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귀로하는 자의 꿈
정홍순(시인)
채호자 시인의 『또 하나의 둘』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너무 기쁘다. 특별히 회갑을 기념하여 시와 수필을 묶어 그동안 삶 속에 품어져 있던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책을 펴는 사람들은 한 가족의 앨범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신앙과 추억과 인간의 그리움, 사랑이 시와 수필을 빌어 꾸밈없이 진솔한 속내를 드러낸다.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빗겨나지 못하게 잡아매고 있다.
여러 차례의 백일장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은 자신의 길을 조용히 반추하며 곱게 여미는 듯 아름다움이 묻어있기도 하다.
채호자 시인이 보여주는 삶의 편린들은 단순한 따름으로 끝나지 않는 ‘길 위의 영성’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다. 신학자 데이빗 보쉬(David Bosch)는 바울의 영성에 대해서 “바울의 영성은 확정된 것이나 소유나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영성이다. 그것은 발전하고, 깊어지고, 새로워지고 성숙하는 영성이다. 고정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나가는 영성이다. 진정한 최후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도착점이 없었다. 그 영성은 수도원의 영성이 아니라 길을 가는 영성이었다.”고 함같이 정태를 동태로 바꾸어가는 행동하는 영성적 삶이라는 것이다.
가령 「동경」에서는 “언젠가 밀려가 버린/물결 위엔/그리운 이야기들/적셔져 있으리라고...//물빛을 담고/반짝이는 모래알들이/꼬옥 누군가의 눈빛만 같아/난 가만히 눈을 감는다.”하였듯이 그리운 이야기들이 물결 위에 적셔져 있으리라고 가만히 눈을 감는 따뜻한 응시가 시인의 삶 속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물결(파도)처럼 쉼 없이 다가가는 시적 꿈의 세계가 심어져 있다.
채호자 시인은 빛이 담아져 있는 눈을 동경하기에 그의 눈은 빛으로 시리기도 하여 눈을 감지만 마음의 눈이 있기에 성찰의 깊이는 항시 그 내면 깊은 곳에 있다. 「귀로」의 시편에서 보여주듯이 “눈 시린 빛으로/제게 오시는 이...//잊으며 오라는 당신/긴 한숨 도리질 하여도/떠나 있으려/눈 감아도/문 열어 내게 오시는 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고요히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기에 전진하는 속도감은 그림자처럼 언제나 그 길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채 시인의 길은 ‘흐름’위에 나 있다. 「바람의 고향」, 「장강의 연인」, 「회상」, 「어머니의 강」 등에서 보였듯이 바다가 그 길이고, 냇물이 그 길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표면적 흐름에 마음을 두지 않고 “깊은 속 강물 같던 어머니” 그런 강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둘』에서 시인이 가는 길은 ‘돌아감’이라는 수행적인 득의가 단연 돋보인다. 늙으신 어머니를 안고, 새로운 그루터기를 끌어안고, 시린 가슴 끌어안고, 작은 새의 봄은 실한 나무에게서 또는 늘 푸른 상록의 그늘을 기도하며 가을은 어쩜 시인이 두는 돌아감의 열매이거나 이별의 준비를 알리는 꿈의 결실로 내놓는 것이다.
“오늘은/은행 털러 가는 날/챙 깊은 모자 눌러쓰고/장갑에 마스크/...//고향 떠나오며/두고 온 감나무 은행나무/떠난 주인 기다려/옛 집터 여전히 지키고 있다.//...가을마다 은행나무/노랗게 익은 속내 조바심치며/우릴 기다린다.”는 「은행을 털다」와 “여보...!/그가 그냥 가고 있네요.”의 「가을」에서 우리는 시인의 이순(耳順)으로 보는 법을 엿보게 된 것이다.
이제 시인이 끌어안고 고뇌할 수 있는 것은 순례적, 혹은 선교적인 ‘길 위의 영성’이 ‘성숙한 영성’으로 예수께서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심 같이 추구되어질 것이다.
“꿈을 꾸었다고 하신다. 목사님은/구름이 흘러가고/바람이 몰려가는 들판에서/그분께/고백했노라 하셨다.//...저 아프리카 인종차별의 여인이/저 먼 곳 르완다 배고픈 아이의/작은 떨림이 나와 연결된/유기체적 나의 잘못이라고...//...사랑의 바이러스/승법번식으로 되돌아온답니다.” 「승법번식」에 두는 시인의 ‘성숙한 영성’은 사랑, 그 완결한 정점에 귀로의 귀착점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눈물과도 같아서 물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기만 하다.
『또 하나의 둘』은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이기도 하다. ‘하나의 둘’은 마치 사람인(人)자와 같은 형상적 이미지로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회복하는 ‘치유 영성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의 둘’은 삶의 방식이며,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걸음이 어찌 장난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오로지 감사한 마음으로 가는 길을 다 갈 뿐이다. 추수감사절에 낭송한 「No pain No gain」을 읽으며 시인이 무엇으로 감사를 드렸는지 알 수 있다. 고통을 통한 진정한 삶의 감사다. 채호자 시인의 시와 수필을 통하여 몇 가지 ‘영성’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속에 추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영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시」인의 따뜻한 말로 마음의 창을 연다.
<책 속에서>
꽃샘 추위에
매화꽃 얼어버릴까
비닐로 싸매어주고
가난한 시인 목사님
추운 서재엔 불을 지폈는가...
메일로 따끈한 차 한 잔 보냈더니
...
바람이 불어
아픈 바람이 불어
창을 닫고 기도하노라
답이 와
아프지 마십시오
그러나 시인은 아퍼야
뼈아픈 글 나오겠지요
답하고
내 마음 시려오기 전
이불을 덮었다.
―「연민」 전문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컴퓨터에 또 다른 세상 있어
내 맘대로 오가며
좋아하는 시인
날마다 그의 샘터에 가서
토끼처럼 물만 먹고 나온다.
다람쥐처럼
도토리 안고 나오듯
그분의 시상까지 안고 나온다.
나의 서재
선반에 올려놓곤
좋아라 어쩔 줄 몰라.
내 손으로 도시락 싸주던 하숙생이
목사님 되고 교수 되고
시인이 되었으니
이 보다 더 행복할까?
―「보람」 전문
나는 아직
이별을 준비하지 못하는데
된서리 보내시며
이 몸을 비우라 하십니다.
벅차 오르던 기쁨
바람에 기대어 출렁인 것을
이제는 때가 되었다 하십니까?
잎새마다 수놓은
찬연한 젊음
저려오는 아품에
단풍으로 물들고
긴 겨울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에
수궁하는 긴 한숨
나는 아직
내일을 거부할 수 없어요.
―「나목 2」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