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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강남서초스터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86학번선배님과 87학번 박왕수선배님 때부터 입니다. 이때는 강남서초스터디라 불리지 않고 "금성회"라고 하는 작은 모임 정도였습니다. 소수의 인원들이 중문학과라는 곳에서 만나서 방송대 학업의 최대의 적인 독학의 힘겨움과 소외감 소속감결여 등으로 인해 학업에 어려움을 겪자, 학구열로 뭉친 몇몇 학우들끼리 (물론 강남서초 지역학우들이였겠지요) 처음엔 복잡한 식당 영업시간을 피해서 중국집이며 다방, 칼국수집 등을 전전하면서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초기멤버 중에는 박왕수 선배님 말고도 86학번 선배님들이나 19992년 서울총학생회장을 지내신 홍순복 선배 등 이 지역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님들이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강남서초스터디 탄생과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가졌다고 보기엔 원가가 2% 부족한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구성이된 금성회는 이후 해마다 같은 지역에 있는 후배들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후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아마 당초 인원 이외에도 후배들을 맞이하다 보니 식당에서 수업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겠지요. 그래서 90학번 선배님들부터 당시 박왕수선배님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방배동 '남일주산학원'에서 학생들의 수업이 모두 끝난 저녁 늦은시간을 이용하여 수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런 적극적인 이유때문에 박왕수 선배님을 강남서초스터디의 1기 선배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91학번은 신입생이 너무 많아서 역시 같은 사람이 운영하는 '태양주산학원'에서 6개월간 수업을 하고 나중에 2학기부터 남일학원에 합류했으며 92년에는 남일 박원장님이 교실 두 개를 하나로 터서 92학번 신입생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스터디 내력을 말하라면 이 "남일주산학원"을 절대 빼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터디의 시계 가운데 "남일주산학원 증"이라고 되어 있는 시계가 있을겁니다... 그런 인연으로 독립스터디룸 개관 때('94.8) 받게 된것이지요.
이렇게 장소가 안정되고 인원이 점점 늘면서 선배와 후배들간에 또 동기들간에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학업의 형태가 비교적 체계화 되었습니다. 박왕수선배님 학번의 선배들을 높이 사는 이유는 이렇게 강남서초의 시초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본인 학업에 열중하는 것도 어려운 데 후배들을 맞이하고 가르쳐 주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그렇게 실력이 우수한 김성태선배님도 90학번 선배님들한테 배운 것이 처음이라 하고 학원의 문턱도 들어가보지 않았으면서 대상을 탈 정도로 실력이 쌓였던 이유는, 계속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반복학습했던 것이라고 항상 증언합니다.(후배수업을 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수업을 진행해 갔는데, 매일 밤 수많은 학생(?)들이 들락거리는 남일주산학원에 대한 상가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결국 우리만의 스터디룸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남일 주산학원에서는 90 91 92 93 94학번이 수업을 했으며, 남일에서의 마지막 달인 94년 6월 월회비는 5,000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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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스터디룸 개관 92년 겨울에 강남서초 전교생인 90,91,92학번이 함께 의논한 결과 모든 학년이 갖춰지는 93년에는 스터디룸을 마련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새해가 닥치자 마음만 있을 뿐 준비가 너무 서툴어 다시 일년을 연기하게 되었고, 그동안 하나둘 준비를 진행하여 월회비 5,000원 외에 별도로 기금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91학번 1학년 팀장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스터디연합회''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학생회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스터디가 일일주점을 하고, 타 스터디에 대한 정보교환과 상호협조의 움직임을 정착시키면서, 독립스터디룸 개관의 바람이 일었고, 이 스터디연합회의 새로운 식구들이 된 92학번 팀장들은 또다른 의욕을 가지고 활동을 했으며 이 때부터 각 스터디별로 "그룹장"제도가 활발히 정착해갔습니다.
우리 스터디에서 초대그룹장을 맡았던 "윤종범(92)"선배님은 각 동문선배들과 후배들의 협조를 얻어 스터디룸을 만드는 데 온힘을 기울여 독립스터디룸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 첫 스터디가 바로 방림시장 위쪽 은하목욕탕 뒷 건물의 28평 지하였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벼룩시장"에 나온 것을 당시 2학년 권도연(93) 선배가 발견하고 김성태 윤종범 선배와 연락을 취해 계약을 하게 되었다지요. 하여튼 이 때, 첫 스터디룸을 만들 때 어디 그냥 앉아서 만들었겠습니까...
이미 졸업하신 동문선배님들께 찬조금 얻어내고 재학생들 주머니 돈 털어서 모은 돈은 임대보증금(800만원)으로 다 들어가고, 새학기가 되기 전에 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수업을 하자는 목표로 공사를 하려니, 얼마 안남은 돈으로는 누구에게 공사를 맡길 수도 없어서 학우들이 직접 나서서 망치질이며 페인트 칠을 해가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답니다. 책상 걸상도 나중에 벼룩시장을 통해서 초등학생 대상의 학원에서 처분하는 것들을 싸게 사다가 썼지요.
8월 중순의 그 더위에 직장에서 곧장 스터디로 와서 변변한 선풍기도 없이 (공사비가 모자랄까봐 선풍기도 나중에서야 황학동 도깨비 시장에서 중고를 구입하고...) 정말 음침한 지하의 좁은 공간에 칸막이를 하고 방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스폰지(흔히 계란판이라고도 부르고요..)를 붙이고 ... 그런데 본래 노란색이었던 이 스폰지 색깔이 해를 넘기면서 먼지가 앉고 나중에 아주 어두운 국방색으로 변한 뒤엔 스터디의 분위기는 한층 음침해 졌었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팬티바람에 칸막이 공사와 페인트칠을 해가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던 그 때를 기억하고... 새학기가 되면 유학을 가니까, 헤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하고 가겠다고 출국 전날 밤늦게까지 페인트칠을 하느라 여자몸으로 온몸이 페인트칠범벅 땀범벅 눈물범벅이 된 선배님(92)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칸막이 공사와 페인트칠까지 모두 마친 뒤 대청소를 한다고 물청소를 하다가 수증기가 가득찬 지하실에서 누전차단기가 작동해 정전이 되기를 몇 차례씩 치르던 깜깜한 지하실의 암흑속에서, 감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도 못하고 한참씩 떨던 그 때를 기억하는 선배들이 스터디를 생각하는 마음은... 대장정을 겪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것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매년 1학기 8월말에 "스터디 개관 기념행사"를 하는데 이것은 강남서초스터디가 처음 출범한 날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날 독립적인 우리만의 스터디룸이 생긴 것을 자축하는 행사를 열게 된 것입니다. 하여튼 이 날 우리 스터디 개관식에는 중문학과 스터디 개관 사상 가장 많은 중문과 동문선배와 학우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첫 스터디룸이 마련되고 94년부터 98년까지 91,92,93,95,96,97,98 학번까지는 이곳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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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2000년 이러던 중 98년 말 서홍원(96)그룹장 시절 이제 99학번을 맞이해야 할 때인데...그 때 방송대의 학생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고 이대로 나가다간 스터디의 재정에 큰 문제가 생기겠다 생각을 했지요. 더구나 이렇게 비좁고 음침한 스터디에서 신입생을 맞이한다는게 무리라는 생각으로 스터디룸을 이사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전에 있었던 방배3동사무소 앞의 "광찬빌딩"진영문고 지하 40여평짜리 스터디룸입니다.(1999년 ~ 2000년)
이때도 중문과 최고 최대의 시설을 자랑했지요. 이때는 95학번 정대엽선배님이 재료비만 받고 칸막이 설치하고 문 달고... 박왕수 선배님은 책상을 깨끗한 성인용 학원책상으로 새로 마련해 주셨구요. 다른 학우들은 직접 와서 페인트 칠이며 못 질이며 하나씩 하나씩 룸을 만들어 갔지요. 이렇게 2년간을 광찬빌딩 지하 스터디에서 지내다가 당시 60만원이던 월세를 90만원으로 인상해 달라고 해서 또한번 부득이 스터디룸을 옮기게 됩니다. 이때가 2000년도 연말쯤이였습니다.
처음에는 룸을 옮기는 데 반대여론도 있었습니다. 여기만큼 교통 좋고 시설 좋은 스터디 공간이 어디 있겠느냐, 인상을 하더라도 여기에 있자는 것이였지요. 하지만 이번 해에 올려주고 앞으로 몇년간 인상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년이 되면 얼마를 더 올려달라고 할지 모르는 상태였는데 ...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재학생들이 쓸 돈을 안쓰고 아껴서 해마다 일정액의 기금을 모아두는 이유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가장 큰 이유는 방송대나 중문과나 신입생 수가 점점 줄어드는 거였습니다. 월세는 오르는데 재학생 수가 줄어든다면 회비를 대폭적으로 인상하기 전에는 공부방을 유지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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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그래서 이곳 저곳을 알아보던 중 현재 공부하고 있는 있는 지하룸을 얻게 되었는데 지금이야 이상덕선배님이 기탁한 500만원의 장학금 등을 사용하며, 거액의 공사비를 들여서 꾸며놓았으니 그럴싸하지만 처음 이곳을 얻었을 때 학우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넓긴 넓었지만 곳곳에 곰팡이며 녹물이며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또 향후 몇년간은 여기에 있자라는 생각으로 적지않은 투자비를 들여 스터디공사를 해서 지금처럼 근사한 모습이 된 겁니다. 물론 여름에 습기가 차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 수중모터소리를 들으며 수업하는게 보통 난감한 것은 아닙니다만 강의실 부족으로 전전긍긍하던 초기에 비하면 정말 훌륭한 환경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거지요.
강남서초하면 공부도 잘하고 흔히들 잘나가는 스터디라고 소문이 나 있는데.. 공부 잘한다는 명성은 특히 91학번 김성태선배님, 95학번의 선배님들 덕분입니다. 91학번 김성태선배님은 2학년때, 스터디의 1학년 초급중국어수업을 하고, 스터디 연합회 회장으로 다른 스터디와 교류 협력하며 바쁘게 공부하는 가운데서 교내 어학경시대회에 출전하여 대상을 거머쥐었었지요.(보통 대상은 3,4학년이 수상을 하는데..)
또 매년 대학본부 학생회관에서 객원교수님을 모셔놓고 새벽회화반을 하는데 처음에는 학우들이 가득 차게 수업을 듣지만, 끝에 가서는 서너명 정도가 남기 마련인데 95년에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새벽회화반을 지켰던 사람들이 우리 강남서초 95학번 선배들이었고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요) 특히 마지막 날 8명의 수업 인원 중 강남서초의 인원이 5명이었답니다. 이 선배들 모두 장학생으로 졸업을 했으며 현재는 모두 중국으로 유학을 갔거나 돌아와서 다시 후배들을 가르치고 계시지요.
또한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무슨 행사가 있다하면 강남서초의 학우들은 끔찍하게도 적극적이였습니다. 더구나 매년 열리는 어학경시대회에 합창은 물론 반드시 듀엣이나 트리오등 별도로 학우들이 참가를 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요. '총장배 전국어학경시대회' 2회의 대상과(1992, 2006 ), 7회의 최우수상, 수많은 우수상과 장려상에 빛나는 "최우수 모범스터디상"...
그리고 '학보사 외국어경시대회' 2회의 은상, "자랑스런 방중인상"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문학과와 스터디의 실질적인 주춧돌 '모범학우상'까지... 이와같이 선배들의 어학경시대회 어학부문에 대한 우수한 성적과 매년 끊기지 않았던 예술부문에 대한 학우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금의 강남서초 스터디의 명성이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3년 어학경시대회 서울지역 예선을 통과한 초급부문 예선통과자 10명 가운데는 강남서초에서 나중에 그룹장을 지낸 이의석 선배 등 강남서초식구 6명이 포함되어 강남서초의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여름방학 때 거의 매일 스터디에 나와서 스터디 어학경시대회와 서울지역 예선을 준비하셨던 분들인데, 이 때 종로의 중국어학원에 근무하던 김현경 선배와 중국인 '메이쑤' '최이칭시'선생의 힘이 큰 도움이 됐으며 , 2006년 어학경시대회에서는 05년 그룹장을 지냈던 이동욱 선배님이 92년에 이어 두번째로 강남서초스터디에 대상을 선물함으로써 강남서초의 명예를 빛냈습니다.
이렇듯 10년이 넘는 스터디 어학경시대회를 통해 중국어 실력에서 두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92년부터 시작된 스터디 장학금은 2000년에 이상덕 선배님이 장학기금 500만원을 기탁하여 재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명성은 능력있는 누군가가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조금씩 조금씩 누적이 되어 온 것이지요. 그래서 동문선배님들을 감사히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살며...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살아가지요.
과거,현재..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이 스터디에서 펼쳐지고 성취될 때까지 우리 스터디가 학우님들에게 방송대학업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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