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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1-5절. 디모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함
1. 바울 사도가 본서를 기록한 역사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63년에 네로 황제의 재판을 받고, 로마 감옥에서 무죄 석방됨.
64년에 당시 땅끝으로 인식된 서바나(스페인) 전도.
65년에 지중해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항해하면서 그레데 섬에서 전도하고, 그레데 교회를 설립한 후 디도를 목회자로 세웠음(딛 1:5).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함.
에베소 교회에 가서 디모데를 목회자로 세움(딤전 1:3).
빌립보 교회에 들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나 고린도 교회에 도착함( 66년).
고린도에서 디모데전서 기록하고, 디도서를 기록해서 보냄 (66년 겨울 보냄).
67년에 고린도의 서북쪽 지역인 니고볼리로 가서 전도함.
67년에 디도와 함께 니고볼리의 북쪽 지역인 달마디아(달마누다)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됨(딛 3:12).
로마 지하 감옥에 투옥됨.
67년 가을에 최후로 디모데후서를 씀 (딤후 4:6-8).
68년 4월에 순교함.
2. 디모데전서와 디도서가 전형적인 목회서신인 데 반해, 디모데후서는 목회자 디모데에게 대한 교훈이 있지만(2:1-4:8), 목회자 디모데 개인에게 보낸 개인적인 목회서신이기도 합니다. (4:9-22)
1장은 문안 인사와(1-2절), 디모데 개인에 대한 감사와 권면(3-14), 바울의 개인 신상 사정(15-18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3. 로마의 네로 황제는 64년에 로마 도성에 불을 질러놓고, 이 화재를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67년에 전도하다가 잡혀서, 로마 감옥에 다시 투옥됩니다.
이 때 갇힌 로마의 감옥은 로마 광장 부근의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석방될 희망이 없고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어서 한번 오기를 당부했습니다(4:9).
이 서신은 유일하게 바울과 함께 있는 누가를 통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고 합니다. (11, 21절)
그리고 이전에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싸웠는데(행 15:39), 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4:11)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the promise of life in Christ Jesus,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Παῦλος, ἀπόστο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Paul, apostle of Christ Jesus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by will of God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κατ’ ἐπαγγελίαν ζωῆς τῆ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according to promise of life of the in Christ Jesus
본 절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오로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직접 부르심에 의해서 된 것이고, 바울 자신의 노력이나 기존의 사도들에 의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 부르심에 의해 사도가 된 사실은 갈라디아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 1:17-19.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란 예수님 믿고 성령님 따라 사는 성도에게는 현세에서도 생명을 누리고 내세에 영생을 누리게 하신다는 약속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요한일서 5:11-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2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o Timothy, my beloved son: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Τιμοθέῳ ἀγαπητῷ τέκνῳ·
to Timothy beloved child
동사가 없으나 올바른 번역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χάρις, ἔλεος, εἰρήνη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καὶ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grace, mercy, peace from God Father and Christ Jesus the Lord of us
동사가 없으나 올바른 번역입니다.
1. 디모데에게는 육신적인 부모가 있었으므로(행 16:1), 바울이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의 전도로 디모데가 예수님을 믿었고, 그 후로도 바울이 디모데를 신앙적으로 돌보고 있으므로,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인 셈입니다.
2. 다른 바울 서신에서는 모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했으나, 오직 디모데전후서에서만 ‘긍휼’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긍휼’(ἔλεος)이란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지옥 갈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 구원의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는 마음의 참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누리게 됩니다.
3절.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thank God, whom I serve with a clear conscience the way my forefathers did, as I constantly remember you in my prayers night and day,
하나님께 감사하고
Χάριν ἔχω τῷ Θεῷ,
thank I have to the God
‘감사하고’(Χάριν ἔχω)에서 동사(ἔχω)는 현재형으로서(I have) 현재 계속 감사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ᾧ λατρεύω ἀπὸ προγόνων ἐν καθαρᾷ συνειδήσει,
whom I serve from forefathers with pure conscience
‘섬겨오는’(λατρεύω)은 현재형으로서(I serve) 현재도 섬기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λατρεύω)은 ‘섬기다, 예배하다’(serve, worship)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ὡς ἀδιάλειπτον ἔχω τὴν περὶ σοῦ μνείαν ἐν ταῖς δεήσεσίν μου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as unceasingly I have the of you remember in the prayers of me night and day
직역하면, ‘밤낮 기도들 가운에서 쉬지 않고 저를 생각하면서’란 뜻입니다.
‘너를 생각하여’에서 동사(ἔχω)는 현재형으로서(I have) 현재도 계속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청결한 양심’이란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한 양심’을 가리키며(이사야 1:25),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란 바울이 유대교인들과 심한 갈등 관계를 갖고 있지만, 바울의 신앙과 기독교는 구약의 신앙에 굳게 근거해 있음을 밝히면서, 같은 유대교 가정에서 자란 디모데에게도 그들의 신앙이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구약 조상들과 선지자들의 신앙에 기초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바울이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한다는 것은 바울이 밤낮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기도 중에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신앙적 부성애로서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육신의 자녀에 대한 참사랑도 밤낮 기도하면서 쉬지 않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자녀를 위해서 쉬지 않고 늘 기도하시기 바라며, 친척과 친구들과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사랑을 해가시기 바랍니다.
4절.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longing to see you, even as I recall your tears, so that I may be filled with joy.
너 보기를 원함은
ἐπιποθῶν σε ἰδεῖν,
longing you to see
‘원함은’(ἐπιποθῶν)은 현재분사로서(longing) 현재 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원형( ἐπιποθέω)은 강한 욕망(strong desire)을 가지고 원하는 것(yearn for)을 뜻하고, ‘보기를’(ἰδεῖν)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ee) 반드시 꼭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μεμνημένος σου τῶν δακρύων,
having recalled your the tears
‘생각하여’(μεμνημένο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recalled)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회상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눈물’(δακρύων)이 복수형(tears)인 것은 디모데가 많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ἵνα χαρᾶς πληρωθῶ,
so that joy I may be filled with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πληρωθῶ)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I may be filled with) 내가 틀림없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사도행전 20장 4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서 걷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7명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디모데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밀레도 해변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기도하면서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 목회자로 시무했는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디모데의 눈물이 있는 진실한 신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로마의 2차 투옥 중에 곧 최후를 앞두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를 보고자 했습니다.
즉 바울이 마지막 생애를 마감하면서 영적인 참 아들 디모데를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am mindful of the sincere faith within you, which first dwelt in your grandmother Lois and your mother Eunice, and I am sure that it is in you as well.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ὑπόμνησιν λαβὼν τῆς ἐν σοὶ ἀνυποκρίτου πίστεως,
remembrance having taken of the with in you unhypocritical faith
직역하면 ‘네 안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기억을 가졌는데’란 뜻입니다.
‘가졌는데’(λαβὼ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과거에 확실히 갖고 있었던 것을 뜻합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 안에 신실한 믿음이 있다는 기억을 확실히 가졌던 것을 뜻합니다.
‘거짓이 없는’(ἀνυποκρίτου)이란 단어는 부정의 접두어(ἀ: un)와 ‘위선적인’(νυποκρίτου:hypocritical )이란 단어의 합성어로서, ‘거짓이 없는, 신실한‘(unhypocritical, sincere)이란 뜻입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ἥτις ἐνῴκησεν πρῶτον ἐν τῇ μάμμῃ σου Λωΐδι καὶ τῇ μητρί σου Εὐνίκῃ,
which dwelt first in the grandmother of you Lois and the mother of you Eunice
‘있더니’(ἐνῴκ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dwelt) 과거에 확실히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πέπεισμαι δὲ ὅτι καὶ ἐν σοί.
I have persuaded now that also in you
‘확신하노라’(πέπεισμαι)는 완료형으로서(I have persuaded) 과거부터 지금까지 확신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디모데가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유대교적 율법주의 혼합 신앙을 가지지 않고, 순수한 복음 신앙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디모데가 순수한 복음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외조모 로이스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로, 딸 유니게를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성도와 혼인시킨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로이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유대교를 가지고 있었다면, 딸 유니게를 결코 헬라인과 혼인시키지 않고, 유대인과 결혼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이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로 딸 유니게를 헬라인 신자와 결혼시켜서(행 16:1) 순수한 복음 신앙을 전수하게 하고, 그 아들 디모데에게도 순수한 복음 신앙으로 길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유대교적 율법주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복음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의 순수한 복음 신앙을 기억하고, 디모데를 영적 아들로 기르고, 임종 직전에도 디모데를 사랑하여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2. 여기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것이 32년경이고, 14년 후인 47년경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인 27년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27년과 47년 사이 20년 동안에 로이스가 딸 유니게를 헬라인 성도와 결혼시켜서, 바로 디모데를 낳아서, 47년경에 디모데가 17세 정도 되었는데, 연대적으로 좀 무리가 되는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유대교인들의 외식주의가 아니고, 구약성경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가졌는데, 아들 디모데에게 순수한 신앙을 전수해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3. 본 절에서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순수한 신앙을 가정에서 전수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학교에서 순수한 신앙을 갖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 학교에서 순수한 신앙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순수한 신앙을 전수받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신앙 교육입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딤후 3:15)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부모님에게서 기도 생활을 배우고,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찬송하는 것을 자연히 익히고,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이웃을 돕고 선한 생활 하는 것을 보고 배우고,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익혀서 배우는 것은 가장 좋은 유산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모가 기도 않고 TV만 보는 것을 보고 배우고, 부모가 성경 읽지 않고, 찬송도 않고, 부모끼리 매일 싸우는 것을 보고, 이웃과도 싸우는 것을 보고, 부모가 거짓말하고, 교회 생활과 헌금생활도 않는 것을 보고 자라면, 그 자녀는 신실한 신앙을 갖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 특히 자녀들 앞에서 신실하고 진실한 신앙 생활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기도와 말씀으로 잘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디모데처럼 훌륭한 자녀들이 되고,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