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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면 42개 자치마을의 연혁과 유래
□ 연혁
- 백제시대 : 두힐현
- 신라시대 : 두원현
- 고려시대 : 두원현
- 조선시대 : 두원면 -> 산의 지세가 야산으로 형성되어 언덕이 콩깍지처럼 엉켜있다하여
두원(豆原)이라고 하였다.
□ 지역특성
- 온순·순박한 면민성과 충·효·예절의 고장으로 고유미풍양속를 전승하고 있다.
- 전통적 농수산 지역으로 농업기반시설 취약 및 면민소득은 저조한 편이다.
- 간척지 개발 및 관광명소 산재로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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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곡1(지북마을)
이마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유씨가 입촌하여 마을 형성하다 자손이 번창치 못하고 어디론가 떠난후 약 200년전 영광정씨 시필이란분이 입촌하여 정씨 자자일촌을 형성하였으며 사슴이 즐겨 먹었다는 지초가 많아 지곡이라 하다 해방후 마을명칭을 지북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곡2(지남마을)
옛날에 지록이라는 사람이 동리터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의 첫 자를 따서 지곡이라 하였으며 마을이 분할되어 남쪽에 있으므로 지남이라 한다.
학곡3(두곡마을)
원래 학곡리에 속하며 고흥읍 수덕산과 접한 마을로서 마을명을 山麗을 피하여 마을 뒤쪽 산간 깊숙이 위치한다하여 “두地避”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 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시 두地避을 산꼴자기가 막혁있다는 뜻을 골곡(谷)자로 훈차하여 두谷이라 改稱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곡4(학림마을)
本之 흥양군 두원면의 지역으로 1915년 일제 초기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곡,지곡,학림의 마을을 합하여 학곡리라 하였으며, 원래 마을명을 "굴너머"(골짜기)로 불리어 왔으나 옛날 묘를 쓰기 위해 청강일 하고 있는 곳을 지나는 老僧이 암벽이 나오면 더 이상 파지말고 下棺하라 일렀으나 듣지않고 암벽을 파니 두 마리의 鶴이 나와 숲에 앉았다하여 산명은 鶴山, 마을명은 鶴林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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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1(관덕마을)
1914년 일제초기 지방행정구역 폐합시 관덕,예동마을을 합하여 관덕리로 하였으며 마을북쪽에 白沙亭이 있어 이조때 이곳에서 白沙亭를 만든 곳이므로 처음 마을명을 “백사정”이라 불리어 오다가 이조중엽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지관이 마을뒤 맹금산의 정기를 받아 덕망이 있는 인재를 후세에 많이 배출될 것이다 하여 觀德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덕2(예동마을)
원래는 마을명을 “옛골”이라 불렀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시 마을의 앞뒤 山勢가 원형을 이루고 있어 온화하고 禮節을 숭상하는 마을이라 하여 禮洞으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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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1(풍류마을)
元來는 흥양군 두원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月下,風流의 마을을 합하여 風流里로 하였으며, 마을 뒷산의 山勢가 동쪽으로는 玉女彈琴형이고 서쪽으로는 仙鶴歌舞의 形局이라하여 四季節 風致가 좋은 것을 뜻하여 마을명을 風流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풍류2(상촌마을)
원래는 풍류리에 속하며 풍류리의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웃뜸”이라 불리어 왔으나 1956년 행정구역개편시 漢子로 表記하여 마을명을 上村이라 改稱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류3(월하마을)
원래는 풍류리에 속하며 마을앞에 반월산이라는 조그만한 산이 있어 반월산의 줄기가 뻗어 있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달月자와 그 산아래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래 下자를 붙혀 마을명을 月下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예명을“달하골” 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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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1(대동마을)
지금으로부터 약1500년전 현재의 大錦里 大洞마을 人口에 동녘 햇살을 먼저 품에 안은 名山 泰山과 서북쪽의 得粮灣을 등에 업고 德山럽게 南쪽을 바라보는 半德山, 그 반덕산 中脈 下麗에 位置한 大洞마을은 同福吳氏를 爲始하여 많은 大姓氏가 集合하여 大村을 이룸으로 當時 이름하여 “큰골”마을이라 하였는데 그후 漢字 大洞으로 改稱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대금2(대덕마을)
元來는 大洞리에 속하며 옛날 어느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山勢와 地形을 보고 마을 이름을 大德으로 하면 큰덕을 볼 것 이라 하여 대동에서 분동될 때부터 大德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금3(금산마을)
본래 大錦里에 속하며 옛날 새벼리,구리샘을 합하여 마을명을 “한절골”이라 불리어 왔으나 1956년 행정구역개편시 마을뒤에 錦城山이 있고 마을앞으로 小平野를 이루는 黃金沃土가 있어 마을명을 錦山이라 改稱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대금4(신흥마을)
원래는 금산,둔정동,새버리란돔과 원돔 즉 눌개,날이꽃등이 합하여 신성리라 불리어 오다가 1940년 일제말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錦山에서 분구되어 독립마을이 되면서 마을地形이 개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으므로 한때 마을명을 “눌개”臥浦라 칭하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새롭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新興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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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1(구룡마을)
日帝초기 1914년 지방행정통폐합시에 九龍과 內塘을 합하여 두원면 龍塘리로 하였는데 元來 구룡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뒷산의 山勢가 마치 아홉 마리 용의 형태로 마을을 감싸고 마을앞 못 안에는 용모양의 바위가 아홉 개 있어 이못에 살던 용이 昇天하였다는 由來가 있어 마을명을 九龍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당2(내당마을)
始初 入基設村 당시 島堂山下의 지형이 주결망형국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元來는 “결망동”이라 불리어 오다가 日帝初期 1914년 지방행정구역통폐합시 마을명을 내당이라 개칭하여 변경없이 현재에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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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대전마을)
元來 흥양군 두원면지역으로서 1914년 일제초기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시 송정,연강등을 합하여 대전리로 하였는데 옛날 마을名을 “수머리”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앞에 큰 밭이 있어 “큰밭골”이라 하다가 한자로 음차하여 大田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白沙老松이 장관을 이루는 大田海水浴場이 있어 有名하다.
대전2(송정마을)
원래 흥양군 두원면 대전리였으며 1914년 일제초기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시 대전리로 편입되었으나 1956년 우리나라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독립마을로분리될 때 옛날 마을 아래쪽 산기슭에 소나무가 정자와 같이 우거져 있어 마을 名을 松亭으로 칭하여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전3(연강마을)
元來는 大田里에 속하며 마을주위에 큰밭이 많다고 하여 한때 “큰밭골”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 지방행정구역개편에 따라 “燕飛”라 칭하였으나 정부수립 이후 1975년 1월1일 자연부락으로 마을앞산의 山勢가 마치 제비가 날으는 形局이라하여 마을名을 燕岡으로 改稱하여 현재에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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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회1(예회마을)
원래 흥양군 두원면의 지역으로 고려말엽 丑問方에 배씨 이씨가 살았다하여 "裵李洞"이란 소지명이 있으며 지형이 싯돌과 같으므로 여호라 칭하였으나 이조고종(1880)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폐합시 예날 예조판서(禮曹判書)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곳에서 쉬어 갔으므로 마을사람들의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을명을 예회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회2(상예마을)
원래 혜호리에 속하며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통폐합시 예회,상예 마을을 합하여 예회리라 하였으며 그후 리동행정개편에 따라 분리되면서 마을地形이 나나리별 形局으로 펼쳐있다하여 나나리별처럼 志操가 있고 예의범절이 있으며 또 집을 지을때는 높은곳에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마을명을 上禮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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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두1(진목마을)
本是 城頭里에 속하며 옛날 이곳에 참나무가 많아 진목이라 불리어오다가 마을 우측에 금성산의 山勢가 마치 白虎形局이므로 호랑이 머리지점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한때 마을명을 虎頭라 칭하였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眞木이라 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두2(차수마을)
元來 城頭里에 속하며 마을 뒷산에 차나무가 있어 마을명을 “차나무등”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때 차수라 칭하여 오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부락으로 독립되면서 옛마을 由來를 계승하는 뜻에서 차수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두3(성리마을)
원래 豆原懸의 현치소에 속한 마을로서 당시의 성의 흔적이 마을 주위에 남아 있으며 처음 마을명을 “성머리”라 불리어오다가 한자로 음차하여 城頭라고 칭하였는데 두원현의 유서깊은 마을로서 여산송씨 集固世居地로 形成되어 현재까지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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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1(영동마을)
지금으로부터 500년전 設基당시 영동이라 칭하였으나 그후 수려하여 이곳에 영적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글을 읽었다 하여 마을명을 永迪이라고 불리어오다가 1460년 밀양박씨가 入基設村하면서 다시 永洞이라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오2(오수마을)
원래 영오리에 속하며 삼면이 야산으로 둘러 있어 산수가 수려하고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 浩然之氣가 용솟음 치는 고장. 元來 마을 地形이 까마귀 집 모양으로 형성됐다 하여 鳥巢라고 불리어 왔으나 마을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아 한때 오동나무골이라고 稱하였으며, 그 무렵에 오동나무골을 漢子로 음차하여 마을명을 梧樹라고 개칭 지금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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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1(와룡마을)
元來 마을앞까지 바다여서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 있어 선창개라 稱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시 主山이 龍의 형국이라 하여 臥龍이라 개칭하였으며 杜谷으로부터 朴씨가 입주하기전 한씨,오씨,김씨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불효였던 김씨가 3대독자아들이 익사하자 영주지가 못된다 하여 大地主였던 김씨가 떠나므로 타성씨도 점차 떠나 버렸다. 이곳이 빈터였기에 약210년전인 1785년 박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산2(대산마을)
元來 용산리에 속하며 마을 서쪽으로 뻗은 등서리 위쪽을 上垈, 아랫쪽을 下垈라 칭하였으며 마을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마을명을 “대뫼”라고 불리어 오다가 日帝末에 柳時奎외 선비들은 한때 마을명을 개명하여 瑞山시이라고 했으나 약150여년전 전부터 대자, 뫼 산자를 漢字로 표기하여 垈山으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산3(신월마을)
원래 垈山마을 아래쪽에 있다하여 아랫垈山이라 하여 왔으나 1992년 10월 1일자로 分洞되어 마을명을 "새롭게 뜨는 달"이라는 한자뜻으로 "新月" 마을이라 칭해 온다.
용산4(금계마을)
원래 용산리에 속하며 풍수가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뒷산에 金鷄包卵形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金鷄라 하다가 河川이 흐르므로 시내계(溪)자로 바뀌어 마을名을 金溪라 칭한 이래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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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1(서신마을)
元來 新松里에 속하며 옛날에는 艮屯이라 불렀고 신송리의 중앙에 위치한다하여 內松라이 하였는데 마을地形이 臥牛形局으로서 남쪽으로 소머리와 소뿔 북쪽으로 소다리, 마을중앙이 소 유방지점에 해당한다 하여 이곳에 통샘물이 용솟아 인근마을까지 식수로 사용하고 있어 일명 샘물을 牛乳라고 하였으며 1914년 일제초기 지방행정구역개편시 新松里로 통합되면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西新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송2(반송마을)
元來 신송리에 속하며 예전에 소반등이라 하였고 이마을에서 고흥읍 주월산으로 배(船)가 넘어 갔다 하여 마을명을 “배실”이라 불리어 왔으나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개편시 신송리로 통합되면서 소반등을 漢字로 盤松이라 개칭한후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독립마을이 됐다.
신송3(동신마을)
元來 신송리에 속하며 이조시대에는 艮屯또는 삼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마을명을 "麻田洞"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초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시 신송리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마을名을 東新이라 개칭한후1956년 리동행정 구역개편에 따라 독립마을이 된 이래 변경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송4(외신마을)
운암산의 원지류인 天皇山洗의 끝에 뻗어 安泰峰이 솟아 있는 西南쪽에 位置한 마을로서 鶴谷川, 新松川,龍山川, 合流하고 있어 옛날에는 艮屯이라 불리어 오기도 했다. 元來 신송리에 속해 있으면서 마을이 2개 마을로 떨어져 있었다. 윗마을은 새멀이라 불리어 왔고, 아랫마을은 매작들이라 했는데 현재는 경지정리 관계로 아랫마을이 윗마을로 합해졌으며, 外新이라 부르기 전에는 般洞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제초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개편시 외신이라 개칭하였는데 광복이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독립마을로 되면서 변경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26년 8월 6일부터 1949년 1월 8일까지 두원면사무소가 있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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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반1(반산마을)
본 반산마을은 약400년전 조선조명종때 밀양박씨시조 혁거세55代孫 應愼이 이곳에 터를 마련하고 약30년후 여양송씨시조14代孫 雲霖이 동강면 마륜에서 이곳에 정착하여 朴,宋 兩姓이 居住 마을이름을 望洞이라 하였음 후기 김영김씨, 안동김씨, 고령신씨, 창녕조씨등 6개성씨가 살아 오다가 李朝말에 마을이름을 盤山이라 개명하여 오던中1965년 작은마을 池登이 分洞되어 현재 50여호가 반산에 거주하고 있다.
용반2(지등마을)
元來 용반리에 속하며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통폐합시 池登마을은 용반리에 편입되었으나 정부수립후 1956년里洞行政區城 개편에 따라 예부터마을 등너머로 玉女峰 못(現 安養堤)에 비추므로 못지(池)字를 따서 마을명을 池登이라 칭하고 자연마을로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반3(금성마을)
마을 서북쪽에 있는 두리봉지맥으로 이루어진 마을뒷산 구절봉이 마을을 옹하고 있는데 山勢가 소가 누워있는 形局이므로 이 구절산재를 “쇠재”라 하여 마을명을 쇠재로 불리어 오다가 한자로 牛峙로 칭하였으나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통폐합시 당초의 쇠재를 쇠금(金)과 잿성(城)의 뜻으로 바꾸어 金城이라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반4(동촌마을)
元來 용반리에 속하며 옛날에 마을 地形이 용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마을명을 “용머리”또는 龍頭라고 불리우다가 1914년 일제초기 지방행정통폐합시 용반리로 편입되면서 용반리 동쪽에 위치한다면 東村으로 改稱하고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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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대1(금오마을)
元來 雲垈里에 속하며 지금은 흔적이 없으나 옛날 이곳에 亭子가 있어 마을명을 亭門嶝이라 부르다가 마을의 山勢가 계모양으로 생긴 形局이므로 금계라 하였는데 계오자를 나오(吾)자로 바꾸어 金吾라 개칭한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대2(중대마을)
中垈마을 입구에 지석묘군 (11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선사시대때부터 사람이 집단으로 살았던곳으로 추정된다 中垈마을 옛地名은 절터골,독적골,사구시,장군바위,역마들,망봉,구슬봉,장밭,배다리등으로 불리어 군사적요충지 또는 문물의집산지라고 추정된 곳이며 옛날 고흥읍에 가까운 내륙 깊숙이 배가 닿았다고 하나 현재는 간척,경지정리로 변하여 육지화 되었고 1950년 행정구역개편시 석촌과 중대로 분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대3(석촌마을)
옛날에 이곳에 장씨가많이 살았으므로 한때 “장촌”이라 불리어오다가 해방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中垈에서 分里된 마을로 마을앞 조그만 산이 많아 마을名을 石村이라 改稱하였고 李朝時代에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으로 마을앞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뒤에는 작은굴, 큰굴이 있어 사기그릇 조각들이 많아 사기시 또는 사구시 흔적이 있는 마을이다.
운대4(상대마을)
元來 雲垈里에 속하며 옛날에는 丁氏子子一村이라하여 丁村이라고 불렀으며 이조시대에 사기(도요)를 많이구어 팔았다하여 “사구시”라 불리어 왔으나 1956년 리동행정 개편시 운대리의 위쪽 높은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마을명을 上垈독로 改稱현재에 이르고 있다 .
운대5(운곡마을)
마을뒤 운암산 중복에 고려 공민왕 19년 重修한 修道庵이 있고 마을앞에 正宗乙巳年에 건립한 雲谷祠가 있어 고종때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거되었으며 당초 마을명은 사구시라 불렀으며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 통페합시 운대리로 편입되기 이전부터 운암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운곡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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