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집 서 무원婺源 강겸江謙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학문이 있어야 하니 국가의 대소(大小), 강약(强弱), 흥망(興亡)을 막론하고 학문한 사람이 없던 적이 없고, 학문을 하여 널리 통하면 신구(新舊)나 문질(文質)을 막론하고 그 학문이 쓰이지 않은 적이 없으며, 진실로 나라를 위해 죽었다면 성사(成事) 여부를 막론하고 후인(後人)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이 체결된 다음 해에 한국(韓國)의 오랜 친구인 김창강(金滄江)이 그의 친구인 황 열사(黃烈士)의 시문(詩文) 2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고 또 열사의 평생 사적(事跡) 및 한일합병 이후 음독 순국(飮毒殉國)한 절의(節義)와 음독 직전에 지은 〈절명시(絶命詩)〉를 보여 주었다. 내가 그것을 살펴보고 나서 한국이 나라 꼴이 안 된 지 오래임을 더욱 믿게 되었으니, 황군(黃君)이 바로 학문을 한 그 나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요즘 중국(中國)은 한창 세계 각국의 강약, 흥망에 대한 두려움에 몹시 불안하여, 전국(全國)의 열혈지사(熱血志士)들이 아낌없이 몸을 희생하여 정치 개혁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처음 무한(武漢) 지역에서 정치 개혁 투쟁을 일으킴으로써 그 바람이 전국에 확산되어 웅걸(雄傑)한 인사들은 마치 범이나 매처럼 강렬히 분발 도약하고 있고, 문인 학자(文人學子)들 또한 그 거사에 대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계획을 협찬해 오고 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거사를 진행해 온 이래 북쪽 조정〔北廷〕이 스스로 재앙을 초래한 것을 뉘우치고, 또 파병(罷兵)을 원하여 백성들의 결의(決議)를 들어줌으로써 대사(大事)가 성사될 날이 머지않았다.
한국은 옛날에 기자(箕子)를 봉(封)했던 나라로 본래 우리 복희(伏羲), 염제(炎帝), 황제(黃帝)의 후예이다. 한국의 학문 또한 중국에서 들어간 것인데, 학문이 오래됨에 따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전국의 선비들이 문예(文藝)에만 지치도록 골몰하는 풍조 또한 중국과 똑같은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이 망하자 그것을 논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학문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학문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한국이 망함에 따라 중국이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폐단이 같기 때문에 화가 장차 중국에도 미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수년, 수십 년 사이에 중국의 시국을 걱정하던 인사들은 국운이 부진하여 금방 망하게 된 형편을 분하게 여겨 정권(政權)을 쟁탈하기도 하고, 요인(要人)을 남몰래 공격하기도 하고, 황 열사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처사와 같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은 사람들이 전후에 서로 이어졌으니, 그들은 모두 지략(智略)이 다하고 사태가 극에 달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사태를 열사(烈士)는 미처 듣지 못했으니, 가령 죽은 열사가 이제라도 그 사실을 듣는다면 아마도 고약 분발(鼓躍奮發)하여 이미 죽은 것을 후회할 것이다.
대저 선비가 음혼(淫昏)한 강자가 선량한 약자를 전제(專制)하는 세상에 나서는 국사(國事)를 전혀 손쓸 방법이 없어 다만 시문으로 펼쳐 내서 자신의 뜻을 부치는 것이 구차히 벼슬길에 나가서 스스로 자신을 폄하(貶下)시키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 그리고 국가가 불행하여 종사(宗社)가 망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안으로 권력이 없음을 헤아리고 밖으로 동지(同志)의 고단함을 상심하여 부득이 한번 죽음을 결단하여 후인(後人)들에게 충정을 호소하는 것이 구차히 생명을 부지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 그러나 국제 정세를 정탐하는 사람은 오히려 부족한 형편이기도 하다.
아, 시문의 학은 진실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음독(飮毒)하거나 자문(自刎)하는 행위는 진실로 시국에 도움 되는 것이 없으니, 그의 처지의 불행함과 의지의 비참함을 그 누가 알겠는가.
또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시(詩)는 정(情)에서 우러나온 사물이요, 죽음은 지조의 종결처이며, 국가의 강약 흥망은 우연한 만남이요, 만남의 다행하거나 불행함은 시기이며, 다행하여 성사하거나 불행하여 성사하지 못하는 것은 자취인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발동하는 것은 정이고, 그것을 성사시키는 것은 지조이며, 최후에 결단하는 것은 죽음인데, 시기는 항상 같은 시기만 만나는 게 아니요, 자취는 항상 같은 일만 답습하는 게 아니니, 진실로 정과 지조가 없어지지 않아서 그 이룬 것을 시기에 따라 사용한다면 반드시 다행함이 있을 것이다.
황군이 정과 지조를 한국 사람에게 남겼고 보면 황군의 죽음은 삶과 다름없고 그의 시 또한 영원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창강(滄江)은 시문에 능한 분인데, 황군을 일러 시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데다 소식(蘇軾), 육유(陸游)의 시체(詩體)를 잘 배워서 청신하고 기발하고 풍부하고 웅건함을 고루 갖추었다고 말한다. 그의 시집(詩集) 간행에 부쳐 중화민국(中華民國) 무원 강겸은 서문을 쓴다.
신해년(1911) 11월 20일.
序[㜈源江謙敬持]
爲國有學。無小大强弱興亡。未嘗無人。爲學而通。無新舊文質。未嘗無用。苟死而爲國。無問於事濟不濟。未嘗無所感於後之人。日韓倂朝之明年。老友韓金滄江。携其故人黃烈士詩文二卷。囑爲序。且傳示烈士生平始末及倂朝後仰藥殉國之節。臨終絶命之詞。余觀之。益信韓不國久矣。而黃君者非其人乎。於時中國。方惴惴於世界强弱興亡之懼。全國熱血志士。不惜摩頂濺血。以爲政治改革之爭。發難武漢之間而風揚於全國。雄傑之士。虎跳鷹奮。而文人學子。亦復攘臂贊畫於其間。兩月以來。北廷悔禍。且願罷兵。聽民决議。大事之成有日矣。夫韓封故 箕子。固吾羲,炎,黃帝之裔。韓之學自中國。而其學之久而不適用。全國之士。敝敝於文藝。又與中國同。韓亡而論之者曰。無人焉故也。無學焉故也。學不適用焉故也。韓亡而中國有懼焉。懼其弊同而禍將及也。前此數年十數年之間。中國憂時之士。憤國之不振。亡之無日。或以爭政。或以暗擊。或以蹈海而死。如黃烈士慷慨之爲者。先後相屬。皆以爲智窮事極。無所復之也。今者中國之事。烈士則不及聞焉。使其聞之。其鼓躍奮發而悔其死歟。夫士生淫昏專制之世。國事無一可措。而但肆於詩文以寄其志。與其苟進而自貶也。及夫國家不幸。宗社淪亡。內度權力之薄。外傷同志之孤。决一死以告後之人。與其偸生以辱國也。而覘國者猶或致不足焉。嗚呼。詩文之學。誠不適用。仰藥伏劍。誠無濟於時。而孰知其所處之不幸而其志之可悲乎哉。抑聞之。詩者情之事也。死者志之終也。國家之强弱興亡遇也。遇之幸不幸時也。幸而成。不幸而不成者跡也。而發之者情。成之者志。决之者死。時無常居。跡無常襲。苟情與志之不滅。時其成而用之。其必有幸焉。君其以情與志。遺韓之人乎哉。則君之死猶生。而詩亦可以不朽焉。滄江老於詩文。謂君於詩有別才。善學蘇陸。淸警富健其有焉。於其刊也。中華民國婺源江謙序之。辛亥十一月二十日。
[주1] 강겸(江謙) : 1876~1942. 교육가(敎育家)로, 안휘성(安徽省) 무원(婺源) 사람이다. 자는 역원(易圓), 호는 양복(陽復)이다. 어려서 자양서원(紫陽書院), 문정서원(文正書院) 등처에서 글을 읽었고, 통주사범학교장(通州師範學校長), 청조(淸朝)의 자정원 의원(資政院議員), 안휘성 교육회 회장(安徽省敎育會會長), 남경고등사범학교 교장(南京高等師範學校校長)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음운학(音韻學)에 밝았으며, 만년에는 불교(佛敎)에 정진하여 무원에 불광사(佛光社)를 창건했다.
[주2] 김창강(金滄江) : 1850~1927. 조선 말기의 학자인 김택영(金澤榮)을 가리킨다. 자는 우림(于霖), 창강은 그의 호이다. 고종(高宗) 연간에 진사(進士)가 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사직했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이후에는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융희2) 중국에 망명하여 통주(通州)에 살았는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서 청(淸)나라의 학자인 강유위(康有爲), 정효서(鄭孝胥) 등과 교유하였다. 바로 이때에 당시 통주사범학교 교장이던 강겸에게 《매천집(梅泉集)》에 대한 서문(序文)을 부탁했던 것이다. 여한십가(麗韓十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주3] 황 열사(黃烈士) : 황현(黃玹, 1855~1910)을 가리킨다. 본서(本書)의 저자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자는 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고종(高宗) 연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했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향리(鄕里)에 은퇴하여 지내다가 1910년(융희4) 한일합병(韓日合倂) 때 국치(國恥)를 통분하여 마침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자결(飮毒自決)하였다.
[주4] 스스로 …… 죽은 : 이 고사(故事)는 본디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말하기를 “저 진(秦)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자칭하고 죄악으로써 천하에 정치를 행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내가 차마 그 백성은 될 수가 없다.〔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전하여 여기서는 단지 망국(亡國)을 개탄하고 자결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