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묘갈
아, 이 밀양부(密陽府)의 서쪽 대동(大洞) 경좌(庚坐)의 산에 바로 점필재 김 선생(佔畢齋金先生)의 묘소가 있다. 선생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사숙한 것인데, 한 번 전수하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되었고, 다시 전수하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되었으며, 정암 뒤에는 진유(眞儒)들이 배출되어 도학이 크게 떨쳐져, 삼한(三韓)의 한 구역이 훌륭하게 문헌(文獻)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공(功)을 살펴보면 이는 실로 선생에게서 연유하였으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성조(聖朝)에서 선생을 존숭함과 사림들이 존모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선생의 휘는 종직(宗直)이요, 자는 계온(季溫)이니, 천순(天順) 기묘년(1459, 세조5)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모시고 경전을 강하였는데, 문리가 명확하고 통창하였다. 성종께서는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상경(上卿)으로 발탁하여 은혜가 매우 융숭하였으나, 선생은 피하여 거처하지 않고 물러가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성상께서는 매우 애통해하시고 슬퍼하였으며 사후에 은전(恩典)을 구비하였다. 그후에 남쪽 지방의 선비들은 선생이 계시던 곳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는바, 한두 곳이 아니었으나 조정에서는 모두 사액(賜額)을 내려 표장하였다.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15)에 우암(尤菴) 선생은 상신(相臣) 김공 수흥(金公壽興)에게 편지를 보내어 탑전에서 건의하게 하여, 특별히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겸직을 준례와 같이 내리게 하였다.
선생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맨 처음 성종 갑인년(1494, 성종25)에 있었는데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니, 도덕에 대한 문견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이는 학사(學士) 이원(李黿)이 건의하여 올린 것이었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라고 시호를 고쳤는데, 무슨 연고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금상 무자년(1708, 숙종34)에 예조에서는 선생의 후손인 생원 시락(是洛)의 상소에 따라 다시 문충이라고 시호할 것을 건의하자, 상은 윤허하였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에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묘전에 있는 석물을 개설하였고, 지금 관찰사로 있는 홍공 우령(洪公禹寧)이 재력을 내어 다시 새롭게 만들었다. 또 옛 묘표가 너무 작고 망가진 것을 탄식하였으며 또 추증을 내린 사유를 자세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장차 큰 돌을 다시 세워 영원히 후세에 남기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홍공은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호위하려는 정성이 지극하다 이를 만하다. 시락의 아우 시연(是淵)은 홍공의 명에 따라 나에게 묘문을 청하였다. 나는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그 대략을 뽑아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공의 전배(前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매계공(梅溪公) 조위(曺偉)의 누님이며, 후배(後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첨정(僉正) 문극정(文克正)의 따님이다. 한 아들 숭년(嵩年)을 두었는데, 재랑(齋郞)이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아 버리고 돌아왔다. 손자는 윤(綸)ㆍ유(維)ㆍ유(紐)인데, 유(紐)는 선대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으며, 호를 박재(璞齋)라 한다. 내외손으로 현재 생존해 있는 자가 모두 50여 명이나 된다.
조정에서는 시락으로 하여금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특별히 등용하여 벼슬이 봉사(奉事)에 이르니, 선생의 7대손이 되는바,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뛰어나다. 조 부인의 묘는 금산(金山)의 미곡(米谷)에 있으며, 문 부인의 묘는 합천(陜川)의 야로현(冶爐縣)에 있는데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세계와 사실은 홍공 귀달(洪公貴達)이 지은 큰 비에 상세히 보이며, 화를 입은 전말은 국사와 야사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佔畢齋金先生墓碣
嗚呼。此密陽府西大洞庚坐之原。卽佔畢齋金先生之墓也。蓋先生之學。私淑於圃隱。而一傳而爲寒暄。再傳而爲靜菴。靜菴之後。眞儒輩出。道學大振。三韓一域。蔚然爲文獻大邦。夷考其功。實由於先生。有不可誣也。列聖之崇報。士林之尊慕。不亦宜乎。先生諱宗直字季昷。擢天順己卯第。嘗侍講經筵。辭理明暢。被成廟嘉奬。擢至上卿。恩顧彌隆。而先
生逡巡不居。退休桑梓。以終其世。訃聞上痛悼忒甚。隱典備矣。其後南中章甫。於先生杖履之地。建祠俎豆。非止一二。而朝廷皆宣額表章。今上己巳。尤菴先生貽書相臣金公壽興。建請于榻前。特贈領議政。兼帶如例。其節惠之典。始在成廟甲寅。道德博聞曰文。廉方公正曰忠。學士李黿所議上也。其後改諡文簡。未知何故而然也。今上戊子。禮部因其後孫生員是洛之疏。請還諡文忠。上允之。崇禎乙亥。府使李侯惟達。改設墓前儀物。今按使洪公禹寧。出財力重新之。又歎舊表短刓。而且以貤贈之
由。不可不備載。將易樹穹石。爲垂永之圖。其尊賢衛道之誠。可謂至矣。是洛之弟是淵。以洪公命請文於尙夏。屢辭不獲。乃敢撮其略而書之如右。前配昌寧曹氏。梅溪公偉之姊。後配南平文氏。僉正克正之女。有一子嵩年。仕爲齋郞。不樂棄歸。孫綸,維,紐。紐克承先業。號璞齋。內外孫見存者幷五十餘人。朝廷以是洛奉先生祀。特爲錄用。官至奉事。於先生爲七代也。有孝友行。曹夫人墓在金山米谷。文夫人墓在陝川治縣。俱贈貞敬夫人。先生世系事實。詳於洪公貴達所撰大碑。被禍首末。俱載於國乘野史。故此不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