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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교회 발자취 (1903년 4월 15일 설립)
1, 광암교회의 설립과 나주의 선교전개 과정
2, 광암교회와 소영 박화성 작가
3, 연도별 교회 연혁
1, 광암교회의 설립과 나주의 선교 전개 과정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1926년 8월 5일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의 시대별 분류를 계발시대(啓發時代 1865년-1892년), 공의회시대(公議會時代 1893년-1906년, [공의회시대를 선교사공의회<1893년-1900년>와 합동공의회<1901년-1906년>로 분류), 독노회시대(獨老會時代 1907년-1911년)로 구분하였으면 맨 처음 노회가 조직된 독노회시대는 경충대리회(京忠代理會), 평북대리회(平北代理會), 평남대리회(平南代理會), 황해대리회(黃海代理會), 전라대리회(全羅代理會), 경상대리회(慶尙代理會), 함경대리회(咸鏡代理會)등 7개 대리회가 각 지방의 교회를 관리 하였다.
광암교회는 공의회 시대중 합동공의회 시대에 설립되었으며 광암교회가 설립된 1903년의 합동공의회 회장은 구례선(Grierson.R 1898년 9월 캐나다장로회에서 파송받아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선교사였다.
전라도 선교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사명이었다. 전라북도는 전주와 군산에 선교부를 마련하였으므로 더 이상 개척지가 없었으나 전라남도는 아직까지 미개척지였다. 그래서 1895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전라남도 선교를 유진벨(Bell, Eugene 한국명:배유지 1868-1925)목사와 레이놀드(Reynolds, William Davis 한국명:이눌서 1867-1951)목사에게 맡겻던 것이다. 당연히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도시 나주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유진벨 목사는 나주를 방문하였다. 당시 나주는 전남의 중심적인 큰 성곽도시로서 선박이 왕래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 영산강 하구에 연하여 수운(水運)을 통한 각종 산물의 집하장으로 서남 해안 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나주는 풍요로운 농촌으로 인근에 영산창(榮山倉)이 있어 이곳에서 세곡을 서울까지 운송하였다..
나주선교부 건설과 좌절은 먼저 두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할수 있는데 첫단계는 1896년 12월 나주 선교부 개설 결정으로부터 1897년 9월까지의 사택 구입과 건설 그리고 퇴거, 두 번째 단계는 1897년 9월 이후의 선교의 계속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
유진벨목사와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 한국명:전위렴 1865년-1908년)목사는 1896년 11월 이후 4주간의 선교 후보지 물색여행여행중 나주를 방문하였으며, 이 여행의 보고를 기초로 해서 미국 남장로교선교회는 1896년 12월 나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주에서는 원래 관청 건물을 사려고 노력했지만 이 계획이 성사되지 못하자 유진벨 목사는 땅을 사서 새로운 집을 짓기로 하였다. 1897년 3월 12일경에 유진벨목사는 어학선생 변창연(邊昌淵)함께 나주시 외곽에 위치한 언덕을 사서 커다란 선교부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해서 시내에 위치한 초가집을 사서 변창연의 가족으로 하여금 살게 하였다. 유진벨 목사는 이집의 방 두캉을 사용하고 다른 한켠을 책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학선생이 외국인과 친밀하다는 사실 자체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켯으며 이로 인해서 건축 및 선교사업은 위축되었고 유진벨 목사는 이러한 소요와 반대의 주된 원인이 “외국인으로서 부인도 없이 혼자서 왔다”는 사실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반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유진벨 목사는 나주선교를 계속적으로 시도하였는데 그 이유는 “평양도 처음에는 거친 반대를 받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선교부를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이었다. 유진벨목사는 나주에서 한달간의 생활을 마치고 4월1일 서울로 돌아왔다.
비교적 사회적 안목이 넓은 해리슨(Harrison, William Butler 한국명:하위렴 1866-1928)목사와 함께 나주에서 선교부지를 구입하려고 노력하던 유진벨목사는 5월3일 서울을 출발하여 4주에서 6주 예정으로 해리슨목사와 나주에 내려 갔는데 그때 딸기모종등 각종 묘목까지 가지고 갔다. 5월 19일 드디어 두사람을 자신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사는데 성공했는데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나주사람들은 선교사들에게 집을 판 주인에게 각종 욕설을 퍼부었으며 이로 인해서 유진벨목사 일행은 너무나도 힘든 외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번의 나주 여행은 나주 시내에 자신들이 살수 있는 집을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6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유진벨 목사는 나주 시내에 산 집을 헐고 거기에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나주 관리들은 외국인이 내지(內地)에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에 헌의해서 허가를 얻기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반대에 부딪치자 유진벨목사는 급히 서울로 돌아와서 서재필을 통해 나주의 관리들에게 선교사들이 내지에서 선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도록 공문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나주 관리에게 보낸 공문도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유진벨목사는 1897년 9월2일 12시경에 다시 나주에 집을 지을수 있는 목재를 가지고 왔으며 목수4명을 고용해서 이미 사두었던 초가집을 허물고 다시 짓기 보다는 개축하여 사용할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는데 조선이라는 국호는 없어지고 대한제국이 되었으며 고종은 임금에서 황제로 칭호를 바꾸었다. 그리고 10월 1일을 기해서 목포항이 개항되어 자유무역항이 된 것이다.
10월 28일부터 11월 1일까지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회의에서 선교회는 남쪽지방의 선교부를 나주가 아닌 목포로 결정하여 유진벨 목사에게 목포에 선교부 건물을 짓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나주를 완전히 포기 한 것은 아니었는데 유진벨목사의 어학선생인 변창연은 여전히 나주에 거주하면서 게속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이렇게 해서 복음의 멧세지를 들은 사람이 4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나주사람들의 위협이 너무나도 심해서 변창연 마저도 1899년 가을에 어쩔수 없이 목숨이 안전한 목포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
나주의 선교는 1897년 3월부터 1899년 가을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지속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주의 선교는 비록 집을 사두었지만 비거주 방문 선교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장로회 선교회가 나주를 포기하고 목포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유진벨목사의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유진벨목사는 “지난 9월 나주 방문때 나주 사람들이 나를 때리겠다고 혹은 죽이겠노라고 위협하였다”라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자유무역항으로 개항이 되어서 외국인의 신변이 보장될거라는 기대와 그당시 중요한 교통수단은 선편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목포와 제물포는 쉽게 배로 여행을 할수 가 있었으며 목포가 개항이 되면 많은 인구가 목포로 유입될것이라는 전망이있었다.
1899년 11월에 유진벨목사는 새로 선교사로 부임한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오기원 1867-1909, 의사의 자격도 갖춘 목사임)목사와 함께 전라남도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어학훈련도 시킬겸 나주를 7일동안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수용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웃에게 터놓고 말할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마치 니고데모처럼 밤에만 예수님을 만나러 가곤 하였다. 그런데 폐질환에 걸린 어떤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예수님을 믿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유진벨목사는 오웬목사를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에 남겨 놓고 목포로 되돌아 갔다.
1900년 1월에는 전주의 테이트(Tate, Lewia Boyd 한국명:최의덕 1862-1929)목사와 함께 유진벨목사 오웬목사가 나주를 거쳐 광주까지 방문하였으며 10일 정도의 방문기간을 가졌다. 나주의 선교는 다소 고무적이어서 이제는 예수를 믿겠노라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였다. 광주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한 이래로 유진벨목사는 나주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가 없어서 2월에 다시 나주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1월달에 예수를 믿겠노라고 말했던 사람이 하나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로지 나환자와 거지만 예뱅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나환자 신자는 1905년에 죽음으로 나주에서는 최초로 기독교식 장례를 치루었던 것이다. 이렇듯 나주의 선교는 처음부터 활발하지 못했지만 1899년 나주군 삼도리(三道里)교회(현재는 광산구 삼도동)가 설립이되고 1903년 4월 15일에 광암교회, 1904년에 나주군 덕림리(德林里)교회, 1905년에는 나주군 방산리(芳山里)교회, 1906년에는 나주 상촌(上村)교회가 설립이 되어 점차 복음의 지평이 넓어져 가게 되었다.
우리 광암교회 110년의 역사에 빼놓을수 없는 두분의 선교사가 있다. 오웬목사와 프레스톤목사이다.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오기원 吳基元)은 1898년 내한하여 목포에 최초의 진료소를 개설하고, 1904년에는 광주선교부를 개척하였으며, 전라남도 장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42세의 나이로 순직하여 광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이다 그는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트(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햄덴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Edinburgh)에 유학하였다. 해외 선교지에서 의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5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며 1900년 12월 12일 미국 북장로회 화이팅(Georgiana Whitting) 의료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목포에 합류하여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오웬은 선교 초기 의사와 목사로서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으나 그 후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그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여서. 그의 한국 선교 업적은 의사로서 보다는 목사로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1899년 가을에 쓴 편지 하나가 있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는 미국산 석유가 처음으로 보급되어 “등불‘을 키게 되었는데 오웬은 이 등불과 비유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빛의 나라(미국)가 이 어둠의 나라(한국)를 비추고 있다. 밤이 밀려 들 때 밤 그림자를 통해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면 불빛들이 별들처럼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 불빛의 출처는 우리의 모국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미국산 석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한국의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1904년 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열린 연례회의는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웬 선교사는 벨 선교사와 함께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이사하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선교 기지를 개척하였으며 그는 호남지방 전도 사업에 헌신하면서 190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선교사공의회 회장으로 선임(언더우드 후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합동공의회시대(1901~1906)에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예를 들면 1901년 광주 송정리(松汀里)교회를 벨과 협력하여 설립하고, 1902년 해남 선두(先頭)교회를 설립하였다. 1903년 나주 광암(廣岩)교회를 설립하였고 1904년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12월 25일 광주 양림리(楊林里)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산(冠山)교회도 설립했으며 1905년 나주 방산(芳山)교회, 보성 무만(武萬), 신천(新泉)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고흥 옥하(玉下)교회를 설립했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Preston, J. F., 한국명: 변요한 邊約翰), 맥컬리(McCallie, H. D., 한국명: 맹현리 孟顯理), 코잇(Coit, R. T., 한국명:고라복 高羅福) 등과 나주 광암(廣岩), 장흥 진목(眞木), 순천 평촌(平村)교회에서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독노회(獨老會) 기간에 해당하는 1907년부터 그가 순직한 1909년까지에는 화순, 보성, 광양, 나주 지방 등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화순읍(和順邑)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보성 운림(雲林)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 광양읍(光陽邑)교회, 보성 양동(陽洞)교회와, 나주 내산(內山)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남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광주 중흥(中興)교회에서 벨 선교사와, 장흥 삭금(朔金)교회에서 니스벳(Nisbet, 柳西伯)과, 나주 서문(西門)교회에서 탈마지(Talmage, J. V., 한국명: 타마자 打馬子)와, 나주 상촌(上村)교회에서 뉴랜드(Newland, L. T.,한국명: 남대리 南大理)선교사 등과 각각 상계하여 시무한바 있다.
또 한분 프레스톤(Preston, John Fairman 한국명:변요한 邊約翰)목사님은 1875년 미국 조지아에서 출생하여 테네시주의 킹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1903년에 내한하여 변요한(邊約翰)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1940년까지 37년간 목포 광주 순천 등 호남 지역에서 선교사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호남지역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1903년 한국으로 파송된 프레스톤 선교사는 부인(Preston, Annie S.)과 함께 목포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 강진지방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그후 선교 지역을 목포 북동 쪽 100km 까지 확장하여 선교본부를 광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광주에 거주하면서 4년 동안 목포를 왕래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였으며 나주 광암(廣岩)교회에도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1905년에는 목포에서 영흥학교 교장으로 학교 건물을 건축하기도 하였으며 1907년 선교본부는 목포를 다시 선교 거점 도시로 개설하였으며, 프레스톤 선교사 부부는 맥켈리(McCallie, H. D., 한국명: 맹현리 孟顯理) 낙스(Knox, Robert 한국명:노라복 魯羅福)선교사 등과 함께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때 강진의 학명리교회, 매곡교회(1907) 해남의 원진(1907), 맹진(1909) 남창(1910)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광주에서 의료선교를 맡고 있던 오웬이 별세하였다. 광주에서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선교사가 유진 벨(Bell, Eugene., 한국명 : 裵裕祉) 선교사뿐이어서, 부득이 프레스톤 선교사는 다시 광주로 옮겨 오웬 선교사의 후임자로 사역을 해야만했다.
1908년 광주에서 숭일학교 초대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에는 학교건물을 건축하였다. 1912년, 프레스톤 부부선교사는 순천지방으로 다시 이동하게되었으며, 1913년 4월 순천에 선교사 주택이 완성되어 순천으로 이사하였다.
순천은 필요한 인적 물적 장비를 모두 갖추어진 상태여서 선교지로 개설한 한국 최초의 유일한 선교 거점 도시였다. 크레인(Crane, John Curtis 한국명: 구례인 具禮仁)과 힘을 합하여 순천에 매산학교를 설립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다시 티몬스(Henry Loyola Timmons, 한국명:金로라)와 함께 순천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하고, 농촌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또한 순천에서는 가곡리교회(1914)와 평중리교회(1919), 사룡리교회(1920) 설립에 기여하고 1918년에는 순천읍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여수지역에서 여수·장천·봉양·우학리교회와 여수서교회, 봉전리교회, 서정교회에서 동사 목사로도 시무하였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장(1923)을 비롯하여, 여수와 순천지역 여러 교회의 설립과 당회를 조직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밖에도 완도 관산리교회(1913)를 설립하고, 나주 삼도리교회(1915), 덕곡교회(1916), 해남 고당리교회(1917), 무안 성남리교회(1917) 등에서 시무하였다.
1940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여 조지아주에서 데카터 장로교회와 아틀란타 노회에서 활동하다가, 1975년 4월 30일 100세에 별세하였다.
# 참고문헌
1. 조선예수교회사 (조선예수교장로회, 1926년)
2. 전남노회 75년사 (전남노회, 1992년)
3.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1979년)
4. 호남교회사연구 (호남교회사연구소, 1995년)
5. 미국 남장로회 내한 선교사 편람 (한남대학교, 2008년)
2, 광암교회와 소영 박화성의 단편소설 한귀(旱鬼)'
전남노회 소속 광암교회(나주시 금천면)를 무대로 쓴 박화성의 한귀(旱鬼)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내용은 광암 들녘에 비가 오지 않아 주민들은 금성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드렸지만 여전히 비가 오지를 않았다. 이러한 일이 3년간 연속적으로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3년째 맞이하는 광암 들녘에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는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이때 기우제를 주관했던 광암리 마을 사람들은 묘지를 찾아다니면서 묘 자리가 이상하게 생긴 묘마다 다른 데로 이장(移葬) 하라는 말을 듣고 이장을 하였지만 끝끝내 비가 오지 않자 마지막 결론이 광암리에 서양 귀신을 믿고 있는 광암교회가 있어서 산신령이 예수쟁이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동내에서 교회당을 때려 부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광암교회 성섭(김재섭집사)은 교인들과 의논을 하고 새벽에 교회당을 지키어야 한다면서 전교인이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밝아오면서 마을 주민들은 교회당을 부수기 위해서 삽과 곡괭이, 망치들을 들고 교회당을 향하여 가는데 난데없이 번개불이 천둥을 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당을 쳐부수겠다고 왔던 지역 주민들이 혼비백산하여 모두들 도망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이 남겨진 것이 한귀(旱鬼)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썼던 박화성은 광암교회 김재섭집사가 형부가 되며, 박화성 언니는 박경애이었다. 김재섭집사는 광암리에서 농토를 많이 경작하는 부농 김치묵(광암교회 창립교인)의 자녀로 출생하여 광주 숭일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학교 영어교사로 일을 하였다. 박화성 언니는 전주기전학교 교사로 활동을 하다가 선교사의 중매로 결혼을 하고 나주 광암리에 자리를 잡고 광암교회 내에 광암학당을 설립하였다. 학당장은 김재섭집사가 맡았으며, 그의 부인은 교사로 부부가 활동을 하면서 낮에는 어린아이들에게 또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비롯해서 교육을 사명으로 알고 이곳에서 사역을 하였다.
'한귀'라는 소설을 발표했던 박화성은 1904년 4월 16일 목포에서 출생을 하였으며,본명은 경순이고 호는 소영이다. 일찍이 부모님을 따라 목포 양동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린 박화성은 프레스톤(Preston, John Fairman 한국명:변요한 邊約翰)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성장하면서 목포정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시 서울로 유학하여 정신여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이 일로 그는 신앙의 힘으로 성장해 갔었다. 이 무렵 숙명여학교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자 전학을 하였다.
다시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진학을 하여 그곳에서 '추석전야'라는 작품으로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데뷔하였다. 박화성 작가가 쓴 소설은 거의가 식민지시대의 조선 노동자 착취와 조선 여성들의 인신매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설이었다. 이러한 소설의 내용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서술을 하였으며, 이 일로 식민지시대에는 단편 소설 19편과 장편소설 '백화', '하수도공사' 모두가 소외받고 있는 가난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었다. 분단 시대에는 장편으로 '고개를 넘으면', '벼랑에 피는 꽃', '내일의 태양' 등을 발표하였다. 60년대는 '약자의 편에 서서', '홍수전후', '즐겨선택 한 십자가' 등을 발표하였다. 그가 남긴 작품(장편, 단편)은 1백권이나 되며 1988년 1월 30일 84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2010년 10월 16일 박화성연구회(회장: 서정자) 주최로 목포문화원에서 제4회 박화성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김수진목사(교회사가)는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과 박화성이야기'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였고 위의 내용은 2010년 10월 21일 기독공보에 실렸던 김수진 목사의 기고문이다]
박화성의 단편「한귀」는 작가의 언니 경애가 살던 나주 광암리의 광암교회에서 있었던 실화로 “내가 가장 정열을 쏟았던 작품중의 하나이며, 쓰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어떤 형용할수 없는 강열한 의욕과 의무감에서 이작품을 썼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언니가 그 동네로 시집을 가서 살았기 때문에 1935년 무렵엔 반나절씩 걸리는 길을 터벅 터벅 걸어가서 며칠씩 묵으면서 취재를 했다“고 증언한다.
「한귀」의 주인공인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고 신앙심 깊은 성섭과 그의 부지런하고 현실적인 아내의 모델은 작가의 형부(김재섭집사)와 친언니(박경애)이다. 박화성은 기독교가정에서 유아(幼兒)세례를 받고 성장했다. 부모님이 먼저 세례를 받았고, 이어 박화성도 유아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의 신앙이 독실한 데다 박화성이 막내여서 어머니의 사랑이 지극했으므로 박화성은 어머니의 영향을많이 받았다.
박화성은 열 살 때 특별한 경험을 한다. 한 달 넘게 중병을 앓던 중 꿈에 당시 유명한 이기풍 목사가 나타나 먹여주는 약을 먹고 두 달 보름 만에 낫는 체험을 한다. 그 때 일에 대해 박화성은“내 현몽의 소문이 교회에 퍼지고 “하나님이 다시 살려 내신 것이라”는 단안이 내려졌다. 부모님도 나도 내 목숨은 그때 다시 이어받은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열 살 때 받았던 비몽사몽간의 환상은 지금 까지도 내 망막 속에 새로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귀」는 1935년 11월 《조광》에 발표된 작품으로. 1934년의 대홍수로 곡식을 잃고
가옥마저 파괴당한 나주 영산포 일대의 농민들이 그 한해를 참담하게 간신히 넘긴후 다음해에는 지독한 가뭄으로 연이어 지옥과 같은 생활을 겪는 이야기 이다. 비옥한 땅이지만 적절한 수리시설을 갖추지 못한 이 일대의 농민들의 한많은 생존조건과 극한 상황속에서의 몸부림이 이 소설에서는 목을 죄는 듯한 현실감으로 서술되고 있다.
#참고문헌
1. 한국일보, (1986년 8월 31일)
2. 기독공보, (2010년 10월 21일)
3. 제4회 박화성문학 페스티벌, 주제발표; 책상위에 펼쳐있는 성경책과 박화성 이야기, 김수진목사 (2010년 10월 16일)
4. 제6회 박화성문학 페스티벌, 주제; 박화성문학과 기독교사상, “박화성소설에 나타난 기독교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서정자, 초당대, (2012년 11월 3일)
3. 연도별 교회 연혁
- 1904년 4월 15일 : 선교사를 보조했던 조사 김윤환전도인이 이지역의 유지인 김치묵 영수와 함께 복음전도의 일을 하고 광암리 333번지에 20여평의 초가 3간 가정집을 구입하고 광암교회 기도처로 확정함
- 1910년 : 변요한선교사
- 1920년대 : 노응표선교사. 김영환, 최치삼, 김동섭, 이유장집사가 교회를 봉사하고 섬김.
- 1935년 : 이병련 전도인. 김재섭, 김재선, 차구천집사가 교회 봉사(선교부 지원으로 유지)
- 1945년대 : 신복균전도사. 해방을 맞이 함(성도 20여명)
- 1948년 : 박천익전도사
- 1950년 : 6, 25동란 기간에도 예배를 드리고 노회에서 전도인을 파송하여 교회의 모습이 정비됨
- 1955년 : 윤영수전도사.
- 1956년 : 조인덕전도사
- 1958년 : 임길만전도사 부임
- 1959년 : 교단 분열시에 통합교단으로 속하기로 함,
- 1963년 : 이안철전도사
- 1967년 11월 : 정유섭전도사. 광암리 361-1에 예배당 신축부지 236평 매입
- 1968년 12월 6일 : 예배당 32평 신축후 입당
- 1969년 : 김용규전도사. 사택 15평 신축
- 1970년 : 박형구전도사
- 1972년 : 김남일전도사
- 1973년 8월 : 예배당 현관 종탑을 세움
- 1974년 2월 : 한국 기독교 사회봉사회로 부터 혼합곡 21석을 대여받아 교회부지 409평을 구입
- 1975년 8월 3일 : 예배당 내부 수리 및 의자 33개 구입
- 1976년 3월 2일 : 박준수장로, 최옥승, 안기정, 박종만, 임영락 안수집사 임직 (광암교회 최초로 장로 임직)
- 1977년 11월 8일 : 한국 기독교 사회봉사회에서 200만원 대여받아 교회부지 396평 매입
- 1977년 : 박겸락전도사
- 1978년 : 김정문전도사
- 1980년 : 김영욱전도사
- 1982년 4월16일 : 남방현목사. 교육관 14평 증축
- 1983년 6월 : 예배당 내부 및 강단과 찬양대석 수리
- 1983년 7월 : 최옥승, 안기정장로임직 및 임복님, 김점순권사 임직
- 1983년 12월7일 : 허동진전도사 부임
- 1984년 6월 24일 : 박준수 장로 재 취임(광주로 이사후 다시 본교회로 옴)
- 1985년 11월26일: 허동진목사 위임
- 1987년 20월20일: 성전부지로 3필지 496평을 매입하고 노회 유지재단에 입단
- 1991년 12월14일: 박종만장로 임직
- 1994년 11월 : 양한묵목사 부임
- 1996년 11월16일: 양한묵목사 위임 및 명복남 조재일 김형곤안수집사 임직, 김추연 김순록 김광량 이민례권사 임직
- 1997년 4월27일 : 강은주장로 취임
- 1999년 9월 17일 : 국유지 4필지 429㎡를 교회부지로 매입
- 1999년 10월22일: 새성전 기공예배 드림. 예배당 1층71평, 2층11평, 3층11평 약 93평 목사관 1층33평, 2층10평 약 43평
- 2000년 11월19일:예배당 헌당 및 박종운 임판순안수집사 임직, 나덕남권사임직, 정정님권사추대
- 2004년 12월31일: 양한묵목사 정년퇴임으로 사임
- 2005년 1월 25일 : 박겸락목사 부임
- 2008년 6월 1일 : 이종문목사 부임
- 2009년 1월12일 : 새해맞이 전도축제(서울염산교회 지원)를 15일까지 실시
- 2010년12월11일 : 박준수장로 원로장로추대, 박종만장로 임복님 김추연 김광량권사 은퇴 김정준 김종곤 이종원안수집사임직 김이례 김분심 강순엽 박 진 권사임직 최채님 박애순 김처녀 최상례 윤복순 박복희명예권사 추대
- 2013년 4월6일 : 110주년 기념예배 및 조창수, 곽태운 안수집사, 홍순남 권사 임직식 홈커밍데이. 교육관겸 식당 50평 준공
- 2013년 4월13일: 110주년 기념 동네 어르신 초청잔치
- 2016년 6월4일-6일 : 라파의료선교 봉사단 의료 선교
- 2016년 8월 15일 ; 나주시기독교단협의회 광복절 조찬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