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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반때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청량산을
졸업 후 40여 년 만에 서울, 영주 26회 동창들이 합류해서 다시 찾았다.
그 날의 아름다웠던 것들을 글로 옮겨 놓았었는데,
그 지난 세월이 벌써 추억이 되었으니...
덫없는 세월의 무상함이여!!!
1. 청량산행(山行)을 결정하고 나서
2000년 11월 상운초등 제26회
최 동 일
2000년 9월 30일에 개최된 재경26회 임시총회에서 누군가에 의해 淸凉山 산행을 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논의결과 참석한 전 회원이 찬성하였다.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날짜를 잡기 위해서 달력을 넘겨가며 의견을 나눈 결과, 단풍은 10월 중순이 절정이라는 의견과 11월 초까지도 괜찮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은 11월 4일(토), 5일(일) 주말을 이용한 무박 2일간으로 잠정 결정하기로 하였으며, 교통편은 열차와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단풍관광시즌이라 우선 열차표가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확정짓기로 하고, 차표 예약을 하기 위하여 산행 희망자 조사는 최기탁 총무가, 그리고 열차표 예약은 회장인 본인이 맡기로 하였다.
38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3개 학급 전체가 청량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그때 나는 사정이 있어 함께 가지 못했던 터라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번의 청량산행 결정에 내심 기대가 컸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인터넷 봉화군 홈페이지에 들어가 청량산에 대한 정보와 산행코스 등을 점검하고 철도청 홈페이지에도 들러 열차시각을 조회하여 보니 청량리발 영주행의 제일 늦은 밤 열차가 23시 30분에 있고, 영주 도착시간은 새벽 3시 20분이었다. 무박 2일로 계획을 하였기 때문에 이 차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산행 희망자 13명에 대해서는 미리 열차표를 예약해 두었다. 아직은 한 달 정도의 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관광시즌이라 유비무환 차원에서 미리 확보해 두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당일 새벽 영주역에 내려서 아침까지 머무를 장소와 또한 청량산까지의 왕복 교통편을 해결하는 것이 문제였다.
새벽에 영주역에 도착해서 산행시간까지는 4~5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영주에서 골프연습장을 경영하고 있는 김진기 동창에게 협조를 구하기로 하고 연락을 취하여 계획과 일정을 설명한 후 새벽에 영업이 가능한 식당을 알선해 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이제 교통편만 해결하면 준비는 완료된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영주에 거주하는 장춘자 동창이 전화를 해왔다 “차량 렌터는 남편이 이미 예약을 해 놓았고, 산행 당일 아침식사는 자기 집에서 준비하겠으니 새벽에 영주역에 내려서 모두 자기 집으로 오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자기 남편과 미리 의논해서 결정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제까지 하면서... 하여튼 이렇게 하여 사전준비를 완료해 놓으니 안심이 되었다.
2. 야간열차를 타고
11월 4일 드디어 기다리던 산행일이 다가왔다. 토요일 근무시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일찍 퇴근을 하여 산행에 필요한 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동창생들과 산에 가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꼭 초등학생 소풍 준비하는 것 같다”고 한마디 한다. 저녁식사를 든든히 하고 10시경에 집을 나섰다.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넓은 역 광장과 대합실에는 온통 주말여행객들로 붐볐다. 주말여행을 즐기려는 남녀 커플, 우리들과 같이 단체여행을 하려는 듯한 중년 남녀들, 학생들인 듯한 젊은 사람, 모든 이들에게서 삶의 활기와 여유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동창들을 찾기 위해 역사 계단을 올라서 2층 대합실을 한바퀴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열차 출발시간까지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역 광장에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고 광장으로 내려와 역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계를 보니 23시가 조금 못되었다.
11월 초순의 밤 기온인데도 조금은 덥게 느껴졌다. 내일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그리고 산행 또한 무사히 마칠 수 있어야 할텐데 등등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 최정숙 동창이 도착했다. 이어서 최종순, 최기탁 동창이 도착을 했고, 우리는 서로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대합실로 이동을 했다. 대합실에는 정순희, 권인교, 권갑년, 채영점, 윤한섭 동창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자 총원 13명 중 9명이 모인 것이다. 장성학, 정육란, 김미화 동창은 양평역에서 타기로 미리 약속을 한 터라 이제 한점수 동창만 오면 되는 것이다. 일단 13명에 대한 왕복 차표를 예매해서 열차출발시간이 임박한 23시 25분까지 기다렸지만 한점수 동창은 끝내 전화연락도 없이 나타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1인분의 왕복 차표를 환불한 뒤 뛰어서 출발 직전에 가까스로 승차를 하였다.
우리가 탄 열차는 23시 30분 정각에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어둠 속을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몇십 년 만에 타보는 초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열차여행인가? 쉰이 넘은 초로(初老)의 나이임에도 마음은 모두들 어린아이들처럼 들떠서 주위의 여행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소란들이다. 들뜬 기분들이 거의 안정되어 갈 무렵 양평역에서 장성학, 정육란, 김미화 세 명의 동창들이 승차를 해서 우리 일행은 모두 열두 명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모두들 꿈나라를 여행할 시간들인데도 피곤한 기색 없이 새벽까지 한 사람도 잠자는 이 없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가끔씩 고향에 다니러 가는 길이 지루하고 멀기만 느껴졌었는데, 이야기하며 떠드는 사이에 벌써 영주역에 다다랐다. 예정시각인 11월 5일 새벽 3시 13분 정시에 우리 일행은 무사히 영주역에 도착한 것이다.
3. 가슴 찡한 友情을 느끼며
플랫폼을 빠져나와 역 광장으로 나오니 장춘자 동창생이 새벽공기를 머금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니까 장춘자 동창은 일요일 새벽을 토요일 새벽으로 착각하여 전날 새벽에도 남편과 함께 우리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서 새벽공기를 마시며 기다렸는데 우리가 오지 않자 새벽에 최정숙 동창집으로 전화를 해서 왜 안 오고 전화받고 있느냐고 하더란다. 아닌 밤중에 전화를 받은 최정숙 동창은 너무나 우스워서 밤중에 한참을 웃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우습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하는 우정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상운초등학교 죽마지우들만이 느낄 수 있는 우정이리라!
새벽공기가 제법 싸늘하게 느껴졌다. 우리 일행 모두는 장춘자 동창 집으로 향했다. 장 동창의 부군되시는 하 선생께서 현관까지 나와 우리 모두를 친히 맞아주면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이 지면을 통하여 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안전 산행을 위하여 잠시만이라도 수면을 취하기로 하고 제각기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청했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불을 끈지가 잠시라고 생각되는데 벌써 누군가의 ‘드르릉’하고 코고는 소리에 고요하던 거실이 갑자기 웃음소리로 변했다. 여자동창들은 제각기 코고는 사람으로 짐작되는 남자동창의 이름을 대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그 바람에 조용히 잠들어 가던 거실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손주까지 본 나이들이건만 마음만은 아직도 애들 같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아니라면 이런 분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일을 위하여 다시금 잠을 청했다.
4. 맛있는 아침식사
잠을 자는듯 마는듯 하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숙면을 하지 못했는데도 기분은 매우 상쾌하였다. 아직 자고 있는 동창들을 깨우고 부산하게들 있는데 영주의 최화자 동창이 들어섰다. 모두들 얼싸안으며 반가이 맞았다. 최화자 동창은 전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장춘자 회원 집 앞에 오니까 불이 꺼져 있고, 너무나 조용해서 우리가 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갔다가 아침 일찍이 온 것이라고 했다.
▼ 청량산행 전 영주의 장동문집 앞에서
우리들은 장춘자 동창께서 손수 정성들여 마련해 준 아침밥을 맛있게 먹은후 서둘러 인원점검을 하고 준비된 차량에 승차를 했다 서울 동창이 12명(최동일, 최기탁, 윤한섭, 장성학, 최종순, 정육란, 최정숙, 김미화, 권인교, 정순희, 채영점, 권갑년)과 영주 동창 2명(장춘자, 최화자) 총 14명이 탑승을 하고 청량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당초 예정했던 시간보다 약 한 시간 가량 늦어진 7시 30분 경이었다.
초가을 이른 아침의 공기는 너무나 상쾌했다. 차창 밖으로 희뿌연 안개가 내려져 있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어릴적 소풍갈 때 느꼈던 기분처럼 모든 것이 즐겁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낙동강 주변의 자연풍경이 안개에 묻혀서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즈음에 우리가 탄 차량은 벌써 청량산 입구에 다달았다. 청량산 입구(다리)에서부터 등산로 입구가 있는 주차장까지의 도로는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과연 도립공원의 면모를 느끼게 하였다. 우리는 주차장을 지나 등산안내판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하차를 하였다. 8시 8분, 영주에서 출발하여 약 40분이 걸렸으니 예정시간보다 20분 정도를 빨리 온 것이다.
▼ 청량산 도착직후 안전산행을 기원하며 안내도 앞에서
5. 아름다운 청량산의 운무(雲霧)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오후에 다시 올 시간을 알려준 후 청량산 등산로 안내판을 배경으로 하여 전원이 기념촬영을 하고 서둘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다. 등산 왕복에는 4~5시간 소요된다고 했으니 오후 1시까지 하산을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등산로에는 우리
▼ 청량산 운무를 바라보며
얼마를 올랐을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니 이른 아침 계곡에서 피어오른 운무(雲霧)가 발아래 골짜기에 가득 메워져서 양쪽 산의 단풍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하였는데, 그 광경이 너무도 장관이어서 한참을 내려다보노라니 몸이 흡사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착각 속에 빠질 지경이었다. 나는 여기서 선두주자 몇몇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광경을 평생에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景觀)이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길을 따라 오르니 왼쪽으로는 청량사로 가는 표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능선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땀을 닦았다. 모두들 힘든 표정이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모습들이다. 특히 일행 중 권갑년 동창은 유일하게 등산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와서 화제를 모았는데, 그로 인하여 잠시 동안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행 중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은 청량사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하고 나머지 열두 명은 정상을 향해서 길을 나섰다.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점점 더 경사도가 심해져서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듯이 가파른데도 낙오자가 한 명도 없이 잘 올랐다. 드디어 첫 봉우리인 경일봉에 도착했다. 해발 750m라고 새겨진 돌 표지판을 확인하고 간단히 메모를 한 후 우리 일행은 땀을 닦으며 잠시 휴식을 했다.
올라온 계곡을 내려다보니 아침에 오를 때 계곡에 깔렸던 안개꽃(雲霧)은 오 간데 없고 발 아래로 길게 펼쳐진 계곡이 까마득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과연 청량산이로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정상 정복의 성취감도 잠시, 또다시 다음 코스를 향했다. 다음 목표는 자소봉인데 지도상으로 1.2km, 여기서부터는 능선 산행이라 한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암봉(岩峰)의 아름다움
예상대로 능선 산행은 조금 수월하다고 느껴졌다. 제작기 힘든 코스가 아니라서 그런지 콧노래와 더불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특히 영주의 최화자 동창은 땀을 연신 훔치면서도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 넉넉한 체구로 특유의 엉덩이춤을 선사하여 우리들을 더욱 즐겁게 하였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저 건너에 우뚝 솟은 촛대같이 생긴 암산 봉우리가 보인다. 저기가 청량산의 주봉(主峰)인가? 아스라히 보이는 봉우리 주변의 철책 난간에는 앞서간 등산객들의 움직임이 아물거리며 보인다.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글로서 표현하겠는가!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하며 암봉 밑에 다다라서 위를 보니 봉우리를 오르는 암벽로(岩壁路)에는 철판으로 만든 사다리가 까마득히 위로 뻗쳐 있었는데 계단수가 어림잡아 몇백 개쯤 될 것 같아 보였다. 우리 일행은 청량사쪽에서 올라온 등산객들과 함께 한 줄로 서서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한 계단 한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이다. 자소봉(보살봉) 해발 840m란 표지석이 보인다 철책 난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시원하게 탁 트인 산야가 발 아래에 가물거린다. 북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넘어 멀리 낙동강이 굽이져 보이고, 남쪽으로는 산과 골이 까마득하게 펼쳐저 있어 길게 뻗친 연(鳶)꼬리를 연상케 하였다. 과연 천하의 명산이로다.
▼ 자소봉에 올라 함께 기념촬영
우리 일행은 바위틈에 자라난 소나무를 배경으로 일동 기념사진 촬영을 한 후 서둘러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떠날 때는 중도 낙오자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했었는데, 자소봉까지 무사히 오르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산신님께 감사를 드렸다.
7. 천 년 사찰 청량사(淸凉寺)를 돌아보고
우리 모두는 청량사에 도착하여 여기서 기다리던 두 동창(장성학, 장춘자) 과 합류하여 천 년 사찰로 알려진 청량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청량사는 신라의 문무왕 3년(서기 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고, 유리보전인 법당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밖에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서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하기도 했다는 청량정사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여타 사찰에 비하여 규모는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색창연한 그 자태는 오랜 세월을 말해 주는 듯 하였다.
5층석탑 주변에는 사진촬영조차 할 수 없이 많은 인파들로 붐볐는데, 우리는 석탑을 오르는 계단길 옆에 앉아서 단체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지난 것 같아 서둘러 하산을 재촉하였다.
▼ 청량사 경내에서
7. 스승의 참사랑을 느끼며
오늘 점심은 당초 도시락으로 준비하려고도 생각했지만 먼 길에 불편도 하거니와 명호 강가의 매운탕이 좋을 것 같아서 재산면장으로 있는 강성일 동창에게 사전에 장소를 예약해 주도록 부탁해 놓았다. 식당으로 전화를 해서 예약이 된 것을 확인한 후 강성일 동창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와 같이 점심식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더니 뜻밖에 권병철 선생님과 청량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강 면장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재산면장으로 재임중이었는데 갑자기 11월 1일자로 상운면장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오늘 우리와 같이 점심을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 터인데, 권병철 선생님과 같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니 너무나도 반가웠다. 모두들 빨리 선생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잰걸음으로 입구를 향했다.
청량산 입구 다리목에는 권병철 선생님과 강성일 면장 부부가 함께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 선생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의 청량산행 소식을 접하고 대구에서 이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오셨다고 한다. 그것도 우리들을 위해 안동에 들르셔서 안동의 그 유명한 ‘똥돼지’ 고기를 사셔서 양손 가득히 들으시고 한 시간을 기다리신 것이다. 스승님의 진정한 제자사랑에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또한 우리들과의 만남을 위해서 부임 초기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와서 기다려준 강 면장 부부에게 진정한 우정을 느꼈다.
8. 두멧골의 똥 돼지 파티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청량산 입구에서 명호 방면으로 약 2킬로미터쯤에 위치한 도로변에「청원마을」이라고 크게 간판이 서있는 집이었는데 매운탕으로 소문난 집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들 모두가 배가 고팠던 탓에 준비되어 있던 메기매운탕으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모두들 포만(飽滿)감으로 인하여 눈꺼풀들이 늘어져서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벌써 야외에 특설식탁을 준비하셨고, 선생님이 사오신 돼지고기로 우리는 2차를 시작하였다. 몇 잔의 술잔이 오가자 모두들 기분 좋게 취흥이 감돌았고 옛날 이야기가 풍성하게 쏟아졌다. 그 중 채영점 동창은 초등학교 시절 권병철 선생님의 등에 업혔던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은 제가 선생님을 꼭 업어드리겠다”고 하여 우리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환호를 했는데, 정작 채영점 동창은 선생님을 업고 일어서질 못하는 바람에 아쉬운 박수와 더불어 웃음바다가 되었다.
▼ 명호강 옆 식당 마당에서 권병철선생님과 함께
9. 귀경(歸京)을 서두르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산자락의 그림자는 점점 길게 늘어지고 있었고, 두멧골의 초가을 날씨는 쌀쌀하게 느껴졌지만 추억이 어린 고향땅 심산유곡에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며 기울이는 소주맛은 고향의 참맛 그것이었다. 과연 이런 기회가 우리 인생에 다시 주어질까를 생각해 보며, 나는 아쉽지만 서울까지 돌아가는 일정이 남아 있으므로 마무리를 하고 기념촬영을 할 것을 제의하였다.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청원마을」간판을 배경으로 하여 준비해 간 카메라로 기념사진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선생님께서 주신 선물(고향산 마늘)을 한 보따리(반 접)씩 짊어지고 렌터카를 이용하여 선생님과 함께 영주로 향했다.
오는 길에 김진기 동창의 사업체인「영주골프연습장」을 방문하였다. 김진기 동창은 국내 프로골퍼로 활약하면서 본인의 전공인 골프연습장을 경영하고 있는 전문경영인으로서 우리 동창회를 위해서도 많이 힘쓰고 있으며, 이 지역의 발전에도 이바지 한 바 크다고 전해 듣고 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와 더불어 차 한 잔씩을 나누며 잠시 정담을 나누었다.
시간은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선생님과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체하지 못하고 영주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춘자 동창의 안내로 역전의「장우동」이라는 국수집에서 우동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 국물 맛이 너무나 일품이었다. 저녁식대 지불조차 장춘자 동창에게 기회를 빼앗기고서 시계를 보니 열차 출발시간까지는 아직도 2시간 가까이 여유가 있었다. 여자 동창들의 제의에 따라 남은 시간을 노래방에서 보내기로 하고, 부근의 어느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10. 아쉬운 작별
우리들은 선생님과 함께 어우러져서 피곤함도 잊은 채 가무(歌舞)와 더불어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모두들 힘든 일정이었음에도 자리에 앉는 사람 없이 한결같이 일어서서 흥을 돋구었는데, 여기서도 영주의 최화자 동창은 평소의 가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특히 권병철 선생님의 곱사춤은 우리 모두의 배꼽을 빠지게 하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차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를 놓칠세라 아쉽지만 마무리를 하고 서둘러 노래방을 나왔다. 그리고 권병철 선생님의 차편부터 제공키 위해 열차편을 알아보니 대구행 열차는 이미 끊어졌다고 했다.
난감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버스터미널로 모시고자 제의하여 선생님을 버스터미널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선생님께서는 “나는 자고 가도 되니 내 걱정은 말고 너희들부터 가라” 하시면서 한사코 우리들부터 먼저 가라고 하셨다. 결국 우리는 열차 시간에 쫓겨서 선생님의 뜻을 꺾지? 못하고, 아쉽지만 선생님, 그리고 영주 동창생들을 역 광장에서 작별을 하고 플랫폼으로 나왔다.
나는 권병철 선생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느끼면서 문득 오래전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다. 객지의 자식들이 고향집에 왔다가 떠나갈 때면 부모님께선 의례히 자식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시려는 마음에서 떠나는 자식들을 따라나오시곤 하셨다. 추운 날씨에 당신 건강을 걱정하여 집으로 들어가시라는 자식들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자식들이 마을 앞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손을 저으며 어서 가라고 하시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11. 서울행 열차를 타고
19시 56분, 우리를 태우고 갈 열차가 원통형의 불빛을 밝히며 영주역에 들어와 멈추자 우리는 열차에 올랐다. 내려올 때와는 달리 열차 안은 빈자리가 많았는데, 우리 일행은 거의가 옆의 빈자리까지 독차지하다시피 하여 자리를 잡았다. 동창들은 몹시 피곤한지 자리에 앉자마자 제각기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휴식을 취하는 듯 아무 말들이 없었다. 전날 밤을 새우다시피 했고 또한 온종일 산행을 하였으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리라.
나는 자리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서서히 수면(睡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차내 안내방송 소리에 잠이 깨었다. 차창 밖으로는 여러 유형의 불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어 청량리역이 임박했음을 짐작케 하였다. 잠시 후, 23시 30분, 정시에 우리가 탄 열차는 청량리 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시간절약을 위하여 차내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제각기 집으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 역 광장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나는 다행히 마지막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이틀간의 행사를 무사히 끝냈음에 대한 안도(安堵)를 하며, 집이 먼(인천 등) 동창들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즈음 권병철 선생님으로부터 대구에 잘 도착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종일토록 우리들과 함께 하시느라 피곤하심에도 이렇듯 전화를 주시다니.... 나는 다시 한번 권병철 선생님의 제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슴 속에 새기며 집으로 향했다.
첫댓글 형님, 감회가 무척 새로왔겠네요!
글 솜씨도 상당하고요~
부모님으로 부터 타고난 것이 자식들한테 있는가 봄다!ㅎ
산행한 일도 벌써 추억속에 뭍혀버렸으니... 세월의 무상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