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김 (淸道 金)
□ 氏族의 연원
시조는 김지대(金之岱), 처음 이름은 중용(仲龍)이다. 고려 고종 6년 거란(契丹)의 난 때 아버지 대신 원수(元帥) 조충(趙沖)을 따라 출정(出征)하면서 충효쌍수(忠孝雙修)를 맹세하고 개선(凱旋)하였다.
그 뒤 문과 장원, 전주사록(全州司錄)에 나아가 선종(善政)을 베풀었다. 이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비서소감(秘書少監). 판사재사 지공거 추밀원부사(判司宰事 知貢擧 樞密院副使)를 거쳐 첨서추밀원(簽書樞密院)에 올랐고 서북(西北)에 출진(出陣), 은신(恩信)으로 선무(宣撫), 서북(西北) 40여 성(城)이 안정(安定)되어 그 공으로 오산군(鰲山君)에 책봉되었다. 오산(鰲山)은 청도(淸道)의 옛 이름이다.
원종 초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금자광록대부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金紫光祿大夫 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
에 가자(賀資)되었다.
김지대(金之岱)가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는데, 그의 선계(先系)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라고 족보(族譜)에 기록되어 있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편에 보면 김지대(金之岱)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悅)의 7세손으로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여흥(金餘興)의 셋째 아들이다.
□ 본관지 연혁
청도(淸道)는 본래 이서소국(伊西小國)인데 신라 유리왕이 빼앗아 뒤에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산(率伊山), 경산(驚山), 조도산(鳥刀山) 등 3성(城)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했다.
경덕왕 때 모두 밀성군(密城郡)의 현령(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에는 3성(城)을 합쳐 군(郡)을 설치, 청도(淸道)로 하였다가 곧 밀성(密城)에 속하였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공민왕 15년 다시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김(金). 노(盧). 백(白). 조(曹)씨 등이 있었다.
□ 주요 세거지
낙산파(樂山派). 의산파(義山派). 차산파(次山派). 의손파(義孫派). 경손파(敬孫派).
상주파(尙州派)
□ 파명록
‘갑자보(甲子譜)’에 의하면 시조 김지대(金之岱)의 대부터 경북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에 대대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6세 김한경(金漢慶)의 대에 평남 강동군(江東郡)일원으로 옮겨갔고, 김한룡(金漢龍)의 후손은 8세 김구전(金九田)의 대에 충남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일원에 터를 잡았다.
9세 김유손(金裕孫)의 대 이후에는 일부가 김포군(金浦郡군) 일원에 세거하였다. 11세 김생수(金生水)의 후손은 청도군(淸道郡) 매전면(梅田面)ㆍ화양면(華陽面) 일원에 터를 잡았고, 14세 김의산(金義山)의 대 이후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에, 김차산(金次山)의 대부터는 화순군(和順郡) 릉향(綾鄕)에, 김량필(金良弼)의 대 이후에는 대구(大邱)에 옮겨가 세거하였다. 15세 김유량(金庾良)의 대 이후에는 남원군(南原郡) 야양면(阿英面)에 터를 잡은 것 같다.
한편 16세 김백일(金百鎰))의 대부터는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에 세거하였고, 김창수(金昌壽)의 대부터는 은진군(恩津郡) 송산면(松山面) 일원에 터를 잡았으며, 17세 김득운(金得運)의 대부터는 해남(海南)에 세거하였다. 18세 김유원(金有元)은 임진왜란 때, 형과 함께 합천(陝川)의 고항(稿項)으로 이거하였고, 19세 이후에는 김제(金堤). 군위(軍威). 청양(靑陽). 하양(河陽)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11세 김승중(金承重)의 대를 전후해서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문화면(文化面) 일원에 터를 잡았고, 일부는 14세 김득종(金得宗)의 대를 전후해서 재령군(載寧郡)에 옮겨갔다. 18세 김시원(金始元). 김시형(金始亨) 형제는 호란(胡亂)을 피해 남하하여 제천(堤川)에 세거하였다.
김승자(金承疵)는 연천군(漣川郡) 마전(麻田)에 터를 잡았고, 일부가 17세 이후로 양주군(楊州郡)에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김구(金矩)의 대를 전후해서는 태인(泰仁)에 세거하였고, 일부가 15세 김세주의 대 이후 충주(忠州)에 터를 잡았다.
12세 김철문(金鐵文)은 영주(榮州)에서 세거하기 시작하였고, 김형석(金衡石)은 정읍군(井邑郡) 고부(古阜)에서 터를 잡고 태인(泰仁). 부안(扶安)등지로 옮겨갔다.
13세 김남두(金南斗). 김하근(金河根)은 부여(扶餘)에서 세거했고, 14세 김준수(金駿繡)는 은진(恩津)에서 시거(始居)하였다. 15세 이후에는 아산군(牙山郡) 신창(新昌),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등지에도 터를 잡은 것 같다.
한편 9세 김의손(金義孫)의 후손은 10세 김여의(金麗義)의 대 이후 고창군(高敞郡) 공음면(孔音面). 상하면(上下面). 해리면(海里面) 일원, 영광군(靈光郡) 공농면(孔農面)등지에 세거한 것 같으며, 김일동(金逸東))의 대부터는 거창(居昌)에서 살았고 김귀(金龜)는 평양(平壤)에서 터를 잡았다.
9세 김경손(金敬孫)은 성주(星州)에 옮겨가 세거했으며, 일부가 13세 김석견(金石堅)의 대 이후로 고령군(高靈郡) 구곡면(九谷面)에 터를 잡았고, 17세를 전후해서는 현풍(玄風). 의령(宜寧). 삭녕(朔寧)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11세 김맹원(金孟元)의 대부터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에 터를 잡은 것 같고, 13세 김여수(金麗秀)의 대부터 광주(廣州)에 세거했으며, 일부가 20세이후로 양구(楊口). 춘성(春城)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충북 중원(中原). 충남 아산(牙山). 전북 남원(南原). 고창(高敞). 전남 화순(和順). 구례(求禮). 경북 의성(義城). 달성(達城). 군위(軍威). 영주(榮州) 경남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거창군(居昌郡)일원. 황해도 신주(信州). 광주(廣州). 평남 대동군(大同郡)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4년에도 충남 부여(扶餘). 보령(保寧). 전북 고창(高敞). 남원(南原). 김제(金堤). 정읍(井邑). 전남 화순(和順). 구례(求禮). 경북 경산(慶山). 영주(榮州). 청도(淸道). 달성(達城). 경남 거창(居昌).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특히 경남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 일대는 1천여 가구의 청도김문(淸道金門)이 밀집해 살고 있는데, 김백일(金百鎰)이 연산군 폭정을 보고 이곳에 낙향한 뒤 선조들이 대대로 은거하였다. 두곡리(杜谷里)에 자리잡은 <쌍수당(雙修堂)>은 시조 김지대(金之岱)를 기리기 위한 재실로 충(忠). 효(孝)를 배우고 닦을 곳이기에 <쌍수당(雙修堂)>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 씨족사
“국환(國患)은 신지환(臣之患)이요, 친우(親憂)는 자소우(子所憂)라,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이면 충효(忠孝)를 가쌍수(可雙修)라[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곧 아들의 근심이니, 어버이를 대신해 나라에 보답하면 충성과 효도를 둘다 닦는 격이다.]”
김지대(金之岱)가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가면서 남긴 명시(名詩)다. 당시 전장의 다른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기이한 동물 그림을 그려 요행을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김지대(金之岱)는 이 한지(漢詩)를 방패머리에 적어놓았다.
이것을 본 당시의 지휘관 문정공(文正公) 조충(趙沖)이 그 내력을 묻고 감탄, 김지대(金之岱)를 발탁, 기용했다.
그 후 자손들은 <충효쌍수(忠孝雙修)>를 가훈으로 삼고 7백여 년 동안 실행에 옮겨왔다. 실제로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 두곡리(杜谷里)에 있는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대종재실(大宗齋室)의 이름이 <쌍수당(雙修堂)>이다.
충혜왕(忠惠王)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조적의 반란을 평정, 1등공신에 오른 김선장(金善莊)도 청도 김씨(淸道金氏) 가문의 인물.
‘고려사(高麗史)’에는 “김선장(金善莊) 등을 1등공신으로 삼아, 전각에 초상을 그려 걸고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전(田) 백결과 노비 10명을 주었다.”고 적혀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인물조(人物條)와 ‘오산지(鰲山誌)’에도 김선장(金善莊)의 공으로 그의 고향이 밀양군(密陽郡)의 한 현(縣)에서 청도군(淸道郡)으로 격상되었고, 그에게 군(郡)을 담당하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세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는 공민왕(恭愍王) 11년 동경도(東京道)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홍건적을 토벌, 수목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에 오르고 개성윤(開城尹). 밀직부사(密直副使). 전라도(全羅道) 도순문사(道巡問使)등을 역임했다. 이밖에도 고려(高麗)의 청도 김씨(淸道金氏) 인물로는 1363년 홍건적 침입 때 공민왕(恭愍王)을 흥룡사(興龍寺)로 호위하고, <김용(金鏞)의 난(亂)>때 순직한 김한용(金漢龍)-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이 있다.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은 조선(朝鮮) 개국공신. 시조 영헌공(英憲公)의 6세손이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이성계(李成桂)의 눈에 띄어 장군이 되고 대호군(大護軍)등 관직을 역임했다. 또 세종(世宗)때는 형조(刑曹).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는 등 3조(朝)에 걸쳐 여러 벼슬을 지냈다. 호강(胡剛)은 김점(金漸)의 시호.
병산공 김란상(金鸞詳)은 명종(明宗)때의 명신(名臣)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1537년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이 됐고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이언적(李彦迪). 권벌(權撥)등과 함께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당시 외척(外戚) 윤원형(尹元衡)이 윤임(尹任)과 사이가 나빠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 3명의 대신을 죽이려고,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을 동원, 3정승을 대역죄로 탄핵했다. 김란상(金鸞祥)은 이때 “간신들의 망동(妄動)하는 뜬 말로서 대신들을 탄핵할 수 없다”고 항의하다 견책을 당해 귀양살이를 한 것이다.
그는 선조(宣組) 등극 후 집의(執義)에서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 이조참의(使曹參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등을 거쳤다.
김난상(金鸞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진사(進士)에 함께 합격한 인연으로 두터운 교분을 유지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모르는 점을 묻고 격려하는 편지를 교환했는데, 이 편지는 모두 이황(李滉)의 문집에 수록돼 있다.
김극유(金克裕)와 김준신(金俊臣)은 임진란(壬辰亂) 때 구국의 활약을 한 청도 김씨(淸道金氏)들.
김극유(金克裕)는 임진란(壬辰亂)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활약,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있을 때 또다시 왜구가 쳐들어 왔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동래만덕령(東來萬德嶺)을 넘어 양산(梁山)으로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김극유(金克裕)는 이내 군사와 백성을 한데 모아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기려 김극유(金克裕)를 선무공신원종이등(宣武功臣原從二等)에 기록했다.
김준신(金俊臣)도 임진란 때 창의(滄義), 상주(尙州) 군수의 추천으로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함께 상주성(尙州城)을 지켰다.
왜군의 총공격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성(城) 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김준신(金俊臣)은 후사관(後事官)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 박호 등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32세. 뒷날 영남유생(嶺南儒生)들의 상소와 경연관의 장계(狀啓)로 그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져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김준신(金俊臣)의 충의비(忠義碑)는 경북(慶北) 상동면(尙東面) 판곡리(板谷里)에 세워져 있다.
이밖에도 김몽룡(金夢龍). 김희방(金希邦)등도 임진란 때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청도 김씨(淸道金氏) 가문의 충절정신을 세상에 떨쳤다.
김시성(金是聲)은 청도 김씨(淸道金氏)가 낳은 전설적인 무장(武將). 1636년 무과(武科)에 급제.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그의 호위를 맡았다. 그 후 함경병사(咸鏡兵使).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등을 역임했다. 그는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있을 때 민가에 내려와 주민들을 괴롭히는 호랑이 두 마리를 단 두발의 화살로 사살할 만큼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그를 1786년 사림(士林)이 남호서원(南湖書院)에 봉안했다. 이 밖의 조선의 인물로는 순조(純組) 때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김응하(金應夏). 고종(高宗) 때의 석학으로 ‘직재집(直齋集)’ ‘반구록(反求錄’등의 저서를 남긴 김익동(金翊東)등이 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조선(朝鮮) 순조(純祖)~고종(高宗)-생전의 가계나 내력, 심지어는 출생한 해와 죽은 해까지도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산과 들에 영원히 살아 숨쉬는 거인. 그는 청도 김씨(淸道金氏)씨가 낳은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일찍부터 실용적이고 정밀한 지도제작에 뜻을 두고 30여년 간 전국을 답사하면서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여 우리 문화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완하기 위해 33권(卷) 15책(冊)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한 지리학자이다. 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현대 과학을 이용한 실측(實測)지도가 나오기 전의 가장 실용적이고 정밀한 지도로서 청일(淸日)전쟁 당시 일본국의 군용지도로 쓰이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유명하다. 사학자 김병도(李丙燾)박사는 고산자(古山子)의 위대한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일점.일획에는 그의 애국.애족에의 심혈이 아로새겨져있다. 그는 국가가 해야할 일을 가난한 일개 학구로서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 손수 각인까지 해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에서는 그에게 아무런 보답도 없었다. 흔한 상마저 주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의 도(道)와 업(業)에 정진하여 우리나라 과학사상과 근대화 사상에 불멸의 자취를 남기고 갔으니, 그 위대함은 무엇에도 비길 바가 아니다. 우리는 김정호(金正浩)의 가계라든지 사생활. 경력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헌을 갖지 못했지만, 그가 남겨놓은 저작들을 통해 그의 위대한 업적은 물론 고매한 지도와 인격 및 굳센 의지와 성벽, 그리고 치밀주도한 사고(思考), 탁월한 창의력과 정력, 놀라운 재분(才分)과 열렬한 조국애를 엿볼 수 있음은 다행이다.“ 김태린(金泰麟)ㆍ김태현(金台鉉)ㆍ김외득(金外得) 등은 일제의 암흑기에 항일의 대열에 앞장섰던 독립유공자들이다.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해방 후 사회 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미군정(美軍政) 당시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던 김영의(金永義), 상공부장관을 지낸 김영찬(金永燦), 미얀마 아웅산사건 때 순직한 김동휘(金東輝)(전(前) 상공부장관), 전 대구매일신문(前 大邱每日新聞) 회장 김상준(金相俊), 전(前) 서울지법 부장판사 김재옥(金在沃), 전 경북대총장(前 慶北大總長) 김영희(金永喜), 연세대(延世大)교수 김찬국(金燦國)(신박(神博)), 김대호(金大鎬)(전(前) 서울지법 부장판사 변호사), 김재영(金在瑛)(11대(代) 국회의원)씨 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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