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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마음으로 떠나는
성주여행
7월14일(금)~15일(토)
좋 은 사 람 들
≪ 일 정 ≫
◆ 7월 14일 : 대전출발(5시) → 삼동연수원(6시 30분) → 저녁식사(7시) →
원장님을 모시고→ 주무심 (10시)
◆ 7월 15일 : 산책 → 아침식사(7시) → 성주성지 소개 (9시) →
샤드 현장(10시) → 고산정(11시) →
성산동 고분군/세종대왕자 태실 → 점심식사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연락처
직 장
비 고
1
강 도 묵
010-5401-5013
기산엔지니어링
2
이 종 익
010-4408-7504
보명테크(주)
3
변 창 전
010-6401-7693
대성청과
4
이 재 헌
010-2121-8456
스마일꽃집
5
조 면 수
010-5407-4994
대국건설
6
장 석 근
010-2233-1500
SG기획
7
송 인 배
010-3407-0544
명민코리아
8
김 관 철
010-8613-5861
이노스킨
9
장 광 천
010-5408-7036
빛으로전광판
10
서 광 덕
010-3410-1063
원불교함라교당
※ 성주성지 관계인
• 유타원 김성혜원장님 010-3738-0124
• 보산 김원명교무님 010-5395-4438
1. 성주
성주에는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가 형성되게 된다. 성산가야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五伽倻)조에 실려 있다. 성산가야의 국읍지는 성산동고분군이 위치하는 성주읍 일대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성산동고분군이 성주군 내에서는 타 지역 고분군들보다 규모면에서 가장 월등하고, 부장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성산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일리군(一利郡)으로 편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신라는 피정복 소국들을 군, 현으로 삼아 지방체제에 편입시키면서 그 단위를 기존의 소국으로 하였고 그 국명을 그대로 고을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즉 성주의 경우도 삼국사기에 처음 신라에 병합되면서는 일리군(一利郡)으로 불리어졌지만,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지방의 군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이전의 성산가야라는 지명을 이용하여 성산군(星山郡)으로 편제되었다.
태종조의 지방제도의 개혁에 따라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였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 팔거(현재 칠곡)에 두어지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 성주는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이 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이 곳에도 미쳐 1906년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는 이의 회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주도 맹렬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수의 인물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경상도 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Paris 長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진 독립청원서였는데, 이 고장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망명 시 휴대하여 평화회의에 우송하였으며, 세계 각국 및 전국 향교에 이 문서를 보내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성주읍에 건립되었다.
2. 성산동 고분
문화재명 : 星州 星山洞 古墳群
구분 : 사적 제86호
규모 : 129基
재질 : 석재, 흙시대
가야시대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위치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 61번지 일원
성산(해발 389.2m)의 줄기를 따라 크
고 작은 무덤들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성주성산동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129기가 지정되어 정비 및 복원을 하
고 있다.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6호분 및
「대분(大墳)」·「팔도분(八桃墳)」이 발굴
조사 된 바 있으나 조사의 경위나 결
과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승왜마을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 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되어 밝혀진 무덤의 내부구조를 보면 매장주체부인 석실(石室)의 구조가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식(割石式)과 대형판석을 주로 사용한 판석식(板石式)의 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室墳)으로 되어 있다.
고분의 묘장(墓葬)형태는 1봉토 내에 2인 이상을 매장한 순장(殉葬)에 의한 다장묘(多葬墓)로서 별도의 순장곽(殉葬槨)을 설치하거나 부곽(副槨)의 한구석에 순장한 형태이며, 주실(主室)인 석실에는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부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발굴조사에서 환두대도(環頭大刀), 금제이식(金製耳飾), 은제과대(銀製帶), 관식(冠飾)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86년 발굴조사에서 대호(大壺)를 비롯한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단경호(短頸壺), 유개고배(有蓋高杯) 등 토기류와 은제행엽(銀製杏葉), 재갈, 교구( 具) 등의 마구류(馬具類)를 비롯한 2,07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3. 가야에 대하여
가야(伽倻, 加耶, 伽耶) 또는 가락(駕洛, 迦落) 또는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 또는 임나(任那)는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에 위치했던 변한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된 전기 가야 연맹,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 - 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성립된 후기 가야 연맹을 통틀어 이르는 국가를 말한다. 고려 삼국유사에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가 있다.
금관국(金官國) 가락국(駕洛國)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고동람국(古冬攬國) 반파국(伴跛國)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아라국(阿羅國) 안라국(安羅國)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고자국(古自國) 고사포국(古史浦國)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성산국(星山國) 벽진국(碧珍國)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비화국(非火國) 불사국(不斯國)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4. 세종대왕자 태실
문화재명 : 世宗大王子胎室
구분 : 사적 제444호
규모 : 19基재질 : 화강암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2003년 3월 6일
위치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 742.4m)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이곳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되었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은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1977년에 태실을 정비하던 중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소장) 등이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세종대왕의 자녀는 몇 명?
세종왕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가지셨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무려 22명의 자녀를 낳는 업적을 이루셨다.
그 이름은 1.향 2.수양 3.안평 4.임영 5.광평 6.금성 7.평원 8.영웅 9.정소 10.정의 11.화의 12.계양 13.의창 14.밀성 15.익현 16.영해 17.담양 18.한남 19.수춘 20.영풍 21.정안 22.정현 이다. 조선의 왕 중 최다의 자녀를 두셨다.
세종대왕은 6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째부인 소헌, 둘째 영빈, 셋째 신빈,
넷째 혜빈, 다섯째 숙원, 여섯째 상침입니다.
4. 성주백세각 (星州百世閣)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3호
건립시기 : 1561년(명종 16)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42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倻溪)송희규(宋希奎)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를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1561년(명종 16년)에 지은 제택(第宅)이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었으며,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어 만든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정침과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 일각 대문을 두고, 주위에 토석 담장을 돌려 영역을 한정하고 그 안의 다소 높은 기단 위에 백세각이 남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측 별곽에는 사당이 있으며 백세각 앞쪽 우측에는 관리사가 각각 위치한다.
정침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구(口)’자형이다. 정면 7칸 중 동쪽에서부터 헛방, 마구칸이 1칸씩 놓이고, 그 다음이 중문칸이다. 중문칸 서쪽으로는 사랑방 2칸과 사랑대청 2칸을 두었고, 사랑방과 마루 앞쪽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사랑방 앞 쌍여닫이 세살창문에는 각각 고졸한 구조의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앞마당 뒤의 안채 부분에는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에는 건넌방과 마루방, 안사랑방과 부엌이 앞채에 이어졌고, 동측에는 안방과 부엌, 뒤주 등이 앞채의 마구간으로 이어진다. 안방과 안사랑방, 안대청 뒷벽의 창문에도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기단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4겹으로 쌓아 놓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각주를 세운 집이다. 사랑마루와 안대청 상부가구는 3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은 간소한 구조이며, 홑처마에 맞배집이다. 이 건물에는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峰), 채번암(蔡樊岩)의 친필이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었으나,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대청과 전(田)자형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恭山)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시장일에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했다고 전하며,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ㆍ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5. 정산종사에 대하여
1) 정산종사
정산 종법사(송규 1900~1962, 재임 원기28년 6월 6일~47년 1월 23일)는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부친 송벽조와 모친 이운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구세의 뜻을 높이 품고 1917년 17세 때에 전라도로 건너와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친영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이 때부터 정산 종법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적극 노력하게 되었다. 또한, 교리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인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그를 「우리 회상의 법모」라고 까지 칭찬하였다.
이후로 정산 종법사는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고, 1943년(원기 28)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강점 말기의 가혹한 탄압과 8·15의 혼란, 6·25의 수난 등을 극복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성업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8·15 광복 이후에 교단의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바꾸었다. 또한, 〈원각가〉·〈불법연구회 창건사〉·〈건국론〉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원각가는 당시 교도들의 신앙·수행심 고취에 큰 역할을 하였고, 불법연구회창건사는 원불교 교사의 기본이 되었다.
건국론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법어〉가 1972년(원기 57)에 발간되어 원불교 교서의 하나로 쓰여지고 있는데, 〈대종경〉과 더불어 많이 읽히고 있다.
정산종법사는「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을 직접 집필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후천개벽시대의 주세불로, 원불교를 주세종교로 천명하였으며,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진리, 인류는 한 가족 임을 말씀하였다.
2) 삼동윤리(三同倫理)란?
① 동원도리 (同源道理)
이 세상 모든 종교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많은 종교가 교리를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고, 문호를 따로 세우고 있으며, 각 종교의 주장과 방편에 따라 교화를 펴고 있으나 모든 종교의 근본적 진리는 다 같이 일원의 진리에 바탕 해 있고, 궁극적인 목적도 다 같이 평화 안락한 이상 세계 건설에 있으므로 모든 종교인은 비록 이름이 다르고 교리와 제도와 의식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으나 그 근본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다.
② 동기연계 (同氣連契)
모든 인류의 미래의 진로를 밝힌 것이다. 이 세상의 많은 인류와 무수한 생령들이 그 이름은 서로 달리 하고 있으나 그 근본은 다 같이 한 기운으로 연계되어 있는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고 상생상화의 선연을 맺어 함께 진급하자는 것이다.
③ 동척사업 (同拓事業)
인간 사회의 각종 사업이나 주의 주장이 때로는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것 같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을 개척하려는 데에 있고 또한 서로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대동 화합하자는 것입니다.
3) 게송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4) 성주와 소성동
① 성주에 대하여
성산가야의 옛터
고려, 조선시대에는 경산부, 성주목이 있었다.
일제 - 철도문제로 반대하여 왜관에 경부선이 지나감 (교통이 불편)
최근 - 특산물로 참외와 수박을 많이 재배한다.
② 소성
소성 - 소야와 구성이 합하여 소성이라 함.
고대 중국의 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시절에 사양의 덕을 노래지어 부르니
봉황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
『簫韶九成에 鳳凰이 來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마을
전래비결 - 세밭 아래에 가히 만인을 살리는 땅이 있다.
『三田之下에 可活萬人之地』
소성위로 월전, 진전, 섭전이 있다.
* 眞田 - 참밭은 깨끗한 밭이며 진리의 밭이다.
잡초를 제거하고 깨끗한 밭이다
수양을 통해서 양성을 통해서 참밭을 만들 수 있다.
* 月田 - 달밭은 밝은 밭이다.
심월이 솟았으니 밝은 밭이다.
연구를 하면 지혜광명이 솟는다.
* 燮田(화할섭, 빛날섭) - 빛나는 밭은 결실의 밭이다.
노력한 대가가 빛나는 것이며 은혜의 덕화가 빛나는 밭이다.
취사를 통하여 공덕이 들어난다.
삼전 아래에 성자가 탄생하셨고 성지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량이 생길 것이다.
또한 삼전은 마음의 밭을 말하며 삼학이 삼전이다.
삼학 속에 만인이 살 수 있는 터전이 있는 것이다.
5) 고산정에 대하여
정산종사의 선대가 살던 곳
조부이신 송훈동 선생이 구성동으로 이사하였음
야성송씨가 고산리에 정착한 것은
1551년 입향조인 충숙공 야계 송희규(1494-1558)선생이다.
송희규선생은 윤원형의 행패를 탄핵하다 전라도 고산에 유배되었다가
5년만에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孤山을 보고 유배지 고산생활을 잊지 못 하여 마을이름을 高山으로 고치다.
송희규선생은 백세각(지방문화재 163호)을 짓고 후학을 기름
정산종사 유학스승 공산 송준필선생이 백세각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송벽조선생 - 원기24년 마령교무로 재임시 진정서
6) 탄생가에 대하여
정산종사는 1900년 8월 4일 탄생,
주산종사는 1907년 12월 23일(열반은 원기31년 3월 27일) 탄생
정산종사 9세시(1908년) 까지 이곳에서 사심
마을 뒷산은 달마산 - 달마대사가 앉자있는 것 같은 바위(달마바위)
사랑채는 서당
7) 박실 구도지
원기 4년 (1919년) 9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남부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곳
* 고대 성현들과 영웅달사들의 명패를 실내에 봉안하고
주문을 외우자고하여 - 여청운님 말씀중 에서
* 가야산의 기도
해가 뉘엿뉘엿 할 때 가야산에서 출발 하였는데
8) 거북바위
정산종사 기도 드리던 곳
9) 주산종사
1907년 음력 11월 19일 탄생
13세에 대종사님 뵙고 제자되기를 간청
대종사 - 너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
주 산 - 夫心者는 至廣至大物이니 修練精神하여 擴充基至大心之耳입니다.
대종사 - 너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이라 이름하거라
원기 13년 16세시 변산에서 : 獻心靈父 許身斯界 常轉法輪 永轉不休 출가시
10) 성주 삼동연수원
성주 삼동연수원은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1년 6월 에 세워진 연수원이다. 연수원의 전체적인 면적은 1만평 정도의 규모이다.
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금산1리 724-1(전화 : 054-931-2247)
연수원 홈페이지 : http://www.samdongcen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