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중 우의공원
▲한중우의공원
흑룡강성(헤이룽장성) 해림시(하이린시)에 김좌진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한․중 우의공원이 있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 아니라 한․중 우의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의 제안 때문이었다고 한다. 중국 당국이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라는 명칭을 부담스러워하자 김좌진 중국인들과 연합해 독립운동을 하셨으니 한중우의공원으로 하자고 중재를 해서 2005년에 개관하였다.
해림은 김좌진 장군이 활동한 중심지는 아니다. 그가 신민부를 창설하고 거주했던 곳은 그가 순국한 산시에서 한참 떨어진 상지시 석두하자였고, 그가 운영한 금성정미소는 산시에 있었다. 그러나 산시와 석두하자는 조그마한 시골이었다. 시골에 그의 기념관을 세워 한․중 우의 활동을 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기념관인 한․중 우의공원이 산시나, 석두하자에 있지 않고 해림시에 있는 이유다. 물론 해림시와 전혀 관계가 없진 않다. 해림시에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고, 그가 세운 신창학교가 지금 ‘해림시 조선족실험소학교’가 되어 계승되고 있다.
한․중 우의공원은 대지 4만 여 평에 백야문화관과 항일역사기념관이 들어선 두 채의 건물과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항일역사기념관 2층에는 5개의 관으로 나누어진 항일역사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제1관은 동북 이주와 독립전쟁의 전개, 제2관은 3․1운동과 독립전쟁의 전개, 제3관은 독립운동 단체의 재정비와 항일 투쟁, 제4관은 일제의 대륙 침략과 한․중 양 민족의 연대투쟁, 제5관은 광복 후 현재의 한․중 우호였다.
항일역사기념관은 국내외를 망라한 독립운동사 관련 최대 규모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심플하고 세련되게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3관에 설치된 ‘추모의 터널’이 관심을 끈다. 추모의 터널에는 만주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좌우익을 포함 한 우리 측 15명과 중국 측 15명의 인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측 애국지사에는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나철, 남자현, 안중근, 양세봉, 오동진, 이동휘, 이상룡, 이상설, 이청천, 이회영, 정이형, 홍범도 등 15명이다.
남자현은 여성독립운동가로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남편 김영주은 1895년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는 한편,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손가락을 끊어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를 써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함께 일본장교 부토 노부요시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이형(1879~1956)은 1926년 3월 길림의 양기탁 집에서 독립운동의 핵심체를 조직하기 위해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석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고려혁명당에 가입, 위원으로 활동 중 1927년 하얼빈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년간 옥살이를 치른 독립 투사였다. 8·15 해방으로 출감한 후 반민족행위 특별법 조례 기초위원장이 되어 민족반역자 척결에 앞장섰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우리에게 잊혀져갔다.
중국인 15명은 동장영, 양림(조선족), 양정우, 왕덕림, 왕덕태, 위증민, 이동광(조선족), 이연록, 이조린, 이학복, 이홍광(조선족), 조상지, 주보중, 진한장, 허형식(조선족) 등이다. 이들 역시 우리 애국지사들처럼 1930년대 항일유격대, 동북항일연군 등의 지휘관으로 대일본 항일 투쟁을 전개해 온 인물들이다.
이조린(1910~1946)은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으로 대일본 한․중 합작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면서 묻어달라던 하얼빈 공원은 지금 이조린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4관에는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사진 속에 들어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김일성의 사진을 발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히 배격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김일성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들이 상당수 전시될 수 있었고 중국의 항일 투사들이 전시되었던 것은, 좌우를 망라한 통일 지향적인 관점과 한·중 우의라는 두 가지의 원칙 덕분이었다. 이젠 우리의 독립운동사도 좌우가 망라된 전체의 모습을 찾을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좌진 장군도 4관에 특별코너로 마련되어 있다. 특별 코너에는 장군의 영정, 고향 홍성의 동상과 생가, 필적, 청산리 전투도, 금성정미소, 장례식 풍경, 장군의 무기 등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2. 순국의 현장 금성정미소
▲김좌진 장군 순국지(산시)
김좌진이 암살당한 후 그의 시신을 처음 묻은 곳은 자경촌(현 신흥동)의 뒷산이었다. 마을 너머 산자락이 1930년 100일간의 사회장으로 장례를 마친 후 묻힌 장소였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지금 그 곳에 없다.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산시의 옛 전우들과 부하들은 국내에 들어간 오숙근 여사를 불러 장군의 시신을 고국으로 반장하기로 결정했다. 1934년 4월 산시에 도착한 오숙근 여사는 시신을 수습한 후 박물장사로 위장하여 시신을 국내로 옮겨 충남 홍성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57년 부인이 죽자, 김두한이 현재의 위치인 보령에 이장하였다.
산시는 목단강시에 하얼빈을 오가는 기차역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산시역 가까이에 김좌진의 순국지가 있다. 입구에는 ‘김좌진 장군 구거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장군의 흉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팔로회의실과 장군이 거처한 자택이 그리고 흉상 뒤로는 금성정미소가 복원되어 있다. 팔로회의실은 장군이 한족총연합회의 간부들과 회의실로 사용하던 방이다. 멍석이 깔린 방에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다. 멍석 위로 8명이 앉았을 작은 방석 8개가 놓여 있었다.
팔로회의실 옆의 작은 집이 김좌진 장군의 자택이었다. 자택에는 다음의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서기 1927년 7월 903명의 독립군과 1천여 명의 재향 군인 및 가족들을 거느리고 이곳 산시에 이주한 후 서기 1928년 9월부터 이 자택에 살면서 홍진, 이청천, 황학수, 김종진 씨 등과 당시 형세와 대일항전에 대해 자주 논의하면서 거주하셨던 곳이다. 서기 1930년 1월 24일 순국 전까지 이곳에 거주하셨다.”
흉상 뒤는 금성정미소이다. 백야는 한족총연합회를 건립하면서 무엇보다도 민족의 자립 경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단체로 산지를 개간하는 등 협동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농사와 직결되는 것은 방앗간이었다. 당시 북만주 일대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방앗간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 대부분은 비싼 사용료를 지불하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정미소를 이용해야 했다. 금성정미소는 그런 조선인들의 편의를 위해 백야가 손수 만들어 운영하던 정미소였다.
정미소 안에는 옛날 방앗간 기계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김좌진 장군 순국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바로 그 현장에서 백야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 김봉환의 사주를 받았던 박상실에게 저격당했다. 1930년 1월 24일 오전 9시 37분이었다.
정미소 앞 표지판에는 다음의 글이 쓰여 있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부근의 농민에게 편의 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자금난도 다소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지하에 자택 앞에 있는 동청철도의 창고를 빌려 이 정미소를 세웠다. 처음에는 연자방아를 사용하다가 서기 1928년 여름 하얼빈에 가서 봉천(심양)산 목탄 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했다. 서기 1930년 1월 24일 오전 9시경 이 정미소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하시었다.
“아직 할 일이…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그게 한스러워서…” 41세의 백야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아직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암살은 장군의 꿈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아니지, 함께 산시에 들어 온 903명의 독립군과 1천여 명이 넘는 가족들, 그리고 국외 모든 독립군들의 꿈마저 빼앗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금성정미소 등 자택은 1999년 김좌진 장군 기념 사업회에서 복원한 것이다. 그의 자택은 정미소에서 한 참 떨어져 있었지만, 그 자택을 확인할 수 없어 이곳 ‘김좌진 장군 구거지’라는 이름으로 정미소와 함께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