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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이조 참판 행(行) 산음 현감(山陰縣監) 김공 대현(金公大賢)의 묘갈명 병서
공의 휘는 대현(大賢)이고 자는 희지(希之)이다. 성은 김씨(金氏)로 풍산인(豐山人)인데, 고려조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낸 김안정(金安鼎)의 7대손이다. 증조는 휘가 양진(楊震)으로 공조 참판을 지냈으며, 재주와 덕이 있어 한 시대 사람들을 복종시켰다. 간원(諫院)의 장(長)으로 있던 중 부마(駙馬) 김희(金禧)의 제택(第宅)이 제도를 뛰어넘는 것을 탄핵하였는데, 김희는 바로 김안로(金安老)의 아들이었다. 이로 인해 김안로로부터 배척당하였다. 조고의 휘는 의정(義貞)으로,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높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으나, 김안로가 질시하였으며, 정언(正言)이 됨에 미쳐서는 간당(奸黨)들이 그의 강직함을 꺼리어 서로 더불어 거짓으로 죄를 날조해 헐뜯었으므로, 드디어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선고의 휘는 농(農)으로,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라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다. 비(妣)는 숙인(淑人) 권씨(權氏)로,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며,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고,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지낸 권일(權鎰)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계축년(1553, 명종8) 2월 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주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혼후(渾厚)하면서도 재주가 있어 동년배들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그 뒤에 여러 차례 천거되어 유사(有司)에게 이름이 올라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조석 간에 승진될 것이라고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사의공(司議公)이 세상을 떴는데, 숙인(淑人)은 이미 이보다 22년 앞서 돌아가셨다. 이때부터는 벼슬길에 나아가 승진하는 데 뜻이 없이 담박하게 지냈다. 그런데도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과 참판(參判) 김륵(金玏)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번갈아 천거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에 제수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옮겨졌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3월 11일에 병으로 관사(官舍)에서 졸하니, 춘추가 50세였다. 그해 8월에 예천(醴泉)의 치소(治所) 남쪽에 있는 광석산(廣石山)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참판공의 묘가 있는 곳이다. 공과 같이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난 분은 드러나고 장수하는 것이 마땅한 바이다. 그런데도 하늘이 복을 준 것이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이른바 하늘의 뜻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관대하고 여유로워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함에 있어서는 화기가 애연히 피어올랐고, 일찍이 눈살을 찌푸리고 사나운 소리를 하면서 서로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또 한칼로 내리쳐 쪼개듯이 분명하게 하였다.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어진 정승을 침해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어 자못 방자하게 깔보면서 모욕을 하였는데, 공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평소에 미치광이와 같아 다른 사람에게 눌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하였는데, 말을 하자마자 곧바로 승복하고는 땅에 엎드린 채 부끄러워하면서 사죄하였다.
공이 어렸을 적에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는데, 장성해서는 남쪽으로 돌아가 지냈다. 그 뒤 경인년(1590, 선조23)에 서울에 올라와서는 우계를 찾아뵙지 않았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답하기를, “이분은 한때의 중한 명망을 지고 있으며,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러니 포의(布衣)를 입은 빈한한 선비가 어찌 감히 갑작스럽게 그분의 문하에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벗에게 준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받은 기운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이 병통이기에, 매번 강(剛)을 하는 공부에 힘쓴다네.〔受氣從來病太柔 每於剛上着工夫〕” 하였는바, 대개 평소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지내면서도 절제가 있었던 것은, 항상 자신을 점검하면서 바로잡은 공이 있는 데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공은 역임한 직임이 비록 적었으나, 일찍이 하찮은 관직이라는 이유로 온 마음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으로 있을 적에는 흩어져 도망친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잔폐된 백성들을 잘 무마하여 분탕질당해 쇠락해진 지역이 조금은 완전해지게 하였다. 이에 직임을 마치고 돌아옴에 미쳐서는 아전과 군졸들이 비석을 세워 추모하면서 그리워하였다. 산음 현감으로 있을 적에 열읍(列邑)의 문묘(文廟)가 대부분 폐허로 변해 비록 큰 고을의 물력(物力)으로 하더라도 역시 대부분 미처 중건(重建)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부임한 처음에 곧바로 고을의 부로(父老)와 사자(士子)들을 불러 깨우쳐 주고는 중수하는 데 온 뜻을 다 기울였으며, 관속 몇 명을 따로 떼어 내어 그곳에 배정해서 선비를 기르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는 곳마다 모두 직무를 제대로 잘 수행하였다고 칭해졌다.
공에게는 실성(失性)하여 벌컥 화를 잘 내는 외삼촌이 있어 조금이라도 그의 뜻에 거슬리면 비록 존항(尊行)이라고 하더라도 문득 패만스럽게 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공은 그와 이웃해서 산 30년 동안에 대우함에 있어서 도를 다하였으며, 외삼촌 역시 일찍이 한 번도 패만스러운 말을 가한 적이 없었다. 재산을 사이에 두고는 더욱더 난처한 일이 많았는데, 공은 능히 다방면으로 조처하여 끝내 그들의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였다. 도(道)를 같이하던 벗 가운데에 문둥병을 앓는 자가 있어서 친구들이 모두 피하면서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만은 홀로 예전처럼 왕래하면서 찾아가서는 서로 마주 대해 먹고 마시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이 혹 의아해하면서 물으면, 공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인데도 이런 병에 걸렸으니, 이는 그 사람의 죄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평소에 서로 허여하였던 의리를 팽개쳐 버리고 병이 들어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즈음에 절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항상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그의 자제들은 공을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다.
공은 남을 사랑하고 상대를 이롭게 해 줌이 천성에서 나왔다.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의 병란 때 굶어 죽은 시체가 나라 안에 가득한 데다가 염병마저 또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열읍(列邑)들로 하여금 진제장(賑濟場)을 열고 구휼(救恤)하게 하였는데, 일을 아전들에게 전적으로 내맡긴 탓에 백성들이 실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여 서로 시체를 베고 누워 거의 다 죽게 되었다. 그러자 공은 측은한 기색으로 고을의 수령에게 말하여 스스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포치(布置)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몸소 그곳에 나아가 죽을 쑨 상태를 점검하여 살펴보았으며, 완급(緩急)을 살펴 제때에 맞추어 잘 조절해 주어도 봉두난발로 귀신같은 얼굴을 한 채 신음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지만 조금도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기색이 없이 오직 제때에 구휼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공은 평소에 정절공(靖節公) 도연명(陶淵明)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당(堂)을 한 채 짓고는 거기에 거처하면서 유연당(悠然堂)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스스로 그 흥취를 서술하여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산에는 구름이 있어 피어남이 무심하고, 당에는 금이 있어 뜯어도 소리가 없네.〔山有雲出無心 堂有琴撫無音〕” 하였는바, 그 고상한 회포와 전아한 생각이 훌쩍 하니 속세에서 벗어난 아취(雅趣)가 있었다. 공은 평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산음현(山陰縣)에 있을 적에는 그곳에 있는 경호(鏡湖)와 환아정(換鵝亭)의 경치를 좋아하여 공무를 보는 여가에 홀로 턱을 괴고 앉아 감상하면서 읊조렸으며, 때때로 고을의 선비들을 초청하여 습지(習池)의 놀이를 열었는데, 초연하여 마치 이 세상과는 서로 잊은 사람 같았다.
공은 집안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절목(節目)이 아주 엉성하여 가산(家産)을 일굴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치밀하게 잘 관리하면서 일에 따라서 온 힘을 다해 하였다. 이에 이시발(李時發)이 영남(嶺南) 지방의 방백(方伯)으로 있을 적에 정적(政績)이 뛰어나다고 아뢰어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시행되기도 전에 공은 이미 병이 들고 말았다. 공은 병이 중해지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는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보내면서 영결을 고하였는데, 신색(神色)이 양양하기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하루는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 자제들이 부르짖으며 물어보니 공이 천천히 이르기를, “내가 막 큰 꿈을 꾸었다.” 하였다. 졸함에 미쳐서는 옷상자에 남아 있는 옷이 없어서 그 고을에 사는 선비인 오장(吳長)과 권집(權潗), 박문영(朴文楧) 등 옷을 벗어서 염습(斂襲)하였다.
공은 책에 있어서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좋아하여 일찍이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험괴하거나 요염한 말을 쓰지 않아 저절로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었다.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능히 잘 절제하였다. 일찍이 춘첩자(春帖子)에 쓰기를, “고요할 때가 많고 동(動)할 때가 적으며, 깨어 있는 날이 많고 취해 있는 날이 적으면 또한 허물을 적게 할 수 있다.〔靜時多動時少 醒日多醉日少 亦可以寡過矣〕” 하였다. 아, 향리(鄕里)에 거처한 30년 동안에 향당(鄕黨)에서는 흡연히 존경하고 사모하면서 선인 군자(善人君子)라고 칭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인은 영인(令人) 이씨(李氏)로,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8세손이며,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즙(李楫)의 손녀이다. 공은 나이 17세 때 이 집안으로 장가들었는데, 부윤공(府尹公)은 당시 나이가 70여 세였는데도 공을 볼 적마다 반드시 예모를 차리고 대하면서 말하기를, “노부가 평생토록 많은 사람을 보아 왔지만 우리 김랑(金郞)과 같은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뒷날에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다.” 하였다. 영인은 어질고 자애롭고 밝고 정숙하였는데, 공보다 25년 뒤에 졸하였으며, 향년은 72세였다. 사의공(司議公)의 묘 뒤편에 장사 지냈는데, 공의 묘와의 거리는 200여 보가량 되었다.
공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장남은 봉조(奉祖)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고, 차남은 영조(榮祖)로 길주 목사(吉州牧使)이고, 삼남은 창조(昌祖)로 금부 도사(禁府都事)이고, 사남은 경조(慶祖)로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이고, 오남은 연조(延祖)로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이고, 육남은 응조(應祖)로 흥덕 현감(興德縣監)이고, 칠남은 염조(念祖)로 종사랑(從仕郞)이고, 팔남은 술조(述祖)로 관례(冠禮)를 올렸으나 요절하였고, 구남은 숭조(崇祖)로 권지 승문원 부정자이다. 또 딸 셋을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의준(李義遵), 사인(士人) 장우정(張友程), 사인 김기추(金起秋)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側室)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정대붕(鄭大鵬)에게 시집갔다.
봉조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종(時宗)이고, 딸은 김시온(金是榲)과 김희(金煕)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계례(笄禮)를 올리지 않았다. 영조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익(時翼), 시민(時敏), 시침(時忱), 시제(時悌)이고, 딸은 서준리(徐準履), 노세겸(盧世謙)에게 시집갔고 한 딸은 아직 계례를 올리지 않았다. 창조는 5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준(時準), 시헌(時憲), 시형(時衡), 시성(時聖)이고, 하나는 아직 어리며, 딸은 유원경(柳元慶), 최이후(崔爾厚)에게 시집갔고, 둘은 아직 어리다. 경조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설(時卨), 시윤(時尹), 시열(時說)이고, 딸은 손회종(孫會宗)에게 시집갔다. 연조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임(時任)이고 딸은 권석충(權碩忠)에게 시집갔다. 응조는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행(時行)이고 하나는 아직 어리며, 딸은 김찬(金鑽), 권식(權軾)에게 시집갔고, 둘은 아직 어리다. 염조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이의준(李義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이송(李爾松)이고 딸은 김시구(金時榘), 김흔(金炘)에게 시집갔다. 장우정(張友程)은 1녀를 두었는데 이이장(李爾樟)에게 시집갔다. 김기추(金起秋)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효증(金孝曾), 김효민(金孝閔)이고, 딸은 유원발(柳元發)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자와 여자가 또 몇 명씩 있다.
기사년(1629, 인조7)에 조정에서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영인에게 정부인(貞夫人)을 추증한 다음,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공의 아들 다섯 사람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덕을 베풀고서도 그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한가. 하늘의 뜻이 여기에서 정해진 것이다.
나는 공과 더불어 임오년(1582, 선조15)에 동년(同年)에 급제하고서는 평소에 서로 공경하면서 지내던 처지였다. 공이 몰한 뒤에 지평군(持平君)이 옷소매 속에 가장(家狀)을 넣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러겠다고 승낙하고서는 그대로 묵혀 두어 공으로 하여금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게 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되었다. 이것은 불민한 나의 죄인데, 지평군이 지금은 또 죽고 없으니, 참으로 슬프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인은 은택 끼치기에 충분했건만 仁足以澤物
작은 고을 다스리는 데에 그쳤고 而局於十室
덕은 수명 누리기에 충분했건만 德足以遐壽
한창 나이 되는 데에 그치었다네 而限於蒼髮
이치상에 있어서는 부당한 거로 理不當然
하늘의 뜻 기필하기 과연 어렵네 天果難必
그렇지만 화홀이 상에 가득해 靴笏滿床
임금 은혜 무덤 속에 미쳐 갔나니 恩及窀穸
착한 이가 복 받는단 분명한 증험 善人之徵
어찌 반드시 자신에게만 있겠나 豈必在卽
예천 고을 광석산의 산기슭 보니 廣石之山
그 기운이 뭉쳐져서 왕성도 하네 其氣鬱茀
앞으로 더 치성해져 창성할 거로 益熾而昌
그 자손들 천년만년 번창하리라 子孫千億
贈吏曹參判行山陰縣監金公墓碣銘 幷序
公諱大賢。字希之。姓金氏。豐山人。麗朝奉翊大夫三司左尹安鼎之七世孫也。曾祖諱楊震。工曹參判。以材德服一世。長諫院。劾駙馬金禧第宅踰制。禧安老子也。用是爲安老所擠。祖諱義貞。早以文行名。登第未久。拜弘文正字。安老已嫉之。及爲正言。奸黨忌其剛直。相與構捏之。遂不振。考諱農。中訓大夫掌隷院司議。妣淑人權氏。安東大姓。高麗太師幸之後。軍資監僉正鎰之女。公以嘉靖癸丑二月七日生。幼而茂秀。長而渾厚且有才。爲儕輩所推許。壬午。
中司馬。其後屢薦名有司。人皆謂朝夕且升。辛卯。司議公棄世。則淑人已先廿二歲歿矣。自此無意進取。泊然也。李相國德馨,金參判玏在銓曹交薦之。乙未。除省峴道察訪。例遷尙衣院直長,禮賓寺主簿。辛丑。授山陰縣監。明年三月十一日。疾終于官。春秋五十。用其年八月。葬于醴泉治南廣石山子坐午向之原。參判公兆次也。以公稟賦之美。宜顯且壽。而天之所以福之者止於此。豈非所謂不定者耶。公寬裕有局量。不色於喜怒。與人言。和氣盎然。未嘗以皺眉厲聲相接。然到截然處。則又一刀兩段。嘗於廣坐中有語侵賢相者頗肆慢侮。公正色責之。其人素狂。以不下人自許。而言下卽服。俯伏慙謝。幼時嘗受學於成牛溪。旣
長。歸南中。庚寅間。至京師。不往謁。或問之則答曰。此人負一世重名。位至宰列。布衣寒士何敢遽至其門。其嘗與友人詩有曰。受氣從來病太柔。每於剛上着工夫。蓋其平生和而有制者。由有點檢矯揉之功也。公歷職雖少。未嘗以小官而不盡心。在省峴。招來散亡。撫摩凋瘵。使燹餘蕩殘之地得以稍完。及歸。吏卒立碑而追思之。在山陰。列邑文廟率皆丘墟。雖大邑物力亦多未及重建。下車初。卽招喩邑之父老士子。悉意重修。除出官屬若干。以爲養士之具。所至皆以能擧職稱。公有舅氏失性多暴怒。小怫其意。則雖尊行。輒慢罵。公比屋居三十年。待之盡其道。舅亦未嘗一以悖語加之。財產間益多難處事。公能多方措畫。終不
失其懽。有執友病癩。親舊皆避不見。公獨往來過從如舊。至於相對飮食。人或疑而問之。公曰。斯人之有斯疾。非其罪也。何忍負平素相許之義。而絶之於疾病死生之際乎。其人常感泣。其子弟父視公。公愛人利物出於天性。壬癸兵荒。餓殍滿國中。厲疫又大行。朝廷令列邑開場賑濟。而事委吏輩。民不蒙實惠。相枕藉死且盡。公惻然言于邑宰。請自幹其事。布置有條理。晨夕躬造其所。檢視饘粥。時其緩急而先後之。蓬頭鬼面呻吟之聲四起。而略無厭惡色。惟恐賑救之不及。平生慕陶靖節之爲人。作堂以居。扁以悠然。自述其興以記之。有曰。山有雲出無心。堂有琴撫無音。其高懷雅想翛然有出塵之趣。素好山水。在山陰。愛鏡湖換鵝之勝。公餘柱笏吟賞。時招邑中佳士作習池之遊。超然若與世相忘者也。居家節目疏闊。不以產業爲念。而居官則綜理微密。隨事盡力。李公時發按節嶺南。以政績聞。命陞敍未行。而公已病矣。病力自知不起。作書與親舊訣。而神色陽陽如平日。一日絶而復蘇。子弟呼而問之。徐曰。吾方做大夢矣。及卒。篋無餘衣。縣之七人吳長,權潗,朴文영 等解衣以斂之。公於書無不涉獵。而酷好班史。手未嘗釋。爲詩文不爲險怪妖艶之語。自然有得於性情之正。喜飮酒。又能剛制。嘗書春帖曰。靜時多動時少。醒日多醉日少。亦可以寡過矣。噫。居鄕三十年。鄕黨翕然尊慕之。稱爲善人君子者。有以也夫。公之媲曰令人李氏。太宗恭定大王八世孫。全州府尹楫之孫。公年十七。執禽于其門。府尹公時年七十餘。每見公必禮貌之曰。老夫平生閱人多矣。未有如金郞者。異日必爲大人矣。令人仁慈明淑。後公二十五年而歿。享年七十二。葬于司議公墓後。去公塋二百餘步。男九人。長奉祖。司憲府持平。次榮祖。吉州牧使。昌祖。禁府都事。慶祖。內侍府敎官。延祖。權知承文院副正字。應祖。興德縣監。念祖。從仕郞。述祖。旣冠而夭。崇祖。權知承文院副正字。女三人。參奉李義遵,士人張友程,金起秋其壻。側室女一。適鄭大鵬。奉祖生一男三女。男時宗。女適金是榲,金煕。一未笄。榮祖生四男三女。男時翼,時敏,時忱,時悌。女適徐準履,盧世謙。一未笄。昌祖生五男四女。男時準,時憲,時衡,時聖。一幼。女適柳元慶,崔爾厚。二幼。慶祖生三男一女。男時卨,時尹,時說。女適孫會宗。延祖男女各一。男時任。女適權碩忠。應祖生二男四女。男時行。一幼。女適金鑽,權軾。二幼。念祖男女各二。皆幼。義遵一男二女。男爾松。女適金時矩,金炘。友程一女。適李爾樟。起秋二男一女。男孝曾,孝閔。女適柳元發。曾孫男女又若干人。己巳。朝廷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贈令人貞夫人。遣禮官賜祭。以公之子五人登大科故也。嘗聞種德而不食其報者其後必昌。豈不信哉。天於是定矣。余與公爲壬午同年。而素相敬。公歿。持平君袖家狀來請銘。諾而宿之。使公墓道闕顯刻且十年。此不敏之罪。而持平君今不在。悲矣。銘曰。仁足以澤物而局於十室。德足以遐壽而限於蒼髮。理不當然。天果難必。靴笏滿床。恩及窀穸。善人之徵。豈必在卽。廣石之山。其氣鬱茀。益熾而昌。子孫千億。
[주1] 습지(習池)의 놀이 : 술을 마시면서 노는 것을 말한다. 습지는 호북성(湖北省) 현산(峴山)의 남쪽에 있는 못으로, 이곳의 토호(土豪)인 습씨(習氏)들의 원지(園池)인데, 고양지(高陽池)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면서 놀았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簡列傳》
[주2] 화홀(靴笏)이 상에 가득해 : 화홀은 화홀(鞾笏)과 같은 말이다. 옛날에 조정의 신하들이 조근(朝覲)할 때나 공식 석상에 나아갈 때 착용하던 신발과 홀로, 전하여 벼슬아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현달한 자손이 많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