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음악평론가 이서은
‘기타의 제왕’ 안드레스 세고비아
“기타는 내게 있어 연인이며, 아내이며, 자식이며, 인생이었다.” - 세고비아
민속악기에 머물렀던 기타를 독주악기로 끌어내 예술악기의 반열에 올려놓은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의 전성기 시절의 음반 <KING OF GUITAR (10CD)> 전집을 굿 인터내셔널에서 출시했다. 이 전집은 세고비아가 1927년 SP시절 첫 녹음한 소르의 <모차르트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비롯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34명의 작곡가의 곡들을 30여 년에 걸쳐 녹음한 것으로 연대기별로 구성하여 10장의 CD에 담았다. 한글해설은 한국 예술평론가 협회 회장이며 한국 기타협회 고문인 김종만씨가 50쪽에 걸쳐 상세하게 그의 일대기와 음악해설을 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 / KING OF GUITAR (10CD)
MONOPOLY 2097
독학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 세고비아는
민속악기에 머물던 기타를 독주악기로 끌어내 예술악기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세고비아는 스페인의 리나레스에서 1893년 3월 21일 태어나, 1987년 6월 2일 마드리드에서 94세로 눈을 감은 전무후무한 기타리스트였다. 그가 20세기 기타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여 오늘날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기타연주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난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2살 때 큰아버지 집에 입양된 그는 백부의 기타소리를 듣고 자랐다. 세고비아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큰집에서는 세고비아에게 바이올린을 시켰으나, 그는 기타를 선택한다. 10세 때부터 기타를 독학으로 배운 세고비아는 1908년 그라나다의 아트센터에서 15살의 나이로 첫 데뷔를 한 뒤, 곧이어 세비야에서 첫 공개 콘서트를 가졌다.
세고비아는 젊은 시절 타레가 학파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는데, 1916년 바르셀로나에서 14회의 연주회를 갖고 있을 때 정점에 이른다. 마지막 연주회는 1천석이 넘는 빠라우 콘서트 홀이었다. 홀 디렉터까지 이 연주회장에서는 기타의 음량이 작아 들리지 않는다며 만류했다. 세고비아는 무대 앞 의자에서 손뼉을 치며 객석에서 들리는지 확인한 뒤 연주가 가능하다고 장담했다. 그러자 타레가의 제자들은 세고비아가 제 정신이 아니며, 기타의 앞날을 파멸로 내몰 것이라고 공격했다. 결국 이 대결은 세고비아의 승리로 끝났다. 그가 오른손의 손끝 살과 손톱을 함께 현에 튕기는 주법을 찾아내면서 “기타 소리는 작지만 멀리까지 울린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24년에는 남미와 유럽연주에서 중세, 바로크, 고전, 낭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공연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작곡가, 화가, 작가 등 많은 예술가들은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의 공연장에 몰려들었으며 작곡가들은 그에게 기타곡을 헌정하기 시작한다.
1927년, 그의 나이 34살에 최고의 연주가들에게만 할애하는 런던 빅터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첫 SP음반을 출반한다. 그는 40여장이 넘는 SP와 LP를 녹음했는데 대부분의 곡들이 그에게 헌정된 곡이거나 그가 기타로 편곡한 곡들로 기타역사에 남는 전설적인 레코딩이다. 세고비아로 인한 기타인구의 팽창은 악기 제작분야에서도 큰 활성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및 미국의 많은 명공들은 보다 좋은 기타를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이 명기들은 연주가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음악적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세고비아 자신은 라미레스(J. Ramirez), 하우저(H. Hauser), 플레타(I Fleta) 등으로 대부분의 연주와 녹음을 하였다.
세고비아의 기타 예술은 누가 무어라 해도 스스로 갈고 닦은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세고비아는 “60년 동안 연습하여 왼손은 5밀리 미터나 더 길어졌고, 이때야 비로소 참된 기타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세고비아는 기타 예술을 인생 자체로 믿었다. 그 목표를 위해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1000회가 넘는 연주여행을 다녔다. 기타 테크닉 향상을 위해 <음계연습>, <소르의 20개 연습곡집>, 보브리의 <세고비아 테크닉>이란 도해책을 냈으며, 초보자를 위해 <My Book of the Guitar>를 출판했다. 그의 후진양성에 대한 노력은 기타 전문 음악원과 음악학교에 정규 기타학과가 신설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고비아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타를 새롭게 인식시켰다. 또한 여러 작곡가들에게 기타 작품을 의뢰해 그 레퍼토리를 확장했으며, 수많은 기타 편곡으로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주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기타라는 악기에 음악혼을 불어 넣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했다. 정녕 세고비아는 기타 역사이래 최고의 거장이자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세고비아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젊었을 때 기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주된 생각은 기타가 음악에 적합한 악기가 아니라 술과 여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노래와 춤에 반주해 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주로 아침에 아주 일찍 기타를 연습하곤 한다. 한번은 내가 호텔방에서 아침 일찍부터 연주하고 있을 때, 호텔의 여급이 아침식사를 가지고 왔다가 내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선생님, 이렇게 일찍, 또 벌써 그렇게 즐거우세요!” 라고 소리쳤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퍼가도 되죠?
감사합니다.,^^ 유익한내용~~
세고비아 기타는 알았는데, '기타의 제왕'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군요!!
이미 구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