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리(城內里)
성내리는 곤양군 동부면 지역이며 조선 세종 12년(1430)에 평지식 곤양읍성이 축조(높이 3.6m, 길이 1,140m)되었는데, 성안에는 삼동(三洞), 수동(水洞) 2개 마을이 있었으며 성내리라 한다. 성내는 4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은 지방도 1005호선의 삼동과 남문외리 경계지점에 있었고, 북문은 북문내라는 지명으로 보아 현재 곤양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가는 진입부분에 있었고, 북문밖에는 5일 시장이 서기도 했다고 하며 지금은 북문교가 새롭게 건설되었다. 동문은 송정마을 지금의 천주교 곤양공소 뒤에 있었고, 서문은 1005호선의 수동과 후전의 경계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곤양군 때에는 성내는 동헌을 비롯하여 많은 관사와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각 3군데 있었고, 3대문으로 드나들며 곤양군의 중심지였다.
남문외리(南門外里)
본래 곤양군 동부면의 지역으로 읍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문외리(남문외촌)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정리시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옥곡(玉谷)과 남문(南門) 2개의 마을로 되어 있다. 옥곡은 시장(5일, 10일)이 서고 있고 시장과 함께 우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장되었다. 현대시설을 갖춘 시장이 만들어져 있으며 고속도로 옆으로 외각도로가 만들어져 교통의 번잡함을 분산시켰으나 앞 들의 옥토는 고속도로와 외각도로 등으로 잠식되어 도로로 변하였다. 남문은 지금도 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고 옛 금융조합터에는 곤양농협이 자리 잡고 있다.
서정리(西鼎里)
곤양군 때에는 동부면의 지역으로 솥골을 동서로 나누어서 동쪽을 동정, 서쪽을 서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정동, 서정동, 사동과 서부면의 방천동, 맥사동 일부를 합하여 서정리라 해서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상정(上鼎), 후전(後田), 사동(仕洞), 우티(牛峙)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상정은 비봉내를 건너 산 아래에 위치하여 앞 들은 침적토로 땅이 기름지고 수원이 좋아 2모작으로 높은 수량의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으며, 솥골에는 곤양고등학교가 설립되어 배움의 전당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며, 후전은 말 그대로 읍성의 뒷밭으로 곤양에서 곤명으로 통하는 국도변에 위치하며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사동은 사랑골이라고도 하며 진교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여 앞 들은 땅이 기름지고 수리안전답으로 옥토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집단 이주 주택단지가 세워지고,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는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활발한 발전을 위한 노력이 모아지고 있다. 우티는 남으로는 서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우산(남산)의 맥을 받아 아늑한 농촌마을이다.
무고리(舞鼓里)
무고(舞鼓)는 곤양면(昆陽面)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동남쪽으로는 맥사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경계에는 무고의 관문(關門)으로 조삼리(造森里)라는 곳이 있다. 이 조삼리는 노송군(老松群)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이 곳은 이명산(理明山)에서 흐르는 내와 다솔골에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곳으로 여기에서부터 무고(舞鼓)마을이 시작된다. 그리고 서(西)로는 하동군 진교면과 북(北)으로는 하동군 북천면 및 사천시 곤명면(초량리)을 경계로 하고 있는 마을이다. 무고(舞鼓) 마을은 조선시대는 곤양군 서부면(西部面)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천군(泗川郡) 서포면(西浦面)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이 무고의 옛 마을명은 물고뱅이 또는 무고뱅이 및 무고(武庫)라고 부르다가 현재의 무고(舞鼓)로 개칭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무고는 만점(萬点), 원동(院洞), 신촌(新村), 상촌(上村), 평촌(坪村)이라는 다섯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편의상(행정구역상) 만점, 원동, 신촌을 무고리(舞鼓里)라 하고 상촌과 평촌을 상평(上坪)마을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무고라고 하면 이 다섯 개의 자연마을을 모두 다 물고뱅이는 물을 가두어 두는 곳으로 해석이 되고, 무고뱅이는 무기고의 방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고는 궁골(弓谷), 다솔골(多率谷), 죽마등골(粥馬嶝谷), 한재골(韓在谷), 방골(坊谷) 등의 다섯 개 골(谷)로 이루어져 있다. 무고(舞鼓)는 이명산(理明山)을 주봉(主峯)으로 하여 수윤산(水潤山 : 일명 물불이 산)과 봉명산(鳳鳴山)이 있는데, 수윤산(水潤山)은 옛부터 산봉우리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이 있었고, 그 산의 중턱에는 석불(石佛)로 유명한 보안암(普安庵 : 미륵암)이 있으며, 봉명산(鳳鳴山)은 다솔사(多率寺)의 주봉(主峰)으로서, 이 삼봉(三峰)은 사천시(泗川市) 서부(西部)의 주봉(主峰)이다. 특히 이명산(理明山)과 수윤산(水潤山)의 중턱에 있는 고사리재(薇嶺) 무고천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이 천은 산수가 좋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농토가 비옥하여 농산물 촉성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조성되어 토마토, 오이, 단고추 등을 많이 생산ㆍ수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산지(山地)를 이용하여 밤, 단감 등의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무고(舞鼓)는 산수가 웅장하고 화려하여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많은 명당(明堂)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만점의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 이 매화낙지형은 천하 명당자리로 전하여지고 있음), 신촌의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 장군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이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은 평촌의 한재골에 있다는 설도 있음), 평촌 방골의 선동취적형(仙童吹笛形 : 신선 동자가 피리를 부는 형상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백세아동주의타(百世兒童朱衣打)라 하여 백세에 걸쳐 벼슬이 나올 명산으로 전하여지고 있음)등의 명당이 있어 요즈음에도 이 명당을 찾아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지관(地官 : 풍수)들이 자주 찾아들고 있다. 무고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武)와 관련된 명칭들이 많이 전하여져 오고 있어 옛 명칭이 무고(武庫)라고 한다. 이 무고(武庫)라는 옛 명칭은 곤양(昆陽)의 산세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거느릴 대천자가 나올 곳으로 천자가 세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필요한 무기를 만들어 보관하는 곳인 무기고(武器庫)라는 뜻이다. 또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무기창고가 무고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고(武庫)는 남해안을 끼고 있는 곤양군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무(武)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① 맥사에서 무고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몰(말)미(馬上들)라는 산이 있고, ② 평촌마을의 한재골에는 장군터가 있는데 그 곳에는 왜인들이 장군이 못 나오도록 불(火)을 떴다고 하는데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③ 상촌마을의 앞 들을 장막(將幕)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장수(將帥)와 막하(幕下)들이 있었던 곳이며, ④ 장막들 앞의 궁골(弓谷)은 군사들의 활터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⑤ 이 장막들의 옆에는 죽마등이 있는데 이 곳은 말에게 먹이(죽)를 주는 곳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며, 또한 그 앞 들이 섬안으로 군량미를 보관하는 곳이었으며, 그 옆에는 치마산(馳馬山)이 있는데 이 곳은 말의 훈련장이었으며, ⑥ 상촌마을의 뒷산에는 장군번덕(산 등성이가 광활함)이 있는데 이 곳은 군사들의 훈련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⑦ 평촌 한재골의 대곡사(大谷寺 : 사적지 참조) 산의 봉우리를 감투봉이라 하여 이 곳은 장군이 관과 투구를 벗어 놓는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해오고 있는 자연 촌락들의 지명을 살펴볼 때 조선시대에 곤양군(昆陽郡) 곤양군은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에서는 해안을 가장 많이 끼고 있었던 고을이었다. 그 경계가 현재 사천만에서 섬진강이 흐르는 하동쪽의 광양만 일부까지였다. 따라서 곤양군은 왜구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내륙침략의 길목으로서의 군사적 요새지였음으로 추정된다. 무고(舞鼓)는 곤양군(昆陽郡)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였음으로 추정(推定)된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고(舞鼓)는 무고(武庫)라는 지명이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남해안에서 내륙침략의 길목인 곤양군(昆陽郡)을 침략한 후 무(武)와 관련이 많은 곤양군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인 무고(武庫)를 춤추고 북치고 노는 무고(舞鼓)로 개칭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리고 마을 어귀(신촌)의 큰 바위에는 무고(武庫)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연대 미상) 따라서 무고의 동민들은 무고(舞鼓)가 무고(武庫)로 개칭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맥사리(脈社里)
곤양에서 진교로 통하는 지방도가 마을 앞을 통과하며 조선시대에는 곤양군 서부면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천군 서포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백두산의 정기가 지리산을 거쳐 지금의 맥사마을에 와서 맺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 뒷산에 정기의 응결을 기리는 제각이 있고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서부초등학교가 있어 44회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95년에 곤양초등학교와 합병되고 지금은 건물만 남아있다. 1945년에 새내골에 소류지가 축조되어 농사의 젖줄이 되고 있다. 동내 앞으로 진교로 통하는 1002호선 지방도와 남해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송전리(松田里)
본래 곤양군 동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곡동(浦谷洞)ㆍ가전동ㆍ송정동을 병합하여 송전으로 하여 곤양면으로 편입되었으며, 송정은 동밖이라고도 하는데 곤양성 동문밖이라 하여 불려 졌으며, 동밖 남쪽으로 산이 있고 여기에 정자가 있어서 송정이라 했다고 한다. 송정은 곤양초등학교와 경계를 하며, 앞 들에는 곤양천을 끼고 이모작 수리안전답으로 옥토이며, 금룡교(1931.12 준공)에서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당천은 사천과 고동포로 가는 도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소매거리라 하여 옛날에는 소를 매워 두었다고 하며, 북쪽 산에는 향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 골짜기로는 저수지가 있어 관개가 편리하다. 당천에서 지방도로 사천 가는 길 서북으로 송전저수지(1944년 완공)가 있고, 저수지 북쪽으로 길다란 계곡이 전개되어 포곡리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곤명에 위치한 다솔사로 다니던 길이 있었다. 포곡 마을은 개울 양편으로 취락되어 있으며 자포실이라고도 한다. 차가 모이는 골이라 하여 차폭곡(車幅谷)이라 하다가 포곡으로 변하였으며, 뒷산에 잣나무가 많아 백포곡(柏浦谷)이라고 하였다. "세종지리지"에는 이 곳에서 이등품의 청자가 생산되어 서울로 보내졌다고 하며 지금도 파편들이 발견되곤 한다
대진리(大津里)
대진리는 조선조에는 곤양군 동부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석문(石門)ㆍ제민(濟民)ㆍ한월(寒月)ㆍ어류(魚遊)를 병합하여 큰 나루가 되었다고 하여 대진리라 해서 곤양면에 편입되면서 석문ㆍ제민ㆍ한월 3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석문은 남으로는 서포와 바다를 경계하며 북으로는 한월과 접하고 있다. 본래는 까막골이라고 했는데 옛날에는 소금을 만드는 가마솥이 있어 가마골이라고 하다가 가마골이 막골로 변했고, 왜구 등 외적을 막기 위해 돌문을 세웠다 하여 석문이라 하였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리방천을 막아 농토로 개척하여 미맥의 곡창지이며 이모작으로 마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한월은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북은 국도와 고속도로가 통과하며, 목단과 본촌을 경계하며 동으로 덕진포를 접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월은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정박하게 하는 큰 나루가 있었는데 이 큰 나루라 하여 한널로 불리다가 한월로 되었다고 하고, 긴긴 밤에 차가운 달이 바다에 비춰진다 하여 한월이라고도 하는데 한널이 한월로 변한 것이다. 도로는 곤양 당천 삼거리에서 월천고개를 넘어 고동포로 하여 중항으로 연결되며, 최근까지 곤양의 항구로 불리는 광포에는 부산으로 가는 공진호가 화물을 싣고 떠났으며, 하동 북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백토를 운반하는 항구였다. 마을이 분산되어 어류는 본 마을과 떨어져 있으며 옛날에는 고기들이 유회했다하여 어류라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농토로 변하여 있고, 성남재를 오르는 골짜기에는 (주)사천환경이 들어와 건축 폐기물 처리를 하는데, 옛 농토는 간 곳 없고 건축 폐자재를 처리하는 기계소리만 요란하다. 제민은 조선조에는 제민창이 있어 제민곡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남쪽은 서포와 경계를 이루고 동은 석문과 경계를 이루는 오리방천의 곤양천에는 재첩과 어패류들이 잡히고 있다.
환덕리(還德里)
곤양에서 사천으로 지방도 1002호선으로 가면 면소재지로부터 6km 지점에서 도로 남쪽으로 위치하며, 남으로는 사천해와 북으로는 묵곡리와 경계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 환덕이라 했는데, 1914년 본촌동을 병합하여 환덕리라 해서 곤양면에 속하였으며 환덕ㆍ본촌ㆍ고동포 3개 마을로 되어있다. 3개 마을의 주산이며 가장 높은 산은 물불이산으로 해발 130m 이며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 산 주봉에서 동으로 뻗은 능선 밑에 환덕 마을이 있으며 입구에는 바위에 음각으로 조씨동이라고 쓰여 있어서 함안 조씨 집성촌임을 말해준다.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푸른 물을 담고 있고, 회관 앞에는 주차선이 그어진 주차장이 있으며, 바로 옆에는 고목군이 있고 제단(祭壇)이 만들어져 있어 정초에 동제를 모시고 있으며, 안길은 잘 포장되어 있고 마을 중간에는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16호(89.1.23 지정)인 조씨 고가가 있다. 마을은 밭이 많고 황토땅으로 고구마의 주산지였고 품질도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인정해 주는 농산물이다. 마을 좌측으로 달등이산, 우측으로 오봉산이 있으며, 오봉산 남쪽 등넘어가 작은 고등골이며, 남쪽으로 한 등을 넘으면 큰 고등골, 이 골의 언덕받이가 왕우바지, 여기서 동남쪽으로 한 등성이를 넘으면 통태바우골이며 고동포마을이다. 통태바우에서 한 등성이 남쪽 넘어가 솔머리골인데(산의 생김새가 삼베와 무명베를 메는 솔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 여기 솔머리산 발치와 중항리 점복개 쪽을 건너 질러 장포농지를 일구어 놓은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으며 고동개 새언이라 한다. 솔머리골에서 남쪽으로 한 골짜기 너머가 고동포 본 마을이며, 앞은 사천해와 접하고 건너는 중항리 안도마을과 바다를 경계로 마주 보고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한등을 넘으면 가마골(산의 형태가 가마솥 같이 생김)이란 골짜기가 있다. 고동포 마을은 물불산이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마지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성지목이란 재가 있는데 옛날 도선 국사가 이 곳까지 와서 보니 지형이 바다로 빠진 것을 보고 통곡했다는 곳이다. 서쪽의 경계는 목단천이 제방골에서 흘러 이 곳에서 바닷물과 합쳐지며 이 곳에 언을 막아 덕진포 농지를 이루고 있고 언을 따라 곤양으로 통하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언 입구에는 이 제방을 축조한 이유생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물불이산 서쪽으로 뻗은 능선 밑이 본촌마을이다. 본촌은 가리와 삼밭골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옛날에는 가리면의 본거지였으며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있고 그 앞에 동수(洞樹)가 있는데 이 곳에 동제를 지낸다. 본 마을 서북으로 재(화경재)를 넘으면 지방도 1002호선 아래로 삼밭골 마을이 있으며, 주위 산에는 밤나무가 조성되어 있고, 도로는 산허리를 돌고 돌아 사천까지 도로구간 중 가장 험로이다. 마을 북쪽으로 남해 고속도로가 있으며 묵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묵곡리(默谷里)
묵곡리는 목단ㆍ묵실ㆍ동천 3개 마을로 되어있다. 조선조시대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 먹을 만들었다고 하여 먹실 또는 묵실이라 하였는데, 1914년 묵곡리라 하여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묵실 마을에는 진양 강씨 집성촌으로 홍씨 한 가구를 제외하곤 모두 일족이다. 지방도에서 동천 탱자나무 거리로부터 북쪽으로 한 골짜기를 자리 잡고 있으며, 주민은 부지런하고 협동심이 강하여 밭을 이용하여 전구지를 대량 생산ㆍ판매하며 산을 개간하여 밤나무 수익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논은 대부분 장포천 주변에 위치하여 강우시는 제방이 붕괴되고 범람하는 일이 많아 주민들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묵곡리 북쪽으로 목단마을에는 선덕여왕이 중국으로부터 보내온 목단의 시배지였다고 하며, 북쪽으로 곤명면 성방과 경계를 이루고, 마을 상단 골짜기를 미독골이라 하며 골어귀에는 미독골 소류지(1988년 조성)가 있으며, 미독골 소류지 남쪽으로 한등성이 넘어가 북정골, 여기서 남쪽으로 한등성 넘어서 사립골이고, 옛날에 절이 있었던 절터가 남아 있으며 앞에는 목단 소류지(1985년 조성)가 있다.
흥사리(興士里)
곤양군 가리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갑사동ㆍ흥속동과 묵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흥속의 “흥”자와 갑사의 “사”자를 글자를 따서 흥사라 하여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으며, 흥사라는 말은 이름 그대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흥사리는 면의 동쪽 9km지점이며 남쪽은 검정리, 동은 탑동, 서는 묵곡리와 북은 곤명면 신흥리와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중앙에 천길봉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신선들이 글을 읽었다는 선들재(仙讀峙)와 명당인 곽가등이 솟아있어 곤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문둘방으로 문달사라는 고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은 간곳이 없고 절터와 주춧돌들이 대밭 속에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며, 구강언을 막기 전 까지는 회관이 있는 앞 들까지 배들이 들어와서 염전용 화목과 기타 화물을 실어 날랐다 한다. 회관이 있는 앞들 아래에는 보물 제614호인 매향비가 있으며 비문과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향토사와 고고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마을 남쪽에서 북쪽까지 2차선 도로가 포장되어 완사까지 통하고 있으며, 입구의 맨 처음 마을은 단숙(흥속)이라 하는데 문달사가 있을 적에 세속과 연을 끓는다는 단속(斷俗)이란 말도 전한다. 재를 넘으면 몰구리 앞들에는 근래까지 인공호가 되어 부들이 꽉 차 있었으나 흙을 메워 농토로 이용하고 있으며, 회관이 있는 덕골은 중심 마을로 비석거리에는 옛 지주들의 시혜공덕을 기리는 소작인들이 세운 비석이 있고, 제방 밑에 깊은 골에 흥사 저수지(1998년 준공)가 있어 흥사는 물론 묵실ㆍ검정ㆍ고동포까지 농용수를 충분히 공급하고 있다. 생활은 벼농사 위주의 농사이며, 비닐하우스에는 토마토ㆍ고추 등을 촉성재배를 하고 있으며, 산지를 이용 밤ㆍ감 등의 과일을 수확하여 소득증대의 일익을 담당하며, 교통은 하루에 3회 사천으로 정기 버스가 다니고 있다.
가화리(加花里)
가화리는 면 소재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진양호 사천만 방수로가 있다. 동쪽은 축동면과 북쪽은 진주시와 서쪽은 흥사리와 남쪽은 검정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본래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 가불개, 가화 또는 가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불개ㆍ밀기미ㆍ산음ㆍ목섬ㆍ탑골가화마을 회관 등 5개 자연마을과 진주군 수곡면의 수거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화리라 해서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 2. 15 다시 가화리 일부는 진양군 나동면에 편입되고 남은 마을은 가화리 탑동마을이다. 마을 전체로 현재 남강 방수로가 된 곳은 농경지였으나 모두 방수로에 편입되어 옛 농토는 간 곳 없고 돌바닥만 남아있으며, 경지면적이 줄어 도로 위쪽의 경작지에 생계를 유지하고 산지 개발로 밤ㆍ감 등과 축산으로 생활하고 있다. 회관이 있는 골은 탑골이라 하여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논 가운데 탑이 있었고, 부근에는 절이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오며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서쪽으로 천길 먼당으로 불리는 높은 산이 있고, 아래쪽으로 탑골재가 있어 흥사ㆍ제방 등 동부지역의 주민들이 사천과 진주를 나들이 할 적에는 이 재를 넘나들어 큰 통행로가 되었으나 이제는 폐도가 되었다. 마을로 통하는 길을 검정에서 2차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취락형태는 검정에서 고개를 넘으면 머엉개이고, 가장 북단이 게자골로 여기서 남쪽으로 한 모퉁이 돌아가면 산음 다음이 목섬이고, 목섬에서 서편으로 한등성이 넘으면 탑골이다.
검정리(儉丁里)
본래 곤양군 가리면 지역으로 검정골 또는 검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된 검정리는 뒷골ㆍ서리골ㆍ은뱅이(아방)ㆍ대구포 등 4개 마을로 되어 있으나 현재 단일 검정리이다. 뒷골은 지방도(1002호)와 남해 고속도로가 동서로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중항까지 북쪽으로는 흥사를 거쳐 곤명면 완사까지 2차선 도로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이 곳에는 건흥초등학교가 건립되었고 농협 동부지소ㆍ보건진료소 등 공공건물과 양조장ㆍ정미소ㆍ이발소ㆍ약방 등이 있어서 곤양면의 제2의 선진지역으로 면리 동부지역 중심지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 하였고 주점도 5~6개소가 성업을 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건흥초등학교도 곤양초등학교에 합병되고 생활양식의 변천으로 민간 사업체도 주점도 문을 닫아 한산한 곳으로 되었으나 지금도 동부의 중심지이다. 고개를 넘으면 서릿골로 해안쪽 대구포는 조선조 고종 때까지 미창(米倉)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고증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릿골에서 산등성이 도로로 남쪽으로 내려가면 도로변에 검정리 회관이 현대 건물로 건축되어 있고, 이 곳이 아방으로 뒷 산세가 멧돼지 어금니처럼 뻗어 지리산 정기가 이 곳까지 이르렀다고 하며, 남쪽으로 사천만을 접하고 건너편으로는 선진과 항공단지를 마주보고 있는 아늑한 곳으로 남강 방수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앞바다에는 죽방렴(갓발)등이 있어서 싱싱한 생선과 민물장어 등이 잡혀 반농 반어촌으로 바다 수입이 무시 못 할 수입이었다. 또한 장포천에 바닷물이 드나들 적에는 회사에서 아방으로 다리가 있어서(솔예교로 제5편 참조) 이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아서 마을 주민들의 활동도 활발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지금도 바다에는 굴ㆍ실뱀장어ㆍ생선 등이 잡혀 부업으로 농가의 수입원이 되고, 농지는 곳곳에 논밭이 산재되어 있는데 장포천 부근에는 넓은 농토가 있다.
중항리(中項里)
곤양군 때에는 가리면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도(鞍島)ㆍ점복(占卜)ㆍ와티(臥峙)를 합하여 중항리라 하여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중항리에서 와티 마을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검정리와 환덕리를 접하고 있다. 환덕마을 오봉산 끝부분(복덕산)과 와티마을 시루밭골와티마을 회관 산뿌리를 가로질러 지금부터 100년 전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장포 농지가 생겼으며, 이 방조제가 조성되기 전에는 흥사리 곽가등 밑에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고 한다. 장포 농지는 본래 이 곳이 논이 조성되기 전에는 진개라 하였는데, 한문으로 장포라 부르고 흥사에서 시작되는 내를 장포천이라 하며 여기 다리를 장포교라 한다. 이 방조제를 새언이라 하며 처음에는 오봉산 산뿌리와 시루밭골 산뿌리를 건너 질러 방조제가 조성되어 구강이 들이였으나, 그 후 15년 후에 고동포 산뿌리와 점복개 산기슭에 방조제(현재 존재)를 새로 막아 새언이라 한다. 중항리의 첫 마을이 와티이고 이 곳에 동명초등학교가 있었으나 1999년 9월 1일 폐교(곤양초등학교와 병합) 되고,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마을이라고도 하며, 만물이 풍부하여 선비가 누워서 놀아도 잘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 앞에는 선창이 있어 배들이 드나들고 바다에서 부업으로 조개류와 기타 고기가 잡히고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점복개 마을이다. 중항리의 첫 마을이 와티이고 이 곳에 동명초등학교가 있었으나 1999년 9월 1일 폐교(곤양초등학교와 병합) 되고,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마을이라고도 하며, 만물이 풍부하여 선비가 누워서 놀아도 잘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 앞에는 선창이 있어 배들이 드나들고 바다에서 부업으로 조개류와 기타 고기가 잡히고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점복개 마을이다. 도로변 회관 옆에는 노목(老木)이 있고, 회관에서 서쪽으로 마을 아래에는 저수지가 있으며, 여기서 곤양으로 가는 길쪽에는 새언을 건너서 다니곤 했다. 다시 남으로 가면 사천만과 서포와 용현을 이어주는 사천대교 공사가 한창이고 그 뒤로 창선ㆍ삼천포 대교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안도(질매섬)이며 뒷산 넘어 통시개들에는 바다를 간척해서 만든 논들이 있고 이 들의 농업용수를 위해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