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해남윤씨 가문의 소유였다.
중국의 새벽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곳.
섬들이 새때처럼 많다는.,뜻 지명.
걸리는 멀고도 먼 오지 낙도의 섬이다.
가야할 만큼., 먼 섬.
<해남윤씨문헌> 기록에 의하면
이 문서들은 맹골도에 관한 기록이 30여건.
맹골도 위와 아래에 죽도와 곽도.
자연산 미역, 톳, 김 등을 채취하여 생활.
많은 바위섬들로 이루어진.,맹골군도.
그 이전에 맹골도에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사이에서 세금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
그런데, 이 분쟁의 중재자는 일본인.
해남윤씨가의 무거운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
.
새롭게 정리되면서 분쟁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곡물 대신 세금으로 바치게 했다.
를 지낸 인물이다.
이발은 윤의중과 함께 대표적 동인 지지 인물.
해남윤씨가는 전형적인 문인 사대부가였지만
성(城)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왜적의 피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을묘왜변(달량진 사변)은
금갑진도 짓밟아 살인과 약탈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해남읍성만은 현감 변협의 지략과
이윤경과 함께 나주에서 적을 퇴치하였다.
윤홍중은 읍성을 지키고 왜구를 물리쳤다.
달량진 사변이 진압된 후 조정에서는
해남현감 변협은 장흥부사로 승진 발령했다.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전 영광군수 윤홍중을 강진에 유배보낸 기록.
"전 군수 윤홍중을 강진에 유배했다.
윤홍중이 숙의(淑儀) 신씨(申氏) 본가
옆에 있는 집을 샀다가 담장문제로 싸움
숙의 집 여종을 붙잡아다 매질을 하였다.
숙의 집에서 숙의에게 호소를 함에
상이 가만히 숙의의 집으로 하여금
형조에 고소를 하게했다. 이렇게 해서
사헌부가 윤홍중을 논박하여 금부에
가두었고 마침내 유배를 모내고 만 것.
윤홍중은 원래 광망하고
술을 많이 마시는 인간이니
애석할 것이 없다. 그러나
숙의 집 사사로운 혐의 때문에
조정 선비를 유배보냈으나 이는
여알(女謁)의 성행을 돕는 것이다."
<미암일기>에도 윤홍중에 관한 기록
미암 유희춘은 윤홍중의 작은 아버지인
윤항의 아들 윤관중(寬中)의 장인 되는데
이 때문인지 사위인 윤관중에 대한 기록이
<미암일기>에 자주 나올 뿐만 아니라
윤홍중에 대한 언급도 자주 눈에 띈다.
먼 바다를 향한 열망
윤홍중이 맹골도를 매입한 것은
토지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개척정신 때문이었을까?
해남윤씨 인물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간척사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하려는 등
적극적인 해양진출의 일면들을 볼 수 있어
해양개척 의식이 뚜렷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해남윤씨 가문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성향 중에 하나가 해남윤씨가의 해양 중시
이는 실천적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개척정신
당시 조선은 해금정책을 쓰는 등
바다를 멀리 하는 사회 상황이었다.
그당시 서남해안을 적극적으로 개척
해남윤씨 가문의 해양 개척정신을 대변.
이중 간척사업(堰田開發)은
해양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
해남윤씨 언전개발은
어초은 윤효정의 손자이자
윤홍중의 동생인 윤의중 대부터
시작되어 그 연원이 매우 빠르다.
해남윤씨 가문은 서남해안 지역조건을 이용
연해 지역의 해언전(海堰田) 개척이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 언전에 관한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은 윤의중(尹穀中) 대다.
헌(憲, 趙憲) 이 또 "신(臣, 尹穀中)이
대탐(大貪)하여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주위로 신의 언전(堰田)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지목(指目)하였습니다.
신(臣)은 포의시(布衣時)로부터
원래 지극히 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선세(先世)의 구업(舊業)이 있고 또
처가의 자산(資産)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臣)의 형제(兄弟) 및 제종(諸從)형제,
처가(妻家)형제가 모두 가빈지인(家貧之人)
으로서 함께 기한(飢寒)의 苦를 면합니다.
이곳에 나온 기록은 윤선도의 조부인
윤의중이 조헌(趙憲, 1544~1592)의
비난 상소에 대하여 반박한 상소 중 일부.
조헌의 상소는 윤의중이 탐하여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의 거의
모든 언전이 그의 소유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윤의중은 이곳에 원래
자산(資産)이 있었고 또 그것이
불의(不義)로 취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윤의중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
서남해안 일대에 많은 언전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윤의중의 언전소유는
그의 자녀들이 분집한 1596년의
화회문기에서도 확인된다.
이후에도 해남윤씨는
윤선도 - 윤인미 - 윤이석 -
윤두서 대등 아주 근대의 윤정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언전을 개발하여
토지를 확보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입안 및 각종 소지류 가운데 상당부분이
해택입안(海澤立案)에 관한 문권(文券)들이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윤홍중이
그 먼 섬 '맹골도'를 매입했던 것도
아마 이러한 간척지 개발의 과정에서
이뤄지지 않았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육지의 연안도 아니고
그 절해의 고도를 굳이 매입했던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바다를
아주 자유롭게 오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치 섬과 섬을 징검다리 삼아
바다 위를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다녔던 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댓글 어머나, 신기한 이야기에요 !! 해남 윤씨 가문에서 이렇게 먼 절해고도의 섬을 매입했군요. 대단한 사람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