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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윤선생 문집 서(白湖尹先生文集序)
류석우柳奭佑
도(道)란 하나뿐인 것으로 하늘 땅과 그 존재를 나란히 하고 고금을 통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도인 것이다. 현인(賢人)ㆍ군자(君子)가 그 자신 욕을 당하고, 자기 목숨은 빼앗길지라도 그 도는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니 만약 없어질 수도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고인들 말에 의하면, 도가 세상에 행해지는 것도 숙명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도 숙명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도가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이 이미 숙명적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시대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게 슬퍼서 그렇게 탄식을 한 것이란 말인가.
물론 시대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는 군자라도 그것을 일단 숙명으로 돌리고 현실성 없는 말이라도 남겨 후세에 전한다면, 비록 그 당시에는 그 도가 행해지지 못했더라도 뒷사람들이나마 그가 남긴 말을 발판으로 하여 그의 도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니, 그야말로 그 당시에는 비록 빛을 못 보았더라도 앞으로 영원히 행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마저도 전해진 것이 없고 보면 후인들로서는 장차 근거로 해서 찾을 길이 없게 되어 그 도가 드디어 빛을 잃고 말 것이니,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가지 기술이나 예능만 있어도 그것이 세상에 쓰여지지 못할 경우 남들이 애석히 여기고 한을 할 것인데, 더구나 분전(墳典)의 뜻을 관통하고, 천인(天人)의 이치를 알며,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부터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법에 훤하고 깊은 경륜을 쌓아 무엇인가 세상에 공적을 남길 인물인데, 시대를 잘못 만나 자기 자신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자기 포부를 펴 보이지 못하고, 끝내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의해 죄 아닌 죄에 걸려들어 화가 자기 몸에 미치고 그의 자손과 문인들에게까지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저술까지도 모두 금압(禁壓)의 대상이 되어 그의 학문이 후세에 전해질 수 없게 되었다면, 고금천하에 그런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건 바로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고 한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다시 돌아오는 법이어서 사나운 눈바람 속에서도 어린 싹은 꺾이지 않고, 건곤(乾坤)이 꽉 막힌 속에서 몇백 년 고폐(錮廢) 끝에 그가 남긴 저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또 하늘이 사문을 도우시고 암암리에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걸맞는 화복을 내리심으로써 후인들에게 좋은 선물을 전해주시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도란 영원히 없앨 수 없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백호(白湖) 윤선생은 마침 효종대왕이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을 때를 만났기에, 왕에게, “그는 학문이 깊고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잘 알아 여느 사람들처럼 겉치레나 하고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그러한 자들과는 다르다.”고 한 자가 있었고 왕도 만나볼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거기에는 또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데에 마음 쓰지 않고 보다 더 원대한 포부를 꿈꾸는 선생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 숙종대왕이 자리에 오르고 나라의 어진이들이 모두 나섰을 때, 국가로부터 계속 부름을 받은 선생은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이 제갈량(諸葛亮)같이 나라 위해 할 도리를 다 하고야 말겠다고 스스로를 다짐했던 것인데, 그로부터 얼마 후 자기 말도 써주지 않고 계책도 채택을 않으면서 벼슬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매달아 두고만 있는 것을 안 선생은,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물러나 전 위치 그대로 있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결국 권신ㆍ척신들 모함에 빠져 형문을 당하고, 유배생활을 하고, 게다가 또 선생을 싫어하는 자들의 종용에 의해 끝내 목숨까지 바쳐야 했을 줄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렸을 때 보면, 장로(長老) 선배들이 경전(經傳)의 의심나는 곳을 두고는 곧잘 귀에다 대고 속삭이기를, 그것은 백호의 해석이라고 하면서도 감히 겉으로 내놓고 발표는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마 공포심이 그때까지도 가시지 않아서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처음에는 선생을 배국(背國)이라고 무함했다가 그것이 잘 안 되자 또다시 난사문(亂斯文)으로 덮어씌웠기 때문에 그의 말이라면 세상의 대금(大禁)이 됐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소인배들이 화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쓰는 수단이 역옥(逆獄)인 것인데, 그때는 그와 달리 경전으로 나라 안에다 함정을 파두고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가혹한 법을 새로 만들어 학자들을 잡았기에 그때 그 함정에 빠져든 자가 하나뿐이 아니었었다. 그리하여 이미 간행이 된 것은 그 판본을 없앴고, 아직 간행이 안 된 것은 초고를 없앴으며, 사승(史乘)을 변란 시키고 사람들을 위협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성현들이 남긴 살아 있는 글에다 누구도 달리 활용할 수 없도록 판을 박음으로써 결국 죽은 글로 만들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사문(斯文)으로서는 하나의 큰 액운을 당하던 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또 그 수법을 자기 쪽 사람들에게다 전하고 저희들끼리 손뼉을 치면서, 이제 한 시대 사람들 입을 틀어막을 수 있고 후세까지도 속여넘길 수 있다고 좋아했었지만, 얼마 못 가 그들도 앙화를 받고 말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후로 척신ㆍ권신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어, 위에 있는 임금은 임금대로 고단하고 아래 있는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곤궁하다가, 그 결과는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팔고, 백성들을 죽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기에 이르렀는데, 서리가 내리면 뒤이어 얼음이 어는 법으로 그것이 어디 일조일석에 된 일일 것인가. 아, 그도 아마 하늘의 뜻이겠지.
그런데 선생의 후손들이 화를 피하여 자기 선대 유고를 경상도 운문산(雲門山) 속에다가 감추어두고 거의 3백 년 동안이나 지켜오다가 지나간 갑자년에야 비로소 그 유고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선비들은 그를 두고, 이제 음이 다 가고 양이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이 유고를 간행하자는 논의가 경주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자, 원래 천성적으로 의(義)를 사모하고 인(仁)을 힘쓴 영남 전역의 선비들이 이구동성으로 호응해왔던 것이다.
다만 유고 분량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물력이 부족해서 그게 걱정이었는데, 김대림(金大林)ㆍ이태문(李泰文)이 선생의 본손인 신환(臣煥) 등과 협력해서 일을 추진하여 진주(晋州)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간행된 것은 총 17권으로 유고 분량에 비하면 겨우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고, 가령 독서기(讀書記)ㆍ천문도설(天文圖說)ㆍ공고직장도설(公孤職掌圖說) 등 실지 학문의 경지를 나타내고 도(道)가 담겨 있는 것들은, 아직도 유고로 그냥 남아 있게 되어 사람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후로도 여러 차례 난리를 겪는 통에 미처 속간(續刊)을 못했다가, 선생의 9세손 수경(壽慶)이 그를 서글피 여기고 몇 십 년을 두고서 계획을 세우고 소요 경비를 두고두고 마련 끝에, 자기 아들 용진(容鎭)을 시켜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부족한 이 사람도 교정 등 역할을 맡게 되어 드디어 전서(全書)를 출간할 수가 있었으니, 권수로는 총 50권이었고 내용은 1백 수십만이 넘는 말로 되어 있었다. 이 어찌 사문이 부흥하는 일대 다행스러운 기회가 아니며 이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무서워서 너무 오랜 기간 숨겨놓다 보니 아무래도 유실과 차착이 없을 수 없어, 가령 선생이 창안한 병거(兵車) 제도 같은 것은 당시 주상 앞에서 시동을 보였을 때, 주상으로부터 “먹지 않는 말이요 옮겨 다니는 성”이라고까지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그 제도가 아마 마소가 끄는 수레와는 달랐던 모양인데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고, 또 식자 같은 것이 잘못된 데가 있어도 부족한 이 사람이 지식도 짧은데다 겸해서 참고할 만한 서적도 없고, 또 인쇄 공정까지 기일이 촉박해서 제대로 정정을 못한 곳이 많을 것이니, 독자들은 그 점 감안해서 큰 줄거리만 추려보고 자질구레한 잘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 선생은 원래 사장(詞章)에 종사한 분이 아니었지만 그 문장은 선생을 해친 자들까지도 저도 모르게 참으로 고결하다는 감탄을 하게 만들었고, 더구나 그 학문의 깊이에 있어서는 선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 역시 저들 스스로 “우리들 10년 공부는 여기에 비하면 가소로울 뿐”이라고 하기도 했으니, 선생의 문장과 학술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미루어 알기에 족하고 또 그것이 바로 그들이 선생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전(經傳) 뜻풀이에 있어서는 그 전에 이미 송(宋)나라 동괴(董槐)ㆍ왕백(王柏)과 명(明)나라 채청(蔡淸)ㆍ방효유(方孝孺) 같은 유자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같은 분들이 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었듯이, 요는 의리(義理)란 무궁무진한 것이어서 학문을 하는 데는 어떠한 속박이나 아집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의 학설은 그 모두가 고전(古傳) 아니면 선유(先儒)들의 논리를 근거로 하여 한 것들인데, 그들이 그리했던 것은 그들이 독서를 제대로 안 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핑계 삼아 저들 마음대로 씹고 치고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례(邦禮)로 하여 시끄러웠던 것은, 선생은 다만 그들이 물어왔기에 그들에게 고례(古禮)대로 말했던 것뿐이지 애당초 상소를 하여 다툰 일도 없었고, 정순(廷詢) 때에 헌의(獻議)도 않았는데, 도리어 독을 품고 뿜어대는 일을 저들에게서 당했으니 그야말로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내가 보기로는, 선생은 문장으로 말하면 한퇴지(韓退之) 비슷하고, 장소(章疏)로 말하면 육경여(陸敬輿)와 같고, 모든 정책을 수립하는 솜씨는 이백기(李伯紀)에 비유할 만했으며, 출처(出處)와 임금 사랑하는 정성은 조정암(趙靜庵) 선생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科擧) 제도를 폐지하고 오조(五條)로 인재를 취할 것을 청한 일, 죽고 없는 자와 어린애에게서 군포와 환곡(還穀) 징수하는 제도를 혁파하고 상평창(常平倉)을 둘 것 등등과 병거(兵車)를 만들고 총술(銃術)을 훈련시키자고 청한 것 등은, 마치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주장했던, 문지(門地)에 구애받지 말고 인재 취하기를 십도(十道)로 할 것과 공물(貢物)을 쌀로 환산하여 받고, 기타 둔전(屯田)ㆍ염리(鹽利) 관계, 그리고 속오법(束伍法)ㆍ화차(火車)ㆍ포루(炮樓)ㆍ자모포(子母炮) 등등을 만들자고 한 그 부문을 본뜬 것 같은데, 만약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삼정(三政)의 폐단을 조속히 바로잡아 이 나라가 망하는 길을 조금은 늦출 수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의 논리는 싸움이 곧 수비라 하여, 성 쌓는 데만 전력하지 말고 군대를 조련하고 자강책을 취하여 앞으로 늘 나아가야 한다고 청했으며, 또 저들 세 왕의 자중지란을 틈탔으면 했던 일은 옛날 제갈량이 했던 말에 느낌이 있어 그랬을 뿐만 아니라 또 어쩌면 심윤술(沈尹戌)이 했던 말과도 같고 또 근세 합중국(合衆國)이 쓰고 있는 진공작전책(進攻作戰策)과도 비록 세상은 달라도 전략은 똑같아, 만약 그 계책이 쓰여졌더라면 설사 요동ㆍ계주[遼薊]까지 쳐들어가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절제를 받지 않고 우리가 자립할 수는 있었을 것 아닌가.
그 밖에도 그의 강직한 내용의 주독(奏牘)ㆍ차기(箚記)ㆍ도설(圖說) 등은 그 모두가 삼대(三代) 시절 명신(名臣)들의 훈고체(訓誥體)로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선한 일을 표방하고, 사특한 것을 미연에 막는 내용들이며 또 더욱 척리ㆍ환관 무리들의 화와 간사한 아첨배들의 해독 그리고 민생들의 피곤한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 애석한 일이지만 숙종(肅宗) 대왕이 만약 선생의 말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고 깊이 음미했더라면, 당화(黨禍)가 다시 판을 뒤집고 그리하여 결국 세도정치를 부를 까닭이 있었겠는가.
일단 이 책이 나왔으니 선생의 몸은 비록 한때 앙화를 당하고 말았지만 선생의 도(道)만은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책을 잘 읽은 자라면 틀림없이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으리라. 아 대한 광복 30년이 되는 갑인년 3월 일에 후학 풍산(豐山) 류석우(柳奭佑)는 서하다.
白湖尹先生文集序[柳奭佑]
夫道一而已所以參天地亘古今而不可廢者是道也賢人君子其身可辱其生可奪而道不可廢可廢非道也然而古人有云道之將行也與命也道之將廢也與命也道之行與廢亦有命也歟抑傷其時之不可有爲而發歎者哉蓋時不可有爲則君子固有付之於命而垂之空言以傳諸後雖不得行於當世後之人猶可因其言而求其道所以廢於一時而不廢於久遠若並其言不傳後之人將無所於參尋紬繹其道遂至晦塞豈不大可懼者耶嗚呼士生斯世如有一技一藝之不見需者人猶惜之恨之况乎貫墳典之旨究天人之理自經世濟民之術至利用厚生之方靡不造其蘊奧固將有爲於世而遭時不淑官其身而不行其道終乃以忮害者之詭計誣以非辜非惟禍及其身並延于子孫門徒復禁壓其文將使其學不得傳于千載天下古今寧有是哉是其天喪斯文者歟然而地雷有復嫩芽稚陽不全泯於饕風虐雪閉塞乾坤之際其文復出於屢百年錮廢之餘則是又非天相斯文陰騭而傳惠於後人者耶道固不可以永廢也白湖尹先生當寧陵之有志於復雪也有告其以邃學而識時務異乎世之騖外徇名者王將就見而復有尼之者先生囂囂之志未改焉逮明陵初服拔茅彙征旌招不已先生幡然以諸葛公之盡瘁後已者自期于心旣而見其言不聽計不用而徒縻之以爵求退固辭自處以前啣夫豈意竟離權戚之陷害幽訊之竄流之復以 忌克者之慫惥遂被後命人到于今悲之記余在幼少見長老先輩於經傳疑晦處輒相與附耳語白湖所解而不敢表顯蓋餘怖未息也始彼輩誣先生以背國而不得其說則復搆之以亂斯文其言爲世大禁故也夫憸壬之起禍必以逆獄至是復以經傳爲阱於國中創千古所無之苛法以賊學者當時之淪於此阱者非一旣刊毁板未刊毁藁變亂史乘脅人屈從聖賢之活書硬着膠粘遂作死書誠斯文之一大厄會而復傳法其黨方自拊手謂旣可以箝制一世復可以欺蔽來後未幾而渠輩亦反受其殃然爾後戚權復熾於是主孤於上民窮於下其流至於弑父與君賣國戕民無所不爲履霜堅氷是豈一日一夕之故哉嗚呼其天也歟然而先生之裔猶能守其先稿避禍隱藏於東都之雲門嶺陰者幾三百年始出其稿於過去甲子一時士論比諸窮陰來復營刊之論始發於古都則全嶺之士固是慕義彊仁出乎其性者翕然響應而其奈編帙浩大物力不敷有金大林李泰文與本孫之臣煥諸公鞅掌其務開刊於晉州而僅印其三之一凡十七卷其如讀書記天文圖說公孤職掌圖說等學之所至道之所寓尙未能盡脫巾箱士林病之爾後屢經搶攘不遑續刊九世孫壽慶慨然于玆拮据經紀殆數十年始辦其費使其子容鎭主幹其務不佞亦得與於丁乙之役全書得出總五十卷百數十餘萬言是非復斯文之一大幸會耶亦其非天也歟所可恨者畏約隱藏之旣久不免有逸漏差錯如先生所製兵車旣經閱試於上前至稱以不食之馬能行之城 想不類於牛牽馬曳者而其制不傳且其銀根之訛以如不佞之蔑如兼乏書籍之可以證照復有印工之催迫尙多未盡訂整讀者庶可攬其大綱而燭其細愆也哉嗚呼先生非從事於詞章者而其文至使賊害者不自覺其發儘高儘潔之歎况復其學至使媢嫉者亦自以吾輩十年工夫爲可笑云是足推其文章學術之卓爾而亦其所以益增彼輩之忮心者也至如經傳之義釋亦已有董槐王柏蔡淸方孝孺諸儒與我李晦齋先生要之義理無窮學固不可以有所拘執也况先生之說一出於古傳與先儒各論彼輩正坐不讀書也不然則抑假此以恣其噬搏也且於邦禮之紛紜先生只因其問質而告之以古禮而已初未嘗陳疏論訟至於廷詢亦不獻議乃反逢彼之含沙毒螫有不足言也以余觀於先生其文倣韓退之其章疏似陸敬輿其設施之策可比於李伯紀其出處與愛君之誠有類於趙靜庵先生其請廢科擧而取人以五條請罷白骨兒弱之徵布及還糓而立常平倉諸策與作兵車鍊銃術等似有取於我先祖文忠公之不拘門地而十道取人貢物作米屯田鹽利諸策與束伍法火車炮樓子母炮等制作使其言得聽或可早捄三政之弊少舒鮮朝覆亡之患歟至論戰守同費請勿專力築城而鍊兵自強以圖進取且欲乘彼三王之亂固有感於諸葛公之言而亦與古沈尹戍所道及近世合衆國之進攻作戰策可謂異世同符使其計得用縱不能馳驅遼薊或可自立而不受彼節制歟其餘侃侃奏牘箚記圖說無非是三代名臣訓誥之文格君陳善閉邪之說尤致意於戚宦之禍姦諛之害民生之困罷惜乎明陵若能沉潛吟味豈復有黨禍翻局以至勢道之政哉是書之出可見先生之身雖罹殃於一時而其道不廢於久遠也如有善讀者其必將三復是書而慨然發歎矣嗚呼有韓復國之三十年甲寅三月日後學豊山柳奭佑序
[주1] 육경여(陸敬輿) : 당(唐)의 육지(陸贄). 경여는 그의 자(字). 덕종(德宗) 때 한림학사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면 반드시 참여했으므로 그 당시 그를 일러 내상(內相)이라고 하였고, 주자(朱泚)가 반기를 들었을 때는 하루에 몇 백 통의 조서(詔書)가 내려졌는데, 그 많은 조서를 다 육지가 맡아 기초하였으나 마치 샘물이 솟듯 막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적재적소로 빈틈이 없이 곡진한 표현을 다하였다고 함. 《唐書 卷157》
[주2] 이백기(李伯紀) : 송(宋)의 이강(李鋼). 백기는 그의 자. 몽고족이 송나라를 침입했을 때는 주전파(主戰派)로서 귀양살이를 가기도 했고, 송(宋) 고종(高宗)이 남으로 나라를 옮겨와서는 누구보다 먼저 그를 불러 제상 자리에 앉혔는데, 그는 군대를 정돈하고 무비를 닦아 국토 수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음. 《宋史 卷358, 卷3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