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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현 명 | 배향인 | 토 성 순 위 | 비 고 |
대흥군(大興郡)*예산군 | 蘇 定 方 |
| 勝覽20 |
양산군(梁山郡) | 金 忍 訓 | 1(慶地), 1(實地), 1(勝覽) | 勝覽22 |
의성현(義城縣) | 金 洪 術 | 1(慶地), 1(實地), 1(勝覽) | 勝覽25 |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 孫 兢 訓 | 1(慶地), 1(實地), 1(勝覽) | 勝覽26 |
곡성현(谷城縣) | 申 崇 謙 | 2(實地), 1(勝覽) | 勝覽29 |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 金 摠 | 3(實地), | 勝覽40 |
* 慶地:慶尙北道地理誌 實地:世宗實錄地理誌 勝覽:新增東國輿地勝覽
위 표에서 전국 군현(郡縣)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무신(武臣) 또는 장군(將軍)으로
고을의 방어(防禦)를 위하여 전투 등에 참전한 무장(武將)임을 알 수 있는데,
양산(梁山)의 김인훈(金忍訓)은 후삼국(後三國)시대에 양산(梁山)을 수호(守護)하던
장사(壯士)이고, 곡성(谷城)의 신숭겸(申崇謙)20)은 고려(高麗)의 개국공신이다.
순천(順天)의 김총(金摠)21)은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견훤(甄萱) 휘하(麾下)에
있었으나, 태조 19년(936년)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마지막 전투인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토벌할 때 박영규(朴英規)가 데리고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
홍술(洪術)은 의성부(義城府)의 성주(城主)•장군將軍)이었는데, 태조(太祖)
12년(929년) 견훤(甄萱)의 5천 군사와 싸우다 전사(戰死)한 인물로 조선시대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22)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
이는 고을인 들이 홍술(洪術)을 기리고 의성의 성황신(城隍神)으로 치제(致祭)의
대상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에 뇌계(㵢溪) 유호인은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부임(赴任)하여 성황사(城隍祠)에서 성황제(城隍祭)를 지낼 때 영송신가(迎送神歌)를
지어 고을인들이 암송(暗誦)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성황제영송신가(城隍祭迎送神歌)23)
또한 유호인의 문집인 뇌계집(권지7)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사서(史書)에 김홍술은 의성인(義城人)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고을의 성황신을 김홍술이라고
전하는데 그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다.......(25)
위 글에서 뇌계(㵢谿) 유호인(俞好仁)은 판단(判斷)을 보류(保留)했지만 당시에 고을인들은
홍술(洪術)을 기려 성황사(城隍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성황신(城隍神)으로 숭배(崇拜)를 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러면 홍술(洪術)이 의성의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推仰)받게
된 시기(時期)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전해진 것은 나말여초(羅末麗初)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되는데, 고려(高麗) 인종(仁宗, 1124 ~ 1146년)에서 의종(毅宗,
1146 ~ 1170년)사이에 전국적(全國的)으로 확산(擴散)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성(義城)의 성황사(城隍祠)는 홍술(洪術)이 전사(戰死)한 이후에 그리
오래지 않아 건립(建立)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을의 토착세력의 동향과도
무관(無關)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의성(義城)은 고을의 위상(位相)과 변화(變化)에 심한 부침이
있었다. 조문국이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85년) 때 사로국(斯盧國)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에 경덕왕(景德王) 때 문소군(聞韶郡)으로 개칭을 하고 진보(眞寶),
비옥(比屋), 안현(安賢), 단밀(單密) 등 4개의 영현(領縣)을 관할(管轄)하였다.
이어서 홍술의 등장과 함께 의성부로 승격했으나, 고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으로 내속(內屬)되고, 25년 후인 인종(仁宗) 21년(1143년)에
속현에서 벗어났으나, 농민봉기로 신종(神宗) 2년(1199년)에는 감무관(監務官)으로
격하(格下)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대구(大邱)에 병합(倂合)된 적도 있었으나,
곧 이어 현(縣)으로 복구(復舊)되어 조선(朝鮮) 말기(末期)까지 내내 동일(同一)한
읍격(邑格)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의성(義城)이 속현(屬縣)으로 격하(格下)하게 된 주된 이유는 고려(高麗)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한 이후에는 의성이 갖는 지리 및 전략적인 중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의성의 토착세력들은 이 같은 사태(事態)를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지
않았는데, 안동부는 신라시대에는 의성과 동일한 읍격의 군(郡, 古昌郡)으로 의성보다
늦게 귀부하고 부(府)의 승격(昇格)도 뒤늦은 고을이었다.
그러한 안동(安東)이 이제 와서 의성(義城)을 지배(支配)하기에 이르러 지역의
토착세력(土着勢力)들은 이를 인정하기가 어려워 반전(反轉)을 위해서 의성(義城)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고려왕실(高麗王室)과 연고(緣故) 내지 기여(寄與)했던 점을
상기(想起))하는 의미(意味)에서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이 바로 홍술(洪術)의 귀부와
전몰사건(戰歿事件)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에 의성을 속현(屬縣)으로 격하시킨 조치(措置)에
대하여 재고(再考)를 요청(要請)하고 읍격(邑格)의 회복을 도모(圖謀)하는 과정에서
홍술(洪術)을 의성의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推仰)했는데, 이것은 홍술(洪術)과
같이 고려(高麗)의 건국(建國)에 기여(寄與)한 공로(功勞)가 지대(至大)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황사(城隍祠)를 건립하여 홍술을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推仰)하는데, 앞장 선
세력은 그의 후손(後孫)들과 지역의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보이고 속현(屬縣)으로
격하(格下)된 이후에 토착세력(土着勢力)들은 사태(時態)의 반전(反轉)을 위한 노력은
필연적(必然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조선(朝鮮) 후기(後期)에 와서는 의성(義城)의 성황신앙(城隍信仰)에도
변화(變化)가 일 조짐이 보이는데, 현종(顯宗) 11년(1670년)에 성황사를 오토산 아래로
이건(移建)했는데, 이건한 성황사(城隍祠)에서는 더 이상 홍술을 성황신(城隍神)으로
배향(配享)하지 않았다.
그러나 옛 성황사(城隍祠)에서는 고을의 이서(吏胥)들이 매년(每年) 춘추(春秋)로
세 번을 향사(享祀)했는데, 무격(巫覡)26)을 동원하여 북을 치고 생황(笙篁)을 부는 등
음사적 제의(祭儀)가 계속됨에 따라, 이를 개탄(慨嘆)하던 향촌사족(鄕村士族)
김석겸(金錫兼)27)이 향리(鄕吏) 등 토착세력(土着勢力)을 설득(說得)하여 숙종(肅宗)
32년(1706년)에 충렬사(忠烈祠)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홍술(洪術)의 위패(位牌)를
안치(安置)하여 유교적 제의(祭儀)로 전환(轉換)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우(祠宇)가 낡고 누추하여 영조(英祖) 21년(1745년)에 현령 송요보(宋堯輔)와
향촌사족 김경천(金敬天)이 중창하고 상량문을 지었으며, 1774년 3월에 경내에
'고려김장군순절비(高麗金將軍殉節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의 현령 김이복(金履復)
의 형 김이곤(金履坤)이 찬(撰)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상복(金相福)이 두전(頭篆)을,
좌의정 홍낙순(洪樂純)이 썼다.
高麗金將軍殉節碑文
余南遊至義城縣登所謂九成山北望山谷鬱紆若有氣可異問于邑士對曰此屯山也古有金將軍
洪術戰死此山下立其廟云按高麗史太祖十二年甄萱率甲卒五千侵高麗義 城府城主將軍洪術
戰死王哭曰失吾左右手義城志(誌)曰十二年甄萱來侵太祖播遷 嶺南以府吏金洪術爲城主及
其戰死太祖哭之慟曰失吾臂矣事定論功贈其官吏民立 祠于屯山又曰太祖戰敗將軍貌類太祖
故爲太祖死之余以史與志槪同而史稱洪術志 乃姓之曰金且是役也史不言王在軍中則志所謂
播越嶺南貌類代死者有不可信然義 城人至今服其節至爲立祠則其事又可微焉豈史則傳聞而
錄之不如邑人所親見而傳 信者哉初將軍之祠與城隍神並祭我朝肅宗丙戌邑人生員金錫兼等
謂與城隍神並祭 非禮也遂爲木主祭以俎豆榜曰忠烈祠今邑士將立石紀其績吾第履復爲縣令
爲之助 成其事以邑士意請余爲文嗚呼當太祖時忠義如將軍者幾人哉公山之戰申太師崇謙嘗
爲太祖死其義烈著於後世而將軍之死與申太師皆韓之紀信也獨沈埋而不大顯徒 爲一邑士民
所誦慕悲夫余聞祭將軍之夕有人夢白馬將戴銀冑被甲列旗旄劍戟 疾馳如風雨入屯山又嘗有
大蟒入廟中斃於神位旁身首中分如刀割然人以爲神之爲 也噫亦異矣 銘曰 誑楚之忠 不讓于
昔 戰場蕪沒 烏川在側 史古志略 指點南黎 何信何徵 有廟翼如 靈騎白馬 燁然如在 一齊敬
信 俎豆無替 相謨伐石 以永厥世
通訓大夫行王孫敎傅金履坤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世孫師金相福篆 嘉善大夫行兵曹參判洪樂純書
崇禎紀元後三年三月日立
위 순절비문(殉節碑文) 중 '余以史與志槪同 而史稱洪術 志乃姓之曰金 且是役也
史不言王在軍中 則志所謂播越嶺南 貌類代死者 有不可信 내가 보건대, 고려사와
의성읍지의 내용은 대략 같아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홍술이라 하고 읍지는
성(姓)을 김씨라 하였고, 또한 이 전역(戰役)에 고려사는 왕건이 군중(軍中)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렇다면 읍지의 영남으로 파천하고 모습이 왕건과
유사 하여 대신 죽었다는 내용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然義城人 至今服其節 至爲立祠 則其事 又可微焉 의성의 고을인 들이 지금까지도
그 충절에 감복하고 사당까지 세웠으니, 그렇다면 이 일이 사실임을 또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으며
'豈史則傳聞而錄之 不如邑人所親見而傳信者哉 고려사는 전해들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고을인들이 직접보고 믿을 만한 사실을 전한 읍지만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러한 성황제의(城隍祭儀)가 고려(高麗)에서 조선 후기까지 지역의 토착(土着)
유력층(有力層)의 주도(主導)아래 이어져 왔으며, 이는 현세(現世) 기복적(祈福的)인
측면이 강하게 반영(反映)되어 있음이 보인다.
그런데, 조선(朝鮮)은 성리학(性理學)을 이념(理念)으로 내세워 유교적(儒敎的)인
체제(體制)의 정비를 우선 과제(課題)로 중시하여 전래(傳來)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을
음사(淫祀)로 규정(規定)하여 제재(制裁)의 대상(對象)이었으나,
고을 이서(吏胥)들의 주도(主導)아래 음사적(淫祀的) 성격의 성황제(城隍祭)가
조선(朝鮮)후기까지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성행(盛行)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의성의 성황제(城隍祭)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成宗) 때 의성현령 유호인(俞好仁)의 사례에서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는 성황제의(城隍祭儀)를 유교화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음사적(淫祀的) 성황제(城隍祭)가 유교적(儒敎的) 선현(先賢)으로 전환(轉換)
되는데 약 2세기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향리와 타협함이 없이 향촌
사족이 주도권을 확보하는데는 그 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성(義城) 충렬사(忠烈祠)의 설립(設立)을 주도(主導)한 김석겸(金錫兼)이
음사(淫祀)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고을 향리(鄕吏)들이 앞장서서 성황사(城隍祠)를
충렬사(忠烈祠)로 전환(轉換)하고, 유교적(儒敎的)인 제향(祭享)의 비용도 향리조직
(鄕吏組織)에서 부담(負擔)했으나, 제례(祭禮)를 주도(主導)하기는 커녕 비용만 부담한
채 향촌사족이 주관하는 제향(祭享)에 참예(參詣)조차도 할 수 없는 보조자(補助者)로
전락(轉落)하였다.
이것은 의성(義城)의 성황신(城隍神)인 홍술의 충렬사(忠烈祠) 배향(配享)이
향리(鄕吏)를 대표(代表)로 하던 고려(高麗) 이래의 전통적(傳統的)인 고을의
토호세력(土豪勢力)을 제압(制壓)하고 읍치(邑治)에서 사족(士族)의 위상(位相)을
확립(확立)하게 된 상징적(象徵的)인 사건(事件)으로 볼 수 있다.
주13)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성황(城隍)이란 글자는 본래 주역(周易) 지천태괘
(地天泰泰卦)의 상륙(上六)의 효사(爻辭)에서 나왔는데, (地天泰 上六卦 :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 성이 무너져 터에 돌아옴이라 군사를 쓰지말고 읍으로부터 명을 고할지니
바르더라도 인색하니라)傳 掘隍土, 積累以成城(전에 이르길 '해자 [隍]의 흙을 파서 높이
쌓아 성을 만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였다. 추측 컨대, 성지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옳게 죽지 못 한 뭇 귀신을 통솔하도록 한 것인
듯하다. 程子曰如今城隍神之類皆不當祭又曰城隍 不典土地之神社稷而已何得更有土地耶此
則雖曰非禮而似指后土之類與我國祝辭微不同 也 (정자(程子)는, '지금 성황신 따위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모두가 부당한 일이다.' 하고 또,'성황신이란 토지(土地)를 맡은 귀신이
아니고 사직(社稷)을 맡았을 뿐인 데, 어찌 토지신으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는 비록 비례(非禮)라고 말했 지만 후토신(后土神)따위를 가리킨 듯하니, 우리나라 축사
(祝辭)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주14)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 主)·병주
(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주15)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한 왕조인 북제의 역사를 다룬 정사로 본기 8권, 열전 42권의 총50권
으로 구성되어 있고 당 태종 10년(636)에 이백약(李百藥)이 편술했다.
주16) 신라말기에 궁예(弓裔)가 901년에 세운 후고구려(後高句麗)를 904년에 개칭한 국호(國號)이며
후에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주17) 장선부(障繕府)는 904년(무태1년)궁예(弓裔)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관제를 제정했는데,
장선부는 성황(城隍)의 수리를 관장하였다.
주18) 고려사에는 이름이 안종왕욱(安宗王郁)이다. 살던 집이 왕륜사(王輪寺)의 남쪽에 있었는데,
경종(景宗)의 비(妃)인 황보씨(皇甫氏)의 사저(私邸)와 가까웠다. 경종이 훙서(薨逝)하자 비는
대궐을 나와 그 집에 살았는데 왕욱과 사통(私通)하여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안 성종이
안종왕욱을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를 보냈다. 왕욱은 아들(고려 현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고을 서낭당 남쪽 귀룡동에 장사 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씨(姓氏)는 고대국가(古代國家)의 형성기(形成期)부터 나타났는데,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왕(朱蒙王)은 국호(國號)를 고구려라 하면서 성을
고씨(高氏)라 하고 동시에 신하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
(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실씨(小室氏) 등의 성(姓)을 주었다고 한다.
백제는 온조왕(溫祚王)가 성(姓)을 부여(扶餘)라 했고, 신라(新羅)에는 박(朴)·석(昔)
·김(金) 3성(姓)의 전설과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에는 6부(部)에 사성(賜姓) 하여,
양부(梁部)에 이씨(李氏), 사량부(沙梁部)에 최씨(崔氏), 점량부(漸梁部)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 정씨(鄭氏),한지부(漢祗部)에 배씨(裵氏),습비부(習比部)에 설씨(薛氏)
의 성(姓)을 주고 가야(伽倻)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은 황금알에서 태어나 김(金)씨
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도
처음에는 성(姓)이 없었다. 이들의 초명(初名)은 홍술(洪術,弘述), 백옥(白玉), 삼능산
(三能山), 복사귀(卜沙貴) 등으로 이름으로 불리다가 사성(賜姓)을 받아 각 성(姓)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홍유는 의성 홍씨(義城洪氏), 배현경은 경주 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신씨
(平山申氏), 복지겸(卜智謙)은 면천 복씨(汚川卜氏)의 시조(始祖)가 되었고, 고려(高麗)
중기부터는 일반 서민들도 성(姓)을 널리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의성부(義城府) 성주(城主)인 홍술(洪術)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홍술(洪述)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高麗史)는 홍술(洪術)로 조선 전기의 지리지 등에는 김홍술
(金洪術)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景明王 六年 是月 眞寶城將軍洪述 降於太祖, 敬順王 三年 秋七月
甄萱攻義城府城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경명왕 6년(922년) 진보성주 홍술이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56대 경순왕 3년(929년)에 견훤(甄萱)이 의성부성을
치매 성주 홍술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라고 전하는데, 홍술의 술자를 述(펼 술,
지을 술)로 보인다.
고려사(고려사절요 포함)에는 '太祖 5年 冬十一月 辛巳 眞寶城主洪術遣使請降,
遣元尹王儒·卿含弼等, 慰諭之.(태조 5년 겨울 11월 신사 진보성(眞寶城) 성주(城主)
홍술(洪術)이 사신(使臣)를 보내 항복(降伏)하기를 청하자, 원윤(元尹)인 왕유(王儒)와
경(卿) 함필(含弼) 등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고 전하고
'太祖 6年 冬十一月 戊申 眞寶城主洪術遣其子王立, 獻鎧三十, 拜王立元尹.
(태조 6년(923년) 겨울 11월 무신(戊申) 진보성 성주 홍술이 아들 왕립을 보내 갑옷
30벌을 바치자 왕립을 원윤으로 임명 하였다)'고 하며,
'太祖 12年 七月 辛巳甄萱以甲卒五千, 侵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태조 12년(929년) 신사 견훤이 갑옷 입은 병사 5,000명으로 의성부에 쳐들어오자,
성주장군 홍술이 전사하였다.)'라고 전해 오는데, 홍술(洪術)을 術(재주술, 꾀술)로
쓰였다.
조선(朝鮮) 중기 성종 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부임하는 유호인(俞好仁)을 위해 '송극기지임의성(送克己之任義城)'이라는 시(詩)에 '人多洪術裔(홍술의 후예들이 많고)'라는 구절(句節)이 보인다.
시강으로 부절 나눠 받아 간 지방은 侍講分符地
천원이 겨우 사방 백 리이건만 川原僅一同
사람은 홍술의 후예들이 많고 人多洪術裔
습속은 소문의 풍기를 띠었다오 俗帶召文風 이하 중략
위 시(詩)에는 의성현(義城縣)에 홍술(洪術)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의성지(義城誌), 동사강목(東史綱目),
성호사설(星湖僿說), 해동역사(海東繹史),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김홍술(金洪術)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문집(文集)인 이계집 5권의 원흥동구서원묘
상량문(元興洞舊書院廟上樑文)에 '서려 있는 천지 사이의 맑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호걸스러운 인재를 길러 냈는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당시에 홍술과 홍유
장군이다.(扶輿靈淑之氣. 亭育豪傑之才. 當麗祖創業之時. 有洪術洪儒之武)'라는
구절에는 홍술(洪術)과 홍유(洪儒)로 쓰였다.
홍술(洪術)이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으로부터 김씨(金氏)의
성(姓)을 사성(賜姓)받은 것으로 보이나, 고려말 조선초 이래로 김홍술(金洪術)과 사서에
전하는 아들 왕립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족보(族譜)에 나오지 않는다.
의성 김씨(義城金氏) 족보(族譜)에는 김석(金錫)이 시조(始祖)이고, 손자(孫子)인
김홍술(金弘述)이 보이는데, 김석(金錫)은 경순왕(敬順王?∼ 979년)이 935년
12월 고려에 항복한 후 왕건(王建)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
(경순왕의 넷째아들 또는 다섯째 아들로이라고도 전한다)이다.
이것은 태조(太祖) 12년(929년)에 의성부성에서 권훤(甄萱)의 군사와 전투에서
몰(歿)한 홍술(洪術)과 비교해 보면 수십 년 이상의 차이가 있어, 김석(金錫)의 손자
김홍술(金弘述)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Ⅵ. 맺는 말
홍술(洪術)은 신라말 고려초에 진보현(眞寶縣) 이(吏)에서 자립하여 성주로
성장한 호족(豪族)이다. 그는 고려 왕건(王建)의 지배를 벗어난 곳에 있었음에도,
일찍이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왕건(王建)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의성(義城)의 지리적인 중요성과 강한 세력(勢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인 진보성(眞寶城)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 가던 중 태조(太祖) 왕건(王建)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문소군으로 진출하였다.
문소군(聞韶郡)은 고려의 남진정책의 전초(前哨) 기지(基地)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의성부로 승격하여 다스리게 되었는데, 경상도 동북지역내 고려와 친밀관계를 유지하는
호족(豪族)을 이끌어 가는 지배자(支配者)로 활동하던 중 동진정책 추진하던 견훤(甄萱)
에게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 때 읍인(邑人)들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고을을 방어(防禦)하는데, 앞장서고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에게 충성을 다한 홍술(洪術)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현종(顯宗)
무렵에 사당(祠堂)을 세워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推仰)했다.
이것은 후손들을 비롯한 지역 유력계층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방통치조직의 정비에
따라 의성이 안동의 속현(屬縣)으로 격하(格下)됨에 따른 읍격(邑格)의 회복(回復)을
위한 수단으로도 보인다.
고려(高麗)에서 조선(朝鮮) 후기까지 홍술(洪術)을 모시는 성황제의(城隍祭儀)는
향리(鄕吏) 등 토착세력(土着勢力)이 주도하여 현세기복적(現世祈福的)인 음사(淫祀)가
지속되었는데, 생원(生員) 김석겸(金錫兼)이 이서(吏胥)들을 설득하여 성황사(城隍祠)를
충렬사(忠烈祠)로 전환하여 음사적(淫祀的) 성황신(城隍神)에서 충절(忠節)로 목숨을
바친 유교적인 의사로 반전시킨 것은 향촌사족(鄕村士族)이 토착세력(土着勢力)들을
제압하여 고을에서 위상을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술(洪術)과 홍유(洪儒)는 의성과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 홍술(洪術)은 진보성주
에서 의성부 성주로 성장하여 고을을 지배하다가 태조(太祖) 12년(929년) 견훤(甄萱)과
의성부 싸움에서 전사했다.
홍유(洪儒)는 주로 중앙정부에서 활동했는데, 태조 19년(936년) 일리천(一利川,
경상북도 구미시)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해에 명을 다한 것으로 의성부의
성주 홍술(洪術)과는 다른 인물이다. 홍유(洪儒)는 의성홍씨(義城洪氏)의 시조이나,
남양 홍씨(南陽洪氏) 문중에서는 시조인 홍은열(洪殷悅, 초명 洪儒)과 홍유(洪儒)를
동일인으로 보고 청주의 남양사에 배향하여 향사하고 있다.
홍술(洪術)은 의성부(義城府) 성주(城主)•장군(將軍))으로 신라 말 고려 초 문소군
(聞韶郡) 진보현(眞寶縣)의 이(吏)로서 성주(城主)에 이르렀는데,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한 이후 문소군(聞韶郡) 성주(城主)로 성장(成長)한 인물로 홍유(洪儒)와
더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추앙을 받았다.
비록 의성부성(義城府城)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고려(高麗) 왕건(王建)이 양손을
잃었다고 할 만큼 아꼈고, '의로운 성' 이라는 뜻으로 ‘義城'이란 지명을 하사(下賜)
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홍술(洪術)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洪述로, 고려사는 洪術,
조선 전기이후의 지리지 등에는 金洪術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읍인(邑人)들의 추앙을 받는 성황신(城隍神)으로
성황사(城隍祠)에 배향(配享)했으나, 1670년경에 음사적(淫祀的)인 성황제(城隍祭)를
대신(代身)하여 유교적(儒敎的) 제의(祭儀)형식인 충렬사(忠烈祠)를 건립(建立)하여
향사(享祀)를 해왔다.
충렬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산10-1번지에 있는데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6년에 복원되었다.
* 참고문헌(參考文獻)
ㅇ 삼국사기(三國史記) ㅇ 고려사•고려사절요 (高麗史•高麗史節要)
ㅇ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ㅇ 의성현지(義城縣誌)
ㅇ 뇌계집(㵢谿集) ㅇ 점필재집(佔畢齋集)
ㅇ 동사강목(東史綱目) ㅇ 해동역사(海東繹史)
ㅇ 성호사설(星湖僿說) ㅇ 여지도서(輿地圖書)
ㅇ 의성군지(義城郡誌) ㅇ 의성읍지(義城邑誌)
ㅇ 교남지(嶠南誌) ㅇ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ㅇ 이계집(伊溪集)
* 인용자료(引用資料)
ㅇ 고려김장군순절비문(高麗金將軍殉節碑文)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충렬사 순절비문)
ㅇ 신라(新羅) 하대(下代)의 성주(城主)•장군(將軍)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윤희면)
ㅇ 성황신(城隍神) 김홍술(金洪術) 의성(義城)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변동명)
ㅇ 고려시대(高麗時代) 성황신앙(城隍信仰)과 지방통지(地方統治)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김갑동)
ㅇ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ㅇ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ㅇ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