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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서문(瓛齋集序)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옛날 고정림(顧亭林) 선생이 “문장이 경술(經術)과 정리(政理 정치)의 중대한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지을 것이 못된다.”라고 하였다. 경술이라는 것은 자기를 수양하는 근본이고, 정치라는 것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이다. 군자의 도는 자기를 닦고 백성을 안정시킬 뿐이니, 이 두 가지를 버리고 문장을 논한다면 어찌 문장을 도를 꿰는 도구〔貫道之器〕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장은 도에서 나오고 도는 문장을 통해 드러난다. 비유하자면 초목 가운에 꽃이 피는 것은 반드시 열매가 있으니, 열매가 없는 꽃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 인문(人文)의 융성이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시대만 한 때가 없었다. 3백 년 지나고서야 박환재(朴瓛齋) 선생을 얻었으니, 선생은세상에 이름을 떨칠 시기를 만나 큰일을 해낼 재주를 드날려, 그 학문은 아들ㆍ신하ㆍ아우ㆍ벗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의리와 분수로부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경전과 역사, 시원과 근본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축적과 소양이 두텁고도 깊었다. 그러나 스스로 문인이라 자처하지 않았고, 글을 지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목적이 있어서 지은 것이지, 한가로이 노닥거리는 실속 없는 말이 아니었다. 매양 생각이 나면 붓을 들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막힘없이 쏟아내었으므로 법도와 기준을 세세히 지키지 않고도 저절로 문장을 이루었다.
치란흥망의 도와 백성들이 겪는 병폐의 근원을 논한 글은 반드시 자세히 반복하고 간절히 말하여 명백하고 통쾌하여 세상 사람들의 혼미함을 깨우쳤다. 전례(典禮)에 대해 논한 글은 근거가 정밀하고 상세하며 체재가 엄격하였다. 교제한 것으로 말하면 정성과 신뢰로 서로 사귀되 자주적인 체통을 잃지 않았다. 크게는 국가를 다스리고 논밭을 경영하는 제도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과 고고(考古), 의기(儀器)와 잡복(雜服) 등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연구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규모가 방대하고 종합한 이론이 치밀하여 모두 경전을 보좌하여 선왕의 도를 천명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문장을 지으면 조화롭고 전아하여 광채가 났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아름답게 꾸며내는 모습과 괴롭게 고생하는 태도가 없었다. 이따금 마치 강물이 쏟아져 천리를 흐르듯이 일렁일렁 끝없이 펼쳐지면서도 여파가 잔잔히 흘러 굽이마다 문채를 이루었으니, 근본을 갖춘 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시는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을 가장 좋아하여, 크고 성대한 시편이 때때로 기이한 광채를 찬란히 드러내기도 했으니, 아마 그 정수를 깊이 터득해서일 것이다.
아! 선생은 불행히 군자의 도가 사라지고 소인의 도가 자라나는 시대를 살면서 지위는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현인으로 등용된 실상이 없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펴지 못했고, 물러나서는 자연에 은거할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답답하고 무료하여 늘 원안(袁安)의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그러나 문사(文辭)에 드러난 것은 담담하고 화평하여 원망과 비방의 뜻이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차마 이 세상을 난세로 치부하고서 자기 몸만을 깨끗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는 지극히 충후(忠厚)함이다.
연재(淵齋) 윤공(尹公)은 정확한 논평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군자이다. 그가 선생의 영전에 올린 제문에 “선비에게 깊은 학문이 있으면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고, 재주와 식견이 있으면 앉아서 간언하고 일어나서 행할 수 있으며, 명예와 지위가 있으면 국정을 도와 경륜을 펼 수 있다. 그런데 끝내 평소 온축한 학문을 펴서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한갓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쓸쓸한 몇 편의 글을 통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탄식하게 만든다.”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불우함을 애석해하고 운명을 탄식한 자가 한량이 없었으니, 또한 공을 위해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임금을 보좌할 만한 공의 재주는 정심(精深)한 학술에 뿌리를 두었고 넓은 식견과 도량으로 두루 이룬 것이다. 평소 소용없는 빈말은 하려 하지 않아, 반드시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말뿐이었으니, 비유컨대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어도 문밖에 나서면 바퀴 폭이 들어맞는 것과 같았다.
오직 백성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을 강구하고, 제도와 계책을 탐구하며, 허물어진 풍속에 대해 걱정했으므로, 그 문장은 찬란히 세상을 경륜할 훌륭한 솜씨였고, 화려한 수식을 좋아하지 않아 자랑하고 과시하는 태도를 부끄럽게 여겼다. 문장의 구상이 맑고 원대하여 봉황이 날개를 치는 듯하였고, 음절(音節)은 툭 트여 큰 종이 울리듯 하였으며, 밝고 깨끗하여 속세를 초월한 것이 마치 큰 규벽(圭璧)을 종묘 안에 진열한 것과 같아서, 자연히 귀중하게 되어 바라보면 미덥고 바른 덕이 사방으로 퍼져 광채를 숨길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는 삼례(三禮)에 관통하고 백가와 역사서를 널리 종합하여 긴요한 핵심에 통달해 신운(神韻)의 소재를 터득한 때문이다.
가정에서 보고들은 것에 연원을 두어 순정함으로 귀결되었고, 중국의 명유(名儒)들을 참작하여 평이하고 진실함에 힘썼으며, 원구(圓球)를 제작하여 육합(六合 천지사방)을 포괄하였고, 잡복(雜服)을 고찰하여 여러 학설을 절충했으며, 〈벽위편(闢衛編)〉의 발문은 해외의 사정을 멀리서 헤아린 것이 마치 촛불이 물건을 비추듯 하였다.
젊은 날의 식견이 이처럼 크고 정밀하였으므로 초야에 묻혀 있을 때는 곤궁함을 다 맛보았으면서도 그 궁핍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조정에 진출해서 현달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교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공이 한가히 거처하면서 깊이 생각에 잠겨 벽을 돌며 방황하던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 내가 알 수 없으나, 간절히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애달픈 충정이 자주 안색에 드러났으니, 수계(繡啓)ㆍ핵주(覈奏)ㆍ조의(祧議)ㆍ연자(燕咨)를 살펴보면 밝게 읽을 수 있고, 우상(右相)을 사직하며 올린 소(疏) 1편은 개연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남은 뜻이 있어 읽는 사람을 더욱 감격하게 만드니, 이것이 어찌 세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 이 소의 원본은 잃어버렸다. -
윤공은 또 말하기를, “근세의 쓸모 있는 인재 중에 환재만 한 학식을 지닌 자가 누구인가? 환재가 죽은 후에 환재만 한 자가 다시 누구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후세에 환재를 이을만한 자가 없음을 상심한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선생의 아우 온재(溫齋) 상서(尙書)가 유고를 수집하여 손수 편찬하여 보관하였는데, 이제 온재공도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며 선생의 도를 즐겼으나 지혜가 선생을 알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유집을 편찬하고 다듬는 일은 모두 온재가 옛날에 했던 것을 따르되, 중복된 것은 산삭하고 윤공의 말씀을 엮어 책머리의 서문으로 부치니 선생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마란다.
신해년(1911) 중추에 문인 청풍(淸風) 김윤식(金允植)이 삼가 서문을 짓다.
[주1] 환재집 서문 : 이 글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신해년(1911) 8월에 지은 서문으로 《운양집(雲養集)》 권10에도 실려 있다. 《환재집》은 1913년 보성사(普成社)에서 신연활자로 간행되었다.
[주2] 고정림(顧亭林) …… 하였다 : 고정림은 명말청초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를 가리킨다. 강남(江南) 곤산(昆山) 사람으로 자는 영인(寧人), 정림은 그의 호이다. 성리학과 양명학이 공리공담을 일삼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주장하였다. 박학을 기반으로 경학, 사학으로부터 음운, 금석에까지 창신구실(創新求實)을 추구하여 청대 고증학의 기초를 닦았다. 인용된 구절은 청나라 전조망(全祖望, 1705~1755)의 《길기정집(鮚埼亭集)》 권12 〈정림선생신도표(亭林先生神道表)〉에 나오는 말이다.
[주3] 도를 꿰는 도구〔貫道之器〕 : 당나라 이한(李漢)이 쓴 〈창려집서(昌黎集序)〉에 “문장이란 도를 꿰는 도구이다.[文者, 貫道之器也.]”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주4] 세상에 이름을 떨칠 : 원문은 ‘명세(名世)’인데, 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나서 왕자(王者)의 보좌가 될 현인을 가리킨다. 맹자가 말하기를 “오백 년 만에 반드시 천하에 왕도정치를 펼 사람이 나오니, 그 사이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자가 나온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5] 군자의 …… 자라나는 : 원문은 ‘군자도소 소인도장(君子道消小人道長)’인데, 《주역》 〈비괘(否卦) 단(彖)〉에 나오는 말이다. “안에는 음의 기운이 있고 밖에는 양의 기운이 있으며, 안에는 유약함이 있고 밖에는 강건함이 있으며, 안에는 소인이 있고 밖에는 군자가 있으니, 소인의 도는 자라나고 군자의 도는 사라진다.[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內小人而外君子, 小人道長, 君子道消也.]”라고 하였다.
[주6] 원안(袁安)의 눈물 : 국사를 근심함을 비유한 말이다. 원안(?~92)은 후한(後漢) 여양(汝陽) 사람으로 자는 소공(邵公)이다. 그는 화제(和帝) 때 사도(司徒)로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여, 조회에서 임금을 뵐 때나 대신들과 국가 일을 말할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주7] 연재(淵齋) 윤공(尹公) : 윤종의(尹宗儀, 1805~1886)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연(士淵), 호는 연재,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철종 때 개성부 도사, 김포 현령, 함평 군수, 청풍 부사 등을 지냈다.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경학, 예학, 농사, 천문 등에 밝았다. 환재가 젊은 시절부터 학문적으로 가깝게 지내 평생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다.
[주8] 삼례(三禮) : 《예기》, 《주례(周禮)》, 《의례(儀禮)》를 가리킨다.
[주9] 원구(圓球)를 …… 포괄하였고 : 환재가 평혼의(平渾儀)를 제작한 일을 가리킨다.
[주10] 잡복(雜服)을 …… 절충했으며 : 환재가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를 편찬한 일을 가리킨다.
[주11] 벽위편(闢衛編)의 발문 : 환재의 〈벽위신편평어(闢衛新編評語)〉를 가리킨다. 환재의 벗 윤종의(尹宗儀)가 서양세력의 조선 침투를 우려하여, 이에 대비하는 벽사위정(闢邪衛正)의 방편을 제시하고자 7권 5책으로 이루어진 《벽위신편(闢衛新編)》을 펴냈는데, 환재가 이 책을 논평하여 붙인 글이 그것이다.
[주12] 수계(繡啓)ㆍ핵주(覈奏)ㆍ조의(祧議)ㆍ연자(燕咨) : 수계는 어사의 장계를 가리키는 말로 《환재집》 제7권에 실려 있는 〈경상좌도암행어사서계(慶尙左道暗行御史書啓)〉를 가리킨다. 핵주는 《환재집》 제6권에 실려 있는 〈우부승지위소후자핵소(右副承旨違召後自劾疏)〉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조의는 사당에 신주를 옮겨 모시는 논의를 가리키는 말로 《환재집》 제6권에 실려 있는 〈헌종대왕부묘시진종대왕조천당부의(憲宗大王祔廟時眞宗大王祧遷當否議)〉를 가리킨다. 연자는 《환재집》 제7권에 실려 있는 7편의 자문(咨文)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13] 온재(溫齋) 상서(尙書) : 박규수의 아우 박선수(朴瑄壽, 1823~189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온경(溫卿), 호는 온재이다. 1864년(고종1) 증광 문과에 장원하고, 경상도 암행 어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瓛齋集序[金允植]
昔顧亭林先生有言。文不關於經術政理之大。不足爲也。夫經術者。修己之本也。政理者。安民之本也。君子之道。修己安民而已。舍是二者而論文。豈足謂貫道之器乎。故文從道出。道以文見。譬如草木之有華者必有實。無實之華。君子耻之。本朝人文之盛。莫如明宣之際。垂三百年而得朴瓛齋先生。先生膺名世之期。挺有爲之才。其學自子臣弟友所當行之義分。達之於天德王道經經緯史元元本本。其蓄積素養之具。旣厚且深。然未甞以文人自命。如有所作則必有爲而發。非汗漫無實之言也。每意到下筆。沛然而達其所欲言。不規規於繩墨尺幅而自然成章。其論治亂興亡之道。生民利病之源。必反覆剴功明白痛快。警破時人之昏聵。論典禮則根据精詳。體裁謹嚴。語交際則誠信相與而不失自主之體。大而體國經野之制。小而金石考古儀器雜服等事。無不硏究精確。實事求是。規模宏大。綜理微密。皆可以羽翼經傳。闡明先王之道者也。故其爲文也。舂容典雅。發輝有光。使人易解。而無雕繪粉澤之容艱難勞苦之態。往往如江河之一瀉千里。瀾汗無際。而餘波淪漣。曲折成文。非有本者。而能如是乎。於詩最好韓文公。鴻章鉅篇。時發其光恠陸離之狀。葢亦深得其神髓也。嗚呼。先生不幸而處君子道消小人道長之時。雖位居鼎鼐而無用賢之實。進而不能展匡濟之策。退而不能遂邱園之志。鬱悒無聊。常掩袁安之涕。然其見於文辭者。冲融和平。無怨誹之意戚戚之色。葢不忍寘斯時於亂世而自潔其身也。此忠厚之至也。淵齋尹公。世之篤論君子也。其祭先生文曰士有邃學可以尊主而庇民。才識可以坐言而起行。名位可以參贊而彌綸。竟不得展素蘊流闓澤。而徒使後人想像咨嗟於寂寥之遺編。葢自古惜其不遇嘆其有命者何限焉。亦夫何恨乎公哉。公之佐王之才。本之於學術之精深。濟之以識量之包恢。平生不欲爲無益之空言。必可以措諸實。譬如閉門造車。出門而合轍。惟民彝物則之是講。制度謨猷之是究。風壞俗敗之是恤。故其文章。皭然爲經世
之鉅工。不喜藻飾。耻爲矜夸之容。意像淸遠。如鳳之翽。音節踈暢。如鍾之舂。通明雅潔。絶塵超凡。如弘璧大圭。陳于廟朝之內。自然貴重。望之有孚尹旁達不可掩之光氣。葢其貫穿三禮。博綜子史。透關解綮。得其神韵之所在。淵源乎家庭聞見而歸之醇正。斟酌乎中州名儒而務爲平實。製圓球而包羅六合。攷雜服而折衷羣說。跋闢衛之編則懸料海外之情狀如燭照物。少日見識。其大且精者如此。故處之蓬蓽。備甞艱窶。而不見其窮。進于巖廊。歷敭華顯。而不見其泰。其燕居深念繞壁彷徨者。吾未知其何事。而惓惓憂愛之苦衷丹誠。屢發於眉睇之外。觀乎繡啓覈奏祧議燕咨。朗然可讀。而辭右相一䟽。慨然有追報之餘意。益使人感激。此豈世俗之所可窺測者哉。此疏本見失 尹公又曰近世有用之才。學識如瓛齋者爲誰。瓛齋旣沒之後。如瓛齋者更復爲誰。葢傷後人之無可繼者也。先生易簀之後。先生之弟溫齋尙書蒐輯遺稿。手自撰次而藏之。今溫齋公亦已沒矣。允植蚤遊先生之門。悅先生之道。而知不足以知先生。玆於遺集編摩之役。悉遵溫齋之舊。而刪其繁複。係之以尹公之言弁諸卷首。庶幾無負先生之志也歟。辛亥仲秋。門人淸風金允植謹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