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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은 대한민국 환경 농업의 메카로, 유기농에 관심이 있는 귀농 희망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실패하고 떠나는 이들이 10%를 밑돌만큼 귀농정착률과 만족도도 높다. 이곳 홍성의 귀농인들을 만나 자신과 주변의 실패 사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을 뒤집으면 바로 성공 비결이 될 것이기에….
-글쓴이 주-
충남 홍성군, 특히 홍동면은 여러모로 특이한 동네다. 면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집에서 대학(풀무농업기술학교 전공부)까지 모든 단위의 교육 기관이 있고, 갓골생태농업연구소, 환경농업교육관, 에너지전환 등 생태·환경 기관과 단체도 여럿 된다. 그러니 유기농에 관심있는 귀농 희망자들 사이에 귀농 1번지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귀농후 정착률도 90%를 웃돈다. 반면 이 지역에 귀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농 인구가 적은 까닭에 빈집과 땅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
인간관계의 실패가 귀농실패로 이어진다
이연진 씨(37·홍동면 팔괘리)도 홍성에서 빈집을 구하지 못해 다른 지역에 귀농했다가 2009년 12월에 이곳 사람이 됐다. 첫 귀농지인 전북 남원에선 사정이 생겨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어 자리잡은 충남 공주에선 마을 주민이 모두 고령자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씨는 “홍성은 힘든 시간을 버텨낸 선배들이 버팀목이 돼주고 있어 나 같은 후배들이 안착할 수 있다”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귀농 선배가 많은 곳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존 마을에 귀농인들이 점점이 자리 잡은 이곳과 달리, 귀농인이 대다수인 이른바 ‘귀농인 마을’도 있어요. 제 경험으로 그런 곳은 정서가 농촌보다 도시에 가깝고, 귀농인끼리 갈등을 일으킬 소지도 높아요.”
그런 마을 한 곳에 정착한 어느 귀농인도 언젠가 기자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는 “이 마을 사람들 중 책 낸 사람이 절반은 넘는다”면서 개성 강한 귀농인들이 한데 모여 있다 보니 피곤한 일도 많다“고 털어 놓았다. 또 다른 귀농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동 귀농은 말리고 싶다”고 했다. 자금이 넉넉지 않아 지인들과 농장을 함께 사기로 뜻을 모았다가 막판에 돌아선 그였다. 그는 “도시에서도 친구와 동업했다가 사람과 사업 모두 잃는 경우가 얼마가 많으냐”면서 “귀농이 반드시 고독한 탈주일 필요는 없지만, ‘혼자’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함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귀농한 지 13년, 그간 많은 귀농 후배를 맞이한 이환의 씨(45·홍동면 금평리)도 “귀농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 문제 때문”이라며 몇몇 사례를 들려줬다. 김아무개 씨는 지역민은 물론이고 귀농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다 결국 홍성을 떠났다. 귀농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던 그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좌절했으며 그 감정을 주변사람들에게 여과없이 쏟아냈다.
“다른 귀농지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더군요. 매번 유토피아를 찾아왔다가 지옥을 맛보는 거지요. 같은 땅에서 두 해 농사를 못짓는 사람도 봤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데 방법을 밖에서만 찾으니 그게 진짜 문제지요.”
투자는 과감하게? 갈등 생기면 법으로?
무리한 투자로 어려움을 겪는 귀농인도 적지 않다. 앞서 이연진 씨의 경우 남원과 공주에서 실패라면 실패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빌린 집이기에 떠나기도 쉬웠고 마침내 처음부터 원하던 홍성으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올 4월 귀농한 황아무개 씨(이날 함께했지만 이름과 신분을 밝히길 꺼렸다)는 “덜컥 집과 땅부터 샀다가 곤란을 겪고 있다”며 자신의 경험과 교훈을 들려줬다.
“공인중개사를 통해 가족이 살 집과 구상 중인 곤충생태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제가 치른 가격이 내부 공동체 거래가의 갑절이던군요. 게다가 돈부터 쓰고 나닌 운신의 폭이 좁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곤충생태학교도 그래요. 토목·건축 인허가가 아직도 안 나왔습니다. 곤충산업특별법이 발표됐다, 다른 지역에서는 절대농지에도 관련 시설 인허가를 내준다고 해도 안 통합니다. 신문에 난 내용, 중앙 부처 공무원이 하는 말만 믿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현장을 확인하고, 그 지역 담당 공무원과 만나 확답을 받은 후 움직여야 합니다.”
부동산 거래에 있어 현장 확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터다. 특히 귀농 관련 온라인 카페에 소개된 매물 정보는 부정확하거나 부동산 업자가 ‘낚시용’으로 올린 것도 많다. 한 귀농인이 겪은 일은 이렇다. 마음에 꼭 드는 집을 만나 그날로 계약하려 했는데, 현지 공인중개사가 주인이 타지에 있다며 다음주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자 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면서 “값을 좀 더 쳐주면 도로 팔 것 같다”고 권유했다. 알고 보니 자신이 사놓고 값을 부풀리려던 것. 그 귀농인은 “현지 공인중개사, 마을 사람들, 인근의 지인 등 복수의 경로를 통해 꼼꼼이 확인할 것”을 재차 강조했다.
집과 땅을 산 다음에도 문제는 이어진다. 홍성의 한 귀농인은 최근 축산의 꿈을 접었다. 주민들이 “어디 동네 입구에 축사를…”하며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경기 파주의 한 귀농인도 그랬다. 처음 충남 당진으로 귀농한 그는 축사를 지으려다가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게다가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주류에 속했다가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런 실패를 교훈 삼아 파주에서는 이사 전부터 마을 사람들 설득에 나선 한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도시민으로서 선뜻 이해가 안 간다. 내 땅에 내 돈으로 축사를 짓겠다는데? 그간의 사정을 지켜본 황씨가 말을 이었다. “시골에선 주민들이 반대하면 아무리 적법한 일이라도 강행하기 힘듭니다. 손해에 대한 보상을 청구한다? 그랬다가는 그 동네에서 못 삽니다. 소송은 이겨도 귀농은 실패하는 거지요.”
이런 사례도 있다. 충남 서천에 귀농한 만화가 장광일 씨가 서천군귀농인협의회 안내 책자에 소개한 실화다. 어떤 이가 귀농해 집부터 샀는데, 측량 결과 자기 땅 일부가 길로 편입돼있었다.
그래서 마당도 넓힐 겸 담을 길쪽으로 밀어 쌓는데, 동네 어른들은 경운기다니기 쉽게 조금만 안으로 들이라 했다. 그는 ‘법으로 보장받은 내 재산인데’ 하고는 측량대로 담을 쳤다. 결과는? 시집살이보다 매운 시골살이가 시작됐다. 다른 집들 역시 자기 마당 내주면서 지겟길을 수렛길로, 다시 찻길로 넓혀왔다. 그런데 외지인이 그 길 공짜로 쓰면서 제 땅은 끝까지 챙기는 데 누가 예쁘게 봐주겠는가.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터에서 펴낸 귀농 사례집 ‘우리는 지금 농촌으로 간다’에 실린 채상헌 센터장의 이야기도 새겨들을 만하다. 한 귀농인이 찾아와 “동네사람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술 한말 내놓으라고 하니 미치겠다”하더란다.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정자나무, 하천과 농로, 심지어 초등학교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그 선조들이 돈이나 힘을 보태 이루어놓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귀농인은 이런 공동체의 터전에 무임승차하는 셈이고 그래서 그런 방식의 지불과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홍성의 귀농인들은 “지역의 정서를 이해하고 귀농인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장에 갈 때 동네 어르신들을 차에 태워드리고, 마을 대소사에 꼭 참석하고, 무엇보다 꼬박꼬박 인사 잘 하고. 농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개 집성촌이고, 농사란 게 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공동체 의식이 강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때로는 훈훈한 인정으로, 때로는 깐깐한 텃세로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돈만 보고 농사짓다 쪽박차기도
가족, 특히 배우자의 동의를 얻지 못해 귀농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얼마 전 홍성을 떠난 최아무개 씨를 떠올렸다. 먼저 자리를 잡겠다며 혼자 내려온 최씨는 마을 사무장까지 맡으며 잘 적응했으나 3년만에 서울로 돌아갔다. 부인이 끝내 내려오길 거부한 것이다. 많은 귀농인들은 “배우자와 함께 귀농할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는 최씨처럼 가족에게 돌아가고, 설령 뒤늦게 가족이 합류한다 해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부부간의 이해와 지지는 귀농 이후 정착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귀농 초기, 서로 의지해야 할 부부끼리 오히려 날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황아무개 씨), “살림과 육아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주거 환경이 불편하다 보니 여성들이 특히 힘들어한다”(이연진씨), “도시에선 가사 분담에 적극적이던 남편이 귀농 후 싹 변했다며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이환의 씨) 등등. 귀농 3년째인 금창영 씨(40·홍동면 월현리)는 “남편도 괴롭다”며 하소연한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가서 내색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랬다가는 내려오자고 한 게 누구냐는 소리만 들으니까.”
“경제적인 이유는 성패를 결정적으로 갈라 놓는다. 이환의 씨는 ”처음 2~3년 버틸 여유 자금도, 이후 자립 계획도 없이 떠밀리듯 귀농한 이들은 거의 다 떠났고“고 했다. 2000년에 귀농한 김창구 씨(50·홍동면 팔괘리)는 “꼼꼼히 준비하고 내려와 농사에 전념한 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3년 안에 수지를 맞춘다”고 이야기한다. 지역의 유기농 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귀농 희망자는 “내려가면 얼마 주냐?”고 묻는단다. 귀농한들 십중팔구 실패할 사람들이란 게 이들의 말이다. “가서 무슨 농사 지으면 돈이 되냐?”는 질문도 이들을 막막하게 한다. 이환의 씨는 돈만 보고 투기에 가까운 농사를 짓던 한 귀농인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그는 농과대학 졸업 후 귀향,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배추와 생강 등 돈이 된다 싶은 품목만 공략했다. 결과는 주변의 우려대로였다. 생강에 연이은 양배추 값 폭락으로 빈손이 된 그는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귀농은 시골 사람 되는 것, 도시적 습성 버려야
이들의 조언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도시적 습성을 버리고 시솔 사람이 되라”일 것이다. 귀농 초기 이환의씨 부부는 독하게 마음 먹고 씀씀이를 줄이는 한편,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몇 가지 요령도 터득했다. 매달 나가는 보험료나 회비를 수입이 있는 달에 한꺼번에 낼 수 있게 조정한 것이 일례다.
“농사가 생계 수단인 만큼 지출 규모는 물론이고 그 구조도 농사에 맞춰야죠. 그래야 가계를 계획적으로 꾸릴 수 있습니다.”이연진 씨는 “시골 사람이 된다는 건 삶의 철학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하다”며 말을 이었다.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 해설자가 아니라 선수로 살고 싶어서 귀농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선수가 아니라 경기를 즐기는 선수 말입니다. ‘어떻게 농사지으면 더 벌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적게 쓸 수 있을가’를 염두에 두고 살 겁니다.”
이들이 들려준 여러 실패 요인을 잘 피해가며 한 10년 시골에서 버티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북 진안의 한 귀농인은 어느 귀농 행사장에서 씁쓸한 경험을 했다. 귀농한 지 10년 됐다는 어떤 이가 도법 스님을 향해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오는 시골 사람들의 무례함을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소연하더란다. 강산이 바뀌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과 자신 사이에 그은 선을 지우지 못한 이 사람은 귀농에 성공한 것일까.
이연진 씨는 “이번에는 성공할지 어떨지 아직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귀농 3년차인 금창영 씨 역시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웃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행복한가’가 아닐까. 잠깐 숙연한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금창영 씨가 웃으며 말을 맺었다.
‘어느 날 밥상 앞에 앉았는데 갑자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게 다 내가 농사지은 것이구나. 참 맛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귀농한 지 2년을 넘긴 때였여요. 맛의 기준,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순간이 불현 듯 찾아온 게. 그 재미에 사는 거죠.
*p.s
농민신문사의 전원생활 2010년 12월호에 게재된 손수정 기자님의 글입니다. 손기자님은 귀농초 저희집에 설치된 바이오가스 시스템 취재로 만났는데 예의 바르고 풋풋한 느낌이었습니다. 십 년 뒤 다시 만나니 지난 시간만큼 농업·농촌 전문 기자로서의 연륜이…. 다시 십 년 뒤에도 기사처럼 기자와 농민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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