의 덕을 입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른 땅의 뿌리”를 오늘날로 말하면 “흙수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이 사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야 태어날 때부터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흙수저는 부모가 너무 가난해서 부모로부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기가 어릴 때부터 노력해야지만 겨우 먹고 사는 사람이 흙수저입니다. “마른 땅으로부터 뿌리”가 바로 오늘날의 말로 표현할 때 흙수저입니다.
그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데, 마리아의 남편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는 몹시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윤곽(form)이 그에게 없고 존엄이 없고 우리가 그를 보겠고 풍채가 없고 우리가 그를 탐내지(desire) 아니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것은 눈먼 자들인 까닭입니다(사 53:1). 우상숭배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윤곽도 없으셨으며 탐날 만한 것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사 53:2).
이사야는 메시아께 풍채도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런 까닭에 우상숭배에 눈먼 자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4) 고난의 종 메시아께서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3-6절에 “그는 업신여김을 받고 사람들에게 거절된 자며 비통(sorrow)의 사람이고 병의 앎을 받는 자며, 얼굴의 숨기는 자 같이 업신여김을 받고 우리는 간주하지 아니하였노라. 진실로 그가 우리의 병들을 들어 올렸고 우리의 비통들을 날랐고, 우리는 그를 닿고 하나님께 침을 받고 괴롭힘을 받는다고 간주하였노라. 그는 우리의 위반에서 찌름을 받으며 우리의 죄악들에서 부숨을 받으며, 우리의 평화의 징계가 그 위에 있고 그 상처에 고침을 받노라. 우리의 모두는 양처럼 헤매었으며 사람(each)이 그의 길에 돌렸고 야훼께서 그 안에 우리 모두의 죄악을 도달시키셨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존중해 주고 높여 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멸시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만일 부자가 자기 앞에 오면 어서 오라면서 환영하는 것이나 이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자로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거절합니다.
그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간고(艱苦)”라는 한자어는 “어려운 고통”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어에 의하면, “비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번역될 때 “간고”라는 번역은 정말 좋은 번역일 수 있었습니다 “간고”와 “질고”는 시적 운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번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간고”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우리에게 낯설기에, 이것을 “간고”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슬픔”으로 번역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진실로 그가 우리의 질병들을 들어 올렸고 우리의 비통들을 날랐으며,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 침을 받고 괴롭힘 받는다고 간주합니다(사 53:4).
“실로”라는 말은 “진실로”를 뜻하며 4절부터 사건의 진실이 나옵니다. 그는 질병의 앎을 받는 자인데, 우리의 질병들을 들어 올린 까닭입니다.
“그”라는 단수 대명사는 “그”가 홀로 들어 올린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병들”을 들어 올렸으므로 질병의 앎을 받는 자였습니다.
같은 단어(마크오브)를 “간고”와 “슬픔”으로 다르게 번역했는데, 3절과 4절의 “간고”와 “슬픔”을 같은 단어로 통일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즉, 둘 다 “슬픔”이나 “비통”으로 번역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3절은 “슬픔”과 “질병”, 4절은 “질병”과 “슬픔”으로 교차하여 나오는데 이렇게 그 순서를 교차하여 기록하는 것은 이사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가 “비통의 사람”이었던 이유는 “우리의 비통들”을 날랐기 때문인데 그는 “우리의 슬픔”을 지탱하였기에(bear) “슬픔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버티고 견딘 것은 바로 “우리의 비통들”, “우리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대신 우리의 질병들을 들어 올렸고 우리의 슬픔을 견뎠기에 “슬픔의 사람”이고 “질병의 앎을 받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께 침을 받고 괴롭힘을 받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것으로 간주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위반에서 찌름을 받으며 우리의 죄악들에서 부숨을 받고, 우리의 평화의 징계가 그 위에, 그 상처에 고침을 받게 됩니다(사 53:5).
이사야는 메시아의 탄생 700년 전에 그가 찌름을 받음을 말하였는데 우리는 내일 일도 모르는데 그는 700년 뒤의 일을 정확히 말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700년 뒤에 찌름을 받으셨습니다.
5절에 “허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위반(transgression)”을 의미하는데 그는 우리의 위반을 위해(for) 찌름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반이 아니라 우리의 위반 대신으로(for) 찌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악(iniquity)들 대신으로 부숨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평화의 징계가 그 위에 있고 그의 상처 안에 고침을 받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가 완성되었기에 우리의 평화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의 상처 안에(by His scourging) 우리가 고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상처를 입으십니다.
“채찍”이라고 번역된 단어(함부라)는 “상처”(injury)를 뜻하는데 “채찍질하기”, “채찍 자국(stripe)”, “상처(wound)”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함부라)은 그의 육체와 영혼의 고난에 사용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상처 때문에 질병으로 비유된 우리의 죄의 질병이 고쳐집니다.
채찍은 황소의 힘줄로 만든 매듭에 뼛조각들을 넣어 만들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의 채찍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죽 채찍이 아닙니다. 채찍으로 때릴 때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에 의해 살점이 뜯기는 것입니다.
그의 손과 발을 뚫었던 그 쇠못들은 끔찍한 고통을 초래하였을 것이며 모든 형태의 육체적 고통이 그의 고통스러운 신체에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죄의 치유책은 그의 대신 속죄의 고통에서만 발견됩니다. 사람들의 죄의 치유책은 적용되는 곳에서 효능을 즉각 나타냅니다. 성품이 고쳐지고 양심이 고쳐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리고 구원함을 받아야만 합니다(사 45:22). 그 몸에 상처를 입으신 그를 바라볼 때까지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그의 상처로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헤매었으며 사람(each of us)이 그의 길에 돌렸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우리 모두의 죄악을 도달시키신 것입니다(사 53:6).
우리는 양 같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릇 행하여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양의 특성이 어떤 것입니까? 목자가 양을 좋은 풀밭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 양이라는 동물은 그 목자가 이끈 곳에서 풀 뜯어 먹고 있으면 되는데, 눈도 별로 좋지 않으면서 저쪽에 있는 풀이 자기 눈에 더 좋아 보입니다. 양은 ‘저기 있는 풀이 더 좋아 보여’라면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양은 ‘저쪽 풀이 더 좋아 보여’라면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자가 좋은 목자면 양들 다 살피고 있겠지만, 양들 관심 없는 목자는 자기의 휴대전화 게임을 하다가 양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그쪽에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헤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늑대가 ‘먹을 것 있네’라고 하며 그 양을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이라는 것이 이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이 이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정원의 만 가지 열매를 먹게 하셨고 단 한 가지만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만 가지 열매 다 먹어 보기 전에 하나님 먹지 말라는 것을 보니 그거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더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하지 말 것을 금하는 것이 이것저것 왜 그렇게 많아? 하나님은 왜 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며 왜 거기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거기 가면 늑대에게 잡아 먹히고, 악마에게 잡아 먹히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 그리 가면 절대 안 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나 하나님 싫어, 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냐?’라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서 양들처럼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바로 하나님께서 그 위에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며 이것이 속죄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절대 없으면 안 될 단어가 바로 이 “속(贖)”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10년 감옥 안에 있어야 하며, 100대 맞아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그는 ’감옥 싫어요, 맞기 싫어요, 대신 1억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1억 주고 감옥에 가지 아니하고 맞지 아니하는 것을 속바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대”신 “속”바치면 “대속”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아는 이 “대속”의 고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아직 믿지 않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아를 전함으로 그들이 속죄함을 받고서 구원영생을 얻도록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1) Motyer, 『이사야 주석』, 951.
2)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220.
3) Ernst Wihelm Hengstenberg, 『구약의 기독론』, 원광연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331.
4) C. H. Spurgeon, 『이사야Ⅱ』, 스펄전 설교전집 13, 이광식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21), 570.
5) Spurgeon, 『이사야Ⅱ』, 스펄전 설교전집, 589.
6) Motyer, 『이사야 주석』, 958.
7) C. H. Spurgeon, 『이사야Ⅲ』, 스펄전 설교전집 14, 이광식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21), 15.
8) Spurgeon, 『이사야Ⅲ』, 스펄전 설교전집, 16.
9) Spurgeon, 『이사야Ⅲ』, 스펄전 설교전집, 17-20.
10) Spurgeon, 『이사야Ⅲ』, 스펄전 설교전집,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