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蘆沙 기정진 奇正鎭
1798년(정조 22) ~ 1879년(고종 16)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금사(奇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기재우(奇在祐)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을 수립하였다.
1815년(순조 15)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였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현종 1)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는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평안도도사, 1857년 무장현감, 1861년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소장의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로 인해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여 그 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그 내용은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장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소장이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그의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 해 6월 사헌부집의, 7월에는 동부승지, 8월에는 호조참의, 10월에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해 삼무사(三無私: 공자가 사심이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하늘, 땅, 해와 달처럼 사심 없이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 곧 지극히 공평한 것을 지칭함)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우하여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하리 월송( 月松: 지금의 진원면 고산리)으로 이사하였으며, 이듬 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약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를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또한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하여 종래의 주리 또는 주기의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을 종합하였다.
그는 저술은 많지 않지만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 『노사집』, 1890년 『답문유편』이 편집되어,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1892년 조성가가 행장을, 1901년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는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전 : [네이버 지식백과] 기정진[奇正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