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집眉巖集 서序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
우리나라의 인재는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의 초기에 이르러 성대해졌다. 그런데 미암(眉巖) 선생은 학문이 깊고 넓어 관각(館閣)에서 특별히 저명하여 의심스러운 글과 모르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했다. 경연 강의에도 더욱 뛰어나 글을 보고 뜻을 설명할 때마다 경전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고 옛것을 끌어다가 오늘을 논증하는 데 수천 수백 마디의 말을 해도 끝이 없었다. 요컨대 도덕과 인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조정의 동료들이 귀를 기울여 듣다가 그 신묘함에 감탄했다. 임금께 올린 《경중구결(經中口訣)》은 정확하고 합당하여 학자들이 지금도 그 구결을 전하여 지켜 오고 있다. 대개 하늘이 특이한 자품을 주어 한번 세상이 다스려질 운수를 도운 것이니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후세의 논자들은 선생의 천부적인 총명을 찬탄하여 미칠 수가 없다고만 여길 뿐, 선생의 학문 전말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깊이 논구하지 않았으니, 이는 선생을 아는 것이 또한 얕다고 하겠다.
선생의 학문이 남과 다른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문로(門路 학문의 길)가 바르다’는 것이다. 장구와 집주가 세상에 유포되면서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주자(朱子)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들의 존중은 면재(勉齋)와 북계(北溪)가 주자를 존중했음을 듣고 존중한 것이다. 가령 면재와 북계가 어느 날 주자의 설에서 옮겨가면 그들도 또한 주자의 설에서 옮겨갈 것이니, 이와 같은 자가 문로를 똑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선생은 처음 학문할 때부터 곧바로 ‘큰 성인 주자〔大聖朱子〕’라 했으니, 이 한 구절만은 이전의 유학자 중에 감히 이처럼 말한 자가 없었다. 일찍이 이를 《속몽구(續蒙求)》에다 쓰고 〈감흥(感興)〉이란 시로 읊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 뒤에 퇴계(退溪) 선생이 “주자는 배워서 알고 이롭게 행한 큰 현인이다.”고 답했으나 긍정하지 않았고, 노옥계(盧玉溪 노진(盧禛))가 “미암은 주자에 혹하였다.”고 논평했으나 끝내 변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의 주자 존숭은 마음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지 이목(耳目)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이를 일러 ‘문로가 바르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장(詞章)으로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말이 지엽으로 흐르면서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기풍이 날로 성해져 윗사람은 이것으로 선비를 만들고 선비는 이것을 서로 숭상하니, 이러한 기풍과 습성에 내몰리는 것은 비록 영명하고 걸출한 인재라 하더라도 면할 수가 없다. 결국엔 궤짝만 사고 구슬은 돌려주는 격이니 모두가 이 모양이다. 선생은 홀로 담담히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하나의 아름다운 구절도 얻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또 “타고난 기질이 치우쳤다.”고 말했다. 선생의 재주와 학문으로 사장에 대해 과연 참으로 기질에 치우쳐 능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마음으로 정수(精髓)를 지키면서 피모(皮毛 가죽과 털, 곧 겉모습)에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 일러 ‘사장(詞章)으로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생은 학문에 일정한 방향을 두고 공부는 가리는 바가 없어 바탕은 반드시 깊어지고 지식은 반드시 넓어졌는데, 조석으로 노력하여 주자와 합일되는 것을 구하고 주자와 합일되지 않은 것을 버렸다. 그렇다면 선생의 선생 됨은 어찌 오로지 타고난 자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이를 뚜렷이 드러내어 후세에 학문한다고 하면서 오롯한 마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죄를 타고난 바탕이 미치지 못한 데로 돌리는 자에게 일깨워주고 싶다.
선생의 덕을 대략 말하면, 시(詩)의 화락함과 서(書)의 침잠함과 예(禮)의 화순함이 마음속에 쌓여 있었다. 바야흐로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간신들이 사특함을 선동할 때에 분육(賁育)도 움츠리는데 선생은 오히려 담소를 나누니 이는 내면이 튼실한 효험이다. 변방 유배지에서 학문을 더 닦아 20년 뒤에 덕성의 함양이 순수하고 견고해지니 또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침 조정이 청명(淸明)한 때를 만났는데 주상께서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온축한 경륜을 오직 경연의 교육에서 드러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일어나자 벼슬아치들이 당인(黨人)으로 지목당함을 면치 못했으나 선생에겐 무엇이 있었겠는가. 유몽정(柳夢井)이 서울에서 떠도는 말을 전했는데 오직 선생과 이율곡(李栗谷)이 중립을 지켜 기울지 않았다고 하니 실제로 그렇다고 하겠다. 아, 식견이 넓고 도량이 커 사림(士林)들이 믿고 따랐던 선생과 같은 네댓 사람을 얻어 그들에게 큰 뜻을 가지고 횡류(橫流) 사이에 처하게 했더라면, 국론은 아마도 난치병에 이르지 않았으리라. 선생 같은 분을 많이 얻을 수 없었건만 게다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지은 《속몽구》와 《육서부록(六書附錄)》 등의 글은 당시에 이미 간행되었고, 그 밖에 편찬한 글이 매우 많으나 대부분 전해지지 않았다. 많은 도서를 모아놓은 곳에 혹 소장되어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고(詩稿)는 종성에서 간행한 것이 약간 편이 있고 잡문은 대부분 산일되었는데, 손수 쓴 《일기》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시작하여 졸년인 정축년(1577, 선조10)에 끝나는데, 위로는 시정기(時政記)로부터 경연강설(經筵講說)까지 기록하고, 아래로는 오고 간 사람이나 안부를 묻고 선물을 준 것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다. 비록 낙권(落卷)이 있다 하더라도 10에 7, 8은 갖춘 셈이다. 떨어져 나간 글과 몇 편의 시가 여기에 의탁하여 보존되기도 했는데, 정묘년 이전은 시국이 어두워 생략하고 쓰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있었는데 전해진 것이 여기에 그친 것일까.
돌아보건대, 병란과 화재도 소실시킬 수 없던 것을 좀이 먹을 수도 있었다. 후손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가려 뽑아 간행하려고 여러 차례 추진했다가 곧 그만두곤 했다. 지금 이 일을 주간하는 사람은 후손 경심(慶深) 씨로 선조의 뜻을 잇고자 재력을 헤아리지 않고 강단 있게 시작했으며, 이 일을 돕는 사람은 그의 재종 경인(慶寅) 씨이다. 끝내 잘 마무리할지 모르겠다. 문자를 분별하는 일에 내가 간혹 곁에서 우견(愚見)을 제공했다 하여 권두에 서문을 붙이게 한 것이다.
기유년(1849, 헌종15) 12월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이 삼가 쓴다.
眉巖先生文集序[奇正鎭]
國朝人才。至穆陵之初。彬彬矣。然眉巖先生以學問淵海。特著館閣。有疑文闕義。必先生是咨。尤長勸講。每臨文敷陳。沿經以達史。援古以證今。衮衮千百言不竭。要之不離於道德仁義之旨。同朝傾耳。歎其妙若神明。所進經中口訣。的確停當。學士家至今傳守之。蓋天篤畀異稟。以賁一治之運。非偶然者。然後世論者。或但贊歎先生天稟之聰穎。以爲不可幾及。而不能深究先生爲學之首末。有大異於人者。則其於知先生也亦淺矣。先生之學。有異於人二事。其一曰門路正。自章句集註之行於世。世皆尊朱子。然其尊之也。聞勉齋,北溪之尊之也而尊之。假令勉齋,北溪一日遷就其說。則吾亦爲之遷就其說矣。若是者。可以立定門路乎。先生自初爲學。卽大聖朱子。只此一句。前人無敢如此道者。嘗筆之蒙求。詩於感興而不疑。厥後退溪先生曰。學知利行之大賢而不信也。慮玉溪曰。惑於朱子而不變也。蓋先生之尊朱子。師心而非師耳目者。此之謂門路正。其二曰不以詞章累其心。自夫言有枝葉也。夸毗之風日勝。上以是造士。士以是相尙。風聲習氣之所驅。雖英才傑人。不得免焉。畢竟買櫝而還珠者皆是也。先生獨泊然不以爲意。故其言曰。平生未嘗得一佳句。又曰。稟質有偏。以先生之才學。其於詞章。果眞偏於質而不能耶。抑志存精髓而不屑於皮毛也。此之謂不以詞章累其心。學有定向。工無所分。則資之必深。聚之必博。早夜孜孜。求其合於朱子者。捨其不合於朱子者。然則先生之爲先生。豈專天姿使然哉。竊願表而出之。以告後世爲學不能專心致志而歸罪於姿不逮者。先生之德。槪而言之。詩之豈弟。書之沈潛。禮之和順。積中也。而方乙巳羣壬之扇慝也。賁育將縮首。而先生談笑。此內固之效。塞垣玉成。二十年後。充養純固。又可量耶。適幸朝著淸明。上富於春秋。故所蘊惟露於啓沃之間。及東西之論興。搢紳未有免其指目者。而在先生何有哉。柳夢井所傳洛中語。惟先生及李栗谷爲中立不倚者。蓋實際也。嗚呼。使得曠識坦度。爲士林所信向如先生四五公。落落然處橫流間。國論庶不至膏肓乎。先生不可多得。而又不久捐館矣。先生所述蒙求附錄等書。當時已刊行。其外編纂甚富而多不傳。羣玉圖書之府。或有藏弆歟。未可知也。詩藁。所刊於鐘城者僅若而篇。雜文大抵散軼。獨幸手筆日記尙傳。起於丁卯。終於卒年丁丑。上自時政記。以及登筵講說。下及來往問遺。犂然載錄。雖未免有落卷。十全七八矣。零文小詩。或有托此而存者。丁卯以前。時義自晦。闕不修歟。抑有之而所傳止此歟。顧兵燹之所不能燼。蠹魚或殘之。後承爲是之懼。謀採摭而壽諸榟。屢擧而旋輟。今之幹事者後孫慶深甫。欲繼述先志。不量力而斷然經始。和之者。其再從慶寅甫也。未知卒乃克完否。文字魚魯。正鎭或從傍貢其愚。故俾置名于卷。作噩之歲律中大呂。幸州奇正鎭。拜手謹書。
[주1] 기정진(奇正鎭) : 1798~1876.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이다.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문집으로 《노사집(蘆沙集)》을 남겼다.
[주2] 관각(館閣) : 조선 시대에 홍문관ㆍ예문관ㆍ규장각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주3] 경중구결(經中口訣) : 류희춘은 만년에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 작업에 참여하였는데,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주4] 면재(勉齋)와 북계(北溪) : 면재는 송나라 황간(黃榦, 1152~1221)의 호이다. 자는 직경(直卿),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주희와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는데, 주희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학문을 전수하고 사위로 삼았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강학하였으며, 저서에 《육경강의(六經講義)》, 《예기집주(禮記集注)》 등이 있다. 북계는 진순(陳淳, 1159~1223)의 호이다. 자는 안경(安卿),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장주(漳州) 용계(龍溪) 사람이다. 주희가 장주 태수(漳州太守)로 있을 때 나아가 수학하여 황간과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저서에 《북계자의(北溪字義)》 등이 있다.
[주5] 분육(賁育) : 진(秦)나라 무왕(武王) 때의 역사(力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다.
[주6] 육서부록(六書附錄) : 《선조수정실록》 5년 5월 1일 기사에서 “부제학 유희춘이 《육서부록》【《시(詩)》ㆍ《서(書)》ㆍ《사서(四書)》】을 올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상을 주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