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함라 삼부자집익산 함라 삼부자집은 조해영 가옥, 김안균 가옥, 이배원 가옥의 세가옥을 일컬어 함라 삼부자집이라고 한다.대략 100여 년 정도된 고택이 옛 전통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서인지 복구가 시급해 보인다. 익산시 함라면에 소재하고 있는 함라 마을은 함라산을 주산으로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소가 누워있는 형세에서
누워있는 형세에서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고 이곳의 수동마을은 누워있는 형세에서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하는 곳 이어서 큰 부를 이룰 명당터라고 한다.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큰 부를 이룰 명당터라고. 함라 삼부잣집들은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어 부잣집이 형성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마을의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도 토담, 돌담, 전돌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혼재되어 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전통가옥들과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묵은 돌담길은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돌담길도 볼만한 풍경이지만 전통가옥인 김안균 가옥과 조해영 가옥, 이배원 가옥 등 함라 3부잣집이 있고
마을 한편에 자리한 문화재자료 제85호 ‘함열향교대성전’이 있어 전통마을로써의 품위를 더해주고 있다.
2006년도에 문화재로 지정된 함라마을 토담길의 옛스러운 정취와 운치가 어릴적 고향길 같다.
함라 삼부자집으로 불리는 집들의 담장은 일반 농가의 담장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집보다 높아서 발돋움해봐도 담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김안균 가옥 안내판
김안균 가옥 (함라면 함열리 457번지 지방민속자료 제23호)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없는지 굳게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이 가옥은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저택이라고 한다.
문간채의 길이가 어찌나 길던지 앵글을 한곳에 가까이 찍을 수가 없어 멀찍이 물러나 담아볼 정도로 굉장히 길다. 누군가? 문간채를 들여다보는 분이 ㅋ
김안균 가옥은 들어가 볼 수 없다. 사람이 살지 않아 대문이 굳게 닫혀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이 집이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건물 안에는 잡초이 무성하다.
정려각(旌閭閣)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또는 충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정표(旌表)로 남기는 것인데 정려각 안쪽을 보면 비석이 있는데 얼핏 열녀를 기리는 비(碑) 같다.
삼부자집 한귀퉁이의 정려각(旌閭閣)은 누구의 효자, 열부 정려인지 알길은 없지만 세월의 흔적이 가득 담은 퇴색한 모습으로 길손을 반겨주고 있다.
함라마을의 담장은 토석담이 대부분이다. 붉은 황토를 개어 돌과 함께 쌓은 것들이다. 순수한 토담과 돌담 등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담장은 일반적인 시골 담보다 조금 높은 편이다. 보통 130cm~150㎝ 정도 높이다.
함라마을은 민속촌처럼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200년쯤 전으로 되돌아가면 만남직한 예스러운 마을에 여전히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다.
이배원 가옥 추녀에 매달려 있는 범종이 무거워 보인다.
서로 마주한 담에서도 높이에 차이가 있어 비교된다. 전통적인 담장은 보일락 말락 정도의 높이인데 이건 거의 시선을 차단하고 침입을 방지한다는
목적이 보인다. 농민들이야 너나 나나 사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 굳이 가릴 이유도 없겠지만 생활환경이 다른 부자들은 사는 모습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돌담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황토에 돌이 섞인 토석담이다. 돌담, 토담, 전돌담 등이 골고루 있다는데 대부분 토석담이다.
우리는 어찌어찌해서 주민의 도움으로 조해영 가옥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관리가 안되어 잡초와 방초로 거의 폐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가옥으로 들어서자 눈에 띄는 조헤영 가옥의 사랑채이다. 주로 예전에 소금장수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그 옛날 법석이든 보부상이며 행수들이 떠나고 없는 곳간채는 고스란히 그날의 영화를 대변해 주는 듯 이제는 소금장수가 기거했던 가옥도 잡초가 무성하다.
조해영 가옥(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현재는 안채와 별채만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있는데 건축연대는 1918년이라고 한다. 다른 집처럼 보수가 되지 않고 방치된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안의 시설을 돌아볼 수 있고 현재 사람이 살고있지 않고 있다. 열두 대문 집이라 불릴만큼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몸채, 부속채, 별채만이 남아 있다.
마당 한켠에는 옥개석과 주춧돌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누마루의 아(亞)자 난간이 궁궐의 전각 난간처럼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조해영 가옥을 들어가는데 변변한 출입문이 없다. 담장을 뚫어 놓은 느낌이다. 뒤쪽으로 가보니 정식 솟을대문이 있는데 비대칭으로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하다.
조해영 가옥에서 또 하나 감탄하게 만든 건 안채와 별채를 구분하는 꽃담이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 역할을 한다.
집의 안과 밖을 구분짓고 영역을 확정하는 것이 담장의 역할인데 집 안에 이런 담은 본연의 역할을 벗어나 정말 특별하다.
담장 가운데 십장생으로 장식을 해서 매우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궁궐의 느낌이 났다. 궁궐을 짓던 대목장이 지었다니 경복궁의 십장생을 모방했으리라.
외부 손님들이 들어왔을 때 안채를 가려주어 여인네들을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데 담장에 십장생 그림을 선택한 것에서는 외부 손님들에게도
장수를 기원하는 배려도 느껴진다. 이 꽃담에 정식으로 십장생을 새겨 넣은 곳은 경복궁 말고는 또 어디서 보았든가. 당시론 좋은 아이디어다.
서울의 대부호의 가옥보다 더 멋진 가옥이었는데 내부를 너무 돌보지 않아 사라져가는 옛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껴 가슴이 아려온다.
거실 입구에 현관의 역할을 하는 포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형태는 완전 일본풍으로 당시 일제강점기에 한옥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장식이나 재료는 고급스럽고 화려했지만 문짝이나 난간은 낡았고 지저분한 짐들이 여기 저기 쌓여 있어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팔작지붕의 늘어진 처마 곡선이 제대로 지은 집이란 걸 알려준다. 당시 궁궐을 짓던 최고의 목수가 지었다고 한다.
조해영 가옥의 일부인데 일본식 건물 형태로 지은 별채이다.
별채는 완전 일식이다. 조해영 가옥은 1920년쯤 지어졌다니 전통 가옥이라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중의 우진각 지붕이며
툇마루 대신 복도를 채택한 것이며 유리문을 단 형식에서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마루 아래로 붉은 벽돌을 쌓아 막은 것도 한옥의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조해영 가옥의 장독대이다. 많은 머슴과 식솔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부자집은 벌써 장독대부터 남다르다는걸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이 비석은 조해영가옥 초입에 세워져 있는 비석으로 대동법실시로 인조, 효종대 실학의 선구로 유명했던 영의정 김육에 대한 선정비이자 불망비라고 한다.
김육은 호남지역의 대동법실시를 여러번 건의하여 유언으로 임금에게 간절히 당부하였는데 그가 사망한 이듬해 1659년에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진것이라고. 대동법실시과 관련된 김육불망비는 전국에 많지만 호남지방에 특히 함열현에 건립하고 현존하는데에 그 의미가 깊다고 한다.
전면 중앙에는 “영의정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망비(領議政金公堉輕?保民仁德不忘碑)” 그 좌측 하단부에 “산부대상공해부심고금(山不大 相公 海不深 古今)”
이라는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기해 이월 이라고 음각되어있다.이건 가져온 글)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함라 삼부자집 마을이지만 인적이 드물고 주변이 조용하기만 하다. (사진/편집: 해찬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