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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우의정 이정귀 李廷龜
선생은 휘(諱)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니, 스스로 묵암(默庵)이라 호하였으며, 파산(坡山)의 우계(牛溪)에 거주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우계 선생이라 칭하였다. 고려(高麗) 때에 중윤(中尹)을 지낸 휘 인보(仁輔)의 후손인데, 6대조 휘 석인(石因)은 예조 판서였고, 5대조 휘 억(抑)은 좌찬성이었고, 고조 휘 득식(得識)은 좌윤(左尹)이었고,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조고 휘 세순(世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시호가 사숙(思肅)이다. 선고(先考) 휘 수침(守琛)은 세상에서 청송(聽松) 선생이라 일컫는데, 젊어서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은둔하여 뜻을 지키며 도학(道學)을 강명하니, 명종(明宗)이 융숭하게 예우하고 여러 번 관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별세하자,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였다.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판관(判官) 사원(士元)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을미년 6월 25일 선생을 한성(漢城)의 순화방(順和坊)에서 낳았다.
선생은 10세에 청송 선생을 따라 파산의 별업(別業)으로 왔는데, 12, 3세에 문사(文思)가 날로 진전되어 책을 대하면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남김없이 통달하였다. 17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모두 급제하였으나 병환이 있어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는데,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힘썼다.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이 정사를 말하다가 죄를 얻고는 파산의 집에 거처하였는데, 선생은 수업할 것을 청하였다. 약관 시절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높은 학식과 뛰어난 행실로 한 시대의 동류(同類)들에게 크게 추앙과 복종을 받았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청송 선생이 풍병(風病)을 앓아 위독하자, 선생은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올렸는데, 얼마 후 병환이 덜하다가 반년 만에 다시 병이 발작하니, 또다시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올렸다. 갑자년(1564, 명종19) 1월 부친이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다.
선조(宣祖) 초년(1568)에 경기 감사가 선생이 학문에 침잠(沈潛)하고 효행이 드높다고 조정에 아뢰어 전생서(典牲署)와 목청전(穆淸殿)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이조에서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에 올려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하고 즉시 파산으로 돌아오니, 원근의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문하에 가득하였다. 선생은 간곡히 이들을 가르쳤으며, 서실의(書室儀)를 짓고 서재(書齋)의 규칙을 세웠으며, 손수 《주자어록(朱子語錄)》 중에 학문하는 방법을 초(抄)하여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율곡(栗谷) 선생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을 논란하여 긴 편지를 주고받아 옛사람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갑술년(1574, 선조7)에 공조 정랑에서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환 때문에 사양하였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부르고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서울로 올라오라는 분부가 있었다. 그리하여 갑술년부터 기묘년(1579, 선조12)까지 지평에 제수된 것이 열두 번이었고 공조 정랑에 제수된 것이 네 번이었으며,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와 종묘서 영(宗廟署令),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와 장흥창 주부(長興倉主簿)에 제수된 것이 한두 번이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거나 사은숙배한 다음 체직되었다. 경진년(1580)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환을 이유로 상소문을 올리니, 상은 말과 가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분부하였다.
율곡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성모(成某)에게 가하신 은혜와 예우는 근래에 드문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의 뜻이 그 사람을 등용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번 보고 마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모의 어짊을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그 재주가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율곡이 아뢰기를, “재주가 또한 똑같지 아니하여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가 있고 선(善)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의 재주를 쓸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성모의 재주는 홀로 경세제민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이른다면 지나치지만,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이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몸에 고질병이 있어서 반드시 사무가 많은 부서는 맡을 수가 없으니, 한가한 부서에 두어 때로 들어와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한다면 반드시 성상을 보필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종묘서 영에 제수되었는데, 부르는 명이 여러 번 내렸으므로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들어갔다. 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다음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는데, 첫 번째로 대도(大道)의 요체를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군주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보전하여 전일하고 안정되게 하여 뜻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본원(本源)인 마음이 맑아져서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고금의 치란(治亂)에 대하여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한 형체가 없어서 오직 군주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반드시 한 세상의 현인과 군자를 얻어 재상으로 삼고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둔 뒤에야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등용한 인물 중에 소인이 있는가?” 하고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조정에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성상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만 많고 강직하고 굳세어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신하가 적으니, 어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백성들의 곤궁함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준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반드시 가벼워져서, 은혜가 민심을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선생이 녹봉을 받지 않았는데, 모시는 신하 중에 이것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에 상은 쌀을 실어 보내 주게 하였다. 선생이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자, 상은 비답(批答)하기를, “구휼해 주면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하시니, 선생은 부득이 이것을 받아서 친척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만(萬) 자에 달하는 봉사소(封事疏)를 올려 전에 등대했을 때에 아뢴 뜻을 펴서 극언하였다. 승정원에서 이 상소문을 대신들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상은 비답하기를, “상소문 가운데에 학문과 시폐(時弊)에 대한 것은 내 마땅히 자세히 살펴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조정을 비판한 것이 너무 지나치고 또 나라의 제도를 모두 변경하려 하였으니, 이는 또한 시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대개 선생의 뜻은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이 연산군(燕山君)에 이르러 모두 폐지되었는데, 아직 완전히 없어지거나 개혁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예를 들면 진상(進上)과 공물(貢物) 따위가 이것이었다. 그리하여 애당초 옛 법을 모두 변경하여야 한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이처럼 백성들에게 폐해를 입히는 정사를 제거하여 선왕(先王)이 만들어 놓은 법을 따르려고 한 것일 뿐이었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대신들에게 이 상소문을 보일 것을 청하자, 상은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삼공(三公)이 선생의 말씀을 가납(嘉納)하고 채용(採用)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경연을 겸직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을 겸직하는 일은 새 규정을 만들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시 만나 보겠다.” 하고는 체직하여 공조 정랑에 제수하자, 선생은 연달아 글을 올려 위급함을 구제해 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수개월 동안 병가(病暇)를 내자, 상은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으며,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제수하고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나아가 아뢰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어 한순간도 간단(間斷)이 없기 때문에 만물을 발육하여 조화(造化)의 공(功)을 이루는 것입니다. 군주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만일 한순간이라도 간단이 있으면 곧 천지의 조화와 서로 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경연에서 글줄을 외고 글자의 뜻을 찾아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제왕의 학문이 아니니, 반드시 깊이 배양하고 후하게 길러서 의리의 마음이 항상 이겨서 뜻과 기운을 맑게 한다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자연 그 사이에 용사(用事)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용》의 구경(九經)과 《대학》의 치평장(治平章)에 반드시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높이는 것이 그다음입니다. 《대학》의 혈구(絜矩)는 사물에 대응하는 요체가 되며, 인물을 등용하고 재물을 다스리는 것은 정치하는 도리의 최우선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농지에 대한 세(稅)는 지극히 가볍고 공물(貢物)은 지극히 무거우니, 모름지기 공법(貢法)을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펴지게 하고 세금을 올려서 세입을 증가하게 한다면 백성이나 나라나 모두 편리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선생의 말씀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으나 공안(貢案)은 고치지 못하였다.
상이 분부를 내려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하자, 선생은 연달아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병을 조리하게 하고자 하니, 대신들은 품계를 올려 주고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을 겸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한가로운 직책에 있으면서 입시할 것을 명하자, 선생은 거듭 사양하여 해직을 청하고 도성을 나가 서쪽 교외에 머물렀다. 상은 선생이 도성을 나갔단 말을 듣고는 비망기(備忘記)로 소환하여 편전에서 인견하고 재삼 머물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물러가 죽기를 간곡히 청하자, 상은 그제야 우선 돌아갔다가 다음 해 봄에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다시 사헌부 집의와 사옹원(司饔院)ㆍ사재감(司宰監)ㆍ내섬시(內贍寺)의 정(正)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583, 선조16) 3월 특지(特旨)로 병조 참지를 제수하였는데, 세 번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체직시키고 이조 참의에 제수한 다음 인하여 품대(品帶) 한 벌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세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내 감히 직사(職事)를 맡겨 억지로 번거롭게 할 수가 없어서 본직을 체직하는 것이니, 다만 물러나 돌아갈 계책을 하지 말고 전에 내린 전지를 따라 경연에 입시하여 덕이 부족하고 몽매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율곡이 조정에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없애고 잘못된 정사를 개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선조(宣祖)는 매우 사랑하고 의지하였다. 취향이 다른 자들이 율곡을 시기하여 공사 간(公事間)에 하찮은 일을 들추어내어 국정을 제멋대로 처결하고 교만 방자하다고 삼사(三司)에서 탄핵하니, 조야(朝野)가 격분하였다. 선생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렀다가 글을 올려 율곡을 논변하여 구원하려 하니, 삼사에서는 또 선생까지 탄핵하였다. 선생이 당일로 도성을 나와 파산으로 돌아오니, 태학생(太學生) 470명과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의 유생(儒生) 400여 명이 서로 이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유생들의 상소문을 보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간담(肝膽)이 늠름하여 범할 수가 없다. 선비들의 기개(氣槪)가 이와 같으니, 내 어찌 국사를 걱정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일 군자라면 붕당(朋黨)이 있음을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나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였다. 얼마 후 또다시 이조 참의를 제수하고 부르는 명을 네 번이나 내렸다. 선생이 부득이 명에 사은숙배하니, 상은 인견하고 대면하여 타일렀다. 겨울에 이조 참판으로 올려 제수하자, 사양하는 상소문을 다섯 번 올렸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율곡 선생이 별세하자, 선생은 한탄하기를, “율곡은 도체(道體)에 대하여 큰 근원을 밝게 보았다. 이른바 ‘천지의 조화가 두 근본이 없다’는 것과 ‘인심(人心)의 발함이 두 근원이 없다’는 것과 ‘이기(理氣)가 서로 발할 수 없다’는 등의 말씀은 모두 실제로 보고서 안 것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진실로 산하(山河)의 뛰어난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인물이요, 삼대(三代) 이전의 훌륭한 인물인데, 이러한 세상에 큰일을 하지 못하고 뜻만 품고서 별세하였으니, 애통하다.” 하였다. 선생이 또다시 네 번이나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아뢰자, 상은 답하기를, “새로 어진 재상을 잃었으니, 나는 국사를 생각하면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나와 함께 국가를 다스릴 자는 경(卿)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지금이 어찌 물러갈 때이겠는가.” 하였다.
가을에 분황(焚黃)하는 일로 말미를 받아 파산으로 돌아오자, 상은 경기 감사에게 글을 내리기를, “성모(成某)가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지키며 은거(隱居)하여 지조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여러 번 부름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왔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병이 많으므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이제 해가 저물어 가니,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안부를 묻고 적절히 헤아려 음식물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찬집청(纂集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부름을 받고 세 번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모두 명류(名流)로서 하찮은 일 때문에 서로 비방하니, 선배와 후배들이 마침내 서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율곡이 아뢰어 두 사람을 외지로 내보내게 하였으나 이때까지도 진정되지 않았다. 심의겸은 바로 인순대비(仁順大妃)의 아우였는데, 젊은 사람들은 외척이라고 지목하여 함께 배척해서 한 함정으로 여겼다. 그러나 선배들은 “심의겸은 권간(權奸)이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힐 때에 사림(士林)을 부지하여 보호한 공이 있으며, 선조(宣祖)가 왕위를 이을 적에 원로 대신들과 어진 사람을 불러오도록 청하였으니, 비록 외척이라고 하나 평소 중요한 관직에 있지 아니하여 일찍이 조정의 권력을 잡은 적이 없으므로 지나치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것을 공론(公論)이라 여기니, 후배들은 마침내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여 외척과 사귀고 결탁하여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혀 국사를 그르친다고 모함하였다. 선생은 연달아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고 유서(遺書)를 써서 아들 문준(文濬)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자지문(自誌文) 및 감회시(感懷詩)와 서문을 지어 문생인 오윤겸(吳允謙)과 황신(黃愼)에게 보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때 마침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 사건이 일어나니, 상은 하교하기를, “나라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이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도성에 들어가 사은한 다음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며, 또 일찍이 정여립을 알고 지냈다 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역적과 서신을 왕래하고는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자, 대간(臺諫)에서는 기군망상(欺君罔上)하였다고 논죄하였다. 선생이 요로(要路)를 맡은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대신이 한마디 말을 사실대로 하지 않았다 하여 대번에 중한 형벌을 받는 것은 왕도 정치에 손상이 된다. 송(宋)나라 조정은 일찍이 한 명의 대신도 죽이지 않았으니, 인후(仁厚)함을 본받을 만하다.” 하니, 그 의논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이때 역옥(逆獄)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어나 크게 파급되어 만연하였다. 성상이 크게 진노하니, 사람들이 감히 구원하고 해명하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강력히 화평한 의논을 주장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 봄에 봉사(封事)를 올려 옥사를 늦추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준엄하게 의논하는 자들이 상당히 불평하였다. -경인년 봉사를 살펴보면 백성들을 길러 나라를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고 현자를 등용하는 도리를 위주로 하였는데, 옥사를 늦추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한 조목은 선생이 상소문을 미처 다 초하기 전에 병환이 났었다. 그리하여 병이 나아 글을 올리려 할 때에는 옥사가 이미 결말이 났으므로 다시 삭제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이 한 조목을 들추어내어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생을 신원(伸冤)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진실을 잃었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에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날 기미가 있으므로 선생은 정장(呈狀)을 올려 체직된 다음 마침내 파산으로 돌아왔다. 태학생들이 상소하여 선생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으니, 선생은 이로부터 다시는 도성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상 또한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얼마 후 최공 영경(崔公永慶)이 호남의 방백(方伯) 홍여순(洪汝諄)이 올린 장계의 유언비어로 말미암아 또한 체포되어 옥중에 있었다. 이에 선생은 정승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최효원(崔孝元 최영경)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깨끗이 수행하는 사람이니, 어찌 역모에 가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 정승의 뜻도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탑전(榻前)에서 ‘최영경은 효도하고 우애하며 기절(氣節)이 뛰어난 인물이므로 반드시 역모에 가담하였을 리가 없다.’고 극진히 아뢰었다. 이에 성상의 뜻이 다소 풀렸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에 선생은 조정으로 달려가려 하였으나 이때 당론(黨論)이 매우 준엄하여 사대부들이 서로 이어 유배 가고 쫓겨났다. 선생은 정 정승과 절친한 친구 간이어서 불원간에 화가 장차 닥치게 되었으므로 감히 곧바로 대궐 아래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선생은 대가(大駕)가 장차 서쪽으로 피난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들 문준에게 이르기를, “대죄하는 신하는 스스로 나아가기 어렵다. 대가가 만약 과연 서쪽으로 가신다면 오직 길가에서 통곡하고 맞이할 것이다. 내가 만약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지어 배척받은 신하이니, 감히 스스로 반열에 낄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자제로 하여금 서울에 들어가 분명한 소식을 탐문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급히 서쪽으로 파천할 줄은 진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후 들으니 대가가 이미 임진 나루를 건넌 다음 배를 철거하여 나루터가 통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온 도에 왜병들이 들끓기 때문에 길가에서 통곡하고 맞이하려던 계획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한 손님과 마주 대하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병든 몸으로 안협(安峽)과 토산(兔山) 사이로 피난하였는데,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 이천(伊川)에 나가 머물면서 글을 내려 선생을 불렀으나 병환 때문에 즉시 가지 못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제왕의 학문과 군무(軍務) 16개 조항을 논하였다. 광해군은 선생으로 하여금 의병장(義兵將) 김지(金漬)의 군중에서 군대의 일을 보게 하고, 인하여 검찰사(檢察使)에 제수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정형(李廷馨)과 협력하여 나가 싸워 국토를 수복(收復)하게 하였다. 가을에 광해군이 말[馬]을 보내어 부르자, 선생은 성천(成川)에 며칠 머물다가 즉시 의주(義州)로 갔는데, 도중에 참찬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에 대가를 미처 호종(扈從)하지 못했다 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하고 새로 제수한 은혜로운 명을 계속하여 사양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다시 참찬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세 가지 계책을 논하였으며, 인하여 군주의 덕을 지극히 논하였다. 이 상소에,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이와 같은 변란을 당하면 모두들 통렬히 스스로 경계하고 꾸짖으며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혹은 존호(尊號)를 제거하고 혹은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의 잘못을 강력히 반성하여 백성들이 우리 군주가 개과천선한 실제를 분명히 알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하시어 크게 훌륭한 일을 하려는 뜻을 분발하셔야 할 것이니, 단지 공허한 말에 나타낼 뿐만이 아니요, 오직 실제 일에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을 금지하고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막으며 한결같이 정직한 선비에게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긴다면 거의 인심(人心)이 기뻐하여 복종하고 천의(天意)가 다시 새로워져서 본원(本源)인 마음이 깊이 배양되어 기강이 떨쳐지고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원수인 왜적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명(明)나라 주사(主事)인 원황(袁黃)이 찬획(贊畫)으로 임명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논하였는데, 그의 말은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을 주장하고 정주(程朱)의 학설은 배척하였다. 행조(行朝)의 재신(宰臣)들은 회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선생에게 청하여 답장을 초하게 하였는데, 대략 말씀하기를, “소방(小邦) 사람들은 모두 황조(皇朝)에서 반포해 준 경서 전주(經書傳註)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외고 익혀서 이 학설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원황은 가상히 여기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에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화가 현궁(玄宮)에까지 미쳤다. 선생은 명을 받들어 재상들과 봉심(奉審)하였는데, 일을 처리함이 상세하고 신중하며 사려가 보통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찌르니, 제공(諸公)들이 탄복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병환이 심해져서 9월에야 비로소 해주(海州)의 행조에 복명(復命)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은 그대로 남아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다.
갑오년 봄에 호서(湖西)의 도적이 크게 일어나니, 경성(京城)이 진동하였다.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서울로 달려가서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변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내가 경(卿)의 집 앞을 지나갔으나 경이 와서 문안하지 않더니, 이제 경이 찾아오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른다.” 하였다. 이는 임진년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할 때에 상이 임진 나루에 이르러 “성모(成某)가 어느 곳에 사는가?” 하고 묻자, 이홍로(李弘老)가 병조 좌랑으로 앞에 있다가 강안(江岸)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을 가리키며 아뢰기를, “저곳이 바로 성모가 사는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하니, 이홍로는 아뢰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와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이홍로는 일찍이 선생이 사는 곳을 왕래하여 선생의 집이 임진 나루에서 20여 리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기회를 틈타 이와 같이 무함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가가 의주(義州)에 이르자, 이홍로는 선생이 동궁(東宮)의 부름에 달려가 성천(成川)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상에게 아뢰기를, “성모는 온 나라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는데 그가 이미 세자에게 돌아갔으니, 일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선생이 의주의 행조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또다시 아뢰기를, “성모가 이번에 온 것은 세자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미 여러 번 그의 무함하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때에 이르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이 황공하여 상소하여 중한 견책을 내리시기를 원하자,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타일렀다.
여름에 좌참찬 겸 비국당상에 제수되니, 이때 상이 당상관들은 각각 계책을 올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에 선생은 시무(時務) 14개 조항을 올렸는데, 첫 번째로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지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중국의 예처럼 시장에서 사 오기를 청하였다. 소(疏)가 계하(啓下)되었으나 폐기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명나라의 고 시랑(顧侍郞)이 호 참장(胡參將)을 보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우리 중국은 병사들이 지치고 힘이 다하였으니, 형편상 우선 왜적의 화의(和議)를 들어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귀국(貴國)과 함께 병력을 길러 후일을 도모할 것이니, 귀국에서는 이러한 형세를 자세히 갖추어 상주(上奏)하라.” 하였다. 이때 왜적들은 경상도 연변의 13개 고을을 점거하여 날마다 노략질을 자행하였고 전라도 한 곳만 홀로 적들의 칼날을 면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병력이 부족하고 군량이 다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의정부에서는 계책을 낼 방도가 없으므로 뜻을 굽혀 고 시랑의 자문을 따르려 하였으나 당시 의논들이 화의를 매우 준엄하게 공박하였다. 이때 정승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선생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성상께 결단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황제에게 어떻게 주문(奏聞)할 것인가?” 하고 묻자, 선생은 아뢰기를, “국세의 위태로움이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과 같으니, 모름지기 다소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어야 거의 자강(自強)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고 시랑은 손수 큰 병권을 쥐고 있어 자기의 생각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현재 물러나 압록강을 지키자는 의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싸우지도 못하고 또 지키지도 못하면서 다만 중국의 화의를 금한다면 잘못된 계책일 듯합니다.” 하였다. 상은 이에 답하지 않았는데, 이때 마침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장계(狀啓)를 올려 우선 화의를 허락하여 병란(兵亂)을 늦추는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좌우의 신하들은 이정암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다투어 아뢰었다. 선생은 평소에 이정암이 충성스럽고 신의를 지키는 큰 절개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이 때문에 중한 죄를 얻을까 염려하여 아뢰기를, “이 사람이 함부로 아뢴 것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그 마음은 지극한 정성으로 국가를 염려하여 용감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은 것이니, 중한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진노하자, 유 정승은 끝내 감히 발언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로부터 상은 여러 번 화의를 배척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삼사에서도 서로 글을 올려 화의를 공격하니, 선생은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날 것을 청한 다음 파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항상 답답해하며 말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인들이 그 이유를 묻자, 선생은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기를, “내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죄를 결정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천지 사이에 몸 둘 곳이 없다. 그런데 편안히 쉬면서 집에 있으니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걱정하고 상심하여 병이 되었다. -살펴보건대 이때 성상의 노여움이 그치지 아니하여 엄한 분부를 연달아 내렸으니, 선생이 사람들과 말씀할 때에 혹 허물을 자책하여 대죄한다는 말씀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답답해하여 눈물을 닦으며 근심하고 상심하여 병환이 됨에 이르렀겠는가. 이 또한 신원(伸冤)할 때에 상에게 아뢴 말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너무 지나친 것이다.- 마침내 위독해지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유서(遺書)를 남기기를, “나는 죄명(罪名)이 지극히 중하여 현재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일은 날로 위급해지는데 평소의 마음을 군부에게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거든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한 다음 띠풀을 엮어 관을 덮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하고 묘 앞의 비석에는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무덤이 있는 곳임을 알게 하면 된다.” 하고 마침내 파산서실에서 별세하니, 무술년 6월 6일로 춘추가 64세였다.
선생이 별세하였으나 여러 소인들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질시(嫉視)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무리인 문경호(文景虎)에게 사주하여 상소하여 선생을 모함하기를, “최영경의 죽음이 선생에게서 연유되었다.”고 하니,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때를 틈타 더욱 함부로 비방하여 ‘간흉과 한 무리가 되고 군주를 버렸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어 사림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하였다. 선조는 어필(御筆)로 ‘모함하여 죽였다[搆殺]’ 등의 글자를 삭제하였으나 끝내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기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선생은 본래 산림에서 일어나 부귀를 보기를 우연히 오는 물건으로 여겼으니, 사후(死後)의 득실(得失)은 선생에게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모함하는 말의 망극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유림(儒林)들이 함께 원통해하고 분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해져서 간사함이 정도(正道)를 이긴 지 오래되었다. 정주(程朱)와 같은 대현(大賢)으로도 오히려 간사한 자들에게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면치 못하였으니, 선생에 대해서 또 무슨 한할 것이 있겠는가.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성상(聖上 인조(仁祖)를 가리킴)께서 즉위하시던 초년에 선유(先儒)들을 높여 장려하시고 억울한 자들을 신원하여 다스렸다. 이에 나는 지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인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함께 선생이 전후에 걸쳐 모함을 당한 곡절을 탑전(榻前)에서 자세히 아뢰니, 성상은 마침내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내가 또 경연에서 선생을 표창하여 추증하는 은전(恩典)을 내릴 것을 청하자, 성상은 즉시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제생들이 파산의 옛 마을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청송(聽松) 선생을 배향(配享)하여 국가의 예전(禮典)이 밝게 게시되어 선비들의 마음이 크게 정해지니, 선생의 도가 다시 오늘날에 밝아졌다고 이를 만하다.
아, 선생은 타고난 천품이 매우 높고 덕기(德器)가 일찍 이루어졌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교훈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입신(立身)하는 기본으로 삼았으며,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정밀하게 연구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진전되고 경(敬)과 의(義)가 서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규모와 절도가 한결같이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본원(本源)인 마음을 조존(操存)하는 곳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공양(供養)과 깊은 조예(造詣)는 일반인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나, 외면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용모가 장중(莊重)하면서도 편안하고 온화한 기색이 있고, 지기(志氣)가 정숙(靜肅)하면서도 억지로 구속하는 수고로움이 없었으며, 말씀이 분명하고 간절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자상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사당에 배알하고 저녁에도 이와 같이 하여 날씨가 춥든 덥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일찍이 그만두지 않았다. 물러 나와 서실에 거처함에 종일토록 엄숙하여 태만한 모습을 신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하고 사물을 대함에 한결같이 겸손하고 온화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서 절약하고 검소함과 사랑하고 용서함을 힘썼고, 집안사람들에게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켜 각각 조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수고롭지 않으면서도 일이 잘 거행되었다. 초상과 제사의 예절은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를 따르고 기용(器用)과 제수(祭需)는 반드시 지극히 정결하게 하였으며, 농사일이 끝나면 언제나 제사에 쓸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별도로 저장하고 다른 곳에 쓰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집안사람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비록 끼니를 여러 번 굶더라도 감히 제수로 쓸 곡식을 갖다 먹지 못하였다. 선조(先祖)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초상 때처럼 하여 포관(布冠)을 쓰고서 하루를 마치곤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질병이 많아 몸이 수척하고 얼굴이 검게 타서 옷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듯하였으나 정신이 안정되고 눈동자가 빛났으며 언제나 책을 읽다가 뜻에 맞는 부분에 이르면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쇳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젊어서 율곡 선생과 교분을 맺고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여 이택(麗澤)의 유익함이 있었다. 율곡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만약 견해의 경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겠으나 조행(操行)의 독실함은 내가 우계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산림에서 광채를 숨겨 본래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런데 학문이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지자, 종유(從遊)하는 선비들이 더욱 많아져 빛나는 명성이 알려졌으므로 여러 번 천거하는 글에 이름이 올랐다. 선조(宣祖)는 은혜와 관심이 특별하여 불차(不次)의 지위로 대우하였다. 선생은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비록 부름을 받고 도성에 가곤 하였지만 항상 오래 머물 뜻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을 따져 보면 1년이 채 못 되니, 이것이 선생이 나아가고 물러난 대략의 내용이다.
선비들의 의논이 분열된 이후로 세상의 도가 날로 나빠지자, 선생은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정직하여 전혀 편벽되이 얽매이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사라지고 자라는 것을 가지고 걱정과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에 한 번 율곡을 위하여 변호하였다가 마침내 일부 사람들의 질시를 당하니, 그들은 남몰래 모함하고 드러나게 꾸짖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학(儒學)을 높이고 현자(賢者)를 예우하는 선조(宣祖)의 거룩한 덕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선생의 큰 포부도 이 세상에 펴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애통해할 만하다. 선생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근원하여 명백하고 정대(正大)하였으며 정밀하고 간절하여 염락(濂洛)의 유풍(遺風)을 깊이 얻었다. 그리하여 문장을 읽어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풀리고 이치가 투철해져서 읽고 읽어도 싫지 않게 하니, 참으로 세상을 경륜할 만한 문장이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6권이 세상에 전한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따님인데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어서 가법(家法)을 잘 지켰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을유년 진사에 합격하고 천거로 현감이 되었다. 장녀는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는데 벼슬이 별좌(別坐)이고, 차녀는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는데 벼슬이 참지(參知)이다. 현감은 주부 조감(趙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역(櫟)이고 그다음은 익(杙)과 직(㮨)이며, 사위는 신민일(申敏一)ㆍ안후지(安厚之)ㆍ윤정득(尹正得)이다. 별좌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걸(杰)이고 그다음은 우(楀)이며, 사위는 신협(申協)ㆍ김여옥(金汝鈺)ㆍ윤형은(尹衡殷)이다. 참지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훈거(勛擧)이고 그다음은 순거(舜擧)ㆍ상거(商擧)ㆍ문거(文擧)ㆍ선거(宣擧)이며, 사위는 이정여(李正輿)ㆍ권준(權儁)이다. 내외의 여러 손자가 모두 60여 명에 이른다.
나는 국가가 위급하던 때에 여러 번 선생을 찾아뵙고서 빛나는 도덕을 바라보고 장려하는 한 말씀을 받았으니, 사모하는 정성이 실로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된다. 이제 시호(諡號)를 청하면서 올릴 행장(行狀)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삼가 가보(家譜)를 가지고 대략을 위와 같이 차례로 쓰는 바이다.
行狀
右議政 李廷龜撰
先生諱渾。字浩原。昌寧人。自號默庵。以居坡山之牛溪。學者稱爲牛溪先生。高麗中尹諱仁輔之後。六代祖諱石因。禮曹判書。五代祖諱抑。左贊成。高祖諱得識。左尹。曾祖諱忠遠。縣令。贈判書。祖諱世純。文科知中樞府事。諡思肅。考諱守琛。世稱聽松先生。少受業趙靜庵之門。隱居守志。講明道學。明廟禮遇隆重。累以官徵不就。卒贈司憲府執義。妣坡平尹氏。判官士元之女。以嘉靖乙未六月二十五日。生先生於漢京順和坊。十歲。隨聽松先生。來坡山別業。十二三。文思日進。臨書。不待講說而曉達靡遺。十七。發解司馬兩試。而仍有疾。不赴覆試。自此絶意科業。專精學問。白獻納仁傑以言獲罪。居坡庄。先生請業焉。弱冠。博通經史。學識行義。大爲一時儕流所推服。癸亥。聽松先生患風疾危劇。先生割股和樂以進。病良已。半歲復作。又割股和藥以進。至甲子正月。竟不起。廬墓三年。宣廟初年。京畿監司以沈潛學問。孝行卓異聞于朝。除典牲署穆淸殿參奉。吏曹以學行擧。陞拜掌苑。皆不赴。庚午。除積城縣監。謝恩卽還坡山。遠近學徒。坌集塡門。先生諄諄訓誨。作書室儀。立齋規。手抄朱子語錄爲學之方。寫成一冊以示學者。與栗谷先生論難四端七情理氣之說。長書往復。多有發前人所未發者。癸酉。除工曹佐郞。俄拜持平。甲戌。自工曹正郞。復除持平。皆以病辭。以典牲主簿。有旨待天氣暄和上來。自甲戌至己卯。拜持平者十二。工曹正郞者四。司紙,宗廟令,禮賓判官,廣興,長興主簿者一再。皆不赴。或謝恩而遞。庚辰。再除掌令。皆以病陳疏。上使之乘馬轎上來。栗谷啓言。自上加恩禮于成某。近古所罕。未知上意欲用其人乎。抑欲一見而止乎。上曰。成某之賢。予已聞知矣。第未知其才如何。栗谷曰。才亦非一般。有可獨任經濟之責者。有好善而能用群才者。成某之才。謂之獨任經綸則過矣。其爲人好善。好善優於天下。豈非可用之材乎。但痼疾在身。必不能任劇。置之閑局而時使入侍經席。則必有啓沃之益矣。辛巳。拜宗廟署令。召旨屢下。力疾入京。上遣醫問疾。賜之藥餌。引見思政殿。首問大道之要。對曰。人君必收拾身心。保養精神。專一凝定。使志氣常淸。則本源澄澈而義理昭著矣。上問古今治亂。對曰。治亂無常形。只係人主一心。必得一世賢人君子爲輔相。廣收人才。列于庶位。然後治化可成矣。上問卽位以來所用有小人乎。對曰。朝著之間。容身固位。無所攖拂之士多。剛毅正直。引君當道之臣少。豈非可憂乎。上問生民困悴。何以則可。對曰。量入爲出。損上益下。則賦役必輕。恩結民心。爲祈天永命之本矣。時先生不受祿。侍臣有爲言者。上乃令輸送米斛。先生疏辭。答曰。周之則受。古之道也。先生不得已受之。分與親戚隣里。進萬言封事。申前登對之意而極言之。政院請宣示大臣。上答曰。疏中如學問時弊。則予當察行。但譏議朝廷太過。又欲盡取國制而紛更之。其亦難行也。蓋先生之意。祖宗良法。至燕山而盡廢。尙有未盡剗革者。如進上貢物之類是也。初非謂舊章可變。只欲祛此病民之政。遵先王成憲而已。玉堂箚請宣示。乃許。三公啓請嘉納採用。且請兼經筵以備顧問。上曰。兼經筵。不可創新規。當更見之。遞付工曹正郞。連上疏乞寢周急之命。病告數月。上遣醫賚藥。除豐儲倉守。命引見便殿。先生進曰。天行健。無一息間斷。故能發育萬物。成造化之功。人君代天理物。如有一息之間斷。則便與天地之化不相似矣。經席之上。尋行數墨。解釋文義。非帝王之學。必深培厚養。使義理之心常勝。而志氣淸明。則耳目口鼻之欲。自不能用事於其間矣。中庸九經。大學平治章。必以修身爲本。尊賢次之。大學挈矩。爲應事之要。用人理財。爲治道之先。我國田稅至輕而貢物至重。須裁省貢法。使民力得紓而歲入增加。於民於國。俱得其便。上嘉納。而貢案不能改。上下敎令出入經筵。先生連疏乞免。上命議大臣。欲令還家過冬調病。大臣請陞秩兼參贊官。上命以閑職入侍。先生申辭乞解。出次西郊。上聞出城。以備忘記召還。引見便殿。再三勉留。先生懇乞退死。上始許姑歸。開春上來。再除執義,司饔,司宰,內贍正。皆不赴。癸未三月。特授兵曹參知。三疏。遞授吏曹參議。仍賜品帶一圍。三疏乞免。答曰。予不敢以職事強煩。當遞本職。但勿爲退歸之計。宜遵前旨。入侍經筵。以補寡昧。時栗谷在朝。以消黨論革弊政爲己任。宣廟眷注方隆。異趣者忌之。捃摭公事間微細事。三司以專擅驕蹇劾之。朝野憤激。先生適被徵至京。上章論救。三司又幷劾之。先生卽日出城還坡山。太學生四百七十人。湖西,海西儒生四百餘人。相継抗疏。上曰。今見儒疏。忠肝義膽。凜凜有不可犯者。士氣如此。予何憂國事。又敎曰。苟君子也。不患其有黨。予願入珥,渾之黨也。無何。又拜吏曹參議。召旨四下。不得已拜命。引對面諭。冬。陞拜吏曹參判。五疏不許。甲申正月。栗谷先生卒。先生歎曰。栗谷於道體。洞見大原。其所謂天地之化無二本。人心之發無二原。理氣不可互發等語。皆實見得。眞是吾師。誠山河間氣。三代上人物。不能有爲於斯世。齎志而歿。慟矣夫。先生又呈辭四度。不許。仍啓乞骸。答曰。新喪賢宰。言念國事。寢不貼席。今與予共理國家。非卿而誰。此豈退去之時乎。秋。以焚黃受由歸坡山。上下書于京畿監司曰。成某安貧守道。隱居求志。因予屢召。幡然而來。惜其多病。暫許歸山。今歲聿云暮。宜使長吏存問。量給食物。乙酉。以纂集廳堂上召。三拜同知。皆疏辭。先是。沈義謙,金孝元俱以名流。因微事相訾謗。先後輩遂相乖隔。栗谷啓請兩出于外。而猶未能鎭靜。沈公義謙。卽仁順大妃之弟。年少輩指爲外戚共斥之。視爲一穽。先輩以爲沈於權奸濁亂之時。有扶護士林之力。及宣廟嗣位。建請徵召耆哲。雖云椒親。常在散秩。未嘗把握朝權。不宜過加排擊。先生以此爲公論。後輩遂倂劾先生。誣以交結外戚。濁亂誤國。先生連上疏自劾。作遺書分付後事於子文濬。丁亥。作自誌文及感懷詩序。示門人吳允謙,黃愼。至己丑冬。復拜吏曹參判。疏辭。會逆賊鄭汝立獄起。上敎曰。國有大變。卿不可退在。先生入城謝恩。上疏辭職。又以曾識汝立待罪。右相鄭彦信以通書逆賊。不以實對。臺諫論以欺罔。先生抵書於當路曰。大臣以一言失實。遽被重辟。有損王政。宋朝未嘗殺一大臣。仁厚可法。其論遂寢。時逆獄起於縉紳。蔓及頗多。天威震怒。人不敢救解。 先生力主和平之論。庚寅春。上封事以緩獄恤刑爲重。峻議者頗不平。按庚寅封事。以養民保邦律貪進賢之道爲主。緩獄恤刑一款。則先生草疏未畢而疾作。及疾間而拜章。則事已結末。故還削之。今反拈出此一款。以爲之重。則蓋出於伸究之意。而未免失其實矣。 當此之時。有黨禍媒孼之幾。先生呈告遞職。遂還坡山。太學生上疏請留。不報。自是不復入京。上亦不復徵召。頃之。聞崔公永慶。以湖南方伯洪汝諄狀啓中飛語。亦在縲絏中。先生抵書於松江鄭相澈曰。崔孝元孝悌淸修。豈有與聞逆謀之理乎。鄭相之意亦然。乃於榻前。極陳崔永慶孝友氣節。必無與知之理。上意稍解。壬辰之變。先生欲赴難于朝。而時黨議甚峻。縉紳相繼竄逐。先生以鄭相之親友。將朝夕及禍。不敢徑詣闕下。聞大駕將西幸。謂子文濬曰。待罪之臣。難於自進。乘輿若果西幸。則惟當哭迎於道左。如蒙顧問。則隨駕而去。不然則罪斥之臣。不敢自廁於班列。遂使之入京。探聽的報而還。實不料西遷如是之急也。俄聞大駕已渡臨津。撤去舟楫。津渡不通。一路方爲亂兵。哭迎之計亦已無及。與親客相對慟哭。遂舁疾避兵于安峽兔山之間。病勢轉劇。幾絶者數矣。光海以世子出駐伊川。有敎召之。病不能卽行。上箚論帝王之學及軍務十六條。光海令視師于義兵將金漬軍中。仍除檢察使。令與開城留守李廷馨協力進取。秋。光海送馬召之。先生入成川留數日。卽往義州。道聞參贊之命。初以不及隨扈。伏藁待罪。継辭新除恩命。拜大司憲辭遞。還拜參贊。上疏論選將練兵聚糧三策。仍極論君德。以爲敵國外患不可專歸於天數。在
昔帝王。遇如此之變。莫不痛自警責。下詔罪己。或去尊號。或罪誤國之臣。力反前失。使民心曉然知吾君改過遷善之實。願殿下憂深思遠。奮發大有爲之志。不但見諸空言。唯當施之實事。絶近習交通之漸。杜宮闈與政之端。一以正直之士爲耳目之寄。則庶幾人心悅服。天意重新。本源深培而綱紀張。將士效命而仇敵滅矣。天朝主事袁黃以贊畫來。貽書論學。其言主陸氏而絀程朱。行朝諸宰難其答。請先生草報。略曰。小邦之人。皆誦習皇朝所頒經書傳註及性理諸書。以爲此說之外無他道理。袁嘉賞不復言。癸巳夏。又除大司憲。辭遞爲西樞。時宣,靖陵禍及玄宮。先生承命。與諸宰奉審。莅事詳愼。思慮出人意表。諸公歎服。還途病劇。九月。始復命於海州行朝。未幾。大駕還都。留扈中殿。甲午春。湖西土賊大起。京城震駴。先生力疾輿赴京師。上疏待罪。批旨略曰。變初。過卿廬舍之前。而卿不來問。今卿來詣。感激流涕云云。蓋壬辰西幸之時。上至臨津渡。問成某居在何處。李弘老以兵曹佐郞在前。指近岸小村曰。此乃成某所居。上曰。然則何不出見我乎。弘老曰。當此之時。渠豈肯來見。弘老曾往來先生所居。知距臨津二十餘里。而乘時誣陷如此。逮大駕至義州。弘老聞先生赴東宮之召。追入成川。言於上曰。成某負一國重望。而已歸於世子。事無可爲者。及聞先生至義州行朝。則曰。成某之來。爲世子圖禪位也。宣廟旣屢聞其讒。至是有此敎。先生惶恐。上疏願伏重譴。批旨慰諭。夏。拜左參贊。兼備局堂上。時有堂上各獻計策之旨。先生於是上時務十四條。第一。請罷貢獻。市易膳御。如中朝例。疏下。寢不行。時天朝顧侍郞遣胡參將移咨曰。中國兵疲力竭。勢當姑聽倭和。與貴國共養兵力。以爲後圖。貴國備陳此形勢而上奏云。是時。倭賊屯據慶尙沿邊十三郡。日肆搶掠。全羅一道獨免兇鋒。而兵單糧匱。賊至則無可爲。廟堂計無所出。欲曲聽顧咨。而群議攻和甚峻。時柳相西厓成龍。要先生同入對稟决。上問奏聞當否。先生以爲國勢危如一髮。須少緩兵鋒。庶可圖自強。而顧侍郞手握大兵。高下在心。方主退守鴨綠之議。我國旣不能戰。又不能守。而只禁中朝之和。似是失策。上不答。適於其時。全羅監司李廷馣狀啓。請姑許和以爲緩兵之計。左右爭陳廷馣可斬。先生素知廷馣有忠信大節。恐以此重得罪。啓曰。此人妄發固有罪。然其心則至誠憂國。敢言不諱。未可深罪。上盛怒。柳相終不敢發言而退。自是上屢降斥和之敎。三司又交章攻和。先生上章自劾。乞骸歸坡山。門人見先生恒悒悒不語。問其故。先生攬涕言曰。吾得罪君父久矣。迄未定罪。固不可措身於天地之間。而偃息在家。豈得安心。自是憂傷成疾。按是時。天怒未已。嚴旨連下。先生與人說話。容有引咎待罪之語。何至悒悒攬涕。憂傷成疾也。此亦因伸冤時告上之辭。而不覺其太過者也。 遂至危劇。遺書於子文濬曰。吾罪名極重。方俟嚴譴。時事日就於危急。素心未暴於君父。吾死目不瞑矣。衣以布衣。歛以紙衾。編茅覆棺。牛車歸葬。墓前書昌寧成某墓五字。使子孫知其處可也。遂易簀于坡山書室。戊戌六月初六日也。春秋六十四。先生旣歿。而群小仇嫉猶不已。鄭仁弘嗾其徒文景虎。上疏誣詆。謂崔永慶之死由於先生。用事者乘時益肆齮齕。以黨奸遺君。搆成罪案。爲網打士林之計。宣廟以御筆抹去搆殺等語。而竟至追奪官爵。噫。先生本起林下。視軒冕
爲倘來。身後得失。無與於先生。而讒言罔極。乃至於此。此儒林之所共冤憤者也。雖然。世衰道微。邪之勝正也久矣。以程朱大賢。猶未免奸邪僞學之目。於先生又何恨焉。天運循環。無往不復。聖上臨御之初。崇奬儒先。伸理冤鬱。廷龜與今領府事吳公允謙。榻前陳白先生前後被誣曲折。上遂命復官職。厥後廷龜又於筵中。請施褒贈之典。上卽命追贈議政府左議政。諸生建書院於坡山舊里。配享於聽松先生。國典昭揭。士心大定。先生之道。可謂復明於今日也。嗚呼。先生天分甚高。德器早成。自童初時服膺庭訓。以孝悌忠信爲立身之根基。至其爲學。則玩索精密。踐履敦確。知行兼進。敬義夾持。其規摸節度。一以考亭爲準則。而於操存本源之地。尤致慥慥焉。充養之厚。造詣之深。有非人人所可窺測。而自其著於外者觀之。儀貌莊重。而有安和之色。志氣靜肅。而無拘束之勤。言辭明剴。動止端詳。平居。晨起必拜謁祠堂。夕亦如之。寒暑風雨。未嘗廢也。退處書室。終日儼然。惰慢之容。不見於體。接人遇物。一於謙和。而人自畏敬。不敢以褻慢進也。治家有法。以節儉慈恕爲務。分職授事。各有條理。故不勞而事擧。喪祭之節。一遵考亭家禮。器用饌品。必致精潔。每穡事畢。稱量粢盛而別貯之。戒勿他用。家人謹守其訓。雖簞瓢屢罄。不敢輒取資焉。遇先忌。哀慕如初喪。以布冠終日。先生少多病。癯然瘦黑。如不勝衣。而神觀凝定。眸子炯炯。每讀書到會意處。聲韻琅然。若出金石。少與栗谷先生定交。講劘道義。有麗澤之益。栗谷嘗稱曰。若論見解所到。吾差有一日之長。操履篤實。吾所不及云。先生早棄科業。韜光林野。本無供世之志。及學成道尊。從遊之士益衆。聲輝騰聞。屢登薦剡。宣廟恩注異常。待以不次之■。先生力辭不獲。雖被徵赴都。恒無久意。歷診立朝。不滿一歲。此先生進退之槪也。自士論分貳。世道日洿。先生秉心平正。絶無偏係。而惟以賢邪消長爲憂樂。一爲栗谷伸辨。遂被一隊人所嫉。陰譖顯詆。靡所不至。使宣廟崇儒禮賢之盛德。不得全其始終。而先生抱負之重。亦未能展布於斯世。誠可痛也。先生文章。出於六經。根乎性理。明白正大。精緊懇到。深得濂洛之風。讀之使人心融理透。亹亹不厭。眞經世之文也。所著有牛溪集六卷行於世。夫人高靈申氏。郡守汝樑之女。賢有婦德。能持家法。生二男二女。男文泳。早卒。次文濬。乙酉進士。薦仕爲縣監。女長適南宮蓂。別坐。次適尹煌。參知。縣監娶主簿趙堪女。生三男三女。長櫟。次杙。次㮨。女壻。申敏一,安厚之,尹正得。別坐生二男三女。長杰。次楀。女壻。申恊,金汝鈺,尹衡殷。參知生五男二女。長勛擧。次舜擧,啇擧,文擧,宣擧。女壻。李正輿,權儁。內外諸孫共六十餘人。廷龜於艱虞之日。屢獲登拜。望見道德之光輝。辱蒙一言之推奬。慕用之誠。實倍恒人。今於易名之狀。義有不敢辭者。謹就家諸。詮次梗槪如右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