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한화(竹窓閑話)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옛집은 서울 서소문동(西小門洞)에 있었다. 뜰에 늙은 노송나무가 있는데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난리를 치른 뒤에 서울 안에 있던 큰 나무들이 남은 것 없이 다 없어졌건만, 유독 이 나무만은 그대로 있어 푸른빛이 하늘에 닿으므로 원근에서 모두 쳐다볼 수 있었다. 이 나무가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에 갑자기 꺾여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그해 여름에 정인홍(鄭仁弘)이 박여량(朴汝樑)ㆍ박건갑(朴乾甲) 등을 시켜서 소를 올려 퇴계를 헐뜯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러자 사림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8도의 유생들이 모두 대전 아래에 모여들어 소를 올려 그 원한을 풀려 했으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송나무가 꺾인 변고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징험된 것이다.
옛 예(例)에 성균관에서는 해마다 인일(人日)이나 다른 절일(節日)에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이때 정부(政府)ㆍ관각(館閣)의 당상들이 모두 모여 의자에 걸터앉으면 모든 유생들은 뜰에서 절을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지관사(知館事)가 되고서, 비로소 참고관(參考官)인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뵙는 예법인데, 본보기가 되는 곳에서 유생을 이렇게 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유생은 읍(揖)을 하고 모든 재상들은 의자 앞에 서서 받아서, 선비를 우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하여, 이것이 지금까지 정한 법이 되었다.
1) 인일人日 : 음력陰曆 정월正月 초이렛날로 人勝節, 人慶節, 人口日, 人七日 등으로도 불린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어서 이날에는 외출을 삼가고 근신하며 일하지 않고 논다. 梁 宗懍의 <荊楚歲時記>를 보면, “음력 정월 초이렛날은 인일이다.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이고, 비단실이나 금박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병풍에 붙이거나 머리에 꽂는다. 또 花勝을 만들어 서로 전하고, 높은 데 올라 시를 짓는다.”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날 화승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花勝은 오색 비단을 잘라 만든 부인의 머리 장식을 말한다.
2) 절일節日 : 한 철의 명절名節로 곧 인일人日, 삼짇날, 단오端午, 칠석七夕, 중양重陽 등. 조선 시대에, 성균관과 지방의 유생을
대상으로, 명절名節인 인일절人日節ㆍ상사절上巳節( 삼월 삼짇날)ㆍ칠석절七夕節ㆍ중양절重陽節에 실시實施한 과거科擧. 의정부 議政府, 육조六曹 등의 당상관堂上官이 성균관成均館에서 제술製述로써 인재人材를 뽑았다.
竹窓閑話
退溪先生舊宅。在於京中西小門洞。庭有老檜長數十丈。兵火之後都下喬木蕩然無餘。獨此樹猶存。蒼翠磨空遠近瞻望。辛亥春忽然摧折。人咸怪訝。其夏鄭仁弘嗾朴汝樑朴乾甲輩。上疏詆毀退溪無所不至。士林齊憤。八方儒生坌集闕下。投疏伸雪。豈非斯文之大不幸。折檜之變於是始驗矣。舊例成均館每年人日。及他節日試製儒生。政府館閣堂上齊會。皆踞椅子。諸生入庭行拜。盧蘇齋守愼爲知館事。始議於參考大臣曰拜下乃臣見君之禮也。首善之地待儒生不可如是太慢。今宜令儒生行揖。諸宰下椅子立受。以視優禮待士之意。左右皆曰可。至今遂成定規。
첫댓글 날마다 귀중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일? 절인?설명이 필요해요.
모르는 게 넘 많아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하여 별도의 각주를 달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