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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행장行狀
선생의 성은 송씨(宋氏)이고, 휘는 익필(翼弼)이며, 자는 운장(雲長)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고려의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의 후예이다. 고조는 송근(宋根)이고, 증조는 송소철(宋小鐵)이다. 할아버지는 송린(宋璘)으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아무 관직을 지낸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첨추군(僉樞君) 송사련(宋祀連)을 낳았다. 이분이 선생의 아버지이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필(仁弼)이고, 차남은 부필(富弼)이고, 그다음이 바로 선생이며, 운곡거사(雲谷居士) 한필(翰弼) 계응(季鷹)이 막내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갑오년(1534, 중종29) 2월 10일 묘시(卯時)에 태어났다. 7, 8세의 나이 때 이미 붓을 들어 시를 지으면 시어(詩語)가 문득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장성해서는 동생인 운곡(雲谷)과 함께 발해(發解)에서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다. 얼마 뒤에는 서울에 살면서 벗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아래로 가 숨어 살았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죽은 뒤에 당화(黨禍)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우계(牛溪)와 율곡 두 현인을 원수처럼 보는 간사한 자들이 선생에게로 노여움을 옮겼다.
병술년(1586)에 화가 드디어 일어났다. 이에 형제들과 더불어 도망쳐 자취를 숨기고서 원수들을 피하였다. 그러자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상소를 올려 그 원통함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으며, 또한 공의 어짊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자급(資級)을 바쳐 속신(贖身)하게 해 주고, 명곡산장(鳴谷山長)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정해년(1587)과 무자년(1588)에도 중봉이 연이어 상소를 올려 논하였는데, 무자년의 경우에는 또 “송익필과 서기(徐起) 등은 모두 장수(將帥)의 재주가 있다.”라고 하였다.
기축년(1589) 겨울에 상이 선생에게 관가(官家)로 나와서 자수(自首)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이른바 “경인년(1590) 봄에 조여식(趙汝式 조헌)이 상소를 올려 나를 구한 데 연루되어 내 스스로 대방(帶方)에서 초수(楚囚)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시를 지어 읊은 가운데 “천리 밖의 상소 어찌 내게 곤욕 끼치었나 임금 마음 막힘없어 저울처럼 공평하다네.〔千里狂章那困我 聖心無滯若衡平〕”라는 구절이 있다. - 이 시의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이때 들으니 조여식이 나를 구하기 위해 올린 상소는 장방평(張方平)이 소식(蘇軾)을 구제해 준 상소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
신묘년(1591) 봄에 장차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이기에 또다시 호남(湖南)으로 갔다. 이보다 앞서 기축년(1589) 여름에 중봉이 이미 유배를 당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또 멀리 유배되었다. 선생은 모두 시를 지어 상심을 토로하였다. 이해에 당금(黨禁)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 홍산(鴻山)에서 초수가 되었다. 이때 중봉이 또 상소를 올리면서 백의(白衣)를 입고 도끼를 등에 지고 나가 대궐 앞에 엎드려 있으면서 죽여 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는 붓을 들어 기록하기를 “조여식과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근 10년이나 되었는데, 상소 가운데에서 매번 나에 대해서 말하였으므로 이런 처벌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1월에 희천의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송강이 당시에 강계(江界)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는데,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근래에 또 구봉공이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는데, 앞으로 또 어떠한 재앙과 괴변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7월에 왜적들을 피하여 명문산(明文山)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희천 고을에 있는 산이다.
계사년(1593) 9월에 은혜를 받아 방환(放還)되었다. 희천 고을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두 현인의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이는 대개 한훤당이 유배되어 와 있을 때 정암이 이곳으로 책을 싸 들고 와 공부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옛 현인들의 유적(遺蹟)을 보고는 감개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하고 돌아왔다.
갑오년(1594) 가을과 겨울에 저새(楮塞)의 산속에다 몸을 붙이고 우거하였는데, 둘째 형인 묵암공(默庵公)이 죽어 곡하였다. 그 뒤에 또 동생인 운곡공(雲谷公)이 죽어 곡하였는데, 연월(年月)은 미상이다.
병신년(1596)에 또 면천(沔川)의 마양촌(馬羊村)에 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진려(金進礪)의 장사(莊舍)에서 살았는데, 우계가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김씨 집에 기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 김씨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입니다. 후생들이 풍모를 듣고 와서 배우는 자가 아주 많습니다. 늘그막에 떠돌다가 이런 사람을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로부터 마양촌에 산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기해년(1599) 8월 8일에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인해 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당진(唐津)의 북면(北面) 원당동(元堂洞)에 장사 지냈는데, 아내인 창녕 성씨(昌寧成氏)와 같은 언덕이다.
성씨(成氏)는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에 태어나서 구봉 선생이 죽기 한 해 전인 무술년(1598, 선조31)에 졸하였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취방(就方)이다. 측실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취대(就大)와 취실(就實)이며, 딸 하나는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선생이 저술한 것 가운데에는 〈태극문(太極問)〉 1권, 〈예문답(禮問答)〉 1권, 〈여우율변론서척(與牛栗辨論書尺)〉 1권이 있어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시고(詩藁) 1권은 문인인 죽서(竹西) 심종직(沈宗直)이 세상에 간행하였다.
당시에 문하로 나온 선비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났고, 수몽(守夢) 정엽(鄭曄), 약봉(藥峯) 서성(徐渻), 대학사(大學士)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관찰사(觀察使) 강찬(姜燦), 처사(處士) 허우(許雨) 및 나의 외할아버지이신 참판(參判) 김반(金槃) 공은 혹은 문학(文學)으로, 혹은 환업(宦業)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아, 선생께서 살아 계셨던 시대는 지금 이미 멀어져서 그 평생의 본말을 찾아볼 길이 없다. 그사이에 일찍이 선배들이 기록한 바를 보니, 그 기록에 이르기를,
“기축년 12월에 선조대왕께서 형조에 전교하기를 ‘사노(私奴) 송익필 형제는 조정에 대한 원망을 쌓아 기필코 일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조헌이 상소를 올려 진달한 것이 모두 이 사람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니, 이는 몹시 통분한 일이다. 더구나 종으로서 주인을 배반하여 도망치고서 나타나지 않으니, 더욱더 놀랍다. 잡아 가두고서 끝까지 추문(推問)하라.’라고 하였다.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다. 송사련은 안당(安瑭)의 얼속(孼屬)으로서 안처겸(安處謙)이 모변(謀變)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를 성립시켜 상을 받고 첨지(僉知) 벼슬을 하였는데, 그의 여러 아들이 모두 재예(才藝)가 있었다.
송익필은 처음에 시(詩)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어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홍(白光弘), 최립(崔岦),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다.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발해(發解)에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교유가 매우 성대하였다.
사관(史官) 이해수(李海壽) 등이 말하기를 ‘송사련이 이미 죄인이 되어 상으로 받은 직이 해면되었으니, 그의 아들은 곧 얼손(孼孫)이다. 법을 무릅쓰고 과시(科試)에 응시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는, 동료와 의논하여 정거(停擧)하고 금고(禁錮)하였다. 이산해 등이 풀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송익필이 다시 이이ㆍ성혼(成渾)과 상종하며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통투(通透)하고 논의가 영발(英發)하였다. 문호를 열어 문도를 가르치니 종학(從學)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으며, 호를 구봉(龜峯)이라고 칭하였다. 송익필은 스스로 고상하게 표방하면서 명경(名卿) 사대부(士大夫) 들과 대등한 예로 교제하고 나이대로 서열을 정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삼사(三司)가 이이를 공격할 때를 당하여 성혼이 상소하여 이이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기(怒氣)를 격동시켜 도리어 손상할까 염려하였고, 또 스스로 ‘산야(山野)의 천사(賤士)로서 물러나는 것을 의리로 삼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시사(時事)에 대해 극렬하게 논하는 것이 어떤지 모르겠다.’라고 여겼다. 이에 송익필에게 편지를 보내어 물으니, 송익필이 답하기를 ‘존형(尊兄)은 성군(聖君)의 지우(知遇)를 받아 이미 조정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어찌 시사에 대해 두루 논하여, 그동안 받은 특별한 은명이 형식적인 것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지 않습니까. 비록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자처하려고 하지만, 지금 이미 나아갔습니다. 그러니 시위(施爲)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불가함을 보고 난 뒤에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성혼이 그 말에 따랐다.
이로부터 거듭 조정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가 되었고, 안씨(安氏)의 자손이 그에 따라서 송사(訟事)를 일으켜, 결단코 천적(賤籍)으로 환속(還屬)시킨 다음에 그를 죽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이에 송익필 등이 모두 도망하였는데, 이산해와 정철 등이 서로 숨겨주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떠도는 말이 상에게 보고되었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송익필이 관가에 나아가 자수하니, 아우 송한필과 함께 극변(極邊)으로 유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鄭仁弘) 등이 옳지 못한 사람과 교유했다는 내용으로 성혼과 이이를 비난하였다.” 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송익필이 화를 당하게 된 전말을 잘 알 수가 있다. 그 뒤 인조(仁祖) 을축년(1625, 인조3)에 문원공 김장생과 수몽 정엽 및 여러 동문이 상소를 올려 송익필의 천적을 씻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상소를 해당 조에 내렸으나, 일이 마침내 유야무야되고 말았으며, 그 뒤에는 드디어 이에 대해서 다시 말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삼가 선배들의 공정한 평론(評論)을 살펴보면 “천품(天稟)이 아주 높았으며, 문장(文章)도 역시 높았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촌(象村)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한 말이다. 또 “타고난 자질이 아주 투철하고 영리하였으며, 이치를 분석하는 것이 아주 정미하고 치밀하여, 다른 사람으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한 말이다. 그리고 상촌 신흠이 송익필의 시에 대해서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시의 소재를 성당(盛唐)에서 취해 왔으므로 그 소리가 맑았고, 시의 뜻을 격양(擊壤)에서 취해 왔으므로 그 말이 조리가 있었다. 화평하고 관대한 지취(旨趣)를 궁박하게 떠돌거나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는 즈음에도 잃지 않았고, 한가롭게 노니는 즐거움을 풍화(風花)와 설월(雪月) 사이에서 마음껏 누렸다. 그러니 때에 편안하고 순리대로 살아 애락(哀樂)에 동요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가령 ‘버들 짙어 연무는 방울이 지려 하고, 못 고요해 백로는 날기를 잊었네.〔柳深煙欲滴 池淨鷺忘飛〕’라고 한 구절을 보면, 그 시격(詩格)이 뭇사람을 뛰어넘고 있는데, 한갓 그 맑은 점만이 귀하게 여길 만할 뿐 아니라, 이치로 따져도 저절로 수긍이 간다.”
하였다.
당시의 여러 명현(名賢) 가운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과 같은 분은 구봉에게 지어 준 시편(詩篇)에서 이르기를,
전에 내가 운장 그대 만났던 거는 / 曩遇雲長初
실로 내게 있어서 큰 행운이었네 / 實爲芸所幸
깊은 우물 긷는 데에 뜻이 있어서 / 有意於汲古
그대에게 두레박줄 빌렸었지 / 從君借脩綆
그대 방촌 사이에는 현황이 있어 / 玄黃方寸間
추로조차 아주 멀진 아니하였지 / 鄒魯亶非迥
여탕 이에 내가 그대 위해 잡았고 / 鑢鐋我須執
사석은 또 그대가 날 위해 갈았네 / 沙石子須磨
사사로운 정이 혹시 일어날 때면 / 私情如或起
비록 곁에 있더라도 되레 멀었네 / 在邇還在遐
하였다.
중봉 조헌은 칭하여 말하기를, “노년에 이르러서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다. 이에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량(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가르치는 즈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다.” 하였으며, 고청(孤靑) 서기는 그에게 와서 배우는 자들에게 말해 주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송구봉을 보면 된다. 비단 송구봉이 제갈공명과 비슷할 뿐만이 아니라, 바로 제갈공명이 송구봉과 비슷한 것이다.” 하였는바, 여러 노선생으로부터 크게 추중받는 바가 이와 같았다.
대개 일찍이 듣건대, 선생은 풍의(風儀)가 높고 단정하였으며, 언론(言論)이 시원스럽고 깨끗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선생의 얼굴을 접하고 선생의 말을 들었을 경우에는 모두 마음속으로 취하여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북저(北渚) 김류(金瑬) 상공(相公)이 어렸을 때 자부심이 강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산사(山寺)에서 우연히 선생을 만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열흘이 넘도록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뒤에 자신이 장상(將相)을 겸하게 되었을 때에 말하기를 “나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구봉에게서 직접 받은 가르침에 힘입은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이 처음에는 자기 형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에게 충고하기를 “형은 무엇 때문에 송모(宋某) 같은 자와 가까이 지내십니까? 내가 그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줄 것입니다.”라고 하니, 영원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송모를 모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필시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홍경신이 영원군의 집에서 선생을 만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섬돌 아래로 내려가 맞이하였는데, 예를 올리는 것이 아주 공경스러웠다. 선생의 언론과 풍의가 족히 사람들을 감동하게 함이 바로 이와 같았다고 한다.
아, 선생께서는 정밀하고 드넓은 학문과 통달하고 투철한 식견과 나라를 빛낼 만한 문장과 세상을 경륜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서도 문벌(門閥)에 막히고 당화(黨禍)에 시달려, 여기저기를 떠돌고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느라, 그 뜻을 조금도 펴지 못하고서, 끝내는 궁박하고 초췌한 가운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찌 우리 사문(斯文)의 액운이 아니겠으며 지사(志士)들이 개탄할 바가 아니겠는가. 오직 당대에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혹시라도 논찬(論撰)하고 저술(著述)하여, 그 도학의 실제를 오늘날과 후대에 환하게 보여 주어, 영원토록 전해지기를 도모한다면, 거의 괜찮을 것이다.
중봉이 병술년(1586, 선조19)과 정해년(1587)에 올린 두 상소의 일단 및 갑자년(1624, 인조2)에 올린 신원소(伸冤疏)를 아울러 아래에다가 첨부하여 참고하는 데 대비한다. 갑인년(1674, 현종15) 계추(季秋)에 후학 이선(李選)은 삼가 찬술한다.
병술소(丙戌疏)
송익필(宋翼弼)과 같은 자는 비록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노년에 이르러서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제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량(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생원시나 진사시에 오른 자도 기꺼이 그의 문도가 되었습니다. 그중에 김장생(金長生)과 허우(許雨) 같은 자는 의를 행하는 행실이 경외(京外)에 저명하였고, 강찬(姜燦)과 정엽(鄭曄) 같은 자도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전례(典禮)로 말하면, 사람을 가르쳐 성취시킨 일이 있으면 으레 관직을 상으로 주는 법이 있고, 중국의 제도로 말하면, 어진 이를 쓰는 데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이이가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의도는 단지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송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허물로 돌립니다.
이산해(李山海)의 경우에는 송익필에게 말하기를 “김응남(金應南)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된 것을 사람들은 그대가 청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대가 만약 이이가 죽고 난 뒤 곧바로 절교하였더라면, 이러한 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발(李潑),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은 또 송익필 형제가 정철(鄭澈)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것을 미워하고, 또 자기들의 단점을 의논할까 의심하여, 몰래 해당 관리를 사주해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없애고 불법으로 환천(還賤)시킨 다음, 곤장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70여 명도 모두 안씨(安氏)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업을 파산(破産)하고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혹자는 이들이 경외(京外)에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고 하고, 혹자는 이들이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면 70여 명 모두가 머지않아 구렁텅이에서 죽어 해골이 될 것이고,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면 70여 명이 장차 수적(水賊)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 성은(聖恩)은 하늘과 같아서 살려 주고 길러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에 사형의 죄에 해당되는 자라도 또한 모두 삼복(三覆)을 시행하여, 형벌에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널리 공의(公議)를 수렴하여 살려 주는 길을 찾습니다. 심지어 새와 송아지가 슬프게 울어도 성려(聖慮)를 다하였고, 타락(駝酪)의 진상을 감하여 세상의 초목이 모두 생기를 띠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70여 명의 목숨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누구 하나 애석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이 관할하고 있는 공주(公州)에는 공암정사(孔巖精舍)가 있고, 서천(舒川)에는 명곡정사(鳴谷精舍)가 있습니다. 공암정사에는 양인(良人) 서기(徐起)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일찍이 이중호(李仲虎)에게 배워 학문이 넓고 행실이 온전한 탓에, 인근에서 그에게 배운 자 중에는 더러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 있고, 가르치기가 쉬운 선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곡정사는 특별히 주장하는 스승이 없습니다. 지난해에 신이 한번 지나다가 보니, 그곳 생도들 가운데 아주 영특하여 가르칠 만한 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루 돌아다니면서 강의하다 보니, 크게 진보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송익필이 아직 구렁텅이에서 굶어 죽거나 수적에게 죽기 전에 신의 자급(資級)을 거두어 안씨(安氏) 집안에 주고서 그를 속신(贖身)하고 그 죄를 용서하며 행인과 어부들로 하여금 온 나라 안에 수소문하여 찾게 한 다음, 혹시라도 그가 나오면 명곡서원의 산장으로 삼아,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잘 가르쳐 이끌어 주게 했으면 합니다. 그럴 경우 어리석은 신이 10년 동안 제독(提督)을 맡은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정해소(丁亥疏)
반드시 송하(宋賀)와 같이 이이(李珥)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송익필의 옥사(獄事)를 다스리게 하여 법을 농락하고 법전을 잘못 적용해, 결단코 그로 하여금 온 가족을 거느리고 떠돌면서 도망치게 한 뒤에야 그 뜻에 시원하게 여겼습니다.
아, 이이의 한평생은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뜻으로 삼았는바, 이 무리들을 저버린 바가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지금 조야(朝野)에서는 이이를 옳다고 하는 자는 늙은이나 젊은이를 막론하고 모두 화를 당하고 있으며, 이이에 대해 비난하는 자는 어리석거나 불초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승진되어 의기양양해하고 있습니다. ……
갑자신원소(甲子伸冤疏)
- 앞에 나온다. -
行狀
先生姓宋。諱翼弼。字雲長。礪山人。高麗貞烈公松禮之後。高祖根。曾祖小鐵。祖璘。直長。娶順興安氏某官某之女。生僉樞君。是爲先生之考。娶延日鄭氏。生四子一女。長諱仁弼。次諱富弼。次卽先生。而雲谷居士翰弼季鷹。其季也。先生以嘉靖甲午二月初十日卯時生。年七八歲。已下筆語輒驚人。及長。與弟雲谷俱發解高等。旣已不樂於京都朋儕間。遯居于高陽之龜峯山下。自甲申李栗谷旣歿。黨禍益深。壬人之仇嫉牛,栗兩賢者。移怒於先生。丙戌歲禍遂作。乃與兄弟藏蹤避仇。重峯趙文烈公上章。亟訟其冤。且言其賢。請納其資級。以贖其身。以爲鳴谷山長。丁亥戊子。重峯連疏論之。而戊子則又言宋某徐起等俱有將帥之才。己丑冬。上有嚴命詣官自首。卽先生所云庚寅春。坐趙汝式上章救我。自作楚囚于帶方者也。賦詩有千里狂章那困我。聖心無滯若衡平之句。自注曰時聞趙汝式之救已。甚於張方平之疏云 辛卯春。將有士林之禍。又適湖南。前此己丑夏。重峯已被謫。至是松江又遠竄。先生皆有詩以傷之。是歲聞黨禁。自作楚囚于鴻山。時重峯又上章。白衣挾砧斧。伏闕請死。先生聞而筆記曰。與汝式不相見近十載。以章中每稱鄙人。故有此 按。及壬辰正月。到熙川謫所。松江時於江界圍置中。與人書云。近又龜公來泊不遠處。未知將來又作何等災怪也。七月。避賊入明文山。卽熙川地也。癸巳九月。蒙恩放還。郡有寒暄,靜庵兩賢祠。蓋寒暄被謫時。靜庵負笈於此也。先生感慨昔賢遺跡。操文以祭而歸。甲午秋冬。寓身於楮塞之山中。哭仲兄默庵公。其後又哭弟雲谷。年月未詳 丙申。又居沔川之馬羊村金僉樞進礪莊舍。牛溪寄書曰。備知寄居金家。主人仁賢。後生向風來學者衆。晩暮漂泊得此人。可謂幸矣。先生自是棲遲馬羊村凡數年。至己亥八月初八日。以疾卒于寓舍。壽六十六。葬于唐津北面元堂洞。與配昌寧成氏同原。成氏以嘉靖癸卯生。前一年戊戌卒。先生有一子。曰就方。側室有二子。曰就大。曰就實。一女適某。先生所著有太極問一卷禮問答一卷與牛栗辨論書尺一卷。藏于家。詩藁一卷。則門人竹西沈宗直。刊行於世。一時及門之士。指不勝屈。而沙溪金文元公,愼獨齋金文敬公。以道學名。守夢鄭公曄,藥峯徐公渻,畸翁鄭大學士弘溟,姜觀察燦,許處士雨曁吾外王父參判金公諱某。或以文學。或以宦業。俱顯於世。噫。先生之世。今已遠矣。其平生本末。無所 尋逐。間嘗見前輩所記。其言曰。己丑十二月。宣祖大王傳于刑曹曰。私奴宋某兄弟。蓄怨朝廷。期必生事。趙憲陳疏。無非此人指嗾云。此極痛惋者。況以奴叛主。逃躱不現。尤爲駭愕。捉囚窮推。宋某。祀連之子也。祀連以安瑭孼屬。告安處謙謀變成獄。得賞僉知。其諸子皆有才藝。翼弼初有詩名。與李山海,崔慶昌,白光弘,崔岦,李純仁,尹卓然,河應臨等。號八文章。與弟翰弼。俱發解高等。交遊甚盛。史官李海壽等。以爲祀連旣爲罪人。禠其賞職。其子乃孼孫也。不當冒法赴擧。與同僚議停擧以錮之。山海等求釋不得。某復 從李珥,成渾。講論道學。識見通透。論議英發。開門授徒。學者日盛。號稱龜峯某。高自標置。與名卿士大夫抗禮序齒。不悅者亦多。當三司之攻李珥也。成渾欲上疏伸珥。而恐激怒反傷。且自以山野賤士。以退爲義。忽極論時事。未知如何。以書問于某。某答曰。尊兄受聖君知遇。旣陟朝端。則何不歷論時事。使前後殊命。不歸於虛文耶。雖欲以不出自處。今旣出矣。宜有所施爲。見其不可。然後可以歸來也。渾從之。自是重爲朝論所嫉。安氏子孫。從而起訟。決還賤籍。方欲殺而報讐。某等皆逃。李山海,鄭澈等。互相藏匿。得不死。至是有飛語聞于上。故有是命某詣官自首。與翰弼俱竄極邊。由此。鄭仁弘等以交遊匪類。咎成,李矣。於此可見其得禍源委也。後仁祖乙丑。文元公與守夢及諸同門陳疏。請滌賤籍。章下該曹。而事竟寢。後遂無再言者。謹按先輩之公評。則曰天稟甚高。文章亦高云者。象村申文貞公之言也。曰天資透悟。剖析精微。人所不及云者。澤堂李公之言也。而象村之又其論詩。則以爲材取盛唐。故其響淸。義取擊壤。故其辭理。和平寬博之旨。不失於羈窮流竄之際。優遊涵泳之樂。自適於風花雪月之間。其庶乎安時處順。哀 樂不能入者矣。又曰。如柳深煙欲滴。池淨鷺忘飛之句。度越諸人。非徒淸葩可貴。理亦自到。至若當時名賢如李土亭。則其所贈詩篇曰。曩遇雲長初。實爲芸所幸。有意於汲古。從君借修綆。玄黃方寸間。鄒魯亶非迥。鑢鐋我須執。沙石子須磨。私情如或起。在邇還在遐。重峯則稱之曰。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牛,栗皆作畏友。常如諸葛之於法正。且其敎誨之際。善發人意思。感奮自立。徐孤靑則語其學者曰。爾輩欲知諸葛之何狀。須見宋龜峯也。非但龜峯似諸葛。卽諸葛似龜峯也。其大爲諸老所重如此。蓋嘗聞之。 先生風儀俊整。言論灑落。人之一接其面而聽其言者。莫不心醉起敬。北渚金相少負氣。不下於人。遇先生於山寺。爲撤業聽其言。閱旬不去。及其身都將相。語人曰。吾之得至今日者。繄當日親炙於龜峯是賴也。洪參議慶臣。初諫其兄寧原君可臣曰。吾兄何可與宋某友乎。吾見宋某。必辱之。寧原笑曰。爾能辱宋某乎。必不能也。後慶臣遇先生於寧原宅。不覺降階以迎。將禮甚敬。其言論風儀之有足動人者乃如此云。噫。以先生精博之學。通透之識。華國之文。經濟之才。限於門地。阨於黨禍。流離竄謫。不能少行其志。而終於窮悴以歿世。豈非斯文之厄而志士之所可慨耶。惟當世立言之君子。儻有以論撰著述。使其道學之實。昭揭於今與後。以爲不朽圖。則亦庶幾焉。重峯丙戌丁亥兩疏一段及甲子伸冤疏。幷附之於左。以備參攷云爾。歲甲寅季秋。後學李選。謹述。丙戌疏乃若宋翼弼。雖是祀連之子。而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足蓋父愆。珥,渾皆作畏友。常如諸葛之於法正。且其敎誨之際。善發人意思。感奮自立。爲生進者亦克有徒。如金長生,許雨。行義著于京外。姜燦,鄭曄。俱有英發之才。以祖典言之。訓人有成。例有賞職。以華制言之。立賢無方。亘古以達今。珥之力通庶類。其意只在求賢以補闕。不是私一翼弼。而人多歸咎於珥。山海則謂翼弼曰。應南之爲濟牧。人言由君之囑也。君若自珥之死。卽與絶交。則可無此患。潑,洁,惟讓。又憎其兄弟與澈素厚。疑議已短。陰囑該官。盡廢四朝良籍。而枉法還賤。至使幾斃杖下。而幷子孫七十餘口。咸畏安氏報仇。破家奔竄。無所於歸。或云散丐京外。或云船飄海島。散丐則七十餘口。擧將爲溝中骨矣。船飄則七十餘口。擧將爲水賊之殲矣。嗚呼。聖恩如天。無物不春。至如大辟者。亦皆三覆。刑之少有疑端。必使廣收公議。以求生道。至有禽犢哀鳴。亦軫聖慮。至減酡酪之進。區中草木。皆有生意。而獨此七十餘口。迫之死域。而無一人愛惜也。臣之所管公州有孔巖精舍。舒川有鳴谷精舍。孔巖則有良人徐起者。曾學於李仲虎。學博而行全。傍人就學者或中生進。多有易敎之士。而鳴谷則別無主張之師。頃歲臣嘗一過。多見其開爽可敎者。而今此遍講。一無大進益者。臣意以爲宋翼弼及其不死於溝壑水賊。納臣資級。以與安氏。贖其身貰其罪。使道人漁子。遍招于邦域。儻其至也。則以爲鳴谷山長。因其才而善導之。則厥有成效。必勝於愚臣之十年提督矣。丁亥疏 必使如宋賀之爲珥所棄者。俾治宋獄。骪法枉典。決使其百口飄亡。然後快於其意。嗚呼。珥之平生。惟以憂國憂民爲志。何負於此輩。而今之朝野。是珥者無老無少。無不中禍。非珥者無愚無不肖。無不超揚云云。甲子伸冤疏在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