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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칼빈의 칭의 교리
2010.10.4(월) 304호
조직신학 석사 2학차 최청진
서론
연구범위 및 방법
이 논문에서 우리의 목적은 칼빈의 칭의 교리를 서술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기독교 강요 3권 11장에 포함된 칼빈의 칭의 교리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을 제시한 후에 다음으로 몇몇 주요한 핵심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간단한 해설을 시도할 것이다.
기독교 강요 3권의 칭의 교리 개관
신앙고백서의 주요한 조항들을 따라 칼빈은 강요 1권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다루었고, 강요 2권에서는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다루었다. 이제 강요 3권에 이르러 칼빈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다룬다. 이 강요 3권은 이 책보다 앞 서 있는 강요 2권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 실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속시키는 연결고리는 믿음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일이다. 긴 2장에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근본적인 태도로 묘사되며, 다른 모든 것들 즉 사랑, 회개, 소망은 그 믿음에 의존하고 그 믿음으로부터 발원한다. 우리는 적당한 위치에서 믿음에 대한 칼빈의 관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바로 지금 칼빈은 계속해서 칭의가 아니라 중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이 한 명의 개혁자 안에서는 매우 낯선 이런 순서를 따르는 이유는 칭의는 중생으로부터 분리되지 말아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 개혁자들은 칭의로부터 선행(good works)을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적으로 명확히 나타내기 위함이다.
칭의의 개념
우리는 이 특정의 주제와 관련된 여덟 개의 장들 중에 첫 번째 장인 11장에 이른다. 칼빈은 우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표현과 “믿음 또는 행위(works)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표현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선언을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며 그[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죄인의 자격으로서는 한 죄인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그분의 진노를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반드시 의로워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그 사람이 본래 의롭다면 즉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면, 행위(works)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질 것이며, 행위(works)의 의(righteousness)로부터는 제외되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한 죄인으로 보이지 않고 단지 한 의인(righteous man)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는데, 명료성과 완전성에 있어서 그 정의를 능가할만한 정의는 없을 법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칭의를 단순히 어떤 받아들임(acceptance)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칭의로 인해 우리를 그분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 간주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칭의가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오지안더의 “본질적 의”에 대한 논박
칼빈은 즉시 자신의 성경적 방법에 따라 그 용어의 사용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오며, 계속해서 이단적인 개혁자 오지안더(Osiander)를 공격해나간다. 칼빈의 논박은 그의 입장을 훨씬 더 명확히 밝혀주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길게 그 논박을 다루어야 한다. 오지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심(indwelling)의 진리를 취하여 “하나님의 본질이 사람들 안에 주입된다(transfusion)”고 주장하므로 그 진리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혼합된다”고 주장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오지안더의 주장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을 인간 안에 주입하시며,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공유자(sharer) 또는 참여자(partaker)가 되며, 오직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고 의롭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과 공유하며,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본성을 받음으로 인해 인간은 중생한다. 오지안더는 그의 칭의 교리에서 용서가 필요 없게 만들고 용서를 중생과 나란히 유지한다. 즉 칭의는 용서와 중생으로 말마암는다. 결국 칼빈은 오지안더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신분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를 진정시키셨으며 또한 영원한 하나님 즉 영원한 생명이 되심으로서 우리의 의이심”을 부인한다고 비난한다.
죄의 용서와 중생에 대한 오지안더의 혼돈
칭의와 중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이라고 칼빈은 답변한다.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다시 태어남이 없는데도 의롭다 여겨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양자(adoption)의 영을 주시며 그분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형상(image)으로 새롭게 하신다.” 칭의와 중생 사이의 연결은 그리스도론적이어서 인시띠오 인 크리스또(insitio in Christo,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 즉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축복들(blessings)도 소유한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질 수 없듯이, 칭의와 중생이라는 그분의 축복들도 나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칭의와 중생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와 중생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한 가지는 의롭다 여겨지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새로운 피조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중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래 의롭지 못하고 중생되지 못할 때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지안더의 주장
두 번째 답변은 그리스도론의 특별한 핵심논점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성(humanity)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신성(divinity)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고 오지안더는 말한다. 칼빈의 답변은 프락세아스(Praxeas)에 대항하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의 잘 알려진 노선을 따르는 삼위일체 논쟁의 하나의 작은 모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의를 획득하신 것은 그분의 인성(manhood) 안에서다. 만일 중보자의 임무가 그리스도의 신성(Godhood)에 속한다면, 그것은 또한 성부와 성령께도 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성은 성부와 성령에게도 공통적이며 또한 신성의 속성들도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form)를 취하시므로 의가 되셨으며,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대한 자신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하시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적 본질(divine nature)에 따라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께 위임된 분배(dispensation)를 근거로 이 일을 행하신다고 나는 결론짓는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내주(indwelling)의 본질에 대해 칼빈은 오지안더 못지않게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연합(real union)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본질로 신자 안에 거주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신자에게 어떤 본질적인 의를 제공하지도 않으신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통해, 즉 다른 말로, 우리의 마음(hearts) 안에 간접적으로 거주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분과의 직접적인 연합에 참여함을 통해 우리의 의가 되지는 않으며, 단지 우리에게 전가됨(imputed)을 통해 우리의 의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그분과의 그런 직접적인 연합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의의 공유자도 되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한 죄인이므로 어떤 타고난/본성적 의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함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용서와 중생에 의해”라는 오지안더의 개념은 “오직 용서에 의해서만”이란 개념과 맞서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제 이 특별한 논쟁을 남겨두고 계속해서 믿음과 행위(works) 사이의 관계를 깊이 고찰하는 것이 좋겠다. 우선 우리는 제 2장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의 정의로 돌아간다.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부동한 지식이며, 또한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는(gratuitous) 약속이라는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믿음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minds)에 계시됨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hearts)에 확증된다. 이 정의에 근거할 때, 믿음은 매우 실제적인 인간의 활동인 동시에 그 믿음의 독특한 특성(nature)에 있어서 그 믿음의 창시자(author)와 대상(object)에 의존한다. 즉 믿음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임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그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믿음은 본래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오지안더의 견해에 칼빈은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의롭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이시며,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붙잡는 것이다. 만일 믿음의 행동이 의롭다 한다면, 그렇다면 믿음은 하나의 행위(a work)가 될 것이고 우리는 행위(works)에 의해 의롭다 여겨질 테니 말이다. 믿음은 일종의 텅빔/무가치(emptiness) 즉 일종의 심부름 즉 일종의 기대함이다. 칼빈은 믿음을 텅빈 그릇(vessel)에 비유하는데, 우리는 그 그릇으로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라고 인정하는 고백이다. 이 고백처럼, 믿음은 칭의를 위한 형식적인 또는 도구적인 원인(cause)이다.
“행위”에 대한 잘못된 표현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행위”(works)라는 표현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해석을 다룬다. “소피스트들” 즉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행위(works)를 중생 이전에 행해진 인간의 독자적인 행위(actions)라고 설명한다. 이 행위들이 칭의를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중생 이후에 행해진 행위는 선한 행위이고, 의롭다 하는/칭의의 믿음에 효력을 주기 위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의해 의롭다 여겨진다. 트랜스 회의(Council of Trent)는 이 견해를 취한다. 이 견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선 바울이 거부한 행위(works)의 범위란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인간의 일체의 활동에까지 미친다고 주장한다. 또한 둘째로 “성화(sanctification)와 의는 그리스도만의 독단적인 축복들(blessings)”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칼빈은 스콜라 신학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리는데 그들은 “오히려 보다 더 막대한 양”의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중대한 실수는 그들이 은혜를 성령의 사역으로 돌리며 성령께서 우리가 선행(good works)을 행하도록 인도하고 우리는 그 선행을 통해 의롭게 된다고 본다는 점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칼빈은 은혜의 참된 의미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과분한 하나님의 자비(mercy)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본래 죄인이며 결코 어떤 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봐서 우리를 용서하시며 따라서 그분 안에서 죄 없고 의로운 존재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한편으로는 용서와 은혜와 칭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필수불가분의 연결을 성경으로부터 보여주기 위해 전진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진다”는 그의 핵심 교리에 도달한다. 이 오직(only)이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배타성을 의미한다. 율법의 의전적인 행위(ceremonial works)뿐만 아니라 율법의 도덕적인 행위(moral works)도 배제한다. 물론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만이 의롭다 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롭다 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 생산된 그 사랑이 아니라 믿음 자체이다.
이중 칭의의 난제
우리는 여기서 잠깐 제 11장에서 곁길로 벗어나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중 칭의(double justification)라 부르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난제를 깊이 고찰하기 위함이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죄인이 의롭다 여겨진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칭의 이후에 행한 그의 행위(works)를 하나님께서 선한 행위로 받아들이신다고 가르쳤다.: 즉 “소명 이후에 행한 신자들의 행위도 하나님께서 승인하신다”는 것이다. 게다가 또 “우리는 행위(works)의 부분적인 의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 마치 그 행위의 의가 완벽하고 온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행위의 의를 승인하신다”는 것이다. 종종「기독교 강요」(Institutio)에서는 마치 중생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만 맞닥뜨렸던 동일한 행위가 칭의 이후에는 거룩한 행위로 받아들여지므로 따라서 이중적이고 불공정한 기준(standard)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마치 칼빈이 스콜라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선행하는(prevenient) 은혜와 그 은혜의 결과로 일어나는 효력 있는 행위의 교리로부터 단지 머리카락 하나의 폭만큼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상 칼빈은 신자도 한 명의 죄인이며 신자의 행위도 불신자의 행위 못지않게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고 강조하는 일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works)가 성령의 열매일지라도 그 행위를 본래 선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전가(imputation)를 통해 그 죄인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그 행위들을 받아들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죄악(iniquities)을 덮기 때문에 우리의 인격(persons)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보이므로 우리의 행위(works)는 의롭다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죄된 것(sinfulness)이 달리 그들에게 속했다고 돌려지지 않고 모두 그리스도의 순수성(purity) 안에 장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works)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진다고 주장함이 타당하다.”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됨
칭의의 정의에 대한 칼빈의 연속적인 설명. 칼빈은 이제 자신의 눈길을 용서로 돌린다. 첫째로 칼빈은 자명한 원리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머무는데 그들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존재하는 한 그렇다”는 포석을 깔아 놓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는 제거되는데 그 방법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의 어떤 변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즉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한 동기로 유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종살이하는 그 죄된 것을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다. 용서를 통해 죄는 실제로 제거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한 명의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기시기에 인간은 죄가 없으며, 만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정말 그렇다. 하지만 용서라는 말은 또한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그 사람이 한 명의 죄인임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기엔 용서해야 할 그 무엇이 존재하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칭의가 오직 용서로 인해 존재하지 중생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명확히 드러난다.
결국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안에 존재한다.” 이 개념의 배후에는 칼빈의 그리스도론의 상당 부분이 놓여있다. 사람(man)되심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세상에 들어오셔서 스스로 그들의 삶과 고통 등을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Man) 즉 다른 모든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대표자로서 사시고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그 사람으로 오셨다. 이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자신에게 요구된 모든 새로운 요구를 받아들이시되 궁극적으로 겟세마네(Gethsemane)에서 자신에게 제공된 잔(cup)에 담긴 하나님의 최종적인 진노를 받아들이시기까지 그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생동안 줄곧 순종을 자신의 길로 시종일관 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대표자로서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 안에 인간의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 가능성은 믿음으로 실현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properties)에 참여자들이 된다. 어떤 속성의 공유/소통(communicatio idiomatum, sharing of attributes)이 일어난다. 즉 우리의 고유한 특성인 것이 그리스도께 주어지고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His)은 그분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하나님께 드린 완벽한 순종이다. 믿음을 통해 이 순종은 우리의 순종으로 간주되거나 우리에게 돌려지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본래 존재하는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되지도 않는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신다.
칼빈의 칭의 교리가 갖는 함축적 의미들
이것이 칼빈의 칭의 교리의 윤곽이다. 우리는 이제 이 칭의 교리의 몇몇 강조점들을 주목하므로 이 교리에 함축된 의미들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첫째로, 칼빈이 오로지 이 주제의 배경(backcloth)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certainty)과 영속성(permanence)은 이 사실에 근거한다. 자기 칭의(self-justification)는 반드시 불확실성(uncertainty)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시되어 심판의 선언이 미결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칭의는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once for all) 선포된 선언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일을 향해 즉 영원을 향해 오늘 존재하시는 것이라면, 또한 오늘을 위해 선언된 하나님의 칭의 선언도 내일을 향해 또는 영원 가운데 변하지 않을 것이다. 칭의라는 단어는 효과적인 칭의의 원인인 하나님의 영원한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택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롭다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칭의가 하나님의 행위이라면, 칼빈은 칭의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임을 우리가 잊도록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칼빈의 독특한 예정 교리를 신봉하는 한 신학자에게 있어서 칭의 교리를 치명적인 죄와 상관없이 순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행해진 하나님의 독단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로 만드는 것보다 더 치명적일만큼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점은 대단히 명확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이다. 분명히 우리는 칼빈이 칭의를 그리스도론적으로 고찰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 론
마지막으로 우리는 칼빈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서 개혁신학의 강력한 특징을 발견한다. 즉 시간과 영원 사이의 긴장을, 소유와 소망 사이의 긴장을 발견한다. 아직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은 어떤 일이 칭의 안에서 우리에게 발생한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의롭다는 판결을 선언하시고 영원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심판은 실제적인 유일한 심판이라고 선언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 안에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시간 안에 존재하며, 시간 안에서 우리는 본래 의롭다는 것으로부터 아주 멀다. 우리는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다. 즉 한 순간 의롭지 못하며 그때엔 죄인이고 다음 순간엔 다시 의롭다. 한때는 그리고 동시에 의인과 죄인 양쪽 모두이다. 또 한편으로 여기 지구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를 소유하지 못하며, 그 의는 감추어진(hidden)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나타나실 때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現)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신다고 믿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가 우리의 소유가 될 그 날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의가 우리 안에서 아주 충분히 우리를 통해 발휘될 그 날을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의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례전(Sacraments)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오며 우리의 의가 된다. 말씀과 성례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순종하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진짜(real) 그리스도 즉 온전한(entire)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례전 안에서 간접적으로 그리고 성례로서 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며 결코 직접적으로 그리고 마주 대면하여 그리스도를 갖지는 못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모든 확실성을 받아들이는데 그 모든 확실성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하지만 믿음은 믿음의 주체(subject) 안에서 전적인 텅빔/무가치(emptiness)를 필수 전제로 가정하는데 그 텅빔/무가치를 가지고(with)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가시적으로는 우리가 죄인이지만 불가시적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불가시적인 그것(that)이 가시적인 것이 될 때, 우리의 정말 가시적인 죄된 것이 파괴될 것이며, 지금은 우리가 본래 존재하지 못하지만 바로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그것(that)이 될 것이다.
T. H. L. Parker. Boston, Lincs.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칼빈의 칭의교리)
Since our aim in this paper is to describe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we will first of all present an objective account of it as contained in Institutio, Lib. Ⅲ, cap. xi, and then afterwards attempt a brief interpretation by underlining certain cardinal points. Following the chief articles of the Creed, Calvin has in Book Ⅰ dealt with the doctrine of God the Creator, and in Book Ⅱ with that of God the Redeemer. Now in Book Ⅲ he comes to the doctrine of God the Holy Spirit. This book should not at all be taken as separate from that which precedes it, for, as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of Christ, His work consists in realizing to us and in us what Christ has done for us. But since the link that binds us to Christ is fait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us is the creating and sustaining of faith. In the long chapter ⅱ faith is represented as the basic attitude towards God in Christ in which all others-e.g. love, repentance, hope-depend, and from which they spring. We must return to his view of faith in the proper place. But now he goes on to speak, not of justification, but of regeneration. His reason for this order, so strange in a reformer, is to bring out more clearly and emphatically that justification is not to be separated from regeneration, and that in a certain sense the Reformers do not exclude good works from justification.
And so we come to chapter ⅺ, the first of the eight chapters on this specific subject. It is first necessary, says Calvin, to explain the expressions "to be justified in sight of God" and "to be justified by faith or by works": "He is said to be justified in the sight of God who in the divine judgment is reputed righteous, and accepted on account of his righteousness." A sinner, qua sinner, can never be accepted by God, who has declared His wrath against sin. It remains, therefore, that for a man to be accepted by God he must be righteous. If he is in himself righteous, that is, without sin before God, he is said to be justified by works. But, "on the other hand, he will be justified by faith, who, being excluded from the righteousness of works, apprehends by faith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nvested in which he appears in the sight of God, not as a sinner, but as a righteous man." On this basis Calvin puts forward his definition, which for clarity and completeness could not be surpassed: "Thus we simply explain justification to be an acceptance, by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ur and esteems us as righteous persons; and we say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After at once, in accordance with his scriptural method, turning to the Bible for confirmation of his use of the term, Calvin moves on to attack the heretical Reformer Osiander. His refutation throws much light on his own position, and therefore we must deal with of the indwelling of Christ in the believer and "grossly perverted" it into a declaration of the "transfusion of the divine essence into men", saying that "Christ's essence is blended with ours". Osiander's argument, according to Calvin, runs thus: God infuses His essence into man, who thus becomes sharer or partaker of the divine essence; but the divine essence is holy and righteous; therefore man shares with God the divine righteousness; and therefore man is in the sight of God righteous. Furthermore, by receiving the essence of God, man is regenerate. Osiander does not dispense with forgiveness altogether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is by forgiveness and regeneration. Finally, Calvin accuses him of denying that "Christ is our righteousness as having in the character of a priest expiated our sins and appeased the Father on our behalf, but as being the eternal God and everlasting life."
It is true, Calvin replies, that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are closely connected. None can be justified without also being born again to eternal life: "Whomsoever, therefore, God receives into his favour, he likewise gives the Spirit of adoption, by whose power he renews them in his own image." It must be particularly observed that the connection between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is Christological; by our insitio in Christo, our union with Him, we possess Christ, and therefore His blessings. As Christ cannot be divided, neither can His blessings of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But on the other hand, they should not be confused, for there is a definite distinction between them: “it is one thing to be justified and quite another to be made new creatures.” Justification is therefore not dependent on regeneration, for we are declared righteous by God when we are in ourselves unrighteous and unregenerate.
The second answer concerns a specific point of Christology. Christ is made to us righteousness, says Osiander, not in respect of His humanity, but of His divinity. Calvin's answer is a little model of trinitarian argument alone the well-known lines of Tertullian against Praxeas. Certainly Christ could not have reconciled us to God unless He had Himself been God. Nevertheless, it is in His manhood that He has procured righteousness for us. If the office of the Mediator belongs to the Godhood of Christ, then it must also belong to the Father and the Holy Spirit, to whom the Godhood is common and also the attributes of the Godhood. "Hence I conclude, first," says Calvin, "that Christ was made righteousness when he assumed the form of a servant; secondly, that he justifies us by his own obedience to the Father; and therefore, that he does this for us, not according to his divine nature, but by reason of the dispensation committed to him."
Thirdly, on the nature of the indwelling of Christ Calvin no less than Osiander, insists on the real union of Christ with believers. But Christ does not inhabit the believer in His essence, and therefore give him an essential righteousness. On the contrary Christ dwells in our hearts by faith; in other words, indirectly. The righteousness of Christ does not become ours by participation in a direct union with Him, but by being imputed to us. Because we do not now enjoy such a direct union with Him, we do not become sharers in His righteousness either. Hire, as long as we live, we are sinners, and cannot be accepted by God on the basis of any inherent righteousness. "God justifies us by pardoning. Osiander's "by forgiveness and regeneration" is met with a firm "by forgiveness only".
We may now leave this particular controversy, and go on to consider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works. And first we return to chapter ii and the definition of faith that it contains. "It is a steady and certain knowledge of the divine benevolence towards us, which, being founded on the truth of the gratuitous promise in Christ, is both revealed to our minds, and confirmed 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From this definition it is clear that, while faith is a very real activity of man, it depends for its particular nature upon its author and its object-it is the creation of God Himself, and it has God in Christ as its object. Calvin can readily agree with Osiander that in itself faith is a weak and imperfect thing. Properly speaking, it is not faith that justifies, but the Christ who is received and laid hold of in faith who justifies. If the act of faith justified, then faith would be a work and we should be justified by works. Faith is an emptiness, a waiting upon, a desiring. Calvin compares it to an empty vessel in which we receive the treasure of Christ. Faith is thus the acknowledgement that we ourselves are sinners but that Christ is our righteousness. And as this acknowledgement, it is the formal or instrumental cause of justification.
In this connection Calvin deals with two misinterpretations of the expression "works". The "Sophists"-i.e. the contemporary Roman Catholic theologians-explain works as man's own unaided actions performed before regeneration. These cannot justify. But the works performed after regeneration are good works, and go to implement the faith which justifies. In this sense we are justified by faith and works. This is the view taken by the Council of Trent. Against it, Calvin insists first that the Pauline repudiation of works extends to all activities of man whatsoever and whenever performed; and secondly, that "sanctification and righteousness are separate blessings of Christ." Next he turns to the Schoolmen whose errors "are rather more gross". Their great fault is that they apply grace to the work of the Holy Spirit leading us to do the good works by which we are righteous. Against them Calvin asserts the true meaning of grace as the free and undeserved mercy of God, by which, when we are in ourselves sinners and without any righteousness at all, whether of our own or as the fruit of faith, we are forgiven by God for the sake of Jesus Christ and therefore accepted in Him as sinless and righteous. He proceeds to show from Scripture the necessary and in separable connection between forgiveness, grace and justification on the one hand and faith on the other, and so reaches the heart of his doctrine "that a man is justified by faith only". This word only is exclusive absolutely. Not only the ceremonial works of the Law, but also the moral works of the Law are excluded. It is true, of course, that only the faith that works by love will justify. But it is not the love borne by faith that justifies, but the faith itself.
We must here digress from chapter xi for a moment to consider a serious difficulty raised by what is called double justification. Calvin, like Luther, taught, not only that the sinner is justified, but that his works done after justification are also accepted by God as good: "even the works of believers after their vocation are approved by God." And, what is more, "we will admit, not only a partial righteousness of works...but such as is approved by God, as though it were perfect and complete." It often appears from the Institutio as if the same work that before regeneration encountered only the wrath of God is after justification accepted as ho]y, and thus a double and unfair standard is set up. And moreover, it looks as if Calvin is here only a hair's breadth from the Scholastic doctrine of prevenient grace and its subsequent efficacious works. In fact, however, he is careful to emphasize that the believer also is a sinner and his works no less vitiated by sin than those of the unbeliever. God cannot accept these works as good in themselves, even though they are the fruit of the Spirit but He accepts them in precisely the same way as He accepts the sinner-by forgiveness and imputation. "When we are ingrafted into Christ, therefore, as our persons appear righteous before God, because our iniquities are covered by his righteousness, so our works are accounted righteous, because the sinfulness otherwise belonging to them is not imputed, being all buried in the purity of Christ. So we may justly assert, that not only our persons, but even our works, are justified by faith alone."
Continuing his explanation of the definition of justification. Calvin now turns his attention to forgiveness. First he lays it down as axiomatic "that the divine wrath remains on all menas long as they continue to be sinners." But God's anger is removed, not by a change in the nature of man but by God pardoning freely-i.e. without being motivated by anything in man-the sinfulness whose willing servant he is. By forgiveness sin is actually removed and ceases to exist, for God looks upon the man not as a sinner but as holy. In the sight of God, therefore, man is sinless, and if in the sight of God, then really. But forgiveness also means of necessity that the man who is sinless in the sight of God is in himself a sinner. Otherwise, what is there to forgive? This thought is sharpened by the fact that justification is only by forgiveness, and not also by regeneration.
And finally, justification "consists in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Behind this lies the large part of Calvin's Christology. By becoming man, the Son of God has not merely entered the world alongside other men and identified Himself with their lives, suffering, etc., but He has come as Man, the man who stands in the place of all other men, living, suffering and dying as their representative towards God. In all this He has been obedient to His Father, accepting every new demand made upon Him until at last He accepts the final wrath of God in the cup that is held out to Him in Gethsemane. Throughout His life He has consistently chosen obedience as His path. But, since He stands in the place of man as man's representative, in Him man is no longer disobedient to God but obedient. In this lies man's possibility; and this possibility is realized by faith. By faith we are made one with Christ, and therefore partakers in the properties of Christ. There takes place a communicatio idiomatum; what is ours is given to Him, and what is His is given to us. And His is the perfect obedience He rendered to God while He was on earth. By faith this obedience is reckoned or imputed to us, and God regards us no longer as the sinners that in ourselves we are, but the righteous men that we are not and never become in this world.
This, then, is the outline of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We may now draw out the implications of this doctrine by noticing some of its emphases.
In the first place, the backcloth to all his thinking on this subject is that it is God who justifies. On this fact rest the certainty and permanence of our salvation. Self-justification is bound to lead to uncertainty, because God's judgment on the matter is ignored, and thus the decree of the judge remains in suspense. Similarly, only the justification of God is a decree made once for all, because God alone is unchanging. If God is to-morrow and for eternity what He is to-day, then also His decree of justification pronounced to-day will not change to-morrow or in eternity. The word of justification is founded on the eternal decree of God which is its efficient cause. It is God that justifieth because it is God who elects.
But if justification is the work of God. Calvin never allows is to forget that it is the work of God in Christ. Nothing would be more fatally easy for a theologian holding Calvin's particular doctrine of predestination than to make justification into an arbitrary and immoral act of God performed purely because it pleases Him and having no relation to the deadliness of sin. but it is abundantly clear that for Calvin, God is the Father of Jesus Christ. Justification is, for him, justification in Christ. We may certainly say that he considers justification christologically.
Finally, we have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the tension between time and eternity, possession and hope that is such a strong feature of Reformation theology. In justification something happens to us that yet does not happen to us. In eternity God pronounces upon us His judgment that we are righteous, and in eternity that judgment is the only real one. But we are not in eternity, but in time, and in time we are very far from being righteous in ourselves. We are simultaneously righteous and sinners; not righteous one moment and then sinners the next and then righteous again, but at one and the same time both righteous and sinners. Again, here on earth we do not possess our righteousness, which is hidden in the hidden Christ, and will only become visible when He also is revealed at the last day. In this world we believe that God accepts us in Him and we look for that day when our righteousness shall become our possession-i.e. when our righteousness in Him shall be in us fully and fully exercised by us. And vet we do possess this righteousness. for we possess Christ. In His Word and Sacraments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come to us and become ours. In them we have the real and entire Christ who was obedient for us and suffered for us. But we have this Christ indirectly and sacramentally, always in His Word and Sacraments, never directly and face to face. We have Him by faith, in all the certainty that faith receives from its object, but with all the emptiness that faith presupposes in its subject. Visibly we are sinners; invisibly we are righteous. When that invisible shall become visible, our all-too visible sinfulness shall be destroyed and we shall become that which now we are not in ourselves, but which we are even now in Jesus 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