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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2018. 4. 8.) 설교 : 서정현담임 목사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10:29-37)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또 내가 실수를 할지라도, 손해를 끼친다 할지라도, 끝까지 내 편에서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또 내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은 군중 속에 홀로된 사람입니다. 형제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다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혼자인 사람입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경제적인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또 성공을 향해서 인생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쉼 없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홀로된 사람 그건 엄청 다른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애매해 모욕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할 때 여러분을 향해서 돌을 들 사람이 많을까요? 절대로 아니다.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끝까지 나의 편에 서서 방패막이가 되어줄 사람이 많을까요? 진정한 이웃이라면 나의 것을 많이 손해나고도 그 사람을 진정 좋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고 내가 잘못을 해도 끝까지 내 편에서 그래 너는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안심해 내가 너를 도와줄게.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이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여기에 강도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갑니다.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 둘은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비유에서 한 가지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누가 강도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면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거의 죽을 지경까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린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강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정죄하고 비난하면서 상처 주고, 고통받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바로 이런 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사람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더럽다고 여겨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상처 난 사람을 안타까워하면서 돌보고 치유하는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러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33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야 합니다.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 기름과 포도주는 귀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자신의 귀한 것을 어려운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쏟아부었습니다.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을 나누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곳이야 말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 공동체에 관해서 쓴 글에 소제목을 보고서 너무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이게 교회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가 뭘까요? 소제목이 뭐냐 하면 교회가 공동체가 아니면 교회도 아니다. 뭐 뭐하면 뭐 뭐한다는 조건문입니다. 교회가 참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연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지요? 쉽게 설명하면 공동체가 아니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족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공동체가 뭡니까? 사마리아인처럼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아픔과 상처를 보고서 외면하지 않고,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나누어서 기름, 포도주 상처에 부어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레위인과 제사장과 다른 것이 있다면 강도만난 자의 삶으로 들어가서 삶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가진 것이 적어도 그는 자신의 삶을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제사장 레위인은 가진 것이 많고, 사회적 지위를 다 가지고 있어도. 강도 만난 자에게 전혀 자신의 삶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모임이 아니라. 무언가 내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나눌 수 있고, 내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과 사람이 그냥 모인 곳이 공동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고 그냥 모임입니다. 계모임. 계모임도 끈끈함이 교회보다 나아요. 저희 부모님도 동갑계가 수십 년을 함께 합니다. 너무너무 끈끈하고, 매번 만나면 어떻게 지내는지. 경사, 애사가 나면 찾아가고, 위로해주고,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 모임이 사실은 계모임 만도 못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드리고 살아간다면 그거보다는 나아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님을 머리로 하고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면 그거보다는 나아야죠. 아니 그 정도는 해야죠.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내가 교회공동체를 만들고 지향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하면서 과연 내가 과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 개인이 그냥 하나님 만난다 생각하고 설교 말씀 듣고 아, 내가 은혜 받았다고 만족하는 것 그게 교회 공동체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회 공동체는 그런 것입니까? 나만 잘하고 오면 되지. 그리고 내가 열심히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 헌금하고 교회 열심히 출석하고 나만 복 받으면 됩니까? 그리고 그게 복입니까?
공동체와 이웃의 최소한의 기준을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반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일 것입니다. 너무나 종교적이지만 자신의 삶을 나눌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들의 신분부터 얼마나 종교적입니까? 레위인 제사장 종교성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은혜가 넘치고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옆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그게 강도 만난 사람에게 1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삶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내가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의 열심과 진실함이 있다고 해도 그 삶이 다른 사람과 나누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인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고, 얼마나 경건하게 예배하는 사람인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의 이중성과 거짓됨을 고발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 스스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하게 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더욱이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혼혈이라고 상종도 하지 않는데 제사장, 레위인과 비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죠. 오늘날 같으면 교회 목회자와 거리의 창녀나, 술주정뱅이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르면 몰랐지 당시에는 그보다 더 심한 비교일 수 있어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괭장히 기분상하는 비교일 것입니다. 나를 창녀와 비교해. 나를 알코올, 마약을 하는 죄수와 비교해 기분이 상하겠지요.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종교지도자들이 굉장히 기분 나쁘고 분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교는 의도적인 비교입니다. 너희는 기분 나빠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욕을 먹어도 싸고, 무시를 당해도 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몰라서 죄짓고, 받은 은혜가 없어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너희들이, 어떻게 너희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르고 죄짓는 그들보다 다 알고, 알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너희들이 정말 악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정말 이스라엘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강도는 바로 종교지도자들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새 계명을 버리고, 옛 계명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싸매고 치유하는 사람
34 싸매고 : 진정한 이웃은 남의 아픔을 싸매어주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주고, 보듬어주고, 치유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하나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하죠? 예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령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씁니다. 그런데도 계속 그들이 물어요. 왜 대답을 못 하느냐고? 계속 물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또다시 앉아서 글을 쓰시죠. 그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세우시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과 악한일 구분한다고 하면서 판단하기를 너무나 쉽게 하는데 그것을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열매는 뭐냐?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런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딘가 나 혼자 버려져도 내가 외롭지 않은 사람이야. 왜냐하면, 내 곁에는 하나님의 이웃들이 있어.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안심되는 공동체입니다. 마음이 놓이는 공동체 내 입으로 어떤 실수를 내어놓아도, 내가 과거에 어떤 잘못한 것을 토설해 놓아도. 괜찮아. 그때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라고 그 말을 품어주고 위로할 수 있는 이웃이 내 곁에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 말을 듣고 나가서 그 인간이 과거에 그랬대라고 총질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교회는 적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돌들을 사람이 아니라. 서로 용납하는데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런 말씀들을 가슴에 잘 간직하고, 교회 공동체의 축복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진정한 이웃은 한번 도와주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책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도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것을 책임지고 공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의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들, 마귀의 노예가 된 고통 받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들을 불쌍히 여시시고, 그들에게 찾아가서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싸매어 주셨어요. 그리고 마침내 영혼의 구원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린도 전서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온전히 합하라. 여러분 우리가 물과 물을 한 컵에 섞습니다. 물이 구분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냥 한 물이 되어버리듯이 교회의 영적인 공동체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엡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서 그냥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신분적 이유를 가지고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우리 나름대로 벽을 만들고 있는데요. 그 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없어져야 됩니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인격이 훌륭한 자나 인격이 좀 부족한 사람이나. 세상이 볼 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평가를 받는 거와 상관없이. 예수 안에 들어오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모자란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돌 던지지 말고, 욕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버팀목이 되어주고, 가림막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엡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비전속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이곳에 이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불러서. 하나님이 이 교회에 하나님의 꿈을 담아. 하나님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동참하고, 헌신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딱 하나입니다. 뭐냐면 사도행전 1:8절 영혼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저나 여러분을 이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갖고 있는 1번의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그 소망, 예수님의 그 소망을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생각을 모아서 오직 영혼구원에 전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오늘 말씀의 요약은
1) 예수님의 공동체를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자.
2) 공동체의 교회가 되자.
3) 공동체 모임을 활성화 하자
은혜로운 말씀인 동시에 우리교회의 금년도 목표 이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