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현 李宜顯
1669년(현종 10) ~745년(영조 21)
본관은 용인.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증조부는 찬성공 이후연(李後淵), 조부는 파주목사 이정악(李挺岳), 아버지는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군수 정창징(鄭昌徵)의 딸이고, 홍익한(洪翼漢)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서울 북부 진장방(鎭長坊) 소격동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21세 때 도승지로 있었던 아버지 이세백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안이 세를 잃어 향리에 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권되어 과거에 응시하기까지 머물렀다.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 복권을 기념하는 별시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정언·홍문관부교리를 거쳐 1707년(숙종 33)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사헌부대사성 및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으로는 황해관찰사·개성부유수·경기관찰사를 지냈다. 경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된 직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에 재임하던 중 왕세제(王世弟, 영조)의 대리 청정 문제로 김일경(金一鏡)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평안도 운사에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 형조판서가 된 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제수받아 문형(文衡)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1727년(영조 3) 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경기도 양주에 있는 선영 아래로 물러갔다. 다음 해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35년(영조 11) 영의정에 올랐다.
70세 되던 해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었고, 봉조하(奉朝賀)로 복록을 누렸다. 77세로 졸하자 조정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정무를 중지하고 철조(輟朝)의 예를 다하였다. [학문과 사상] 학문 세계는 조선 후기 북학파 문학 이론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자기 표현을 절제하고 둔세적이며 자기 분수를 지키려는 내향적인 인물로, 청빈을 미덕으로 삼고 사대부로서의 본분을 삼으려는 조선조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키려는 인물로 평가된다.
저저로 『도곡집(陶谷集)』 등이 있는데, 특히 보학(譜學)에 밝아 당시 우리나라 298개 성씨를 모아 정리하였다. 정조 대 2,091명의 전기를 수록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도 이의현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