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암유고 서문 旅菴遺稿序
홍양호 洪良浩
무엇을 문(文)이라 하는가? 이치를 형상에 붙인 것이다. 하도(河圖)ㆍ낙서(洛書)가 출현하여 천지의 모양이 드러났고, 글자가 만들어져 인문(人文)이 시작되었다. 문자는 형상에서 생겨나고 이치는 문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공자의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에 문(文)을 우선시했다. 이에 문학(文學)이란 과목이 있었으나 그 이른바 문(文)은 모두 이치와 도(道)를 합쳐 이름붙인 것이다.
이후 춘추 시대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비로소 일어나 구류(九流)가 함께 치달려서 각각 그들의 학술로 문학을 하였지만 일찍이 실상이 없는 빈말을 하지는 않았다. 초(楚)나라의 사(辭)와 한(漢)나라의 부(賦)가 일어나 과장되고 화려해지면서 이치에 근본을 두지 않아 문(文)과 도(道)가 마침내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각각 그 스승을 본받고 각각 그 학문을 배워 학문에는 편벽됨과 순수함이 있고 문사(文辭)에는 교묘함과 졸렬함이 있지만, 모두 스스로 문호를 세울 수 있었다.
오직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견문이 적어서 세상의 학자들이 옛사람의 찌꺼기만 취하여 겉을 꾸미고 그림자를 따랐을 뿐, 능히 자득(自得)하여 일가를 이룬 경우가 드물다. 사람들의 의식(衣食)에 비유하자면 장터에서 곡식을 구걸하고 시장에서 옷감을 사서 굶주림과 추위를 막을 뿐이요, 스스로 씨를 뿌리고 베를 짜지 못하여 창고를 엿보면 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글을 지어도 근본이 없고 근본이 없으니 고갈되고 만다.
오직 여암(旅庵) 신공(申公)은 뛰어난 재주와 넓은 학식을 갖춘 데다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는 공부까지 더하여, 멀리는 감석(甘石)의 글과 장해(章亥)의 기록에서부터 가까이는 주구(州鳩)의 악보와 사마(司馬)의 병법까지 그 빗장을 열어젖혀 그 심오한 곳을 찾아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제자백가를 두루 망라하여 우리 유학에 절충시켰다. 그가 말로 드러내면 깊고 넓어 끝이 없고 조리에 맞아 징험이 있었으며, 글로 표현하면 이전 사람의 말을 답습하지 않고 저절로 내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며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저절로 법도에 들어맞아 우뚝하게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었으니, 발군의 큰 재주요 세상에 드문 통유(通儒)라고 말할 만하다.
내가 젊은 날 호남에서 시험을 관장할 때에 공이 남도의 선비로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서울에서 벼슬하게 되어 마침내 교분을 맺었는데, 그의 심중을 두드려보고 나서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매번 고금의 일을 담론하고 명분과 의리를 분석하느라 밤낮을 잊었으며, 거의 30년 동안 세상의 고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이 말한 지음(知音)의 교분이었다.
공은 늙어서 호남으로 돌아갔는데 세상을 떠나자 공의 사위 이영갑(李永甲) 군이 유고를 가져와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 유고를 모두 살펴보니 전할 만한 것이 10에 7, 8이 되었고, 그중 〈소사문답(素沙問答)〉ㆍ〈동음해(東音解)〉ㆍ〈강계지(疆界志)〉와 같은 여러 편(篇)은 대개 천하에 기이한 문장으로 이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니, 후세에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 나는 이 서문을 쓰면서 남몰래 한스런 마음이 크게 든다. 공이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바닷가 모퉁이에서 태어나 눈으로 중국의 광대함을 보지 못했으니, 옛사람의 책을 읽었지만 모두 종이 위에서 어림짐작했을 뿐이네. 나와 그대가 혹시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어 중국으로 가게 된다면 아마도 평소에 강론했던 바를 증험하겠지?” 하였다. 공이 죽은 이듬해에 나는 비로소 연경(燕京)으로 가면서 그 산하의 광대함과 풍속의 변천과 고금의 연혁을 살펴보고 나서 뚜렷이 부합하고 환히 깨달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공은 다시 일어날 수 없으니 장차 누구에게 말하며 누가 들어주겠는가. 아, 슬프다.
풍산(豐山) 홍양호(洪良浩) 한사(漢師)가 서문을 쓴다.
[주1] 구류(九流) : 선진(先秦) 시대에 있던 아홉 가지의 학술 유파를 일컫는 말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가리킨다.
[주2] 감석(甘石) : 전국 시대에 제(齊)나라 사람 감공(甘公)과 위(魏)나라 사람 석신(石申)을 말한다. 두 사람은 모두 천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주3] 장해(章亥) : 대장(大章)과 수해(竪亥)라는 사람의 합칭이다. 이들은 고대 전설에 나오는 매우 잘 달리는 사람들이다. 우(禹) 임금이 대장을 시켜서 땅의 동쪽 끝으로부터 서쪽 끝까지 걸어 거리를 재도록 했더니 그 거리가 2억 3만 3500리 70보(步)였고, 수해를 시켜 땅의 북쪽 끝으로부터 남쪽 끝까지 걸어 거리를 재도록 했더니 그 거리가 2억 3만 3570리였다 한다. 《山海經 海外東經》
[주4] 주구(州鳩) : 춘추 시대 주나라 경왕(景王) 때 악관의 이름이다.
[주5] 사마(司馬)의 병법 :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장군이자 병법가인 사마양저(司馬穰苴)로, 본래의 성은 전씨(田氏)인데 대사마(大司馬)가 되었기 때문에 사마양저로 불렸다.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병법에 뛰어나 재상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경공(景公)에게 중용되었다. 《사마병법(司馬兵法)》이 있다.
[주6] 홍양호(洪良浩) : 1724~1802.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52년(영조28)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 판서ㆍ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문장이 바르면서 숙련되고 법칙이 있어서 당시 조정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도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旅菴遺稿序[洪良浩]
曷之謂文。理寓象也。圖書出而天地之象形。書契作而人之文肇。文生於象。理顯於文。故孔門敎人。文居其先。爰有文學之科。然其所謂文。皆合理與道而名之也。下至春秋。異端始起。九流並騖。而各以其學文焉。未嘗爲無實之空言也。洎夫楚之辭漢之賦興而夸大靡曼。不根於理。文與道遂二。然中國之人。各師其師。各學其學。學有偏粹。辭有巧拙。而皆能自立門戶焉。惟我東。壤地褊而見聞寡。世之學者直取古人之糟粕。皮膚而影像焉。罕有能自得而成家者。譬如人之衣食也。丐粟於塲。販繒於市。以御饑寒而已。未能自種而自織。窺其廩枵然空耳。故其爲文無本。無本則竭矣。惟旅菴申公。以䧺才博識。加之以探賾鉤深之功。遠而甘石之經。章亥之誌。近而州鳩之譜。司馬之法。無不掊其扃而抉其奧。旁羅百氏而折衷於吾道。其發之言也。汪汪乎不窮。鑿鑿乎有徵。其形於文也。不襲前人之口。而自出吾肺腑。不拘攣於繩尺。而自中窽會。卓然成一家之言。可謂絶類之宏才。希世之通儒也。良浩少日掌試湖南。公以南士居高第。宦王京。遂與定交焉。叩其中。瞠然乎不可跂也。每與談古今析名理。窮日夜不輟。聚散升沈。殆三十年。而終始如一。信乎古所穪知音之交也。公老而南歸。旣歿。公之女婿李君永甲。持遺藁來徵序。覽其全卷。可傳者十七八。至若素沙問答。東音解。疆界志諸篇。盖天下奇文。而前人所未道也。後世必有知者矣。噫。余於是窃有所大恨焉。公常語余曰。吾輩生於海隅。目不見中華之大。讀古人書。皆紙上懸揣耳。吾與子倘有奉使西遊者。庶驗平日之所講乎。公歿之明年。余始赴燕。覽其山河之大。風俗之變。古今之因革。多有犂然而合。豁然而悟者。而公乎不可作矣。將誰言而誰聽之耶。嗚呼唏矣。豐山洪良浩漢師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