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양선생 약전〔雲養先生略傳〕
연안延安 이빈승李斌承
선생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윤식(允植), 자는 순경(洵卿),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그의 선조 중에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은 도학을 창도하였고,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은 사업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선생은 을미년(1835, 헌종15)에 태어났다. 선대의 공덕을 품고 태어나 가학에 젖어들었다.
16세에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두 선생을 따라 공부하였다.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처음 관직에 나아가 침랑(寢郞)이 되었다. 40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사림(詞林)과 대각(臺閣)을 차례로 거치며 승진하였다. 47세에 영선사(領選使)로서 천진(天津)에 갔다가 이듬해 조정에 돌아와 기무처에 들어가 공무를 처리하였다. 50세에 벼슬의 등급을 뛰어넘어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의 독판(督辦)이 되었으며, 얼마 후 전권대신(全權大臣)에 차출되어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을 비준하였다. 53세에 광주 유수(廣州留守)가 되었으나 후에 사건으로 인해 면천군(沔川郡)에 유배되었다가 7년 만에 사면되었다. 61세에 외부 대신에 배수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을미년 정국 개편이다. 63세에 제주에 종신 유배되었다가 다시 지도(智島)로 옮겨졌고, 정미년(1907)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전후로 유배지에 있던 것이 도합 19년이다.
무신년(1908)에 중추원(中樞院) 의장에 배수되어 칙서를 받들고 동경(東京)으로 가서,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수여받았다. 이듬해 다시 동경에 갔다 돌아와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경술년(1910) 자작(子爵)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환재집(瓛齋集)》ㆍ《봉서집(鳳棲集)》 두 문집 및 그의 벗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의 문집까지 간행하였으니, 그가 의(義)를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80에 그가 저술한 시문에 자서를 쓰고 세상에 간행해 내놓으며 그 이름을 《운양집(雲養集)》이라 하였다. 운양은 그의 자호이다. 이 일로 을묘년(1915) 봄에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상을 받았고, 병진년(1916)에는 경학원(經學院) 대제학이 되었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낙천적이며, 지조가 굳세고 품행이 분명하여 큰일에 임해서도 목소리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학문에 근본이 있으면서도 옛것에만 빠지지는 않았다. 금년 83세이나, 시력과 청력이 변함없고 바라보면 신선 같다.
정사년(1917) 2월, 문인 연안(延安) 이빈승(李斌承)이 삼가 쓰다.
[주1] 이빈승(李斌承) : 《운양집》 및 《운양속집》을 교정하였다. 김윤식은 《속음청사》 양력 1917년 5월 11일자 일기에, ‘《운양집》 중간(重刊) 기념회’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집에 자리를 마련하고 이빈승과 김용계가 주관하였다.〔設局于吾家 李斌承金溶契主之〕”라고 서술하였다. 이빈승은 또 《조선태조실기(朝鮮太祖實紀)》를 저술하여 1927년에 대동성문사(大東成文社)에서 간행하였다.
[주2]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받던 조광조(趙光祖)와 학문적ㆍ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를 바탕으로 훈구 세력 제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와 함께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내용으로는 미신타파, 향약 실시,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봉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주3] 김육(金堉) : 1580~1658.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식의 3대손이다. 특히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들 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양근 미원서원과 청풍 봉강서원,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
[주4] 박규수(朴珪壽) : 1807~1877.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규학(珪鶴),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瓛卿), 정경(鼎卿), 초호(初號)는 환재(桓齋),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거사(瓛齋居士)이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김윤식, 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주5] 유신환(兪莘煥) : 1801~1859.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윤병정(尹秉鼎), 서응순(徐應淳), 김낙현(金洛鉉), 윤치조(尹致祖), 김윤식, 남정철(南廷哲)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한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학의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율력ㆍ산수 등에도 정통하였으며 정치ㆍ경제ㆍ군사 등의 분야에도 박학하였다.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주6] 침랑(寢郞)이 되었다 : 능참봉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김윤식은 1865년(고종2) 음직으로 건릉 참봉(健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때 지은 시가 〈건재집(健齋集)〉에 묶여 《운양집》 권1에 실려 있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능으로, 현재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번지에 있다.
[주7] 사림(詞林)과 …… 승진하였다 : 김윤식은 1874년(고종11)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학, 시강원 겸사서, 부응교, 부교리, 승지 등의 벼슬을 거쳤다.
[주8] 영선사(領選使)로서 천진(天津)에 갔다가 : 1881년(고종18) 중국의 선진 군사기술을 배우고, 연미(聯美) 문제에 대하여 사전 협의하기 하기 위해 조선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선발, 38명의 학생 및 관원과 수종(隨從)을 합쳐 총 69명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김윤식은 국내에 기기창을 설립하기 위해 약간의 무기를 구입하고 남은 학생들과 완전 귀국하였다.
[주9] 기무처에 …… 처리하였다 : 기무처는 1882년 청나라 관제를 모방하여 신설한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임오군란으로 다시 폐지되었다가 7월 잠정조처로 부활한 기관이다. 12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했다. 김윤식은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로 임명되었고, 그 뒤 아문의 개칭에 따라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임명되었다.
[주10]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김윤식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대사마는 병조 판서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주11]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의 독판(督辦)이 되었으며 : 김윤식은 1884년 6월에 강화 유수로 있다가 같은 해 7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외무아문 대신이 되었다.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가리킨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많은 관원이 살해당하였고 청나라 세력이 제거되자 1885년 그 기능이 의정부로 이관되었다.
[주12] 사건으로 …… 유배되었다가 : 김윤식은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민영익(閔泳翊)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면천(沔川)에 유배되었다.
[주13] 61세에 …… 개편이다 : 김윤식은 갑오개혁이 시작된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천거로 외무 대신이 되었다.
[주14] 제주에 종신 유배되었다가 :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이 죽고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자 김윤식은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이 때문에 1897년 12월 20일 제주도에 종신토록 유배되었다.
[주15] 지도(智島)로 옮겨졌고 : 제주도에서 천주교 신자와 민당(民黨)의 대립으로 인해 민요가 일어나자 1901년 김윤식은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 지도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해 있는 섬으로, 면적은 60.27㎢이다.
[주16] 사면되어 돌아왔다 : 김윤식은 1907년 7월 송병준을 비롯한 일진회(一進會)의 간청과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조처에 따라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주17] 칙서를 …… 수여받았다 : 1908년 김윤식은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에 갔다. 이 일로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수여받았다.
[주18] 그의 …… 간행하였으니 : 김윤식이 《경당유고(絅堂遺稿)》를 편찬한 일을 가리킨다. 저자 서응순(徐應淳, 1824~1880)은 유신환 문하에서 김윤식과 함께 수학한 인물이다. 경당은 그의 호이다.
[주19]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 현 일본학사원의 전신으로, 연구자 표창 등의 사업을 통해 일본 학술의 발전을 꾀할 목적으로 1906년 설치된 기관이다. 식민지까지 포함한 각지에서 우수한 연구자를 회원으로 선임하였고, 일본 국적이 없더라도 일본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면 객원으로 영입하였다. 김윤식이 받은 제국학사원상은 현저한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제국학사원에서 수여하는 상이었으며, 후신인 일본학사원상은 현재 일본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평가된다.
[주20] 경학원(經學院) : 한일병합조약 후 총독부는 기존의 성균관을 폐지하고 천황의 하사금으로 경학원을 설립, 식민정책에 부합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성균관 명칭을 회복하였다.
雲養先生略傳[李斌承]
先生姓金氏名允植字洵卿。淸風人。其先有文毅公湜。倡道學。文貞公堉。以事業顯。先生以乙未生。肧胎前光。擩染家學。十六從瓛齋朴公珪壽,鳳棲兪公莘煥兩先生游。三十中進士。筮仕寢郞。四十擢文科。歷敭詞林臺閣。四十七歲。以領選使赴天津。明年還朝。入機務處辦事。五十超遷大司馬。督辦通商交涉事務。尋差全權大臣。批准露約。五十三歲。留守廣州。後因事流配沔川郡七年乃宥。六十一歲拜外部大臣。寔乙未改局也。六十三歲濟州流終身。又移智島。丁未宥還。前後在謫凡十九年。戊申拜中樞院議長。奉勅赴東京。叙勳一等。明年再赴東京。還陞正一品輔國。庚戌授子爵。刊行瓛齋,鳳棲二集。以及於其友絅堂徐公應淳之文。其好義類此。年八十。自序其所著詩文。刊行于世曰雲養集。雲養其自號也。以故乙卯春。受帝國學士院賞。丙辰爲經學院大提學。爲人公平樂易。而操履堅確。臨大事不動聲色。其學盖有本。而亦不泥於古。今年八十三歲。視聽不改。望之若神仙云。丁巳仲春。門人延安李斌承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