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17
○ 중용(中庸) 1 신축년(1781)에 홍이건(洪履健), 김재찬(金載瓚), 홍인호(洪仁浩), 이노춘(李魯春), 이석하(李錫夏) 등이 대답한 것을 뽑았다
중용서序
정자(程子)의 학설에,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도심(道心)이고 인욕(人欲)을 따르는 것이 인심(人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의 학설에, “상지(上智)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 어찌 모두를 인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정자의 학설 가운데 인욕이라고 한 것은 맹자가 이른바 ‘이목구비사지(耳目口鼻四肢)의 욕(欲)’을 말하는가? 그렇다면 상지라도 이것이 없다고 할 수 없을 듯한데, 주자의 학설에서는 인욕의 욕(欲) 자를 사욕(私慾)의 욕(慾)에 소속시켰다. 두 현인의 학설이 모순되는 듯하다. 이것이 과연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것인가?
[홍인호가 대답하였다.]
도심은 순전히 천리의 발현이니 본디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이 없겠으나, 귀가 소리를 들으려는 것이나 입이 맛있는 것을 먹으려는 것도 모두가 이 몸에 갖추어져 이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이니, 여기의 욕(欲) 자는 곧 사람에게는 없을 수 없는 것으로서, 사욕(私慾)의 욕(慾)과 같은 예로 논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정자가 이른바 ‘인욕을 따른다’는 것이 역시 맹자의 말에 가까우며, 반드시 사욕(私慾)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주자의 말은 또한 배우는 자들이 정자가 한 말의 뜻을 살피지 않고서 ‘인욕을 따른다’는 것을 바로 사욕(私慾)이라고 볼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다만 인욕(人欲)이 악(惡) 쪽으로만 치달리는 것에서 상성(上聖)도 없을 수가 없는 바를 집어내어서, 구별하여 밝혀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대저 정자의 학설은 좀더 엉성하고 주자의 학설은 좀더 치밀합니다.
우리나라의 학자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별에 대해 말하기를, “이(理)와 기(氣)가 뒤섞여서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발지자(發之者)가 기(氣)이고 소이발자(所以發者)가 이(理)이다. 어찌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하는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도심은 비록 기에서 떨어지지 않지만 그 발하는 것이 도의(道義)를 위함이기 때문에 성명(性命)에 소속시키고, 인심은 또한 이에 근본하는 것이지만 그 발함이 구체(口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형기(形氣)에 소속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이발’이니 ‘발지’니 하는 것은 이 이가 있기 때문에 발하는 것이지만 이 기가 없으면 발하지 못한다는 말이니, 이와 기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이 여기서 결판난다. 그렇다면 일설에서 사단(四端)을 이발에 소속시키고 칠정(七情)을 기발에 소속시킨 것은 어째서인가? 분명한 의논을 듣고 싶다.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주 부자가 정(情)을 심(心)에 소속시키기도 하고 성(性)에 소속시키기도 하여 심과 성에 나누어 소속시키지 않은 것이 바로 그 평소의 말이었는데, 《어류(語類)》에 실려 있는, ‘칠정은 기에서 발하고 사단은 이에서 발한다’는 학설은 《대전(大全)》에서 논한 바와 같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의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어류》를 위주로 삼아 이기호발(理氣互發)의 학설을 주장하였고, 선정신 이이(李珥)는 《대전》을 위주로 삼아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학문이 얕은 제가 감히 그 득실이 어떠한지를 망녕되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만, 생각건대, 이른바 ‘발지자는 기이고 소이발자는 이이다’라는 것은 참으로 이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말한 것이고 주 부자의 《대전》의 학설이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어류》는 반드시 주자의 본지(本旨)는 아닐 것이고, 또 《어류》에서는 ‘기에서 발한다’, ‘이에서 발한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기발’이니 ‘이발’이니 하는 것과는 말뜻에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이에서 발한다’라고 하면 ‘성명(性命)에 근원한다’는 말에 가깝고, ‘이발’이라고 하면 이가 도리어 운용조작(運用造作)의 권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운용조작에 간여하면 곧 이가 아니고 이미 기에 소속됩니다. 이것이 기발이승의 학설에 비하여 완벽에 흠이 있을 듯한 까닭입니다.
우리나라 학자의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에 도심 아래에 선(善) 자를 써 놓았는데 성선(性善)의 선(善) 자와 그 뜻이 같은가, 다른가? 인심은 성인과 범인(凡人)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인데, 도본(圖本)에 인심(人心)을 비스듬히 쓰고 아래에 악(惡) 자를 붙여 놓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선(善)이라는 한 글자는 본디 두 갈래의 뜻이 없으나, 맹자가 선을 말한 것은 성(性)에 나아가 전체를 말한 것이고 도설(圖說)에 선을 써 놓은 것은 정(情)과의 경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선을 말한 것은 비록 같지만 전체를 말하느냐 대응시켜 말하느냐의 구별이 조금 있습니다. 인심이 비록 성인이나 범인이나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형기(形氣)에만 닿았다 하면 흘러서 인욕(人欲)이 되는 것은 곧 순간입니다. 그 움직임은 제어하기 어렵고 그 기미는 매우 위태합니다. 그러므로 선정신 이이(李珥)의 도본에 반드시 비스듬히 적어서 그 위태하고 불안한 정상을 형용하고 그 아래에 이어서 악 자를 붙여서 또 악 쪽으로 쉽게 흘러 들어갈 수 있음을 밝힌 것이지, 인심이 본래 악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정(精)은 저 둘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살피는 공부는 본편(本篇) 가운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살핀다는 말은 곧 위태함과 은미함의 경계를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매우 은미한 것은 도심(道心)이고 매우 위태한 것은 인심(人心)입니다. 그 단서(端緖)가 나뉘는 틈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여기에 반드시 정밀하게 살피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살피는 방법은 마땅히 생각이 싹트는 곳에서부터 먼저 이(理)와 욕(欲)의 나뉨을 살펴야 하고, 참으로 그 핵심을 찾는다면 첫 장에 이른바 ‘신독(愼獨)’이라는 두 글자만 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시중(時中)과 집중(執中)의 뜻은 같은가, 다른가? 요(堯)임금이 집중을 처음 말하였고 부자(夫子)가 이어서 시중을 말했는데, 앞뒤로 두 성인이 각기 다르게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집중과 시중이 이 얼마나 좋은 제목인가. 그런데 자막(子莫)의 집중도 있고 호광(胡廣)의 시중도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여기에 이른 것인가? 자세히 분석한 말을 듣고 싶다.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집중은 심(心)을 위주로 말한 것이고 시중은 사(事)를 위주로 말한 것인데, 그 중(中)이 됨은 마찬가지입니다. 저 집(執) 자는, 성인은 집(執)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저절로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기 때문에 집중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집(執)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막(子莫)의 집(執)과 같은 것은 단지 한 가지 고정된 중(中)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이니, 참으로 집착(執捉)의 집(執)입니다. 그러나 자막은 그래도 도(道)를 배우다가 좀 어긋난 것이지만, 호광이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 것은 더욱이 논할 것도 없습니다.
程說以爲循天理底道心。循人欲底人心。朱說以爲上智不能無人心。豈可盡謂之人欲乎云云。程說中人欲云者。是指孟子所謂耳目口鼻四肢之欲耶。然則上智似不可謂無是。而朱說以人欲之欲字。屬之私慾之慾。兩賢之說。若相矛盾。此果分明劈破耶。仁浩對。道心則純是天理之發。固無議爲。而若夫耳之欲聲口之欲味。亦莫非具於是身而發於是心。則此箇欲字。卽人之所不能無者。而不可以私慾之慾一例論斷。然則程子所謂循人欲者。亦近於孟子所言。而未必是私之云也。若朱子之言則抑恐學者不察程子之意。而以循人欲底。便看作私慾。故特就人欲之走了惡一邊者而挑出上聖所不能無者。區別而發明之耳。大抵程說較闊。朱說較密。東儒言人心道心之別曰。理氣渾融。元不相離。發之者氣也。所以發者理也。安有理發氣發之殊乎。但道心雖不離乎氣。而其發也爲道義。故屬之性命。人心雖亦本乎理。而其發也爲口體。故屬之形氣。曰所以發曰發之云云。蓋謂有是理故發也。無是氣則不發也。理氣之元不相離。卽此可決。然則一說以四端屬理發。以七情屬氣發者何也。願聞的確之論。魯春對。朱夫子以情或屬心或屬性。不分屬於心性者乃其雅言。而語類所載有七情發於氣。四端發於理之說。與大全所論不同。故我東先正臣李滉主語類而爲理氣互發之說。先正臣李珥主大全而爲氣發理乘之說。末學淺見。固未敢妄論得失之如何。而第所謂發之者氣也。所以發者理也者。眞是發前人未發。而朱夫子大全之說。於是益明。但恐語類未必是朱子本旨。且語類則乃曰發於氣發於理。亦與氣發理發。語意不無差殊。蓋發於理云則近於原於性命之語。而理發云則理却有運用造作之權。纔涉運用造作。便不是理。而已屬乎氣。此所以比之於氣發理乘之說。恐欠完粹也。東儒人心道心圖。道心下書善字。與性善之善字。其義同耶異耶。人心卽聖凡之所共有。而圖本斜書人心下著惡字何也。魯春對。善之一字。固無兩項地頭。而乃若孟子之言善。就性上全體說。圖說之書善。就情之分界處而言。言善雖同而煞有全體對擧之別。人心雖是聖凡之所同有。而纔涉形氣。其流而爲人欲者。卽毫忽間耳。其發難制。其幾至危。故所以先正臣李珥圖本。必斜而書之。以形容其危殆不安之狀。其下仍著惡字。又明其易流於惡。非謂人心本惡也。此曰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所以察之工。本篇之中。當於何著手耶。錫夏對。察之爲言。卽分別危微界頭之謂也。夫至微者道心也。至危者人心也。其端緖之分。間不容髮。故學者於此。須用精察之工。而所以察之者。當從意慮之萌。先審理欲之分。苟求其要。恐無如首章所云愼獨二字矣。時中執中之義。同歟異歟。帝堯始言執中。夫子繼言時中。前後聖立言之各異何也。且執中與時中。何等好題目。而有子莫之執中。有胡廣之時中。此則緣何致此。願聞剖釋之說。載瓚對。執中主心上說。時中主事上說。而其爲中則一也。這執字聖人非有意於執而自然無過不及。故有執中之名。而實未嘗有所執。若子莫之執。只是膠守一定之中。則眞執捉之執也。然而子莫猶學道而差。胡廣之隨時俯仰。尤不足論也。以上序
[주1] 우리나라 학자의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4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주2] 자막(子莫)의 집중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자막은 양주(楊朱)의 위아(爲我)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의 중간을 정해서 그것을 중도로 삼아 지켰지만, 어느 한 곳을 고정불변으로 잡고 지키는 것도 중(中)이 아니다. 중(中)은 정체(定體)가 없으므로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