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직물업의 발달사를 보면 1930년대에 이미 직물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34년경부터 평남 덕천지방에서 명주공장을 설립 운영하던(족답기 15개 규모)일부 월남민들이 1938년경 풍기 동부동에 40평 정도 공장 2동 신축 수족기 32대, 족답기 8대로 직조를 시작한 것이 풍기직물(인견)의 시작이였다.
6.25 동란 이후 이북 거주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월남민들이 대거 풍기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대부터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잡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인견 최대 생산지역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934년 풍기 방적이란 상호로 가내 수공업의 최초 공장 설립, 사진 뒤쪽 오른편에 계시는 분이 설립자 송석홍씨(송세영씨 소장)
◉ 1936송석홍씨는 단독으로 원경준씨로부터 건물을 임대받아 풍기직물이라는 상호로 변경 운영
◉ 1937재창업, 신규공장 창설로 직조기계공장 설립이 급속도로 파급
◉ 1938풍기직물공장조합을 구성하여 직물산업의 토대 마련
◉ 1942중앙선 철도가 개통됨으로서 원사를 쉽게 구입하고 제품판매도 용이
◉ 1945해방을 맞이하면서 직물공업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됨
◉ 1948펄프가 주원료인 인견직물의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인견사를 대치품목으로 선정, 양복, 양장지의 안감을 생산하게 되는 인견직물산업의 일대 혁신적 궤도에 올랐다.
1959년 가내 수공업 전성기 때의 수직공장 광경(풍용직물 송국용씨 소장)
◉ 1965획기적인 직물생산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전기가 되었다.
◉ 1996 인조로 제직된 옷감을 겉옷으로 입을 수 있는 여러무늬 생산이 가능함에 따라 원단을 특수 제직하여 인견직 수요가 서서히 증가되는 추세가 가시화 되었다.
◉ 2000
기준 생산량과 매출액은 인견직물 1,200만야드 아세이테이트 100만 야드 나일로 3,600만야드 폴리에스터 및 합성직물 9,200만 야드로 직물 1억 야드 이상을 생산하는 소형 집산지로서 국내 최고 기능을 갖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