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잡록(象村雜錄)
신흠(申欽) 찬(撰)
남사고(南師古)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관동(關東)1)에 살았다. 그는 풍수(風水)와 천문(天文)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아서 모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을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살면서 판서(判書) 권극례(權克禮)와 친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서 조정에 반드시 분당(分黨)이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2)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3)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또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태평성대의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하였다.
김윤신(金潤身)4)과 함께 동교(東郊)5) 밖을 지나다가 태릉(泰陵)근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동쪽으로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다.”하니, 김윤신이 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남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에 저절로 알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말 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이 을해년부터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되는데도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사직동 잠저(社稷洞潛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으며, 태산(泰山)이란 곧 태릉을 말한 것으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 이듬해에 돌아가서 태릉에 장사지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南師古者明廟朝人也。家關東。善風水天文卜筮相法。俱得不傳之訣。言發必中。明廟末年。來遊京洛。與權判書克禮相厚。嘗言曰。不久朝廷當分黨。又不久當有倭變。若起於辰年。則猶可救。起於巳年。則不可救。又嘗謂人曰。社稷洞有王氣。當有太平之主。出於其坊。與金潤身過東郊外。指泰陵近地曰。明年東封泰山云。潤身怪而更問之。師古曰。明年當自知之。如是者不可累擧。朝廷自乙亥間。始携貳。迄今將五十年未已。倭寇發於辰年。宣廟自社稷洞潛邸。入承大統。泰山卽泰陵之謂也。文定薨於其明年。葬于泰陵云。我國亦有如此之人。可異焉
1) 관동(關東)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이다.
2) 진년(辰年) : 태세(太歲)의 지지(地支)가 진(辰)으로 된 해. 갑진(甲辰)ㆍ병진(丙辰)ㆍ무진(戊辰)ㆍ경진(庚辰)ㆍ임진(壬辰) 따위.
3) 사년(巳年) : 태세(太歲)의 지지(地支)가 사(巳)로 된 해. 을사(乙巳)ㆍ정사(丁巳)ㆍ기사(己巳) 같은 해.
4) 김윤신(金潤身)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 할아버지는 김중상(金仲祥)이며, 아버지는 사정 司正 김여명金汝明이다. 1476년(성종 7)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0년에 통선대부로서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곧 전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는 안변부사가 되어 정사를 잘하였다. 강릉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5) 동교(東郊) : 광진구 자양동 · 성동구 성수동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살곶이벌이라 부르던 뚝섬 일대를 말한다. 조선 초 정인지가 쓴 이 지역에 대한 글 에서 “동교는 토성(土性)이 비옥하고 수초가 풍요하여 목축에 적당하며 좋은 말이 만 필이나 되는 듯 바라보기에 구름이 뭉친 것 같다.”고 하였던 곳이다. → 뚝섬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