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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엘리사
제 1 절 엘리야(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인류가 남긴 유산들은 대부분 무덤들이다. 중국 진시황릉, 태국의 앙콜왓트,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밋 등등... 인류는 죽음 너머의 신비를 풀기위해 온갖 상상력 속에 수많은 종교와 미신을 만들어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신체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고 있으며 유전공학의 발달은 생명체의 근원의 존재론적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무상을 느끼며 탄식과 죽음에 두려움과 슬픔이 역사의 장마다 메아리칠 때 홀연히 불수레를 타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 승천한 신비한 사람이 있으니 곧 엘리야다.
성경에 기록된 무덤을 남기지 아니한 사람,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지 아니하고 간 길이기 때문에 그가 간 길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승천하여 간 길이라면 우리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엘리야의 승천은 구약 최대의 신비이다. 엘리야의 승천은 죽음을 한계상황으로 통곡하는 인간에게 죽음이 생명의 본질이 아님을 일깨워 준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의 길을 믿으려 하지 아니한 것처럼 그의 승천을 믿으려 하지 않고 산속에서 사흘동안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 어리석은 소동이 벌어진다. 이제 그의 뒤를 좇아가 보자.
족보가 소개되지 아니한 엘리야. 유대인들은 한 인물을 말할때 보통 五대까지 조상들을 소개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그런데 엘리야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 하나 입을 열어 그를 말하는 이가 없다.
엘리야는 어느 지파 사람 누구의 자손이며, 어디가 고향이며 등등 일체가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이다. 단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 라는소개밖에 없다. 寓居(우거)한다는 말은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그네처럼 일시적으로 기거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왜 성경은 그의 혈대인 族譜(족보)를 소개하지 않는가? 그는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승천하여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누구 하나 의문하고 문제 제기를 하며 그 이유를 찾아보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분명한 그 이유가 있음을 알수가 있다.
아담이래 모든 인류는 죽은 자이다. 성경적 죽음이다. (성경의 핵심적인 흐름-죽은자에 대해 참조)
인류의 족보란 죽은 자로서 죽은 자를 기록한 문서이다. 엘리야에게 족보가 없다는 말은 그는 죽은 자로서 죽은 자가 아니란 말이다. 죽음을 뛰어넘는 그에게는 죽은 자들의 대열인 족보에 기록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신비한 인물 하나가 나온다. 바로 멜기세덱이다.
[히 7:1-16]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이사람은 아비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근본이란 혈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인간편에서 보면 근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족보를 가지고 있는 인간과 같이 아니하며 죽음에서 자유한 존재라는 말이다.
엘리야 역시 그의 족보가 소개되지 아니한 것은 그는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구약인에게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승천의 길을 구약인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녹이 아담의 7대손으로 소개됨은 노아의 계보를 소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이다.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仙人(선인)이 되어 승천하는 길을 구약에서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서 생명의 실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 실상을 부활 승천으로 명백하게 보여 주시기 전에는 그것은 실체에 대한 그림자가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 15:49-50]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피가 흐르는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는 하늘 백성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입은 육신의 조상은 아담과 하와이다.
그는 타락으로 육을 벗고 변화되어 영원히 사는 길을 잃어 버린 자이다. 인간은 아직도 죽은 자 아담이 물려준 혈통의 족보를 소중히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한다.
[딤전 1:3-4]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끝없는 족보에 착념 말게 함이라..." 유대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느 지파와 가문의 몇 손인가를 따지는 족보학의 귀재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족보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과 래세에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교란 잘못 깨달으면 미신이 된다.
제 2 절 엘리야와 삼년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에 대한 예언.
엘리야가 나타난 시대에 왕은 아합왕이다.
그는 역대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 된다. 그는 아내 이세벨과 공모하여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케 하므로 백성들의 정신과 마음을 타락 시킨자였다.(아합 왕에 대해서 참조)
이때 엘리야라는 신비의 인물이 나타나게 된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는 아합왕에게 고하여 삼년반 동안 雨露(우로)가 이스라엘에 내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게 된다.
엘리야는 왜 이 경고를 하는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르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사심에서...?
그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아합왕과 백성에게 참 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우로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인 이슬과 비가 오지 아니하는 자연적인 것과.
하나님의 은혜의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이 있다. 삼년반 동안은 계시록의 환란 기간과 동일하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참 알곡을 가려 뽑으시는 기간으로 맹렬한 풀무불에 타지 아니하는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삼년 반의 우로가 없는 재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알과 아스다롯이 비를 줄 수 없는 신임을 증명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바알신은 원래 가나안의 주신으로 비를 내리는 신이다.
이 가뭄을 통하여서 왕과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하나님은 비를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엘리야를 잡기에 혈안이 되지만 그는 하나님이 숨기신다.
엘리야와 사렙다의 과부.
엘리야는 기근을 예언한 뒤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릴 시냇가에서 까마귀의 도움으로 지내지만 시내와 강이 말라 시돈당 사렙다의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명에 의해서 찾아간 과부는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불쌍한 여인이었다.
[왕상 17:10-12]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본문은 많은 사람의 단골 설교 메뉴이기도 하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바쳤을 때에 복을 주신다는 ....
그 의미을 살펴보자. 성구에서 보듯 이 과부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아들과 함께 먹을 한끼의 양식,곧 자살용 한끼인 셈이다. 이러한 말을 듣고도 엘리야는 그 한끼를 자신에게 달라고 말한다.
[왕상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엘리야는 자기의 욕심만 채우자고 하는 것인가? 과부의 형편을 모른단 말인가?
엘리야에게는 믿음이 있기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절망 가운데 있는자가 의지하는 마지막 하나를 버릴 때에 비로소 새로운 기회와 출구가 열리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이땅을 사는동안 생의 부요함과 안락을 구하다가 좌절한 사람을 구원하는가? 아니다. 래세를 소망하며 사는자가 자신이 붙들고 있는 마지막 하나 의지하는 것을 버릴 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렙다의 과부는 절대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한끼를 포기하고 순종할 때에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은 절대 믿음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절대 믿음인데 이것을 인간 스스로는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믿게 하시는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엘리야의 냉혹하고 무례한 요구에 욕설과 저주를 하고 개거품을 물고 신세 한탄과 넋두리를 늘어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치고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빵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하고 아들가 함께 죽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고 있었다.
[왕상 17:14-16]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엘리야의 말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이 과부는 정숙하고 현숙하며 믿음이 돈독한 여자였다.
자기의 목숨을 포기하고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므로 흉년이 끝날때까지 아들과 함께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끼의 빵대접으로 벼락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여자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 여자에게 보낸것도 그녀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눅 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위 말씀은 예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에 배척하는 그들을 향하여 엘리야와 사렙다과부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향으로는 보냄을 받지 아니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그 많은 과부을 두고 사렙다의 과부에게 보냄을 받은 것은 그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엘리사 시대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나아만 장군 하나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 시대에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 받을 사람이 많지 아니하다는 말씀이다.
신앙 생활이란 시간 많은 사람들의 취미생활도 사교모임도 관념론자들의 유희도 아니다.
참 신앙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엄숙한 결단의 생활이다.
그녀는 평소에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였기에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낸 것이다. 엘리야 혼자라면 천사를 통해서 먹고 마시게 했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 한끼의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이 과부의 심성과 믿음 앞에 찬사와 사랑을 보낸다.
제 3 절 과부의 아들을 살리다.
이 일후에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게 된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왕상 17:17-18]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나님은 선지자를 대접하여 축복을 주시는가 하더니 왜 그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실까? 참 이상하지 아니한가?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면 과부와의 사건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하나님은 본래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육신의 양식이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구약인들은 하나님을 이땅에서 사는동안 축복과 저주를 주시는 차원 정도의 하나님 밖에 알지 못했다. 이 여인이 아는 것도 죄를 지으면 저주를 주는 하나님 정도로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들이 죽자 "자신이 무슨 죄를 졌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하나님의 전부이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하나님은 일용한 양식이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아들의 목숨을 잠시 빼앗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에게는 부활의 비밀을 알려 주시며 이것을 읽는 자들에게는 신약에 예수가 그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왔음을 증거하는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구약인으로서 사렙다 과부는 생명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왕상 17:19-23]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뉘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구약에서 공식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삼대 속에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하나님을 묻어두신 다음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사건의 상징과 비유속에 그 비밀을 감추시다가 장차 산 자로서 승천할 자인 엘리야 때에 와서 비로서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게 하신다.
이 과부는 육신에 양식이 생겼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나 아들이 죽었을 때에는 엘리야를 원망하였다. 육신의 떡이 생겼을 때는 감사하고 아들이 죽었을 때에는 원망하는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그가 근본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인 몽학선생의 인도를 받는 상태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산자 엘리야를 통하여 부활의 신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의 대부분의 신앙인은 이땅을 사는동안의 禍福(화복)을 주시는 하나님 정도로는 믿으나 이 과부처럼 생명의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 말씀이 있어도 無用(무용)이 아닌가?
이 여자를 두고 히브리서 믿음장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약에 믿음의 선진을 두고 한 말이다. 구약에서 누가 죽은 자를 살리는 경험을 했는가? 곧 사렙다 과부를 두고 한 말이다.
모세는 권능의 지팡이를 받았으나 죽은 자를 살리지는 아니했다.
성경 최초로 죽은 자가 살리는 사건이 성경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엘리야로부터이다.
그를 따라 그의 제자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다. 예수의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듯... 사렙다 과부의 빵과 기름병 사건은 아들을 살리는 것과 별개로 보아서는 안됨을 알아야 한다.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 참조)
(참 죽음과 부활에 대해-예수와 사도들이 행한 부활의 사건들 참조)
제 4 절 갈멜산의 엘리야
엘리야는 삼년동안 사렙다의 과부의 집에서 기근이 끝날 때까지 숨어 은둔 생활을 한다.
그러면 엘리야는 이 삼년동안 어떻게 보냈을까? 과부가 주는 빵이나 먹으며 할일 없이 보냈을까?
아니다. 그는 기도하며 깊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들을 깨달아 민족과 나라를 건지기 위해 그 방법을 찾아 기도했다.
그의 가슴 속에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할 방법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아합왕에게 단신으로 도전을 한다.
[왕상 18:1]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은 도전장을 내게 된다.
[왕상 18:19-20]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는 안다. 바알과 아세라는 우상이며 거짓신이며 제사장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은 헛깨비임을... 그는 갈멜산에서 참 신이 누구인가를 온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대결을 제의한 것이다.
800:1의 대결 하나님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먼저 모인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스라엘은 二重의 신앙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 두 주인을 섬기는 이 신앙을 모든 선지자는 바로 잡으려 했지만 늘 실패하였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으로 나뉘인 이중의 마음을 어찌할 수 있는가?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열매 선악과란 무엇인가? 참조)
이들은 바알을 여호와로, 여호와를 바알로 오해하여 늘 섬겨 왔는데 이는 무지의 결과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삶의 화복을 주는 신으로 섬기는데 이는 무지이다. 이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하여 성령을 믿는 자의 마음 가운데 두고 계시는 것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백성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한 신을 섬기는 신부이지 두 신을 섬기는 淫婦(음부)가 아니다. 엘리야의 피맺힌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미 창녀가 되어 버린 백성은 말이 없다. 무지한 그들이 보기에는 한사람 엘리야보다는 850명의 양적 숫자가 더 든든하게 보였을 것이다. 백성의 호응을 받지 못한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제의한다.
[왕상 18:23-24]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백성이 엘리야의 공평한 제안에 대해 옳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엘리야가 제안한대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은 단위에 제물을 얹어 놓고 자신의 신을 부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낮까지 呪文(주문)을 외우고 呪術(주술)을 행한다. 그러나 번제단 주위에는 쉬파리만 모여들 뿐 아무 응답이 없다.
[왕상 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들을 향하여서 엘리야는 조롱을 보낸다.
[왕상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 조롱에 화가 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은 자신의 몸에 自害(자해)를 하고 온갖 방법을 다해 빌었으나 바알이 어찌 불을 낼 수 있겠는가? 바알은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우상일 뿐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 되었고 그제사장들은 거짓 선지자임이 들어났다.
이제는 엘리야의 차례이다.
[왕상 18:36-39]
저녁 소제 드릴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위 성구의 내용을 잘 살펴보라. 엘리야가 부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이 조상의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본 뜻임을 나타내고 있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본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이다.
이 사건은 구약 성경 전체 가운데 가장 통렬하고 통쾌하며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불의 역사다. 오늘날의 불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아합왕 시대에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이후 그 왕조의 말기에 해당한다 . 그시대의 끝에서 엘리야가나타나 불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준 것처럼 이 시대 끝날에도 엘리야와 같은 이가 나타나 성령의 참 불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젖은 성도를 깨우칠 것이다. 거짓 직업 종교 꾼들의 거짓을 벗겨야 한다. 불의한 세상나라와 결탁하여 양들을 미혹하는 종교 사기꾼들을 밝혀줄 엘리야는 언제 올 것인가?
엘리야라는 이름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이다.
그는 갈멜산에서 야훼 하나님을 증거했다. 엘리야는 아합의 상에서 먹던 850인을 기손 시냇가로 끌고가 죽이자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고 삼년반 동안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전국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의 일곱 번의 기도는 하늘을 열어 비를 쏟아 붓는다.
그는 신이 아니다. 초인도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약 5:17-18]
엘리야는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그는 오직 믿음만이 특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를 다스리고(계15:5) 불을 다스리는 천사를(계14:18)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천사숭배의 의식을 벗어나 성령의 불의 역사 가운데서 말이다.
제 5 절 호렙산에 오른 엘리야.
갈멜산에서 불에 응답을 통하여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인을 죽인 엘리야!!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며 죽이지 못하면 신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상 19:1-3]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미 참 신이 누구인가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신이 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얼마나 극악한 妖物(요물)인가를 알 수 있다. 엘리야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도 예수의 부활하심을 듣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사서 거짓 소문을 내게 했다.
[마 28:11-13]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본래 엘리야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여호와가 참 신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사명이 다하자 그는 광야로 나가 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다.[왕상19:4-7]
이에 대하여 여러 말들이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공갈 협박 목숨이 무서워 광야로 도망간 것이 아니다. 갈멜산에서 850인의 거짓 선지자들과 단신으로 대결하던 그가 목숨이 아까워 도망하였을까?
그는 자신의 사명이 끝이 났으므로 더이상 살아야 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는 천사의 도움을 받아 40주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 호렙에 이른 엘리야는 굴속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엘리야가 삼년동안 사렙다의 과부의 집에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능력을 받는 기간이었다면 호렙산에서는 생명의 근본 문제를 깨닫는 기간이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왕상 19:11-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위 성구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많은 뜻을 담고 있다. 엘리야가 산에 섰을 때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과 바위를 부수고, 지진이 있었고 불이 일어났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세한 소리만 있었다.
그러면 호렙산에서 모세와 백성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출 19:16-19]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 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히 12:18-21]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 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모세와 백성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그들 앞에 강림한 야훼 하나님을 보고 백성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공포와 두려움이 없다. 무슨 차이인가? 이땅 위의 삶을 생명으로 보는 자는 그 목숨을 잃을까 두렵고 무섭다.(하나님과 구약의 야훼-여호와 야훼의 속성)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엘리야는 새로운 생명 영생의 길을 깨우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누구에게는 두려움이 아닌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히 느껴지는가?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스런 아버지요, 바리새인들에게는 무서워서 경외해야 하는 두려움의 하나님인가. 예수에게는 아들의 마음, 영이 역사하는 것이며. 바리새인들에게는 종의 마음, 영이 역사하기에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였다.
오늘날도 아들의 영인 성령을 주어 율법 아래 종살이 하는 우리에게 사랑의 아버지가 되시건만 누가 여호와라 부르며 축복과 저주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가?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은 공포와 질투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 되고 있다. 바람과 지진과 불 그 속에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지만 모세와 백성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들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느끼는 하나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면목을 영원히 알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 갔다. 두려움은 상대적 의식세계이다. 그 마음을 극복하고 난 마음은 참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엘리야는 이미 생명의 비밀을 깨우친 사람이었다. 그는 구약의 시대를 살지만 신약의 예수의 시대를 경험하고있는 것이다. 모세가 인식하고 있는 神觀(신관)과 엘리야가 인식하는 신관이 같은 구약의 시대이지만 이처럼 다르다.
그러므로 구약인의 눈에는 승천한 엘리야에 대하여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시체를 찾으러 나서게 된다.
오늘날은 엘리야가 구약인으로서 만난 하나님과 예수가 말한 하나님이 같건만 구약인의 신관의 자리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율법과 십계가 있어 그들이 두려워하는 마음 위에 군림하여 축복과 저주의 공포의 신이 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인 종의 마음과 새로운 성령의 마음을 주셨다. 성령의 마음은 머리이다. 두려움의 상대적인 마음은 종의 마음이다. 우리 안에 성령의 마음이 역사되게 할때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다스릴 수 없다. 아들의 영을 주신 아버지가 다스리실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영을 받고 다시 종으로 돌아감은 어찜이뇨.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 그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산을 가르고 지진과 바람을 일으킨다 해도 그 속에 참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하며 저들이 두려워하는 여호와만 있을 뿐이다. 양을 협박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임을 깨우치라.
제 6 절승천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호렙산에서 생명의 신비를 깨달은 엘리야는 하산하여 하나님의 명에 의해 한 제자를 부르는데 그가 엘리사이다. 엘리사는 농부이다. 열두겨리의 소를 가지고 밭을 갈다 엘리야의 부름을 듣고 농기구를 불에 태우고 아비와 작별한 후 엘리야를 따라 나선다. 여기에서 그는 보통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를 따라 나서는 것은 단호한 결단력이 요구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삶의 현장에서 끝없는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왕에게 보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일로 인해 죽음을 예언하게 하신다.
(아합왕에 대해서 참조)
[왕상 21:17-19]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합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아가 왕이 되어 병이 들었는데 에그론의 신 바알 세불에게 사람을 보내어 병이 낫겠나를 점치게 한다. 하나님은 노하셔서 엘리야를 보내 죽을 것을 예언케 하시니 그대로되었다. 과연 기적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이다. 오직 성령의 믿어지게 하심만이 구원할 수 있다
아합과 아하시아의 종말을 본 엘리야는 승천할 때가 가까워옴을 알고 엘리사와 고별을 하려한다.
[왕하 2:1-2]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왕하 2: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왕하 2: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세 번에 걸쳐 자기에게서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엘리사는 맹세하며 못 떠나겠다고 말하며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한다.
왜 엘리야는 愛弟子(애제자) 엘리사와의 동행을 거부할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엘리야는 자신이 승천하는 장면을 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싶었다.
이 땅에 시체를 남기지 아니하고 승천하는 길은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길은 아담이 범죄하지 아니했다면 육의 몸이 변화되어 가는 길이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길이다. (성경은 왜 두가지 흐름이 생기는가? 참조)
그러므로 그 길은 보여줄 수 없는 비밀이 되는 것이다. 엘리사는 스승에 대해서 잘 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친히 목격해야만 한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를 목격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한 스승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데 어떠한 모습인지를 기필코 봐야 하기에 끝가지 동행을 하게 된다.
그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세 번씩이나 부탁하는 스승의 말에 눈물 방울 흘리며 돌아섰을 것이다. 50인의 생도는 그와 같았다. 엘리야는 심산유곡 깊은 곳에서 仙化(선화)하고 싶었으나 엘리사가 옷깃을 잡고 놓아주지 아니하는 확고 부동한 결심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하 2:7-11]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엘리사가 구한 것은 스스로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다. 엘리야는 제자에게 그의 손에서 놓여 어떻게 되는 것을 보면 갑절의 영감이 임하지만 보지 못하면 소용 없음을 예고하신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엘리야는 자신이 어떻게 될 줄로 안다. 그때에 엘리사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혼절해 버린다면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왕하 2:11-12]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그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 두사람 사이를 떨어지게 하더니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 하는 것이다. 엘리사는 두려움에 기절하지 아니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장엄한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구약의 어두운 밤하늘을 찬란히 빛나게 하는 이 광경을...
엘리사는 구약의 어두움의 눈꺼풀이 열리고 신약의 사람이 된다. 그는 신약의 예수의 부활 승천을 목격한 제자 중의 하나와 같은 사람이 된다. 그는 시체를 남기고 죽는 것이 아닌 飛化昇天(비화승천)의 길이 있는 새로운 생명의 현상을 보게 되므로 마음에서 죽음의 의식이 물러가고 새사람이 되어 갑절의 믿음으로 갑절의 능력을 행하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선지자로 등장을 한다.
그러나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 50인은 이 사실을 목격하지 못하고 스승의 시체를 찾으러 나선다.
[왕하 2:16]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그러나 엘리사는 막는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 요구하므로 허락한다. 차라리 저들로 찾게 하므로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왕하 2:17-18]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 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저들은 스승과 함께 있다 돌아온 엘리사를 보고 스승의 능력이 그의 머리 위에 임해 있는 것을 보았으며 승천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 말은 저들에게는 엘리사가 꾸며낸 이야기로 들렸다. 어리석은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스승을 승천 시키는 척하다가 어느 골짜기에 시신을 버렸을 것이라고 단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만약 끝까지 시신 수색을 막았더라면 그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흘 동안 시신을 찾아 헤메다 돌아와 부끄러워하였다. 이는 엘리사가 말한 승천을 믿지 아니한것에 대해서 부끄러운 것이다.
예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 또한 산자의 맥을 이어 받은 자들이다. 승천을 목격하지 못한 제사장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조작하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예수의 부활이 인류에게는 참으로 복된 소식이다. 열한 제자는 맛디아를 뽑을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라 말한다. 사도바울도 부활을 증거하다 로마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오늘의 교회는 부활을 증거 하는가? 입술로는 믿으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는 말하지만 마음에서 믿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도 성경의 산을 헤매며 예수의 시신을 찾는 자들 아닌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 자들이다.
엘리사는 스승이 남겨놓고 간 겉옷을 물려받고 많은 기적 이적을 행한다. 옷은 두가지가 있다. 겉옷을 물려 받음은 진리의 형식만 인계 받음을 상징한다. 속옷은 참 생명의 상징이다. 예수는 호지 아니한 속옷을 입었다. 겉옷은 네깃으로 나뉘었지만 속옷은 찢기지 아니하였다.
(십자가앞의 예수-예수의 겉옷과 속옷의 비밀 & 예수의 속옷, 호지않은 통옷 참조)
구약의 시대에는 진리의 형식인 껍데기만 알 수 있으나 예수는 속옷을 남겨 두셨는데 이는 생명의 실상이다. 누가 이 옷을 입을 것인가?
엘리야!! 구약인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신비, 그러나 신약의 자리에서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엘리야의 길은 죽지 아니하는 산 자가 가는 정상적인 길이지만 죽은 우리에게는 다시 사는 부활을 통해 가는 제2의 길이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장차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상의하신다. 예수는 산 자이므로 엘리야처럼 승천하실 수 있으나 그러면 죽은 자인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2의길인 부활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
하늘 나라는 산 자가 승천하여 가는 곳이지 죽은 자가 죽어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님을 알자.
제 7 절 엘리사가(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행한 일들.
스승의 승천을 목격한 엘리사는 스승보다 갑절의 靈感(영감)을 받아 수많은 기적을 행한다.
그 뜻과 의미를 살펴보자.
여리고 성의 우물을 달게 하다.
여리고 성은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물물이 좋지 아니하여 과일이 다 익기 전에 落果(낙과) 하는 일이 많았다. 엘리사는 그 우물에 소금을 넣어 단물로 변화 시킨다.
[왕하 2:12-2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하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출애굽 당시에 모세도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적이 있다. (광야사십년의 생활-마라의 쓴물에 대하여 참조)
이 여리고에는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한 생도들이 있었다.
샘물은 인간이 사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에는 물에 대한 연구로 그 중요성이 절실해졌다.
물에는 두가지가 있다. 샘물과 생수이다. 샘물은 목숨을 유지시켜 주지만 생수는 생명을 유지시켜준다.
아담 이래 모든 인류는 생명이 없는 자이다. 생수의 근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육신의 목숨을 유지시켜주는 샘물을 들어서 참 생수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수는 성령이라. 성령은 예수이다. 엘리사는 샘물에 소금을 넣어 그 근원을 고쳤다.
소금은 진리의 상징이다. 오늘날 종교 공해에 찌들어 익지 못하고 낙과하는 교인들이 많다.
생수의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고치는 길은 예수의 진리의 말씀 뿐이다.
우물물과 피빛 우물물
아합왕의 아들 여호람과 유다왕 여호사밧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우기 위하여 광야로 나갔으나 샘물이 없고 포위되어 죽게 되었을 때 엘리사를 찾으므로 구원을 받는 사건이다.
[왕하 3:16]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육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엘리야는 거문고 운율에 따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언했고 그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개천을 팠더니 많은 물이 고였다. 이는 용출하는 생수였다. 이 물을 먹고 사람과 짐승이 해갈을 하였다. 그런데 이 물이 태양광선에 굴절되니 반사되어 피처럼 보이게 되었다.
[왕하 3:22-25]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찌기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취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가로되 이는 피라. 필연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그 성읍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라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맷군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모압왕은 아침 해가 뜰때에 멀리 이스라엘 진영에 붉게 반사되는 물을 보고 저들끼리 싸워 흘린 피로 알고 전리품을 취하기 위해 갔다가 멸망을 당하였다.
사단 마귀에 포위되어 죽게 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로 기갈을 면하고 예수의 보혈의 피를 이용하여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생도의 아들을 채무에서 구하는 사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채무 때문에 아들을 노예로 빼앗길 상황에 처한 어머니가 엘리사에게 와서 구원을 호소하니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여 그걸 팔아 아들을 구원하게 한다.
[왕하 4:1-7]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하여 채권자인 마귀의 노예들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 빚을 값고 우리를 해방시키었다. 기름은 생명의 상징이며 진리의 상징이다. 여인이 가지고 있는 기름병은 빈 병이다.
기름은 믿음이며 옳은 행실이다. 구약인은 믿음으로 행함이 따르지 아니하는 빈 병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이다. 행함이 없는 자들은 마귀의 참소를 받아 마귀의 노예들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기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손에 놓여 그 기름으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었다.
기름 곧 성령으로 마음의 성전의 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리자.(재림과 종말에 대하여-신부는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 참조)
제 8 절 수넴 여인의 잉태의 기적과 아들을 살리는 일.
수넴이라는 마을에 한 여자가 있으니 엘리사가 그곳에 들렀을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줄을 알고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이후 엘리사가 갈때마다 매번 처음과 똑같이 정성을 다한 대접이었다.
[왕하 4:8-9]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하지만 이 여자는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石女(석녀)였으며 그의 남편은 이미 늙은 상태였다.
엘리사는 그녀의 변함없는 믿음을 보고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구하라.
하지만 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보고 잉태하는 기적을 행한다.
이는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수태고지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셉과 동정녀 마리아-구약의 성령 잉태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하여 참조)
[왕하 4:13-17]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많은 뜻들이 있으나 다른 부분에서 쓴 것들이 많아 읽는 이가 알아서 느껴 보아야 할 것이다 .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부족한 것을 구하라 해도 구할 것이 없었다.
정작 자식이 없지만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다.
엘리사가 아들을 잉태할 것을 예언하지만 믿으려 하지 아니한다.
여기에서 엘리사는 이미 성령 잉태에 대해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원래 부활의 비밀을 알게 되면 성령 잉태에 대해서는 같이 깨달아지는 법이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을 낳게 된다 .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생명의 법칙을 알고 그 생명의 하나님을 찾으며 믿은 것은 아니다.
수넴 여인이 아는 선지자의 하나님은 화복을 주시는 정도의 하나님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구약의 사람들은 현재 사는 생명, 곧 영원히 죽은 자로서 죽기 위해 살고 있는 생명 외에는 알지 못하므로 현재가 아닌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이가 없었다.
이 여인은 죽은 자로서의 죽은 하나님은 알고 있었지만 근본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의 생명을 거두신다. 이는 이 여인에게 근본 생명의 하나님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추수하는 어느날 아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 엘리사는 갈멜산에 隱居(은거) 중이었는데 수넴여인이 찾아와 발 앞에 엎드린다.
잉태시킨 능력을 알고 믿는 여인이므로 죽은 자도 살려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먼저 지팡이를 게하시에게 주며 가서 아이를 살리라 하지만 여인은 게하시를 믿지 아니하고 엘리사가 손수가서 살려주기를 청한다.
여인의 판단은 옳다. 만약 게하시를 따라 갔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게하시는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없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부활의 생명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게하시는 스승을 속이다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옮겨 받은 자이다. (문둥이 나아만 장군을 치료하는 일 참조)
[왕하 4:34-35]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죽은 자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
오직 산 자만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산 자이신 예수는 죽은 우리의 입에 산자의 입을 맞추어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근본 생명의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사건은 후에 산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산 자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을 말씀하시기 위한 구약 속의 신약의 실체들임을 알아야 한다.
제 9 절 독이 든 국을 해독 시키는 일.
길갈에 심한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였다. 이때 선지사의 생도 중 하나가 들에 나물을 캐러 나갔다가 야생 등넝쿨을 발견하고 그곳에 열린 외를 따다가 국을 끓이기 위해 솥에 넣었다.
[왕하 4:38-41]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흉년이 들면 인간은 양식 아닌 것으로 연명하려 든다. 주린 자의 눈에는 독이 든 것도 먹음직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해지면, 기근이 닥치면, 양들은 거짓목자가 주는 독초를 먹고 배탈이 난다.
오늘날 야등넝쿨처럼 먹지 못할 거짓 복음이 얼마나 많은가? 참 선지자는 신음하는 양들에게 해독제를 먹여야 한다.
보리떡 20개와 채소의 기적.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를 가지고 일백명을 먹이고도 남는 신약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다.
이러한 일이 구약에서 행하여지기 때문에 신약의 예수님도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왕하 4:42-44]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위 말씀은 신약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말씀이므로 기록할 수가 없다 .
읽는 이들의 믿음이 너무 옅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은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제 10 절 문둥이 나아만 장군을 치료하는 일.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존귀한 자이다.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에 비하여 강대한 나라로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온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도 아니하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담그라 한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공손하지 못한 태도에 분개하여 돌아가는데 그때 따르는 종들이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의 말대로 해보아도 손해날 것이 없지 않느냐고 간청하자 그대로 행하여 문둥병이 치료되는 사건이다.
[왕하 5:10-14]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요단강에는 지리적 요단강이 있고 성령의 요단강이 있다.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아니한 구약에서는 지리적 요단강을 들어서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광야사십년의 생활-사도바울이 바라본 홍해의 의미와 요단강에 대해&요단강 건넘의 의미 참조)
엘리사가 나아만을 요단강으로 보낸 것은 지리적 요단강이지만 성령의
강으로 보내어 다시 태어나는 重生(중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다.
그렇다고 누구 한사람 몸이 깨끗해지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는 지리적 요단강에서 목욕을 한 것에 불과하다.
나아만은 몸을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성령을 통해 신생하고 있음의 상징이다.
이에 대해 신약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눅 4:27공동번역]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나아만은 찾아와 감사를 표하고 예물을 드리나 엘리사는 거절한다.
예수님도 이와 같으며 제자들에게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 하신다.
오늘날 감사헌금 하라고 하는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이와 같으리라마는 그렇지 아니하다면 게하시와 같은 자들이다.
게하시는 자신이 고치지도 아니하였으며 엘리사의 이름을 팔아 나아만에게 예물을 도적질한 자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 이름을 팔아 자신들이 고치지도 아니했으며 감사까지 강요하는 것이 게하시와 같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저주를 받아 나아만의 문둥병이 옮겨 문둥병자가 된다.
스승님 너무 하십니다?? 이 일은 사탄의 거짓임을 나타내는 일이기에 동정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왕하 5:20-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 5:26-27]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할 말이 많지만 줄이자.
제 11 절 요단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기적.
생도들이 엘리사와 함께 하는 집이 비좁자 엘리사의 거처를 짓기 위해 요단으로 가서 나무을 베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요단 강물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던져 도끼가 떠오르는 마법 같은 사건이다.
[왕하 6:1-7]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별 의미 없이 읽을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암시하는 바가 많이 있으나 읽는 이가 어려워하는고로 읽는 이의 영감에 맡기겠다.
다만 도끼의 자루는 남성을 상징하며 도끼날은 여성의 상징이다.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지는 낡은 도끼는 하나님의 사람이 거할 집을 짓는데 부적합하다.
타락하여 낡은 인간은 하나님의 집의 상징인 선지자의 집을 지을 수 없다.
요단을 통해 거듭난 새 도끼로 선지자의 집은 지어져야 할 것이다.
人肉(인육)을 먹는 일과 아람 군대를 물리치는 기적.
아람의 군대가 도단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 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번번히 패하자 엘리사로 인함인 줄 알기 때문에 엘리사를
죽이지 아니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이다.
이때 엘리사는 천사를 동원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여 사마리아 성으로 유인하여 사로잡는다.
이스라엘 왕은 죽이자고 하나 엘리사는 음식을 주어 돌려 보낸다.
이는 엘리사는 평화의 진리를 깨우치고 참 생명을 이어 받은 자이기 때문에 피흘림을 원치 아니한다.
하나님의 도는 예수를 통하여 평화의 도로 우리에게 전하여졌다.
그러나 아람 왕은 군대를 다시 모아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게 된다.
이때 시간이 오래되자 성안에서는 양식이 떨어저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자식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왕하:6장 28-29]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요시아왕은 이러한 일이 엘리사가 이성안에 있음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여 엘리사를 죽이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음이다.
그 아비 아합이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엘리야를 죽이려한 것처럼 그의 아들 역시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엘리사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호렙산에 오른 엘리야 참조)
엘리사가 성중에 있음으로 오히려 구원 받는 줄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義人(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멸망될 성이 구원을 얻는다.
소돔이 멸망할 때에 의인이 없어 망하지 아니하였는가? (아브라함,믿음에 대해-의인 열명이 없는 소돔성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참조)
사마리아 성이 이처럼 인육을 먹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된 것은 사마리아 성이 우상숭배의 결과이지 엘리사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땅히 소돔 고모라처럼 멸망 받아야 할 사마리아성을 의인 한 사람 때문에 구원하신다. 천군을 동원하여 아람군이 도망가게 한다.
자식을 잡아먹고 고운 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하는 먹을 양식이 없는 주림의 시대에 의인은 어디 있는가?
(한스아는 약 칠리터 銀 한세겔은 노동자의 사일에 해당하는 품삯)
의인 한사람 예수로 인해 인류는 아비규환에서 구원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제 12 절엘리사의 죽음과 죽은자를 살리는 시체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도 죽음이 다가왔다. 그런데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인간의 죽음은 병과 함께 오는 것이다. 이 죽음을 어찌 피하랴.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요하스 왕에게 아람을 칠 예언을 하고 죽게 된다.
[왕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엘리사는 살아서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 죽어서도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다.
엘리사를 통한 많은 기적 가운데 그가 행한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라 하겠다.
엘리사는 스승의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승천을 목격하여 그러한 길이 있음을 알고 믿는 자이다.
(승천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참조)
그는 생명의 참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다. 그의 시신은 썩고 뼈만 남아 있는 곳에 죽은 자의
시체가 닿자 그 시체가 살아났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생전에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 온 사람이다.
그의 부활의 믿음은 골수에까지 사무쳐 배어 있음에 시체가 닿자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부활을 기다리는 잠이다.
모세의 버금가는 갖가지 기적을 행한 엘리사가 뜻없이 행한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오직 후에 오실 메시야가 행할 일을 구약의 자리에서 청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엘리사를 통하여 구약에서 오실 아들의 그림자를 남겨두고 있으니 읽는 이는
예수 없는 구약이 없으며 구약 없는 예수가 없음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리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닌 낮은 차원의 의식의 눈은 사심으로 성경을 보게 할 뿐이다.
엘리사 엘리야
첫댓글 할렐루야
할렐루야
감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