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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3성을 들러보며
Ⅰ. 서 론
2004년 8월 16일부터 21일까지 5박 6일간 가까운 친구일행과 박승수 초등학교 동창 일행과 합류하여 31명이 인천국제공항에서 1시 중국의 북방항공기에 올라 요녕성의 중심 도시인 심양에 약 1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우리는 심양 국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 빠져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현지 조선족 가이드의 안내로 승차하여 중국의 동북 3성 즉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의 민족의 얼이 깃든 여행길이 시작 되었다.
우리가 가게 된 중국의 동북 3성 즉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등 3성으로 요녕성의 심양시, 통화시, 집안시, 길림성의 연길시와 용정시, 이도백하 지역의 백두산, 도문시, 요녕성의 장춘에서 1박하고 귀국하였다.
여행하면서 첫밤을 심양발 통환 야간 열차를 타고 아침에 8시간의 긴 시간을 열차에서 잠을 청하였으며 일행은 통화에 도착 아침 식사후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 집안시로 이동하여 박물관, 국내성, 환도산성을 관람한 후 일박하였다, 다음날 광개토대왕능, 장군총, 오회분묘를 관람후 통화로 이동 이도백하로 가기 위해 야간 열차를 타고 숙식을 하였다. 이도백하역에서 하차 후 백두산, 장백폭포 등을 관람 후 일박하고 다음 날 길림성의 연길시와 용정시를 방문한 후 북한과 국경지대인 도문을 방문하여 북한 병사들이 경계모습을 본 후 하루 빨리 통일의 날이 와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곤 하였다. 다시 연길을 향해 오면서 혜란강의 물줄기를 그리며 그 위에 탈북자를 수용하는 시설이라고 안내자의 말을 듣고 또한 분단 국가의 아품을 아르기며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동양 최대라는 곰 사육장을 견학하고 일행은 북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조선족의 한국 가요를 감상하였다. 일행은 귀국을 위해 연길시 국제공항에서 장춘으로 이동 일박 후 귀국하는 5박6일의 중국 북동3성 지역을 살펴 보았다. 중국의 동북 3성을 돌러 보고 오면서 민족의 뿌리와 얼이 시작되는 백두산 천지에서 험난한 사회를 혜쳐 나간 선조들의 지혜와 용기의 흔적을 둘러보고 본고에서 내가 가본 지역의 특징과 느낌, 동북3성의 내력 등을 가이드의 현지 설명 메모와 인터넷 등으로 구체적인 사실을 보충하여 서술하여 보고자 한다.
Ⅱ. 여행의 개요
1. 여행기간 : 2004. 8.16(월)부터 8월21일(토) 5박 6일
2. 주관 여행사 : 미래관광(주)
3. 참석자 : 박승수, 권혁진, 김천식, 유인반, 이동철, 한재선 내외, 장경래, 최범진 부인,
부천소사초교 박승수 동창 일행, 가이더 등 32명
4. 여행지 : 부평역 출발, 인천국제공항, 심양국제공항, 심양 북릉공원과 사적거리, 발맛사지, 심양기차역, 길림성 통화(기차), 집안시 고구려 유적(뻐스), 백두산, 도문시 두만강 일대,
용정시, 연길시와 연길국제공항, 장춘국제공항
5. 숙박지 : 1일차 열차, 2일차(집안시 취원호텔), 3일차 열차(이도백하) 4일차 백두산 백산대주점, 5일차 장춘 (영명호텔)
Ⅲ. 중국 동북3성의 여행과정
1. 1일차 - 인천, 심양, 통화
■ 요녕성(遼寧省)의 심양시(沈陽市)의 개요
심양은 요녕성의 중심 도시이고 동북지역의 경제, 문화, 교통, 금융, 상업 중심지이며, 전국적으로 중요한 공기업 중심지이며, 또한 역사문화로 유명한 도시이다.
특히 심양은 요령성의 수도이고 북경과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중국 동북공업지대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축이기도 하고, 정치, 문화적으로 동북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
기후는 북온대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분명하다, 현재 심양은 9rornn, 1개시,3개현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면적은 1.3만㎢ 이고, 도시 면적은 3495㎢이며, 총인구는 720만, 도시 인구는 485만이라고 하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로 전한(前漢)시대(기원전206년)도시 기반을 다지고 원(元 )대에 심양이라 불리기 되었다고 한다. 심양은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이곳에 도읍으로 정하면서 한반도 침략의 원융지로 삼았으며,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고 한다.
심양은 중국에서 이름난 역사 문화의 도시이며, 심양의 역사는 720년 신석기 시대로부터 시작 되었으며, 도시의 역사는 근 2300년에 이른다고 한다.
1625년에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이곳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며 1636년에 황태조는 “청”이라 명명하고 청왕조를 건립하였다.
심양은 오랜 공업기지와 구역성 중심도시이며 다년간 도시 건설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동북지구의 민용국제공항이 있고, 교통망은 주로 철도에 의존하며, 연길, 장춘, 심양을 기점으로 북경에 이르는 고속도로가 통하고 있다고 한다.
심양에는 심양고궁, 북릉공원, 동릉공원, 유조호 드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본곳은 북릉공원으로 이 곳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북릉공원(北陵公園)
심양의 국제공항에서 버스에 승차한 일행은 심양시내를 경유해 방향도 모른채 심양시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북릉공원으로 향하였다.
중국에는 4번째로 낯설지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와 같은 연상이 든다. 곳곳에는 한글 간판이 붙어 있고, 도시 개발지에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었다. 아파트 건축은 우리나라의 엘지와 현대, 신성건설 등이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내 막내 아들이 신성 건설에 근무하고 있어 이 곳에 진출하여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는 모습에 한편 마음이 든든하였다.
북릉공원으로 가면서 거리는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으나 고층 건물과 공장 등이 많이 보였으며 넓은 국토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니 이 곳도 우리 조상들이 옛날 활동 무대라는 것을 생각하니 자랑스러웠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보니 북릉공원에 다다르게 되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상인들이 덤벼들어 1000원하면서 물건을 사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뿌리치고 입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북릉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태종의 능은 공원의 제일 뒤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능의 크기는 경주에 있는 왕릉들 크기만 한데, 봉분을 떼로 입히지 않고 모래를 씌워 놓은 것처럼 누런 흙으로 덮여있는 것이 매우 이채로웠다. 안내자 말로는 시맨트를 바른 것이라 했다. 그리고 봉분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는 것이 우리 정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사적거리와 심양역에서
북릉공원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심양의 사적거리로 향하였다. 넓은 거리는 인적이 한산하였다. 심양의 사적거리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거리에서는 마작에 포카를 거리에서 즐겼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외국에 온 기분이 나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하여 해물 전골 형태의 음식을 들었다. 맛은 별로 이나 중국인의 짓은 향은 나지 않아 먹을 만하였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6명의 일행이 도착하였다. 매우 반갑고 같은 비행기로 오지 못한 것이 미안하였다. 거리는 구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참 불쌍한 느낌이 들어 주머니의 천원짜리 한 장을 주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달겨 들어 피하고 말았다.
거리는 깨끗하지는 않았으나 어둠이 시작되니 많은 인파가 거리를 활보하였고 전광판에는 한국의 가요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들렸다.
일행은 통화로 가기 위해 밤 11시 심양발 열차가 예매되었다고 한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우리는 단체로 발맛사지를 하였다. 정말로 아프기도 하였으나 시원하면서 피로가 가셨다. 고마워서 팀을 주었다. 발 맛사지를 하고 우리는 버스에 올라 심양의 거리를 들러 보았다. 심양시청 앞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나름대로의 여가활동을 하고 있었다. 가이더는 중국인들은 개방 후 생활 습관이 자유분방하면서 생활습관의 개선과 여가 생활을 많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심양역에 도착한 우리는 대합실에서 열차(기차)를 기다렸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에 중국인들이 기차를 기다렸다. 상점에도 들러보았다. 물건값은 싼편으로 호기심에서 빵을 사서 먹었다.
대합실을 나와 기차에 올랐다. 침대 기차였다, 중국에서의 첫 숙박을 기차에서 하게 되었다. 3층 침대로 잠이 잘 오지 않고 어색하였다, 뒤척이다 잠이 들어 하루를 기차에서 보냈다. 통화에 도착한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고구려 유적지인 길림성 집안시로 향하였다.
2. 2일차 통화, 집안시 고구려 유적
■ 길림성의 개요와 조선족
중국은 50여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통일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한족(94%)을 제외한 여러 민족은 소수민족으로 全인구의 5-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살고있는 지역은 주로 변경지대로 중국 全면적의 50-60%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은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수로 보아 10위 이내에 든다. 소수민족으로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장족(쭈앙)으로서 중국의 남부 광서성에 살고 있다. 그리고 왕년(往年)에 종종 남하하여 중국정복을 꾀하고 17세기초에는 청왕조를 수립했던 만주족의 반은 오늘날 실상 한족에 동화되었고 나머지 반은 중국의 동북부지방에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소수민족 가운데 그 나름대로 자기 나라의 고유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기 위해서 대학을 세우고 있는 소수민족이 약간 있으나 중국동북부 연변지역 즉, 길림성의 연길시에 있는 연변대학은 조선족에 의해서 세워진 떳떳한 종합대학이 있으나 우리는 대학 건물 앞으로 지나가는데 그쳤다.
■ 길림성의 자연적, 지리적 특정
1952년 9월 3일에 성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총면적이 427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고 연길, 훈춘, 도문, 돈화, 룡정, 화룡 등 6개 시와 왕청,안도 2개 현을 관할한다. 주정부소재지는 연길이다.
중국 동북 길림성 동부에 위치해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러시아,북한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고 동해에 인접해있다. 동부는 러시아와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 길이는 232.7km이며 남부는 북한과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길이는 522.5km로서 중국동북의 대외연결의 중요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아세아대륙의 중심지역이다.
연변의 삼림면적은 347.2만헥타르이고 삼림피복률은 78.2%이며 입목축적량은 3.32억입방미터이고 120여가지의 목본식물이 자라 고있다. 주로 홍송, 백송, 낙엽송, 가문비나무 등이다. 연변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금속광물자원으로는 연,아연, 구리, 알루미늄,망간,몰리브덴이 위주이다. 비금속광물로는 석탄, 석유(저장량이 1억톤),모래암, 용수정, 운모, 고령토, 안산효암, 규소토 및 석규석 등이다. 연변은 중국의 저명한 약재 보물고의 하나이다.중외인의 주목을 끄는 세계원시상태의 완전한 자연종합체인 백두산과 두만강하류의 한눈에 3국이 안겨오는 변경유람지역은 국내외 관광객의 명승지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총인구는 220만명이다. 그 가운데서 조선족 인구는 85만 4천명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7%를 차지 하고 한족인구는 전 주 인구의 57.4%를 차지하며 기타 소수민족으로는 만족, 회족, 몽골족 등이다. 인구증가율은 0.4%이다. 연변의 도시문화정도는 보다 높고 비농업 인구가 124,3만명에 달한다. 연변에는 양호한 훈련을 받은 숙련된 노동력이 많고 비용도 중국연해지구보다 낮다. 근래에 해외투자가 많아짐에 따라 연변 노동 생산율도 부단히 제고되고 있다.
■ 집안시와 고구려 유적지
중국에서의 첫밤을 심양발 밤 11시 통화행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8시간의 긴 시간을 열차에서 잠을 청하였으며 일행은 통환에 도착 아침 식사후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 집안시로 이동하여 박물관, 국내성, 환도산성을 관람한 후 일박하였다, 내 생전 가장 추억이 깃든 남다른 밤이었다.
통화역에서 내려 아침 식사를 위해 동산빈관 호텔로 이동했다. 중국 특유의 향료 때문에 먹기가 조심스러웠지만 그런대로 중국인들의 식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빵과 차음료 중심의 간단한 식사로 다양한 빵이 제공되었다. 중국 음식은 대체로 짠편이고, 죽은 맛이 밋밋해서 전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뜨거운 차를 항상 들고 다니며 마시기에 소금처럼 짠 음식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10시에 통화의 동산빈관을 출발한 버스는 집안에 들어갔다가 내일 다시 나와야한다. 통화에서 백두산 이도백하로 가는 야간기차를 다시 타야하기 때문이다.
집안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잠깐 휴게소에서 내려 여유를 즐겼다. 집안시에 도착한 우리는 고구려 유적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조선족의 설명을 들었다. 박물관에는 3개의 방으로 고구려의 유적 유물관 국내성의 위치 지도와 광개토대왕비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박물관 내에는 고구려 역대 왕들의 초상화와 고분 벽화의 모형들, 그리고 고분에서 발견된 몇몇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분 벽화 중에 고구려 무사가 쏘는 화살촉의 모양이 특히했다, 조선족의 설명에 의하면 이 화살은 마취용 화살로 실제로 마취제를 사용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한 설명도 들었는데, 이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건립한 것으로 추모왕(주몽:동명성왕)의 건국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집안(국내성)의 방위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사실 집안은 실제 방위와 국내성 유적을 포함한 고분들의 방향이 약간 다르다. 그래서 방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답사를 하기 위해 취원빈관에 도착하자마자 지도부터 구했었다.
시조새인 삼족새는 동쪽(백두산쪽)으로, 달의 신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배치했다. 그래서, 동쪽에는 용산이 있는데 이곳에 광개토왕릉(호태왕릉), 광개토대왕비, 장군총(장수왕릉)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서쪽은 내일 압록강 유람선을 탈 곳으로 칠성산이 있다고 한다. 남쪽에는 압록강이 있어 강건너 북한땅도 남쪽에 해당되며, 북쪽에는 우산과 환도산성이 있다.
일행은 박물관을 나와 국내성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인들은 국내성터를 발견하고 관리하는 것을 대단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터는 복원이 되었고 연립 주택형의 아파트와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집안의 중국인들은 고구려 사적지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돈벌이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라진 국가 고구려인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국내성터를 나와 우리는 압록강변의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북한의 만포시가 있는 만포철교 밑까지 갔다왔다. 마음이 설레였다. 유람선에 '북한쪽으로 좀더 가까이'하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손에 잡힐 듯 할 때까지 북한 땅 가까이 갔다. 북한 주민들의 거리 행렬과 초소의 군인들이 보일 뿐이고 적막한 모습이었다. 국경에서 북한의 산하 구경은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북한의 산은 중국쪽에 비해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었고, 산꼭대기까지 개간을 한 것으로 보니 생활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나는 표정이 굳어있었다. 아마도 분단의 아픔을 뼈속 깊이 느꼈기 때문이리라.
일행은 점심을 한 후 환도산성으로 향하였다. 산성에 도착하니 오르는 길이 힘이들었다, 환도산성의 성터만이 존재하였다. 성터에서 내려와 서남쪽에 위치한 고분군을 답사하였다. 고분에 사용된 큰 돌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고, 작은 돌은 환도산성 주변의 강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환도산성 주변의 고분이 600여개 정도 된다고 하니 화강암과 강돌의 양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환도산성은 천연의 요새였다. 왜 두 번씩이나 함락되었던 것일까? 환도산성은 포곡식 산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산성이었다. 우리는 만포철교로 향하였다.
조중철교(만포철교)에 도착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집안시와 북한의 만포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부근에서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하루에 1번 기차가 운행된다. 우리는 중국 공안원의 안내로 철교 중간까지 가보았다.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철교 중간에서 돌아오면서 자꾸 북한 쪽을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되었다. 너무나 아쉬웠다. 철교를 뒤로 한 채 취원빈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3. 3일차 - 집안시 고구려 유적, 통화, 야간기차 숙박 백두산 이도백하로
다음날 우리는 5회분 5호묘로 향했다. 일본 학자들이 무덤의 형태가 다섯 개의 투구모양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그 중 공개하는 곳은 5호묘 뿐이었다. 그러나 회손이 심해 영상으로 만 안내하였다. 늦은 감이 있지만 보존을 위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는 능, 총은 왕의 무덤이고, 묘는 장군이나 신하의 무덤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5호묘는 장군이나 신하의 무덤인 셈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중심 내용은 동쪽 벽화라고 한다. 5호묘에는 동서남북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후기의 무덤이라서 화강암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었다. 광물과 동, 식물성 안료에 접착제로 아교를 섞어 그린 것이다. 초기에는 석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화법을 썼다고 한다. 5호묘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모줄임 천장과 지붕에 해당하는 통돌을 보았다. 바닥에는 시신을 놓았던 돌단이 3개 있는데, 중앙이 남자주인, 오른쪽이 본부인, 왼쪽이 첩이라는데, 그것은 돌단의 크기와 돌단 사이의 간격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다음으로 광개토대왕비로 향했다.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광개토대왕비는 보존을 위해 건물로 애워 쌓았다. 크기는 3층 정도의 높이로 사면에 모두 글이 새겨져 있다. 돌을 기초없이 맨 바닥에 세워놓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넘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고구려인들은 이 돌을 어떻게 운반하고 세워놓았을까? 또 현재 있는 비석의 위치와 방위는 처음에 세운 때와 일치하는 것일까? 궁금한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능에 올랐다. 하나의 돌 무덤 동산으로 회손이 심했다. 이 곳에서 한나라당 황우여 국회의원 4분을 만났다.
다음으로 장군총에 도착했다. 장군총을 집안에서는 장수왕릉이라고 한다. 장군총에 올라 사진도 찍고, 직접 돌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고구려식 건축기법이라는 퇴물림 공법으로 쌓았다고 한다. 그랭이 공법은 가급적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적인 상태로 돌을 짜맞추는 공법으로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퇴물림 공법 역시 중국에는 없는 건축기술로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돌을 조금씩 들여쌓는 건축기술인데, 이집트나 마야문명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상단부의 묘실에 들어가니 시신을 놓는 단이 2개 있었다. 왕의 것은 크고 단이 높은데, 부인 것은 작고 낮았다. 그리고 천장에 놓여진 큰 통돌(50톤)이 점점 갈라져가고 있는 것도 보였다.
장군총을 뒤로하고 일행은 이도백하로 가기 위해 통화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휴게소에서 잠시 피로를 달래며 산야와 강물에 더위를 식혔다. 통화에서 민족의 독립 운동가 양정우 장군을 모신 공원을 찾았으나 공사 관계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얌체처럼 슬그머니 공사장 근처로 다가가 중국의 민가 모습을 보았다. 침대와 가재 도구들이 보일 뿐이고 사람은 없었다. 다시 우리는 통화에서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로 향하면서 3일차에 2번의 야간 기차 침대에서 묵었다. 처음보다는 익숙해진 모습으로 잠을 그런대로 청하였다. 이도백하에 도착한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 국내성 심층분석
삼국사기에 유리왕 22년(단기 2336, 서기 3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졸본으로 부터 여기로 서울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에 따르 면 돌로 성을 쌓기 이전에 이미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토성에서 발 굴된 돌도끼, 돌칼, 원형석기 등을 감정한 결과 BC 5-3세기 때의 것이라는 것이라 고 하니 부여나 그 이전인 (고)조선 때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었던 터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여기로 수도를 옮긴 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 도할 때까지 4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중심지였던 국내성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국내성은 일제시대 때 대대적 인 개축공사를 하지 전까지도 원형의 모습이 잘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총 길이는 2,686m이었던 것이 지금은 북쪽 성벽만 남고 모두 사 라져 버린 것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너비는 약 7∼10m로 평지에 세운 성이기 때문 에 산성에 비해 넓다. 성벽의 높이가 5-6m 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m 정도만 남아 있다.
■ 무덤떼와 환도산성 심층분석
중국 집안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서 1,2000여 기가 넘는 무덤떼이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 근방에도 1,000기밖에 없는데 그 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무덤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은 전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고구려 무덤떼중 주요한 무덤들을 보면, 장군총은 한 변의 길이가 30m가 넘고, 태왕능은 66m이며, 가장 큰 천추묘는 85*80m나 된다. 천추묘는 묘자리만 2,057평이나 되는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증축하기 전 처음에는 한 변이 63m였으니 이러한 거대한 묘들은 고구려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 무덤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실질적 가치는 23기의 무덤에 나타난 벽화이다. 벽화는 주제가 풍부하고 대채로워 인간세상의 갖가지 생활상과 사후의 하늘 세계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으며, 기술적 수준이 대단히 높아 고구려인의 창조력과 예술적 감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걸작이다.
■ 장군총 심층분석
12,000여 기나 되는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4.5km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압록강과 집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군총을 바라보면 우선 엄청나게 큰 규모에 압도 된다. 물론 가장 큰 천추총이나 태왕능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빼어난 건축술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웅대한 모습을 보노라면 중국 학자들이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했다는 말이 실감난다.12.4m높이의 장군총을 올라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5층 높이의 아파트를 걸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되고, 한 변의 길이가 31.58m인 바른네모꼴이므로 건평 300평 짜리 건물을 상상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 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인채 남아 있다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본인이고, 또 평양에서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묻히게 되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중국 현지의 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구려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덤을 준비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수도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내성에 무덤을 준비해 놓았고, 관례에 따라 시신을 옮겨 이곳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 광개토대왕비와 능 심층분석
대왕비가 위대한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4면에는 177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 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내용도 풍부하여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능은 엄청 큰 돌무지로 정상에 대왕을 모신 석실이 있었다, 주변은 돌무지가 점점 회손되어 가고 있어 보존이 이루어져야 함을 느꼈다.
■ 만포철교 심층분석
국내성 터를 나와 압록강변 집안의 건너편인 양강도 만포시가 바라보이는 선착장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중국의 집안과 북한의 만포를 잇는 만포대교까지 이르러 각자가 황폐해진 북한 땅을 보면서 굶주리고 헐벗은 동포들이 살겠지... 강변에 비추어진 북한 만포의 모습은 사람이 더 이상 살지 못하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아파트같은 주택들은 유리창도 보이지 않고 버려진 폐가의 모습이었다. 공장들은 녹슬어 버린 고철더미나 다름없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는 옥수수가 심어져있었고 금년에는 기상 조건이 좋았던지 상당히 푸르고 높이 자란 모습이었다. 산악 지방이라 저 강냉이가 저들의 유일한 1년 양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 옥수수들이 알차게 무르익어 강냉이 밥으로 굶주림이 없는 겨울이 되기를 기도했다.
건너 편 강가에는 벌고 벗고 물놀이를 하는 천진스런 아이들은 우리들이 남에서 온 같은 동포인지를 아는지 모른는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아마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기에 그런 기분인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통일의 날이 아주 가까이 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압록강물이 이 강토를 적시듯이 통일의 날에 감격의 눈물이 이 강토를 적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4. 4일차 이도백하, 백두산, 장백폭포, 천지, 온천
■ 백두산 기행
우리 일행은 3일차 광개토대왕능, 장군총, 오회분묘를 관람후 통화로 이동 이도백하로 가기 위해 야간 열차(3일차)를 타고 숙식을 하였다. 이도백하역에서 하차 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백두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백두산 입구에서 짚차를 타고 정상에 오르니 매서운 바람과 추위로 몸을 가눌길이 없었다, 특히 안개로 시야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이 가려 천지를 보지 못하고 하산 하기에 이르렀다, 하산하여 장백 폭포를 향하여 올라가니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천지를 향해 일행은 올라갔으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저 상상만하고 말아 아쉬움을 더했다. 이곳에서 온천수에 익힌 겨란을 사 먹고, 온천에 몸을 담그며 피로를 덜고 천지에 오르지 못한 한과 무례함을 달랬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실감하며, 천지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백두산(2,744m)은 함경남북도와 중국 동북부와의 국경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장백산맥의 동쪽에 있으며 천지가 있다. 백두산은 휴화산(休火山)이고 흰빛깔의 경석, 석회암으로 덮여 있으므로 백두산이라고 부른다. 천지의 물은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두만강, 동북으로는 송화강을 이루고 있다.
청나라의 성조(강희제)는 백두산을 청나라 발상의 영산이라고 하여 조선 숙종3년(1677)에는 청나라의 내대신을 백두산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지리도 조사하여 숙종38년(1712)에는 국경을 일방적으로 천지 동쪽 아래로 10리쯤되는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높이가 2자이고 넓이가 1자이다. 비문에는 한자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국과 조선국경으로 한다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는 주위가 20km며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317m이고 총면적은 15km2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천지를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마다 백설봉이니, 천문봉, 청석봉, 옥설봉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 천지가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하는 천지성인설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로 부근의 해수가 침투하여 천지의 수원이 되었다고 보는 것, 둘째 백두산 주변의 식생분포로 인해서 그것이 수분을 함유하고 증발하여 산상으로 밀어 올라가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또는 눈이 되어 천지를 이룬다고 보는 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천지바닥에서 물이 솟아오른다는 용수설 등이 있다.
우리 한민족은 아시아 동북에 우뚝 솟아있는 이 백두산을 발상지로 삼고 이 산 서북의 만주 대륙에서부터 우리 한반도에 걸친 지역을 생활무대 삼아 살면서 색다른 문화와 역사를 간직해 옴으로서 동방문화의 선구자로서 모든 압박과 착취에 견디어 왔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두산은 언제나 틀림없이 우리 민족과 더불어 존재하는 성산이요 영산인 것이다.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해발 2,744m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산 중의 하나이다. 산정에는 거대한 화산호인 천지가 있는데, 천지의 5분의 3은 북한, 5분의 2는 중국 소유이며 주변 봉우리들은 그 경계에 따라 나누어져 있다.
■ 장백폭포
천지에서 흘러내려온 은하강은 200m 남짓 흐른 뒤 수직으로 된 절벽에 이르면 높이 8m가 되는 폭포로 되어 하늘까지도 퍼질 듯한 굉음과 함께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하얗게 뿜어내는 장백폭포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옆으로는 검회색 돌산이 솟아 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푸른 미인송 숲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폭포 옆에는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간혹 낙석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 백두산온천
백두산 기슭 곳곳에는 온천이 솟고 있다. 백두산의 온천은 장소에 따 차이가 있지만 최고 82℃나 되기 때문에 이 온천에서 계란을 삶아 파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 온천은 다량의 무기질과 유화수소를 함유하고 있어 피부병과 관절염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위치는 천지와 장백폭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장백폭포 쪽으로 접어들어 약 10분 정도 도보로 걸어가면 길 양옆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나오는데 여기가 백두산온천이다.
우리는 조선족의 안내로 이 곳에서 온천을 하고 피로를 덜며 하산하였다. 하산 도중 중간 휴식처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백두산 송어회를 맛 본후 백두산 호텔에 투숙하여 하루를 백두산 기슭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음 날은 연길시를 향해 떠날 예정이다.
5. 5일차 - 연길로 가는 길, 연길시, 용정시, 도문시(간도)
■ 연길로 가는 길
백두산관광후 일행은 연길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의 활동 무대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넓은 땅이 부러웠다. 연길로 향하면서 중간에 백두산 꿀을 파는 곳에 정차하였다. 꿀맛을 보고 일행은 꿀을 많이 구입하였다. 이곳을 출발하면서 도로나 시가지에는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으며 이는 모두 노동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길로 가면서 다시 북한 사람이 한다는 약품을 파는 휴게소에 들렀다, 별로 구매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가면서 농산물 판매소에 들렀다. 이 곳에서는 호기심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맛도 보았다. 다양한 농산물이 있었으나 그저 쑈핑하는 정도에 그쳤다. 어느덧 무더운 날씨 속에 달리다 보니 4시간 정도의 소요로 연길의 빈관에 도착 점심을 하고 다시 쇼핑이 시작되었다. 많은 악세사리에 모시와 베가 시선을 끌기도 하였으나 간단한 악세사리를 처가 구입하여 사랑스러운 며느리에게 주려고 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일송정 즉 독립 운동의 본거지를 버스의 차창으로 관람하였으나 버스가 고장이 나 수리하는 바람에 내렸다. 역시 조선족 상인들이 옥수수, 과일 들을 팔아 동정 어린 자세로 구매하여 버스 안은 온통 옥수수에 과일로 넘쳐 있었다. 우리의 돈이 이 곳에 흘러 들어 이들의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나 한편으로는 외화가 해외로 나간다는 아품도 있었다. 버스 수리가 꿑나 윤동주 시인의 모슴이 서린 용정시 용정중학교로 향하였다. 이곳 역시 한국인 관광객으로 기다려야 했다. 우리 차례가 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학교의 역사를 설명하여 주었다.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장학 사업 기금 모금에 약간의 돈을 성금하고 나왔다.
이곳에서 나온 우리는 도문시로 향하였다. 도문으로 가면서 수려한 산야에 도취하기도 하였으나 두만강 넘어 북한 땅은 나무가 하나도 없어 쓸쓸해 보였다
잠시 버스에서 내려 두만강 줄기를 바라보며 인적이 다니지 않아 잡초만 욱어진 두만강변의 모래와 자갈 밭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북한 병사들의 모습이 방카 안에서 나와 경계하는 모습을 포착하게 되었고, 간이 기차역에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다시 간도지방에 있는 도문시로 향하면서 두만강의 좁은 폭과 낮은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통일의 날은 언제 일까 기대하여 보았다.
도문시에 도착한 우리는 북한과 연결된 도문철도를 볼 수 있었고 북한과 국경지대인 두만강가에서 잠시 머무르며 일부는 나룻배를 타고 북한 최 접경까지 가기도 하고 일부는 두만강가에서 기념 촬영과 강 바닥에서 수석을 고르기도 하였다.
도문시를 출발하면서 가이더는 탈북자 수용소 건물을 가리키며 두만강과 송화강의 한만은 사연을 이야기 해 주었다. 어느덧 연변에 도착하여 곰 사육장을 관람하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 조선족 자치주 심층 분석
동북지방의 길림성 동부에 있는 길림은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수도로서 인구는 약 30만으로 그 가운데 조선족이 59.6%, 한족이 38.8%, 그밖에 만주족·회족·몽고족 등 10개의 소수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시 전체의 면적은 747.4㎢이지만 도심만 따진다면 18.6㎢에 지나지 않는다.
연길은 인구비례에 의한 소비가 중국에서 첫손 꼽히며 택시 보유 1인당 배당률도 중국 제 2위라고 할 정도로 소비도시이자 문화도시이다. 또한 4개의 예술단체와 1개의 자체 방송국이 있는데 연변방송국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에게는 없는 유일한 소수민족 자치방송국이라 조선족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연길에는 여행객을 끌만한 이름난 명승고적은 거의 없지만, 연변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거나 사업차 찾아가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는 백두산 관광을 위한 경유지로 들르게 되는 곳이다. 그리고 연길은 조선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관광하기에는 매우 수월하지만 거리구조나 교통수단은 다분히 중국적이다
■ 용정시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을 수 있다. 이 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용정은 1백년 전에 개척되기 시작했는데, 19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 아름다리 나무가 울창했고 갈대와 가시덤불이 그득했며 온갖 맹수가 살았다고 한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었다. 용정의 민속관에는 한국 교포들의 풍속, 항일의사들의 사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용정중학교는 일본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다
■ 도문시
도문시는 온대다습 기온대로서 봄철은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철은 무덥고 비기 많으며 가을철은 시원하고 비가 적으며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적고 춥다. 년평균일조시간은 2062여 시간, 농작물의 성장기는 5월부터 9월까지이며 일조시간수는 866여 시간이며 년태양복사총량은 110.2키로카로리/cm이며 태양에네르기리용률은 1% 좌우이다. 년평균기온은 5.4℃--10℃이며 ≥10℃온도의 축적은 2540-2650℃이다. 무상기는 125--138일이다. 가을철 첫서리는 9월하순부터 내리기 시작하고 봄철서리는 5월중순에 끝난다. 여름철에는 장마가 지고 봄철에는 가뭄때가 많다. 도문시에 이미 탐지된 금속광산자원은 동,연, 아연, 사금 등 8가지 종류가 있고 비금속광산으로는 석탄, 대리석, 화강암, 석회석, 광천수 등 9가지 종류가 있다며 그중 석탄매장량은 2억톤이라 한다.
6. 6일차 연길에서 장춘시로 이동 숙박, 귀국
■ 장춘시는 중국 동북평원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길림성의 중심도시로 길림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또한 장춘시는 자동차의 도시, 삼림의 도시, 영화의 도시, 과학기술의 도시, 북방의 곡창 등으로도 불리는 인구 686만 9천명의 도시라고 한다.
장춘시는 연해개방도시와 같은 우대정책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종합화 개혁과 자본 우대화 구조의 실험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장춘시 산하에 경제기술 개발구와 고신기술 개발구 같은 국가급 개발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풍부한 자연자원, 좋은 지리적 위치, 편리한 교통, 거대한 시장 잠재력, 높은 수준의 인재, 좋은 투자 환경이 있어서 세계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유명한 대기업도 장춘에 와서 기업을 만들고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개혁 개방은 장춘시의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1998년 장춘시의 성장률을 11.5 % 였으며, 지금 장춘시는 독특한 산업구조와 잠재력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춘시민은 인심이 좋고 열정적이라고 하며 우리는 잠시 이곳에서 머물다 귀국하였다.
■ 조선족 이민사와 자치주의 장래
조선사람이 만주로 건너간 시기는 일찍이 삼국시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두만강과 압록강 양쪽 대안은 옛날부터 인삼이 재배되었고 또 넓고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 이 지역을 청나라는 청조 왕실의 발생지로서 이곳을 봉금지대로 정하고 한족과 몽고인, 그리고 조선족 등 이민족들의 접근과 침입을 방비함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요소 요소에 초소를 두어 출입자의 단속을 엄격히 하였다. 특히 조선북방 지방에는 대상의 공간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청나라의 이와 같은 방비책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 개간하는 조선족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조선측에서도 월강하는데 대해서 강경한 방비책과 응징책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월강을 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단속을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취하고 숙종11년에는 삼수, 갑산, 강계 등에 변비사를 두어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강을 막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조후기에는 중앙의 헌정은 물론 이들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지방관리들의 학정이 극도에 달했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에게 과세를 통해서 압력과 학정, 수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민중반발로 순조때에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난을 전후하여 천재, 수재와 곁들어 콜레라 및 대화재 등의 발생은 정국을 매우 어지럽게 하여 나라 사정은 어렵기만 했다.
이때 조선을 에워싸고 있는 국제적, 정치적 환경은 만만치 않았으며 러시아, 일본 그리고 청나라간의 대립은 첨예화해 감으로서 국제적의 긴장은 심도를 더해가기만 했다. 그리고 동학란(1894)을 계기로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을 초래했었다. 한편 러시아의 숙원인 남진정책은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과의 대립을 가져와 일로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은 양차대전 승리로 인하여 조선에 대해서는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 위치에서 점차 조선의 주권을 침식하게 이르렀으며 을사조약(1905)을 비롯한 정미조약(1907) 그리고 한일합방(1910)에 이르러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순조연간의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 역병, 민란 등은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많이 두만강 그리고 압록강을 넘어가게 하였고 그 수나 또는 월강상태는 더욱 대담하게 되어갔다. 아무튼 넓고 기름진 토지는 조선인들의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들에게는 유일한 생명선이요 생활원천이요 또한 안식처이기도 했었다. 이리하여 조선족들은 마침내 청나라의 봉금지대로 되어있는 완충지대에 집을 짓고 토지를 일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으로 넘어가는 이주자는 여러 곳으로 갔으나 두드러지게 조선인들이 집단 이주하여 개간을 하였던 곳은 간도지방, 오늘의 연변지방이었다. 왜 이곳으로 많이 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1)지리적으로 가까웠고 (2)간도지방은 천연적으로 토지가 비옥했고 (3)간도조약으로 거주자유와 귀화자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인정했고 (4)복잡다난한 조선을 피하여 비교적 안이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5)끝으로 한일합방으로 인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 불만에 가득찬 자들이 이곳 간도를 찾았던 것이다.
조선족들의 간도에의 이주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를 집어 낼 수도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사실문헌을 종합하여 볼 때 간도에의 이주시기는 인조6년 이전(명말)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 시기에는 청나라의 금봉지대에 대한 단속이 엄격했으므로 대담하게 또는 눈에 띄게 이주가 행해지지는 못했으며 다만 일귀경작 즉 아침에 강을 건너가서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밭을 가꾸는 사간이 활발해 진 것을 청나라 중기 이후(1845년, 헌종11년) 소위 성지에 대한 금입정책이 이완된 시기 이후이며 또한 조선에서는 정치혼란이 극심했고 국내도처에서 민란이 속출되었던 험악한 시국 이후로 간주된다. 이때는 인접 대안에서 몰래 경작하는 밀경에만 그치지 않고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또 경작방법도 춘경추귀 즉 봄에 갈아 가을에 수확할 정도로 대담하게 되었다.
간도조약 후에는 중국으로 귀화하여 입적한 자 이외에는 공공연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고 특히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 이주자에게 더욱 불리해 졌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배후에는 일본세력이 숨어있다고 의심하고 또 조선인들은 침략주의자들의 주구라고 오해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파란곡절 그리고 만고풍상 다 겪었던 연변의 조선족들은 이주이래 5대에 이르러 완전히 생활기반을 잡게 되었다 한다.
Ⅳ. 결어
이번 여행을 통해 중국 북동 3성은 우리 조상들의 활동 무대였습을 입증 할 수 있었다. 중국 동북부지방 길림성 연변에 살고있는 조선족의 현저한 공헌이라면 뭐니해도 그들이 만주 연변개척의 주인공이며, 조선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의 기지로서의 피눈물 젖어있는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나아가 연변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대부분이 조선독립 투사들의 후예가 아니면 그들과의 관계자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주 이주자들은 허다한 곤란과 싸우면서 굳건히 일어서 수천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얼이 깃들여 있는 만주벌판에서 미작 개발과 과수원 경영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임으로서 개개인의 능력은 물론이고 조선족의 생활권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1949년 중국의 새로운 혁명정부 수립과 더불어 연변조선족 자치주로서 승격되었다
조선족 인구감소의 중요원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기술, 체제전환 그리고 사상, 도덕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치주의 목적은 배타적이 아니고 여러 민족이 단결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는데 있으며 여러 소민족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급속히 근본적인 변화와 발전을 보이고 있어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마음대로 왕래할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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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역사공부 많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