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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기원
새해에도 믿음의 항해를 허락하신 주님,
주님의 말씀과 은총을 찬미합니다.
어둠에 갇혀 살던 묵은해를 벗고,
빛으로 오신 주님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열어주옵소서.
우리 삶에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처럼 행복하기
마태 5장 1-12절
성경 안에는
설교자로서 설교하기가 두려운 말씀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말씀을 피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소위 산상보훈
혹은 산상수훈이라는 별명을 가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산에서 특별히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산상수훈에 관한 내용은
제가 설교하기에 퍽 부담스럽고
두려워지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설교하려고 하면
'내가 과연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을 사람이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박해를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았기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정말 나는 온유한가?'고 자문할 때
금방 대답이 안 나옵니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에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종종 산상보훈의 말씀을 읽지만
그 때마다 이 말씀은
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듯한
충격을 주고 자신감을 꺾어 놓습니다.
너무나 수준이 높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목사가 부담스러운 말씀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마음놓고 전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다 보니 37년이 넘도록
산상수훈 가운데서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몇 번 설교를 하긴 했지만
전체를 놓고 강해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산상수훈을
본격적으로 묵상하면서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없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성도들과 함께
산상수훈의 성찬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매주마다 산상수훈을 놓고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동산으로
여러분과 함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바로 앞에 있는 4장 25절에 보면
갈릴리에서도 오고, 데가볼리에서도 오고,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도 오고,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서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몰려온 그들의 신분이
대충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물론 지체 높고 잘 사는 사람들도
조금은 끼어 있었겠지만
4장 24절로 보면
대부분은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사람들이요,
어떤 면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이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자들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장 1절에 보면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앉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간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말씀은
너무 평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의미에는
상당히 무게가 실려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것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유대 나라 랍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가르칠 때 앉아서 했습니다.
가르치는 선생의 권위를
앉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명강의를 하는 소문난 교수들은
앉아서 강의를 합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에 가서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치심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는지,
얼마나 무게가 있었는지
듣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7장 28절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왜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7장 29절입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없을 만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저희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적으로 가르치면
아무래도 감동이 적고
또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은
권위가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직업적으로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렸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랜 것입니다.
앉아서 가르치신 주님의 그 태도에는
이와 같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의 이 권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비록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앉으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 앞에
우리는 압도되어야 하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담아 들으면
마음이 아무리 캄캄한 사람이라도
하늘에서 빛이 비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권위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그 말씀이 깊이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자리잡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막연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먹듯이
마음 속 깊이 담았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말씀이 내 기쁨이 되었나이다.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고백한 그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팔복의 내용을 한데 묶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팔복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복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여덟 가지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여덟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자신의 성품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성품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성품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팔복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만이
닮아갈 수 있는 주님의 성품이요,
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따라서 이 여덟 가지를
개별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온전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이 여덟 가지는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
내 것으로 받아 들여졌을 때
내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성품이요,
거룩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팔복이 예수님 자신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8복을 가만히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덟 가지의 칼라를 가진
수천 개의 작은 돌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자이크 초상화 같습니다.
모자이크 그림이라든지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돌들이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얼굴을 모자이크에 가까이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돌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자이크로부터
몇 걸음 뒷걸음질해서 전체를 보면
이 작은 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팔복도 이와 똑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말씀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각에도 그 나름대로 풍성한 은혜가 있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팔복 전체를 보면서 마음에 담고 생각하면
어느새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에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애통함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얼굴에는 화평이 있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말씀을
권위 있게 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 나처럼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요,
예수님을 닮는 자요,
결국에는 예수님과 똑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팔복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를 배우고 따르고 닮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고 계시지만
예배를 마치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다 잊어버리고
또 일주일을 살아갈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러지 맙시다.
집에 돌아가서 팔복의 말씀을 앞에 놓고
매일 매일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며 묵상하십시오.
주님을 닮아가는 내가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있고,
과연 이 말씀대로
내 자신이 주님처럼 빚어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그분을 더욱 닮게 됩니다.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 사람은
그분의 사진을 벽에다 걸어 놓고
하루에 한 두 번씩 쳐다보면서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하고
그분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닮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고는
손 씻듯이 다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살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매일 묵상하시면
그 말씀이 나의 성품을 심는 씨앗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 가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너희도 행복해야 된다.'는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투는 감탄사입니다.
우리말 번역인 '복이 있나니'에도
감탄의 뉘앙스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 이 말은 완전히 감탄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행복이여!'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화평케 하는 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 아는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탄과 감격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마카리오스'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행복을 가리켜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 속에는
'내가 누리는 행복을
너희도 항상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는
주님의 심정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도 나처럼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속삭임이
이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나처럼 행복할 수 있느니라.' 하는
주님의 마음이
말씀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분이 없었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박해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만큼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령의 행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그 행복을 누가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큰 소리를 쳐야 이깁니다.
온유하면 손해 봅니다.
그런데 온유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못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행복인 것입니다.
이 행복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면
앞뒤 가리지 아니하고 매달립니다.
마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을 통해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행복을 실제로 손에 넣은 자가
이 세상에서 몇이나 됩니까?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좇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솔로몬까지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나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전도서가 선언한 것처럼
'헛되다'로 귀착된다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의 길이 어디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애쓰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행복의 순도는 더 높아지고
그 농도는 더 진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의 원천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권세 있게 말씀합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 아니다.
행복은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내가 다스리는
너희 마음에서 행복을 찾으라.'
행복을 찾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하셨던 것처럼
나도 심령이 가난해 지면
예수님의 행복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성격이
예수님의 성품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행복은 소유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심령이 가난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애통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긍휼이 여기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심령에 왕으로 모시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우리 모두의
행복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그림들을 그리고 싶습니까?
어린아이가 잠을 푹 자고
눈을 살짝 떴는데
자기를 쳐다보고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너무나 행복해서 씩 웃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 같은 장면입니다.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처럼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의 성격을 하나하나
나의 성격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면
행복해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세상이 모르는 행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앗아가지 못하는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행복의 원천 되시는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을 알고
그분을 배울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집에 가셔서 팔복의 말씀을
날마다 한번씩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면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
예수님의 성품이 이랬다면
나도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여덟 가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품성이
나 자신의 품성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 집니다.
악을 쓰는 세상에서
내가 온유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악착같이 모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틈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만족이 내 안에 있다면
세상에 이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보다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록 나는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심정 때문에
내 마음에 신비스러운 행복이 자리를 잡는다면
세상에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시간 귀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배우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갈수 있음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닮아가면
예수님이 마음에 간직하셨던 그 행복을
우리의 행복으로 소유할수 있다는
소망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진리를 깊이 깨닫는 기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정말 심령이 가난함으로 행복할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게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온유함으로써 행복할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감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지의 축복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고
산상수훈을 통하여
점점 더 깨달아지는 은혜에 축복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주님, 2025년 첫 주일을 출발합니다.
올해도 하늘나라 창고를 여시고
때 묻지 않은 정한 시간을
삶의 그릇에 가득 차도록
분배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몸과 시간과 물질만이 아닌
삶의 전부를 드립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어느 자리에 있든지
주님의 향기를 전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함께하여 주시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지켜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과 생명이
주님 손에 있으므로 안심하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영광을 보는
즐거움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세상 끝날까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와 동행해 주시며 붙잡아 주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새롭게 시작된 2025년을
주님을 본받아 살기로 결심하고
세상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힘차게
출발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