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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장 1-10절. 문안 인사와 감사와 간구
1.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옥중서신에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물론 제 2차 로마 투옥 시에는 디모데후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2.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와 빌레몬서를 쓰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1) 먼저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장로님이신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 사도에게로 보내달라는 부탁 편지로서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2) 이처럼 빌레몬서를 쓰면서,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3) 그리고, 골로새 교회나, 이웃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나, 히에라볼리 교회 등 소아시아 지방의 수많은 교회들의 어머니 교회와 같은 <에베소 교회>에 교회들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서 <에베소서>를 써 보냅니다.
(4) 이처럼, 빌레몬서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거의 며칠 사이로 주후 61년경에 쓴 편지들입니다.
(5) 그리고, <빌립보서>는 2년 후인 AD 63년경에,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받고 풀려나기 지전에 쓴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는 편지입니다.
(6) 이후로 바울은 64년에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서 소위 제 4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서바나)까지 가서 전도하고, 지중해 그레데 섬에서 그레데 교회를 설립하고, 66년 겨울에 고린도에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써보냈습니다.
AD 67년에 고린도 서북쪽 니고볼리에서 전도하고, 니고볼리 북쪽 달마누다 지방에서 디도와 함께 전도하다가, 네로 황제와 기독교 박해로 로마 군병에게 체포되어 2차로 로마 지하 감옥에 투옥됩니다.
(7) 그리고, 순교하기 6개월 전인 AD 67년 가을에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로마 옥중에서 기록하고, 이듬해인 68년 4월에 순교를 당합니다.
3. 바울이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기를 지키는 군사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네시모라는 죄수를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2) 이 오네시모는 알고 보니, 바울이 전도했던 빌레몬 장로님댁의 노예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종살이하는 것이 역겨워서 빌레몬 장로님댁의 돈을 훔쳐서 로마로 도망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도, 도적질하다가 잡혀서 바울이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에게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평생을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바울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성도였습니다.
(3) 그러나, 바울이나 빌레몬은 아무래도 떳떳하게 전도사역에 나서려면, 빌레몬 장로님에게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빚 문제도 해결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레몬 장로님에게 오네시모를 일단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고 빚진 것은 바울이 갚겠으니,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와 함께 보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쓰여진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4. 그렇기 때문에, 빌레몬서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3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감옥에 갇힌 바울은 사랑하는 빌레몬 장로님과 아내인 압비아와 아들인 아킵보 목회자에게 자상한 문안 인사와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한 가정 식구들의 이름을 모두 들어가면서 자세히 인사를 하는 것은 빌레몬서뿐입니다.
4-7절. 바울은 빌레몬 장로님의 선행에 대해서 칭찬하면서, 빌레몬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역시 다른 서신에 비해서 빌레몬의 선행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8-10절.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으나,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된 오네시모를 위해서 간곡히 간청한다고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11-14절. 오네시모를 바울의 신복으로 머물러두고 싶지만, 빌레몬의 승낙을 얻기 위해서 잠시 돌려보낸다고 말합니다.
15-17절. 오네시모가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해주고, 바울 자신을 환영한 것처럼, 오네시모를 환영해주라고 간청합니다.
18-20절. 오네시모가 빌레몬 장로에게 물질적 손해 끼친 것은 바울 자신이 갚아주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레몬 장로도 바울에게 복음의 빚 진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21-22절. 바울 자신은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면, 빌레몬의 집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말합니다.
23-24절.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인사와 축도로 편지를 마감합니다.
5. 오늘은 시간 관계상 1-10절을 가지고, <인사와 감사와 간구>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3절. 먼저 바울은 사랑하는 빌레몬 장로님과 아내인 압비아와 아들인 아킵보에게 자상한 문안 인사와 축복기도를 합니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Paul, a prisoner of Christ Jesus, and Timothy our brother, To Philemon our beloved brother and fellow worker,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Παῦλος δέσμι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αὶ Τιμόθεος ὁ ἀδελφὸς
Paul prisoner of Christ Jesus and Timothy brother,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란 문구는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인 바울은’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Φιλήμονι τῷ ἀγαπητῷ καὶ συνεργῷ ἡμῶν
To Philemon the beloved and fellow worker of us
직역하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편지하노니)’란 뜻입니다.
1. 어떤 비평가는 바울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노예가 자유 할 수 있거든 자유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기독교는 노예 제도나 사회개혁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고, 인간의 영혼을 중생시켜 변화되게 하는 것이고, 사회개혁을 거듭난 성도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사회개혁에 직접 나선다면, 순전한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고, 원래의 영혼 중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통적인 기독교는 순복음(純福音)이고,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 아닙니다.
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된 바울’이란 빌레몬서를 기록할 당시( 61년경)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28:16)
‘형제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 사도행전 16장)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고, 바울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충성하고 신임을 얻는 사람이고(디모데후서 4:16-21), 바울의 믿음의 아들인데(디모데전서 1:2), 여기서는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입장에서 바울도 사도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고, 디모데도 형제로 호칭했습니다.
‘동역자인 빌레몬’이란 호칭은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제자이지만, 오네시모 때문에 부탁하는 입장에서 빌레몬을 높여 부른 호칭이고, 실제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이고 그의 집이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o Apphia our sister, and to Archippus our fellow soldier, and to the church in your house: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καὶ Ἀπφίᾳ τῇ ἀδελφῇ καὶ Ἀρχίππῳ τῷ συστρατιώτῃ ἡμῶν
and to Apphia our sister, and to Archippus fellow soldier of us
직역하면 ‘우리의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에게 (편지하노니)’란 뜻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καὶ τῇ κατ’ οἶκόν σου ἐκκλησίᾳ·
and to the at house of you church
‘편지하노니’란 의미상 첨가한 것이나, 올바른 번역입니다.
1.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 장로의 아내였습니다.
‘함께 군사 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었는데, 골로새 교회의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를 도와서 부교역자로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17).
바울은 복음 전파를 전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0:3-5).
‘네 집에 있는 교회’란 빌레몬의 집이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뜻하고, AD 2세기까지는 개별적인 교회당 건물이 없었고, 이처럼 가정집이 교회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와 마가의 집인 예루살렘 교회(사도행전 12:12), 루디아의 집인 빌립보 교회(사도행전 16:40), 브리스길라와 아굴의 집인 에베소 교회( 고린도전서 16:19), 눔바의 집인 라오디게아 교회(골로새서 4:15) 등.
이처럼 초대교회는 가정집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신앙이 매우 뜨거웠고, 영국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도 가정교회에서 시작되었고, 종교개혁의 먼 시발점이 된 독일 진젠돌프의 경건주의 운동도 가정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Father of us and Lord Jesus Christ
‘있을지어다’도 의미상 첨가한 번역이고 잘된 번역입니다.
1.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님이시고, 압비아는 그 아내이고, 아킵보는 그 아들로서, 목회자인 에바브라가 바울을 만나러 로마 감옥에 간 사이에 임시로 골로새 교회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1)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란 빌레몬의 집이 골로새 교회로 사용되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2)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이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단독건물의 교회당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편지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문안 인사를 합니다.
(1)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용서와 사랑을 가리킵니다.
(2)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 있을 때, 마음에 참된 “평강”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참된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27)
4-7절. 바울은 빌레몬 장로님의 선행에 대해서 칭찬하면서, 빌레몬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4절.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Εὐχαριστῶ τῷ Θεῷ μου πάντοτε
I thank the God of me always
‘감사하고’(Εὐχαριστῶ)는 현재형으로서(I thank) 감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μνείαν σου ποιούμενος ἐπὶ τῶν προσευχῶν μου,
mention of you making upon the prayers of me
‘너희를 말함은’(μνείαν σου ποιούμενος)은 직역하면 ‘너희에 대한 언급을 함은’이란 뜻이고, 동사(ποιού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making) 기도할 때 항상 빌레몬을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맨 처음에 나온 명사(μνείαν)는 ‘기억, 언급’(remembrance, mention)이란 뜻이 있습니다.
5절.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ἀκούων σου τὴν ἀγάπην καὶ τὴν πίστιν
hearing of you the love and the faith
‘들음이니’(ἀκούων)는 현재분사로서(hearing) 듣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ἣν ἔχεις πρὸς τὸν Κύριον Ἰησοῦν καὶ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ἁγίους,
that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직역하면 ‘주 예수와 모든 성도들에 대해 네가 가지고 있는’이란 뜻입니다.
‘가지고 있는’(ἔχεις)는 현재로서(you have) 언제나 가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교차 대조법’(chiasmus)으로서 ‘주 예수께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네가 가지고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ὅπως ἡ κοινωνία τῆς πίστεώς σου
so that the fellowship of the faith of you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ἐνεργὴς γένηται ἐν ἐπιγνώσει παντὸς ἀγαθοῦ τοῦ ἐν ἡμῖν εἰς Χριστόν·
effective might become in acknowledgment of every good that in us for the sake of Christ
직역하면 ‘(네 믿음과 교제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안의 모든 선을 알게 하는데 효과적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알게 하고’(γένηται ἐν ἐπιγνώσει)에서 동사(γένη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입니다(might become)
1. ‘믿음의 교제’(κοινωνία τῆς πίστεώς: fellowship of the faith)란 성도들 간의 신앙적 교제를 말하면서 특별히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빌레몬 장로가 도둑질한 오네시모를 물질적으로 용서해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란 빌레몬 장로가 도둑이었던 오네시모를 용서해줌으로써 성도들 가운데 있는 선을 확실히 알게 해주라는 뜻입니다.
‘알게 하고’(ἐπιγνώσει: acknowledgment)란 단어는 원래 명사형으로서 ‘경험을 통한 확실한 지식’("contact-knowledge, experiential knowing)을 뜻합니다.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χαρὰν γὰρ πολλὴν ἔσχον καὶ παράκλησιν ἐπὶ τῇ ἀγάπῃ σου,
joy for great I had and encouragement on the love of you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희 사랑으로 내가 큰 기쁨과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얻었노라’(ἔσχον)는 부정과거로서(I had) 기쁨과 위로를 확실히 얻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ὅτι τὰ σπλάγχνα τῶν ἁγίων ἀναπέπαυται διὰ σοῦ, ἀδελφέ.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by you, brother
직역하면 ‘형제여, 이는 성도들의 마음들이 너로 인해 새롭게 됨을 얻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평안함을 얻었으니’(ἀναπέπαυται)는 완료수동태로서(have been refreshed)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 소생함을 얻게 되었다’는 뜻으로서, 원형(ἀναπαύω)은 ‘쉬게 하다, 소생하게 하다’(give rest, refresh)는 뜻입니다.
1.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 장로를 통해서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은 부요한 빌레몬 장로가 개인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구제함으로써, 성도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안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때 부르기아 지방에 지진이 있어서 빌레몬 장로가 성도들을 도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Scott by 이상근).
이처럼 빌레몬 장로가 성도들을 도왔다는 소식을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서 듣고, 바울이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을 하기 전에 빌레몬 장로가 물질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도왔다는 말을 한 것은 빌레몬 장로가 오네시모에게도 같은 사랑과 구제를 해달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모든 편지에서 먼저 감사를 표현합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1) 빌레몬 장로님은 바울 사도가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참 좋은 장로님이셨습니다.
이처럼 목회자에게 기도할 때 감사가 생각나는 성도가 있고, 어떤 성도는 기도할 때마다 불안을 주는 성도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로몬 장로님처럼 목회자가 기도할 때, 감사가 나오는 성도님들 되시고, 목회자가 기도할 때 염려 근심을 느끼게 하는 성도님들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감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빌레몬 장로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1) 물론 빌레몬 장로님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세상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성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빌레몬 장로님은 노예들을 거느릴 정도로 부유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 장로님이 사랑을 베푼 것은 특별히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한 사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빌레몬 장로님이 가련한 이웃에게 베푼 사랑의 구제 행위는 사방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3) 그런데, 바울 사도가 특별히 빌레몬 장로님의 이런 성도 사랑과 구제 행위를 언급한 것은 나중에 오네시모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특별히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빌레몬 장로님의 이러한 사랑의 행동은 불신자들에게 교회 성도들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한다는 것과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전도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1) “믿음의 교제”라는 것은 빌레몬 장로가 가난한 성도들에게 사랑의 구제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는 것은 성도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불신자들이 교회 성도들이 선한 사람들이고, 교회란 선한 단체라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3)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는 것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선한 단체인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4) 이것은 바울 사도가 빌레몬의 선행을 행함으로써, 골로새 교회가 빌레몬 장로님 덕분으로 성장 발전함을 칭찬한 것입니다.
참으로 빌레몬 장로님은 명실상부하게 골로새 교회 성장발전의 밑걸음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는 에베소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알렉산더와 후메내오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디도서 1장 10절에는 그레데 교회에는 교회를 온통 무너뜨리는 율법주의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골로새 교회에 빌레몬 장로님 같은 분이 계신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과 직분자들은 모두 빌레몬 장로님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고, 불신자들에게도 칭찬받아서, 교회를 발전시키는 귀한 직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 장로님이 이렇게 사랑과 덕을 세움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을 얻고, 목회자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1) 장로님이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면,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율법적으로 성도들을 잘못한다고 죄를 지적하고 꾸짖으면, 성도들의 마음과 교회 분위기는 불안해집니다.
대부분의 장로님들은 잘하시지만, 혹 어떤 분은 “감독”이라는 성경의 뜻을 잘못 알아서, 마치 법원의 재판관처럼 목회자를 감독하고,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사 감독관처럼 행동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감독”이란 단어의 뜻은 “예수님처럼 희생하며 섬김으로써,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성도를 보호하고 돌보라고 장로의 직분을 주셨는데, 오히려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마치 성도의 적군인 것처럼 힘들게 하는 것이 감독직인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혹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장로님들이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서, 섬기고 희생하면서, 성도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시는 모범적인 분들이심을 감사드립니다.
(2) 바울 사도는 빌레몬 장로님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장로님 되어서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는 것을 보고,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회자가 마음이 괴로운 것은 교회의 중직자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형은 서리 집사이고, 동생은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어쩌다 가난하게 살고, 동생은 부자이고 자식들도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인 동생이 늘 형을 무시하고, 형제가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 사이에도 소문이 나서, 그 교회의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인 동생이 목사의 권면을 듣고, 그래도 늘 기도하시는 분이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형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하나님이 그 교회에 복을 주시기 시작하여, 몇 년 내에 부흥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신 세상에서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도, 서로 사랑하고 평화로울 때, 부흥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서로 사랑하고, 평화로운 교회로 소문나기를 축원합니다!
8-10절.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으나,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 된 오네시모를 위해서 간곡히 간청 한다고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Διό, πολλὴν ἐν Χριστῷ παρρησίαν ἔχων
therefore, much in Christ boldness having
직역하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대함을 가지고’란 뜻입니다.
‘가지고’(ἔχων)는 현재분사입니다(having)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ἐπιτάσσειν σοι τὸ ἀνῆκον,
to order you what (is) befitting
직역하면 ‘마땅한 일로 너에게 명령하기 위하여’ (내가 담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땅한’(ἀνῆκον)은 현재분사이고(befitting), ‘명령할 수 있으나’(ἐπιτάσσειν)는 현재 부정사형으로서(to order) 앞의 ‘담대함을 갖고 있다’에 연결됩니다.
1. ‘이러므로’는 ‘성도들에 대한 빌레몬의 사랑의 소식을 들었으므로’란 뜻입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이 어려운 성도들을 많이 도왔으므로, 이번 오네시모에 대한 사랑의 부탁도 들어줄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명령할 수도 있다’는 말씀은 바울이 사도적 권위로써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명령할 수 있으나, 오히려 빌레몬에게 간청한다는 말씀입니다.
9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New American Standard Bible: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 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διὰ τὴν ἀγάπην, μᾶλλον παρακαλῶ,
because of the love, rather I exhort (you)
‘간구하노라’(παρακαλῶ)는 현재형입니다(I exhort).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τοιοῦτος ὢν ὡς Παῦλος πρεσβύτης, νυνὶ δὲ καὶ δέσμι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such one being as Paul aged, now then also prisoner of Christ Jesus
직역하면 ‘나이가 많은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어’란 뜻입니다.
‘되어’(ὢν)는 현재분사입니다(being).
1. ‘나이가 많은 바울’이란 당시 바울의 나이가 60이 넘었다는 뜻입니다.
즉 스데반이 순교할 때(주후 31년경)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가편 투표를 했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원 자격을 30세 이상이었으므로, 지금 로마 감옥에 있는 때가 AD 61년이므로, 바울은 이때 62세가량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나이가 많은데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형편입니다.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아들을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παρακαλῶ σε περὶ τοῦ ἐμοῦ τέκνου,
I exhort you for the my child
직역하면 ‘내 아들을 위하여 네게 내가 간구하노라’는 뜻입니다.
‘간구하노라’(αρακαλῶ)는 현재형입니다(I exhort).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ὃν ἐγέννησα ἐν τοῖς δεσμοῖς, Ὀνήσιμον,
whom I begot in the chains, Onesimus
‘낳은’(ἐγέννησα)은 부정과거로서(I begot) 과거에 확실하게 낳은 것을 가리키고, 이것은 비유적으로 바울이 옥중에서 전도해서 결신시킨 것을 가리킵니다.
1. 원문에는 ‘오네시모’란 단어가 맨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옥중에서 낳은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네게 간구하노라. 그는 오네시모다’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란 이름이 매우 불쾌하게 기억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조심스럽게 오네시모란 이름을 맨 나중에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라고 극히 존귀하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믿음의 아들’이라고 존귀한 호칭을 했습니다. (딤전 1:2, 딛 1:4)
그런데 도둑질 하고 도망가서 감옥에 갇힌 오네시모를 바울이 ‘내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은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빌레몬 장로에게 전도하여 구원받게 한 은인이고, 또 사도의 권위로 올바른 일을 명령할 수도 있고, 복음 진리에 비추어서 마땅한 일로 명령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고 간청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1)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공의의 법칙’이 아니고, ‘사랑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면, 우리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고, 모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2) 그러므로, 가장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는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법대로 한다면서, 서로 싸우고 정죄하는 것은 가장 큰 계명을 어기는 불법인 것입니다.
(3) 바울 사도는 늘 이러한 사랑의 원칙에 따라서 살았기 때문에, 믿음의 아들이요 순종 잘하는 제자인 빌레몬 장로에게 명령하지 않고, 간청하면서 부탁을 했습니다.
빌레몬 장로는 바울 사도에게 참 좋은 제자였습니다.
교역자가 어떤 성도에게는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할 만한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형편상 부탁을 드려야 할 처지인데도, 그 사람의 신앙 인격상 도저히 부탁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 장로님은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부탁을 할 수 있는 참 좋은 장로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역자가 마음 놓고 주의 일로 부탁드릴 수 있는 믿음 좋은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4) 디모데후서 1장을 보면,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하여서, 주님의 날에 긍휼을 얻게 해달라는 바울 사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직분자들께서도 빌레몬 장로님처럼, 오네시보로처럼 목회자가 축복기도를 해드릴 수 있는 좋은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드디어 바울 사도는 빌레몬 장로님에게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본론적인 간청을 합니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바울 사도는 마치 부모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하는 것처럼 “나이 많고 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가 감옥에서 낳은 믿음의 막내 아들을 위하여 큰 아들같은 빌레몬 너에게 부탁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간청합니다.
(2) 물론 도적질 하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는 것과 그 위에 노예를 이제는 주님을 믿는 형제로 대접해달라는 부탁과 오네시모를 바울 사도를 섬기도록 보내달라는 어려운 부탁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어렵게 부탁을 꺼내고 있습니다.
(3)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배울 점은 사제지간처럼 친밀한 바울과 빌레몬 사이이지만, 친할수록 더욱 예의를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 장로의 입장과 자유의사를 충분히 존중하여 간청했습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고, 자원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시고 희생하셔서 우리가 믿도록 만드셨지, 두들겨 패서 강제로 새롭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들도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빌레몬 장로님처럼 성도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불신자들에게 좋은 소문이 펴져서, 교회를 부흥 발전시키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의 아들이자 제자인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로 명령할 수 있으나, 인격을 존중하고 자유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명령 대신에 간청하는 것을 본받아서,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계신 분들일수록 어린 성도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니다!
그래서 행복한 우리 교회가 되고, 모든 성도들의 가정과 자손들이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