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 저 언덕 너머로 가야산 호령하던 호랑이, 스스로 낸 길 따라 영원의 세계에 들다
▲ 1993년 11월10일 성철 스님의 다비식이 열리던 날, 전국에서 20만 명 인파가 운집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노승이 언덕을 건너가고 있었다.
해인사의 아침은 맑고 고요했다. 새소리만 퇴설당 작은 마당에 떨어졌다. 성철은 제자 원택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몸은 무척 가벼웠다. 제자는 스승의 작은 숨소리에 제 숨소리를 포갰다.
1993년 11월4일, 입적하자 전국서 조문객들 발길 이어 가을비 속 하루 2만 명 찾아
다비식 날 2000여개 만장과 500여명 스님 행렬 뒤 따라 오열하는 중생들 남겨둔 채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
아침공양을 마친 스님 몇이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며 연기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오늘 ‘가야산 호랑이’가 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몰랐다. 성철이 백련암에 올라 포효하면 가야산이 울었다. 그 일렁임과 그 울음은 어디로 스며들 것인가. 불생불멸이지만 빈 하늘은 쓸쓸했다. 비질을 멈추고 퇴설당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막 생겨난 햇살이 스님의 맑은 얼굴에서 경건하게 부서졌다.
성철의 숨소리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택이 코밑에 손을 대봤다. 퇴옹(退翁)이, 물러난 늙은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물러났다. 태어난 지 81년, 산문에 든 지 58년 만이었다. 1993년 11월4일 아침 7시30분, 원택과 시자 셋이서 이를 지켰다.
퇴설당은 원래 선방으로 가야산 해인사를 상징하는 수행의 요람이었다. 퇴설당에서 시작된 성철의 수행은 퇴설당에서 끝났다. 집 떠나와 퇴설당에 들어 삭발을 하고 영원히 사는 길을 찾더니, 이승의 마지막도 퇴설당에서 맞았다. 묻고 또 물어 스스로 낸 길을 따라 이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조계종 종정 퇴옹 성철, 이른 봄날에 세상에 나왔다가 늦은 가을에 떠났다.
범종이 울렸다. 열반의 종소리가 가야산 구석구석에 퍼졌다. 108번의 울림은 느려서 더 무거웠고, 무심해서 더 슬펐다. 소리가 탁하거나 둔하지 않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법당에서, 선방에서, 강원에서, 암자에서, 산등성이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누구는 기도를 올리고, 누구는 낙엽을 굽어보고, 누구는 하늘을 보았다.
“가야산 호랑이가 떠났구나.”
바람이 퇴설당 문짝을 잡아당겼다. 가야산 산봉우리도, 백련암을 지키는 키 큰 느티나무도, 경내의 불면석(佛面石)도 큰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종소리가 희로애락의 언덕을 넘어갔다.
108번을 울던 범종이 그치자 일순 시간이 멈췄다. 가야산 해인사는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성철은 무심하게 떠났지만 남은 자들은 유심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주검은 새털처럼 가벼웠지만 죽음은 쇠처럼 무거웠다. 마른기침으로 경내의 정적을 걷어내며 스님들이 퇴설당으로 모여들었다. 법신은 퇴설당에 모시고 분향소는 궁현당에 차렸다. 원로스님과 상좌 20여 명이 영전을 지키고 문중제자 20여 명은 궁현당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등산객들이 열반 소식을 듣고 분향소를 찾아와 엎드렸다. 오후에는 인근 마을에서 신도와 주민들이 일주문을 넘어왔다. 그저 기특한 일로 여겼는데 다음 날부터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조문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주문에서 해인사 궁현당까지의 길은 추모 인파로 뒤덮였다. 해인사가 생긴 이래, 아니 가야산이 인간을 품은 이래 최대의 인파였다. 날마다 2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찾아들었다. 해인사 일대가 사람으로 뒤덮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조문객 스스로가 엄청난 조문 열기에 놀랐다.
성철은 청정비구의 외길을 걸었다.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진정한 무소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조사들이 걸었던 옛길을 찾아냈다.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에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은 무량불사를 위한 수행이었다. 말씀을 얻겠다고 백련암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누구나 삼천배를 시켰다. 감투와 돈 보따리는 가야산 소나무에 걸쳐두고 몸만 올라오라 했다. 성철 자신을 보지 말고 부처를 보라고 했다. 산중에 있음이 만 리 밖에 있음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떠난 뒤에야 알았다. 새삼 성철의 남긴 말이 공명을 일으켰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 몰래 남을 도웁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한사코 마다했지만 종정이란 고깔모자를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구도 정진과 청정 계행을 멈추지 않았다. ‘산속의 종정’은 한국불교와 수행종단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11월6, 7일 이틀 동안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 끝을 장식하고 있던 단풍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빗속에도 조문객은 끊이지 않았다. 해인사는 회색과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어디서 왔는지, 여신도 한 무리가 퇴설당 문밖에 엎드려 길게 울었다. 또 더러는 큰절 해인사에서 백련암까지 성철이 오르내렸던 오솔길을 짐짓 뒷짐을 지고 걸었다.
혜춘 노스님은 경내 귀퉁이에서 비닐 거적을 깔고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성철은 특히 혜춘에게 엄했다. 공부에 진척이 없다며 수행처 천제굴을 찾아온 혜춘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주장자로 내리쳤다. 성철의 “일러보라”는 추궁에 답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승이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누가 비구니 노승을 경책하며 지켜줄 것인가. 낙엽이 뒹구는 거적 옆에는 혜춘 스님의 헤진 털신이 놓여있었다. 스승도 헤진 고무신 한 켤레를 남겼고, 제자도 떨어진 신 한 켤레 남기고 뒤를 따르리라. 사람들은 차마 그 광경을 바로보지 못했다.
입관식은 산중 큰 스님들과 제자들이 지켜봤다. 평생 검소하게 살다간 성철의 삶을 헤아려 법구에 삼베 가사, 장삼을 입혔다. 해인사 목수간에서 만들어진 관은 가야산에 자생하는 붉은 소나무가 쓰였다. 처음 해인사를 찾아갈 때 성철을 지켜보던 바로 그 소나무들이었다.
11월10일, 다비식 날이 밝았다. 아침 7시55분 퇴설당 문이 열렸다. 전국 선방 대표 20여 명이 법구를 모시고 나왔다. 그날따라 퇴설당 문이 유독 비좁아 보였다. 스님, 신도들이 일제히 “석가모니불”을 정근했다. 스님 500여 명이 두 줄로 도열해 있고, 그 사이로 법구가 지나갔다. 대적광전에서 학사대, 다시 범종각을 지났다. 붉은 만장과 영정을 앞세우고 법구를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으로 모셨다. 영결식은 오전 11시에 열렸다.
말짱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찬비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적셨다. 범종이 다섯 번 울렸다. 종소리가 남은 자들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오열하는 스님들, 땅을 치는 신도들.
가야산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생 누더기만 걸쳤던 성철이 비로소 만 송이 국화로 뒤덮인 법구차에 실렸다. 다비장은 절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철의 영정이 앞서고 2000여 개의 만장이 뒤를 따랐다. 법구차 뒤로는 사람의 행렬이 끝도 없이 뒤따랐다. 선두 행렬이 다비장에 도착했음에도 영결식장 해인사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비식을 보러 달려오던 차량들도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해인사 진입로부터는 오지도 가지도 못했다. 모두 내려서 걸어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서너 시간이 걸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성철은 생전에도 친견하기 어려웠지만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그날 해인사를 찾은 인파는 20만 명이 넘었다.
다비장 주변 언덕과 숲 속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온통 사람의 산이었다. 제법 나이 든 소나무들이 연화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도, 만장들도, 나무들도 연화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비장 한가운데는 거대한 연꽃 봉우리였다.
법구를 연화대 거푸집에 밀어 넣었다. 제자들이 장작으로 거푸집 입구를 막았다. 염불이 끝나고 종단 대표 스님들과 문도 스님들이 거화봉에 불을 붙였다.
“거화(擧火)”
일제히 연화대에 불을 붙였다. 오열과 염불소리가 산자락에 가득했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을 외쳤다. 부슬비는 계속 내렸다. 누구는 “석가모니불”을 염하고 누구는 “아미타불”을 송(誦)했다. 수만 명의 입에서 나온 염과 송이 잠시 빗줄기를 밀어냈다. 연화대가 화염에 뒤덮였다. 고운 꽃들을 짓이기며 불길이 치솟았다. 연화대는 지수화풍의 몸을 태우는 화택(火宅)이었다.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一輪吐紅掛碧山)’
열반송의 마지막 구절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듯했다.
‘육체는 헌 누더기,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본래 청정하여 나고 죽음이 없다.’
‘생사란 바다의 파도와 같다. 끝없는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다 스러졌다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한다. 그렇다고 바다 자체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의 생사 자체도 마찬가지다.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자체는 바다와 같이 넓고 가없어서 상주불멸, 불생불멸이다. 따라서 생과 사는 하나이지 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성철은 그리 일렀지만 어찌 슬프지 않을 것인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오열하는 이들의 눈물을 빗물이 씻기고 있었다.
“우리 스님을 어이 할꼬.”
연기가 피어올라 가야산 운무와 합쳐졌다. 번뇌 조각을 깨물고 있는 중생들을 두고, 그렇게 성철은 저 언덕을 넘어갔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 세상이 가야산 속으로
『"성철의 빈자리는 깊었다. 빈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벌써 성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간 한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가시는 님은 이승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권부의 이력도 이재의 축적도 없이 수저와 그릇, 누더기 옷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
▲ 다비식에서 성철 스님을 기리는 만장이 끝없는 행렬을 이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가난해서 행복했던, 그래서 거침이 없었던 선승이 떠나갔다. 선승은 산문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지만 세상이 가야산 속으로 들어왔다. 지상에서의 최후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철이 남긴 누더기 옷과 죽비를 보며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 시대가 오염되었음을, 어른이 없음을 실감했다.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더 큰 밥그릇만 찾고 있었다. 그런 중생에게 이제 누가 죽비를 내려칠 것인가. 성철은 생전에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절집과 사람들을 꾸짖었다. 성철의 유산을 더듬던 사람들은 문득 성철의 소리를 들었다.
“그대들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철의 빈자리는 깊었다. 빈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벌써 성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난날 지구라는 별에서 성철과 함께 또 다른 진리의 별을 바라보았음을 알게 됐다. 지나서 생각하니 새삼 그것이 축복이고 행운이었음을 알게 됐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간 한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선객, 묵객들은 붓을 들어 성철을 기렸다. 시인 고은은 소금 없는 식단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은 성철 자신이 스스로 소금이었기 때문이라며 치열했던 용맹정진과 시퍼런 결기를 찬했다.
‘성철 큰스님은 자애롭다, 천진이다 하고 누가 말하지만 그 분의 특장(特)은 엄혹(嚴酷) 거기에 있다. 사람 하나 다루는 데도 금강산 1만 2천봉을 다 써버리며 시자나 상좌 하나 길러내는 데도 향수해(香水海) 바닷물을 다 써서 그 파도에 실려 보내는 것이다. 실로 자비 문중의 무자비(無慈悲)였다. 그런 뼈 으스러지는 공부를 통한 뒤에라야 겨우 가야산 겨울 홍시 두어 개를 따먹으리라 하는 것이다.’
언론은 열반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특별취재반을 내려 보냈다. 가야산의 늦가을 정취를 배경으로 일생 동안 중생의 불성을 깨우쳤던 성철의 삶을 조명했다. 한때 엄중한 우리네 현실을 외면하고 산속에서 선문답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언론도 영전에 향을 살랐다. 선(禪)은 사상과 논리의 저 편에 있으니, 문자로는 결코 선승의 경지를 제대로 그릴 수 없었지만 언론에 보도된 성철의 일생은 향기로웠다.
‘청산도 묵언이었다. 법체가 옮겨진 연화대 다비장이 거화되자 영결식 때부터 청산을 적시던 빗물도 그었다. 수만 불자들의 흐느낌과 독경이 가득한 가운데 거행된 성철 큰스님의 가시는 길은 무지중생이 짐작할 길 없는 무량무애였다. 그 무량 앞에서 장엄하다, 위대하다 등의 수식어는 오히려 훼가 될 뿐이다. 가시는 님은 이승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권부의 이력도 이재의 축적도 없이 수저와 그릇, 누더기 옷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 말을 아끼던 생전에 병든 속세를 향해 내뱉던 돈오(頓悟)의 법어들.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고도 추대식장에는 물론 끝내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내보내곤 했던 큰스님의 그 법어들은, 삼보정재를 세속의 밥그릇싸움으로 전락케 만든 한국 불교계를 향한 질타였으며, 사바세계 대중에게는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계문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며 버리고, 버리고 갔다.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번을 앞세우고 동방 약사유리광불, 서방 아미타불 등 오방번을 모신 채 한 가닥 남은 육신의 옷조차 벗고 갔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는 사부대중들이 영결식장에서 다비장까지 십여 리 산길을 가득 메우고 절로 부복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병든 세상을 기운 누더기 한 벌로 닦아 온 이승의 삶을 기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 뜻을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이날 추도사에서 “돈만 집어넣으면 흰 것도 검어지고 권력으로 밀어붙이면 둥근 것도 모가 난다고 하는 세상인심들! 얽히고설킨 한 맺힌 그물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바의 절규 속에 찌든 인생들이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가시는 님의 큰 뜻을 새겼다.’ (경향신문 양권모기자 ‘해인사의 흐느낌’)
다비식 법요를 마쳤지만 사람들은 다비장을 떠나지 않았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든 성철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연화대 불길은 11월11일 새벽 4시에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밤을 꼬박 새우며 재로 변한 법구를 염불로 지켰다.
11월12일 오후 습골이 시작됐다. 의현 장의위원장, 일타 장의집행위원장, 혜암 해인총림부방장, 법전 법제자, 천제 맏상좌가 재를 뒤적였다. 성철은 생전에 사리를 거두어 법력을 과시하는 풍토를 경계했다. “사리만 나오면 뭐하나. 살아서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살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럼에도 세속의 관심은 온통 사리에 집중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성철의 사리를 찾았다. 1000여명의 사부대중이 습골을 지켜봤다. 이윽고 누군가 외쳤다.
“사리다, 사리가 나왔다.”
순간 이를 지켜보던 대중 사이에 환성이 터졌다. 밝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성철은 능히 고무신 한 켤레로도 도인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리가 당연히 그 증표가 돼야했다. 모두 110과의 사리를 수습했다. 스님들이 성철의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다비장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다비장 옆에 서있던 키 큰 떡갈나무가 제 몸을 떨어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일행이 갈 길을 멈추고 나무를 쳐다봤다. 떡갈나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나목이 되어버렸다. 가장 가까이서 다비의식의 처음과 끝을 지켜봤던 나무였다. 사람들은 기이하다며 나무를 만져보거나 올려다보았다.
다비식을 마친 다음날 아침 공양이 막 끝났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방광이다, 백련암 쪽이다.”
그러자 절 식구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백련암 쪽을 바라봤다. 정말 오렌지색 빛 무더기가 백련암 뒷산을 휘감고 있었다. 구름인 듯 안개인 듯 빛을 품고 산등성이 위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올랐다. 20여분간 백련암을 장엄했다. 백련암에서 성철을 시봉했던 제자들이 보기에도 그 빛은 아침노을보다 훨씬 붉고 밝았다. 방광을 목격한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열반한 날 밤과 영결식 전날 밤에도 붉은 빛이 숲과 산등성이를 물들였다. 사하촌 사람들과 산 아래 가야면 주민들은 믿기지 않는다며 눈을 비볐다. 일부에선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일축하지만 봤다는 사람들은 침을 튀기며 목격담을 전했다. 일타 스님은 ‘성철대종사 사리탑비명’에 이렇게 썼다.
‘7일 장중(葬中)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두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방광을 하시니, 그 이적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했다.’
성철의 사리가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고도 길었다. 날마다 1만 명이 넘게 몰려들었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사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아마 문도들과 몰려든 대중들에게 이렇게 일갈했을 것이다.
“미련한 곰들아, 살아 수행이 중요하지 죽어 사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직도 사리장사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왜 당신네 본 모습은 보지 않고 남의 사리를 구경하러 그 고생을 하는가.”
성철이 뭐라 하든 남은 사람들은 사리탑을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조각을 하지 말자, 높게 짓지 말자, 우리 시대 조형언어로 짓자’는데 뜻을 모았다. 무턱대고 전통양식을 모방, 모사하는 불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내 불생불멸, 부증불감인 우주의 결정체를 형상화한 원(圓) 형태의 독특한 조형물이 완성되었다. 사리탑이 결코 크거나 우뚝하지 않아 탑전에 선(禪)의 공간이 생겼다. 1998년 11월 열반 5주기에 사리탑 회향식을 가졌다. 그 후 사리탑은 자연스레 성철의 정신세계를 기리는 참배공간이 되었다. 실제로 열반 20주기에는 1000여명이 모여 탑을 둘러싸고 삼천배를 올렸다. 제자들과 딸 불필스님, 그리고 성철을 따르던 대중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의 고향 생가터에 겁외사를 세우고 성철을 다시 모셨다. 겁외(劫外)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머문다’는 뜻으로 성철이 말년 자신의 처소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겁외사에 법당과 심검당, 요사채를 짓고, 성철 동상도 세웠다. 고향 떠난 후 속가에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데,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생가로 모셔온 셈이었다.
물론 이렇듯 구도의 조각들을 모으고 기리는 것을 성철이 보고 크게 꾸짖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꾸짖음조차도 그립다. 그래서 스승을 모셔 놓고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불쑥 이곳 겁외사에 눈 푸른 납자가 찾아올 것으로 믿고 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 성철 스님의 어린시절 아픈 땅, 거친 시간 속에서 경허가 가고 성철이 오다
『"성철은 1912년 4월6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1920년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동급생은 거의가 스무 살 전후 청년들이었다. 학적부에는 입학 이전에 서당서 글을 깨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미 ‘서유기’ ‘삼국지연의’ 같은 중국 기서를 읽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 성철 스님 생가터에 자리 잡은 산청 겁외사.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수계득도부터 정진, 오도, 열반에 이르기까지 구도여정을 참배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순례단이 2012년 3월31일 출범식을 가졌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유교의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꺼져가는 왕조의 끄트머리에서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 아니었다. 삿된 것들이 정법을 능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홀로 깨쳐 암흑기에 선(禪)의 등불을 밝힌 선사가 있었으니 바로 경허이다. 오묘한 설법으로 선풍을 일으키자 눈 밝은 이들이 모여들어 제자로 삼아 달라 간청했다. 하지만 잇단 기행으로 선사에 대한 세평은 무애와 방종, 두타행과 파계행 사이를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 혹독한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들어갔다. 지도상에서도 찾기 힘든 오지 중의 오지였다. 선사가 개마고원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마도 스승 없이 일군 선가(禪家)에서 스스로를 유배시킴이었을 것이다.
선사는 머리를 길러 유관(儒冠)을 쓰고 글방선생(훈장)이 되었다. 그것이 경허에게는 대자유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스승이 사라진 땅에서 제자 셋은 달(수월, 혜월, 만공)로 떠서 선방을 밝혔다. 선사는 1912년 4월25일 능이방도하동(能耳坊道下洞)이란 곳에서 입적했다. 장례는 유교식으로 치러졌고 유생차림으로 묻혔다. 뒤늦게 스승의 입적소식을 듣고 달려간 혜월과 만공은 무덤을 헤쳐 스승의 유복(儒服)을 벗겼다. 악취 나는 시신을 불태워 뼛가루를 북쪽 강과 산에 뿌렸다.
경허가 입적한 바로 그해, 남쪽 오지 유가(儒家)에서 사내아기가 태어났다. 훗날 선승으로 경허와 같은 듯 매우 다른, 다른 듯 같은 길을 걸었던 성철이었다. 성철은 1912년 4월6일(음력 2월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세수 49세인 용성 스님은 서울 종로에 대각사를 세우고 도심포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동산 스님은 경성의전 의학도로 용성 스님을 찾아가 몸이 아닌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듬해 출가한 23세 하봉규란 청년이었다. 37세 한암 스님은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정진 중이었고, 효봉 스님은 이찬형이라는 속명의 25세 일본 유학생이었다. 34세 만해 스님은 양산 통도사에서 경전 편찬을 기획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줄곧 억압을 받아온 불교는 다시 급속히 왜색에 물들었다. 당시 사찰은 여염집과 다름이 없었다. 공양간에서는 비린내가 빠지지 않았고, 빨래 줄에는 기저귀가 나풀 거렸다. 그래도 이 땅 곳곳에서 선승들이 살아있었다. 어느 때보다 눈을 부릅떴으니 일본불교를 물리치고 임제 선맥을 이으려는 또 다른 독립투쟁이었다.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에 큰스님이 대거 등장한 것은 이 땅의 불자들이 500년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선승들은 고단했다. 거친 시간들 속에서, 아픈 땅에서 경허가 떠나고 성철이 태어났다.
성철의 세속 이름은 영주(英柱)였다. 아버지 이상언과 어머니 강상봉 사이의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유학자였고, 아호는 율은(栗隱)이었다. 아마 집 주위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 숲에 숨은 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셈에 밝아 해마다 살림이 불어났다. 영주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많은 땅을 사들여 인근에서 살림이 가장 윤택했다.
아버지 이상언은 성정이 당당하고 직설적이었다고 한다. 손녀인 불필 스님은 할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외모는 아버지보다 더 훤해 지팡이를 짚고 갓을 쓰고 길에 나서면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이었다. 유림으로서 향교에 나가 좌정하면 향교가 다 훤해질 정도였다.”
영주네 커다란 기와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집 앞으로는 경호강이 흘렀고, 대나무 밭을 옆에 끼고 있었다. 집 주위에는 온통 소나무, 밤나무, 참나무, 버드나무가 숲을 이뤘다. 경호강 너머 야산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고, 그 오른편으로 아스라이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다.
산청군은 남명 선생의 유풍이 면면히 내려오는 곳이었다. 영원한 처사이며 평생 재야의 선비였던 조식은 곧잘 퇴계 이황과 비견되곤 했다.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다면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었다. 퇴계가 관직을 내려놓지 않은 반면 남명은 임금의 부름에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니며 자신을 다스렸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고 공리공담을 멀리했다. 말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길렀으니 지금의 덕천서원(산청군 시천면) 자리이다. 산청군에서도 단성면은 특히 남명 선생의 유풍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단성군을 산청군에 통합시킨 데는 유림의 기질을 누르려는 저의가 있었던 것 같다. ‘산청군 향토사’는 단성면 유림들의 남다른 기질을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단성을 일제가 거북한 상대로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단성은 진주와 같이 사족(士族)들이 남명사상에 젖어 경의(敬義)를 제일로 삼고, 위선을 경멸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선비풍이 남다르고, 배일(排日)사상이 투철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억누르는(抑勢制裁)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라고 전하여 온다.’
이러한 기개는 아버지 이상언도 그대로 품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일제가 전쟁 물자를 조달하러 쇠붙이들을 거둬갈 때도 숟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이상언의 기세에 눌려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유림이 아들을 얻었으니 아마 세상을 다 품은 듯 했을 것이다.
영주는 신동이었다. 세 살 때 글을 익혔는데 어른들이 읽다 놓아둔 책을 넘겨보니 다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소학’ ‘대학’을 배웠다. 다섯 살에 어른들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한시를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기특해서 글 읽는 소리만 들어도 배가 불렀다. 아버지는 서둘러 영주를 서당에 보냈다. 서당은 경호강 건너에 있었는데, 훈장의 칭찬이 자주 물을 건너왔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지리산 영봉을 올려다봤다.
훗날 성철은 무비 스님에게 육조단경을 세 번 읽고 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머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성철은 적어도 자신이 그만큼의 머리는 된다는 암시였을 것이다. 또 갓 출가한 일타 스님이 송광사에 갔을 때 대중들이 “성철 스님이 온다”며 하나같이 술렁였다고 한다. 일타 스님이 그 연유를 묻자 “성철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는 대단한 스님”이라 했다고 한다. 물론 소문이 부풀려졌겠지만 성철의 머리가 비범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1920년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통학교도 경호강을 건너야 갈 수 있었다. 동급생은 거의가 스무 살 전후 청년들이었다. 갈수기에는 그런 동급생에 업혀서,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영주의 학적부에는 입학 이전에 서당서 글을 깨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영주는 책을 놓지 않았다. 한번 책을 잡으면 단숨에 독파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미 ‘서유기’ ‘삼국지연의’ 같은 중국 기서를 읽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영주는 어른이 되어 회고했다.
“내가 남에게 배운 것은 서당에서의 ‘자치통감’과 소학교 6년 과정이 전부였다.”
영주는 고집이 셌다.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해야 했다. 또 무엇이 갖고 싶으면 기어이 손에 넣어야 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대문 앞에서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이상언~, 이상언아~”
동네가 떠나갈 듯이 크게 외쳤다. 그러면 어머니가 달려 나가 돈을 쥐어주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을 사고 싶으면 몇 번이고 아버지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괴짜 악동이라며 돌아서서 웃었고 아버지 이상언은 입맛을 다셨다. 훗날 일타 스님은 그런 기질을 지닌 영주를 이렇게 평했다.
“성철 스님(영주)은 1만 명 중 한 명이 태어나는 태양인으로 다소 변덕스러우면서도 영웅기질을 지닌 분이셨다.”
영주는 영특했지만 몸이 약했다. 특히 위장이 약해서 좀 과하게 먹었다 싶으면 탈이 났다. 어머니는 자주 보약을 달여 먹였다. 영주는 요양하러 지리산 동쪽 기슭에 붙어있는 대원사에 자주 갔다. 묵곡리에서 70리쯤 떨어진 대원사는 울창한 숲이 있고 계곡이 깊었다.
1926년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너끈히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 몸이 걱정됐지만 정작 낙방에는 덤덤했다. 당시 유림에게 신학문은 사서삼경보다 나을 수 없었다.
영주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독학을 했다. 학교에 가지 않음은 그만의 시각으로 다른 지식을 섭취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영주는 자주 엉뚱한 생각을 했다. 몸이 아파서인지 혼자만의 상상을 많이 했다. 성철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 다니지 말고 하늘로 훨훨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또 엉뚱한 실험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엉뚱할 뿐이지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 그것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정말 쇳덩이는 동쪽으로 움직였다.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영주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인간의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엉뚱한 실험,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영주는 다른 세계로 빠져들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 종이와 먹을 떠난 ‘글자가 없는 경’
『"영주가 읽은 책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영원한 삶’ 같은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길, 즉 구원에 목말라 있었음을 암시하는 방황의 흔적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 스님이 해설을 붙인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눈이 딱 멈췄다.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경이 과연 무엇일까. 이때 영주는 이미 불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 성철 스님은 21세에 당시 관혼상제에 대한 의식을 모아놓은 책 ‘간례휘찬(簡禮彙纂)’ 사이에 메모 형태의 ‘이영주 서적기(書籍記)’를 남겨놓았다. 이를 통해 스님의 엄청난 독서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청소년기에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최후가 있었다. 생명붙이는 물론이요 길도 끊기고, 지나가는 바람도 홀연 멈췄다. 인간도 한 번 상여를 타고 떠나면 돌아오지 못했다. 영주의 젊은 날은 그래서 아프고 허망했다. 당시 심경의 일단을 훗날 딸(불필 스님)에게 준 법문 노트의 머리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초로인생(草露人生),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라. 참으로 영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주는 책에 빠져 들었다. 책이 인생의 해답을 줄 것으로 믿었다. 누구나 인생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찾아온 행복에는 끝이 있었다. 영주는 끝이 없는 행복, 즉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책 속 영웅과 위인들의 삶도 영원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철은 훗날 세속에서 성공했다는 세 사람의 삶을 들어 그들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대중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법문을 통해 몇 번이나 설했으니 바로 록펠러와 맹상군, 진시황이다.
록펠러(1839~1937)는 자수성가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흔 아홉까지 살았다. 그만하면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산 사람이었다. 돈 많고 장수했으니 부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말년에 암에 걸리자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일 년만 연장시키면 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광고를 냈다. 거금을 들여 광고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별 별 사람이 각양각색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살려보려 했지만 록펠러는 죽었다. 부귀와 영화는 이렇듯 한 순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맹상군 또한 세상의 부귀를 모두 누렸다. 왕자로 태어나 정승을 지내며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하지만 백년도 못살고 일흔 가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장례를 거창하게 치러 죽어서도 호강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영화를 앗아갔다. 누군가 시를 지어 세속 영화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 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무덤이 산처럼 거창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누군가 무덤 위로 밭을 냈으며, 무심한 농부는 그 밭을 갈 뿐이었다. 맹상군도 그럴진대 보통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도 진나라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었다. 천하를 얻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다. 음식과 옷 등 세상의 좋은 것들을 독차지했고 수많은 미인을 끼고 살았다. 아방궁이란 궁궐을 지었는데 그 길이가 칠 백 리에 뻗쳤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자신이 늙고 있었다. 곧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황제는 불사초(不死草)를 구해 오라 군사들을 동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기다리던 ‘불사초 원정대’는 오지 않았고 진시황은 죽고 말았다. 그 후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했다. 항우가 아방궁에 들어가 불을 질렀는데 밤낮없이 석 달 동안 화염을 뿜었다.
저들은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몸부림쳤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죽음을 막아보겠다는 것은 버마재비가 수레를 멈춰보겠다며 바퀴 앞을 가로막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들은 세속적인 행복을 누렸지만 지나보니 행복이라는 것이 거지가 밥 한 끼 잘 얻어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영원에서 영원으로 통하는 진리는 없을까?’
영주는 온통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붙들고 해답을 찾아 책 속을 헤매었다. 고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동서고금의 책들을 읽었다. 영주는 21세(1932년 12월2일)에 당시 관혼상제에 대한 의식을 모아놓은 책 ‘간례휘찬(簡禮彙纂)’ 사이에 메모 형태의 ‘이영주 서적기(書籍記)’를 남겨놓았다. 이를 통해 영주의 엄청난 독서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시집’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같은 70여권의 책이름이 나온다. 종교, 철학, 문학서적을 두루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다독은 물론이고 책에 대한 욕심도 대단했다고 한다. 칸트가 지은 ‘실천이성비판’은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쌀 한가마니를 주고서 손에 넣었다고 전해진다.
영주는 의학서적 또한 열심히 읽었다. 자신의 몸이 아팠기도 했지만 인체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의서를 탐독하다보니 자연 인체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맏상좌 천제 스님은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약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 못지않았다고 들었다. 출가하기 전부터 ‘동의보감’ ‘본초강목’ 등을 읽으셨고 웬만한 병은 처방전을 내려줄 정도였다고 한다. 먼 길 떠나는 도반이나 몸이 약한 제자들의 약도 손수 지어주셨다. 아마 속가에 계셨으면 용한 한의사가 됐을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과 학자들을 만나고 도서관을 전전하며 책을 실컷 읽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집안이 윤택하여 돈 걱정이 없었고, 한문과 일어에 능통했기에 영주의 ‘독서여행’은 막힘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얻고 싶었지만 동서고금의 책들은 읽을수록 혼란스러웠다. 영주가 읽은 책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영원한 삶’ 같은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길, 즉 구원에 목말라 있었음을 암시하는 방황의 흔적들이었다.
천제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기의 성철은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찾기 위해 몸에 비상(砒霜)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인간에게 현세를 떠난 또 다른 세계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영주는 대숲에서 생각에 잠겼다. 또 집 앞 바위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흰 얼굴에 눈이 큰 영주는 그림 속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참말로 이곳 사람은 아니구먼.”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 스님이 해설을 붙인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눈이 딱 멈췄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 자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아유일권경 (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 (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 (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 (常放大光明)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경이 과연 무엇일까. 영주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것은 여느 지적 호기심과는 달랐다. 성철은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 없는 경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영주는 이미 불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채근담’의 경구들은 이미 불법에서 많은 것을 따왔기 때문이다. 아마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도 영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고요한 밤 종소리를 듣고 꿈 속의 꿈을 불러 깨우며 맑은 못의 달그림자를 보고 몸 밖의 몸을 엿보는도다. 청정야지종성 (聽靜夜之鐘聲) 환성몽중지몽 (喚醒夢中之夢) 관징담지월영 (觀澄潭之月影) 궁견신외지신 (窺見身外之身)
그럼에도 ‘글자 없는 경’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영주는 공맹의 ‘가르침’에서 노장의 ‘은유와 성찰’로 눈을 돌렸다. 성철이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고, 도(道)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라(爲學日益 爲道日損)’는 글귀를 법문에서 자주 인용한 것을 보면 젊은 날 의식의 흐름을 유추해 따라가 볼 수 있다. 도는 학문 속이 아닌 학문 저 편에 있었다.
영주는 특히 ‘장자’를 읽으며 무위자연의 세계를 거닐었다. ‘도(道)는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듣고, 보고, 말 한다면 도가 아니다’는 ‘지북유편(知北遊篇)’을 곱씹었다. 그리고 장주(莊周)의 ‘소요유(逍遙遊)’를 흉내 냈다. 장주는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르며 유유자적했다. 상상력을 확장시켜 상식을 희롱했다. 장주는 또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귀함과 천함,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지우고 자유를 획득했다. 그럼에도 장주의 자유에는 ‘영원함’이 빠져 있었다. 영원한 자유를 찾으려는 영주에게는 무언가가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묵곡리에 노승이 찾아들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 선승의 노래가 가슴을 쳤다 “아아 이런 공부가 있었구나”
『"책을 펴자 머릿속이 환해졌다. 1300년 전에 살았던 선승의 노래가 한 청년의 가슴을 적시고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공맹과 노장 및 제자백가의 사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갑자기 한밤중에 밝은 해가 솟아 앞길을 환히 비추는 것 같았다. 부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중생이 곧 부처였음을 처음 밝힌 분이 석가모니부처였다. 영주의 방황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성철 스님 생가터에 세워진 율은고거. 이곳에서 노승이 건넨 ‘증도가’를 읽으며 오랜 방황을 끝낸 어린 영주는 불교의 가르침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비상(砒霜)을 품에 넣고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를 찾아 헤매는 영주를 식구들은 비상하게 지켜봤다. 영주의 고뇌는 부모의 눈에 방황으로 비쳐졌다. 사서삼경 안에 살아가는 이치가 다 들어있건만 아들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유림의 소양을 쌓아 선비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타고난 큰 그릇에 아들은 다른 것을 채우고 있었다. 아버지 이상언은 아들 영주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을 하면 해와 달 대신 색시를 쳐다보고, 책 대신 제 자식을 볼 것이라고 여겼다.
영주는 1931년 11월 묵곡리와 가까운 덕산의 전주 이씨 문중 규수와 결혼했다. 이름은 이덕명이었다. 신부는 영주보다 세 살 위인 스물 셋이었다. 딸(불필 스님)이 기억하는 어머니 이덕명은 옷매무새가 단정한 멋쟁이었다.
“갓 시집왔을 때 얼마나 인물이 훤했는지 동네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 ‘물 찬 제비’였다. 외가가 넉넉한 집안이어서 시집 올 때 소 몇 마리와 노비를 함께 데리고 왔다고 한다.”
실제로 남아있는 이덕명의 사진을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하지만 결혼은 아버지의 뜻대로 장남 영주를 바꿔놓지 못했다. 결혼 후 마을잔치가 벌어졌을 때 영주는 친지들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노래를 불렀다. 쉰 듯한 목소리에 타령조로 부른 노래는 한동안 묵곡리를 맴돌았고, 이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성철을 떠올리면 그 노래를 기억해냈다. 딸은 어른들에게 들은 노래의 가사를 외우고 있다.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은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한 마디로 분위기 깨는 노래였다. 신부 이덕명은 고개를 숙였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거듭 ‘이 세상에 살 사람은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혼한 이듬 해 큰딸 도경을 얻었다. 아이는 예쁘고 젖을 물리는 아내는 덕스러웠다. 하지만 영주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강가를 거닐고 밤이슬을 맞았다. 아버지는 곳간을 들여다보고 대소사를 챙기는 장남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영주는 늘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어느 해에는 영주에게 창고에 쌓여있는 수십 가마의 밤을 팔아보라고 했다. 집 근처 밤 숲에서 수확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일거리를 주어 아들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수십 가마니의 밤을 팔려면 당연히 상대를 물색하여 밀고 당기는 흥정을 해야 했다. 식구들은 영주가 모처럼 골치 아픈 일거리를 맡았다고 소곤거렸다. 하지만 영주에게 밤을 파는 일은 단순하고 간단했다. 영주는 밤을 시세의 반값에 팔았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단 이틀 만에 창고를 비워버렸다. 아버지는 혀를 차며 담뱃대를 찾았지만 이 일화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 성철은 출가 전에도 번거로운 것을 싫어했다. 밀고 당기는, 주고받기식의 인간관계를 불편해했다. 또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영주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상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승이 묵곡리에 나타났다. 그리고 영주와 마주쳤다. 허름한 차림의 노승은 걸음을 멈추고 영주를 한참 바라보았다. 영주는 키가 크고 얼굴이 크고 눈도 컸다. 노승은 낡은 바랑에서 차림새만큼이나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영가 스님이 지은 ‘증도가’였다. 육조 스님을 찾아가 확철히 깨침을 인가받고, 영가 스님 나름의 깨친 경지를 펼쳐 놓은 것이었다.
“자네에게 힘이 될 것이네.”
책을 펴자 머릿속이 환해졌다. 1300년 전에 살았던 선승의 노래가 한 청년의 가슴을 적시고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공맹과 노장 및 제자백가의 사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君不見]’로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마음에 박혔다.
수행을 마쳐 다시 배울 것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세상에 분명 존재할 것 같았다.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글자(책) 속에 있지 않았다. 깨달음에 있었다. 참됨[眞]도 설래야 설 수 없고 망상도 본래 공(空)하여 찾아볼 수 없는 참됨과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경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책장을 넘길수록 언어문자에 집착하면 인간의 본래면목을 영원히 깨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글자나 헤아리고 문자나 파고드는 사람은 바다 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이나 헤아리는 것과 같음이었다. 영주의 방황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예전에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내었도다 비래진경미증마(比來塵鏡未曾磨) 금일분명수부석(今日分明須剖析)
중생의 근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번뇌망상의 티끌이 꽉 차서 지혜광명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었다. 마음만 본래의 모습대로 닦으면 모두가 부처였다. 부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중생이 곧 부처였음을 처음 밝힌 분이 석가모니부처였다. 영주는 비로소 글자 없는 경이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증도가’를 깜깜한 밤 등잔불 밑에서 읽었어도 머릿속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훗날 성철은 ‘증도가’를 ‘신심명’과 더불어 모두 외워서 그 정신, 그 사상, 그 방법으로 공부하라고 일렀다.
“이 ‘신심명’과 ‘증도가’는 최고의 법문이며 만고에 유명한 최상승의 표본이니 만큼, 내 법문을 들은 대중들은 이것을 다 외웠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영주는 제대로 된 불서를 얻어 읽은 셈이었다. 종교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었다. 2500년 전 석가모니란 사람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고 깨달았으니 그것이 불교의 출발이었다. 유교는 공자 말씀, 기독교는 절대 신의 계시가 출발점이었다. 즉 다른 종교는 절대신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불교는 인간의 본래면목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었다. 성철이 훗날 성전암에서 정진할 때 작성한 단상(일명 ‘성전암 노트’)을 보면 그의 종교관을 알 수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이 말은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어거스틴의 선언으로 신앙의 절대성을 표시한 말이다. 즉 신앙이란 어떠한 불합리한 사실이 있을지라도 오직 무조건 종조(宗祖)를 추종하여야 한다 함이니, 이야말로 종교의 지상명령이며 생명선일 것이다. (…) 그러면 탁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인 어거스틴 같은 지혜인이 어째서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라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말을 토했을까. 여기에는 아주 깊은 까닭이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의 불합리성을 엄폐하려는 일종의 수단방법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 만약 자기 종교에 불합리한 점이 없다면 이러한 언사는 절대로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합리한 종교는 인지(人知)가 발달함에 따라 그 가면이 벗겨지고 그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객관적 확실성을 토대로 하되 조리가 정연한 이론체계로서 조직된 종교만이 오직 인류의 영원한 태양이 될 것이다.”
영주는 독서를 통해 어쩌면 가장 논리적인 사고를 지녔을 것이다. 그런 영주에게 불교는 가장 허점이 없는, 가장 객관성이 담보된, 그래서 가장 논리적인 사상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하다. 훗날 성철이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했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 않았다며 “만약에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승복을 벗겠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영주의 두꺼운 논리의 벽을 깨뜨리고 마음속에 들어갔음이었다.
영주는 다른 불교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불교’라는 잡지를 읽으며 화두를 잡고 공부하는 법에도 눈을 떴다.
달 밝은 밤, 영주는 품에서 비상을 꺼내 흩뿌렸다. 늘 지니고 다니던 ‘죽음’을 몰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