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사항은 학계의 검증을 거친 내용이 아니라 다른 사이트에 게제된 내용을 옮겨온 것으로 종친들께서는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상산 김씨는 고대 스키타이 민족으로서 고대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지금의 한반도로 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에는 고대 인류가 살고 있었고, 그들과 혼인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金需)와 김조(金祚)계통을 달리하는 상산 김씨끼리도 혼인을 한 것으로 보아서 족내혼이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상산 김씨는 사벌국의 고향인 상산(상주의 옜 지명))을 근거지로 하여 본관향을 세대를 이어 온 가문으로서 보통의 김알지계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이는 상산 김씨가 고대국가 삼국시대, 신라중대, 하대뿐만 아니라 고려, 이씨조선 때만 해도 별 다른 무리없이 관계에 진출을 하였다는 것은 어떤 세력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힘의 중추역할을 하여 왔다는 증거 때문이다.
소위 후삼국(태봉국, 후백제, 신라하대,고려) 때만 해도 상주를 배경으로 한 세력 각축 와중에서도 상주를 배경으로 하여 다른 가문(고려말기에 가문을 만들어짐)은 관계에 진출을 하지 못하고 고려 말기에 관계에 진출을 한다는 것은 고려때만 해도 상주지역은 여전히 상산 김씨의 수중에 있었고, 주도세력이었다는 것이다.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 셔블이라는 명칭은 상주의 고대지명인 사량벌, 사벌이 변한 말이다.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도읍이니, 혹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비(泗)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비(泗)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 이는 상주지역에서 뻗어나간 계통이라는 것이다.
상산은 영남대로의 중심축이었다. 모든 길은 반드시 상산을 거쳐 문경새재를 거쳐 북쪽으로, 남으로는 낙동강을 통하여, 낙동강을 거쳐 지나가야만 하는 반도의 중심무대였다. 고대 이래로 전장이 발생하면 문화재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주는 예로부터 전장의 중심지역이었기에 선사이래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다. 단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서기 889년 한반도 최초의 농민혁명으로 기록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혁명(革命)(일명 원종, 애노의 난亂)이 상주에서 일어났었으며, 태봉국 궁예왕의 부하인 고려 왕건도 후백제왕 견훤과의 싸움을 상주에서 80% 이상이 전개된다는 것은 한반도의 인물의 고장이라는 증거이다. 그만치 상주는 내우외환으로 백성은 고통을 많이 받았던 곳이다.
상산은 아마 그 당시에 소중한 역사적 문화재와 민족의 기원을 기록한 서적 등이 불타거나 유실, 조작, 축소, 은폐, 왜곡되어졌을 것이다. 아래 내용은 상산 김씨의 유래로 일부 내용에 불과하나 참고가 되기 바란다.
-삼원수(三元帥) 계통- 상산군파(門下侍中 商城君 金祿의 둘째 아들, 김득제金得齊) 낙성군파(門下侍中 商城君 金祿의 세째 아들, 김선치金先致) 문충공파(門下侍中 商城君 金祿의 첫째 아들, 김득배金得培)
*** 상산 김씨 씨족사의 개요 *** 고려 공민왕 8년, 4만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하였다. 당시 1세기에 걸친 원(元)나라의 내정간섭에 시달려 왔던 고려는 이때부터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망국의 위기에 놓인다.
고려 500년 사직이 위태로왔던 이 시기에 상산 김씨는 구국의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니 그 대표적 인물이 김득배다. 깁득배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김득제, 김선치와 함께 우애롭게 성장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할머니는 상산 김씨 김조의 딸이다. 그녀 역시 어릴적에 홍건적 침입때 부모가 피난가는 길에 길가 숲에 던져 놓았다가 사흘이 지난 후에 찾아서 키워진 분이다. 김득배는 홍건적의 1차 침입때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서 이방실, 안우 등과 함께 西京(평양)을 수복, 공신이 되고 政堂文學에 올랐다.
2년 뒤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西北面都兵馬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西京이 함락되었다.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신하는 치욕적인 패배였다. 그러나 이듬해 안우, 이방실, 최 영, 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으로 반격, 서울을 탈환하고 나머지 적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는 개선 후, 간신 김용(金鏞)의 무고로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안우, 이방실 등 공을 세운 장군들과 함께 참형을 당했다. 당시 김득배의 문인(門仁)이었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는 상소로 김득배의 무고함을 간하고, 형이 집행되자 사체를 거두어 안장했다. 포은이 김득배의 영전에 바쳤던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는 지금도 포은문집 중에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득배에게 文武兼全의 極稱인 <文忠>의 시호를 내렸다.
그의 두 동생도 뛰어난 인물로 김득제(우왕, 三司右使, 商山君)는 홍건적의 침입 때 대장군으로 공민왕의 피난길을 호종하고 서경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김선치(同知密直) 이때 공을 세워1등공신에 올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삼원수>라 불렀다.
또 원종 때의 중랑장 김충(中郞將 金忠)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 상산 김씨는 고려말엽 文과 武로써 가문을 일으켰다. 이후 상산 김씨는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면서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과 명현달사(名賢達士)들을 세상에 배출했다.
그 예로 시중(侍中)으로 정정(貞靖)의 시호를 받은 김제, 역시 시중(侍中)으로 청평(淸平)의 시호를 받은 김희일(金希逸), 찬성사(贊成事)와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이 된 김비궁(金匪躬), 3海(동, 서, 남해)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고 몽고(蒙古)의 침입을 막아낸 김충(金忠), 김일(金鎰), 김록(金祿) 등이 모두 고려조에 상산 김문(商山 金門)를 빛낸 인물들이다.
김운보(金云寶)와 김신보(金臣寶) 형제는 1353년 왜구의 침입, 1363년의 홍건적의 침입 때 각각 공을 세워, 김운보는 판전의시사(判典醫侍事)에 신보는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이씨조선 개국 후 이 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형 운보는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고,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오른데 비해 동생 신보는 전남 영광(靈光)에 낙향(落鄕),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상산 김씨 중에는 김신보처럼 이씨 조선의 개국에 반발한 이도 적지 않아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는 두문동(杜門洞)에서 풍월을 벗삼다 일생을 마쳤고, 제학공(提學公) 단구제(丹邱齊) 김후(金後)는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만시(挽詩)를 지어 통곡하고는 두류산(頭流山)(지금의 지리산, 智異山)아래 단성현(丹城縣) 법물리(法勿里)에 들어가 후학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조선조에 있어서는 태조때 랑장으로 이방원(태종)이 사냥터에서 표범의 습격을 받았을 때 화살로 쏘아 죽여 이방원을 구출했다는 김덕생(金德生,동지중추부사), 세조때 두차례나 침입한 야인(野人)을 무찔러 용맹을 떨치고 병조판서에 오른 김사우(金師禹), 구경사서(九經四書)에 통달했던 석학 김우생(金佑生, 전남 順天府使)등은 이씨조선 초기의 인물들이다. 이들 중 김우생(金佑生)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분이 두터웠고, 1457년 단종이 억울하게 숨지자 세조의 왕위찬탈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독자결한 절신이다.
김우생(金佑生)은 1372(공민왕21)~1457(세조3) 고려 이씨조선의 문신, 자는 문숙(文淑), 호는 양산(陽山),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운보(金雲寶)의 아들로 17세때 시중(侍中) 최영이 요동(遼東)정벌을 강행하려 하자 이성계에게 글을 보내어 그 불가함을 논했다. 후에 정몽주에게 수학(修學), 9경(經), 4서(書)에 통했다. 1392년 이씨조선이 개국되자 순천부사가되고, 태종 이방원 때 형 김덕생(金德生)이 억울하게 처형되자 사임했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교유했고, 1454년(단종 2년)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사건 때는 정인지에게 의뢰, 화를 면했다. 1457년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했다.
성조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김수억(金守億),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에 항거한 김려성(金礪成)은 공신이 되어 이름을 남겼다. 김귀영(金貴榮)은 이씨조선 중기의 거목으로서 명종 때 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8번, 사신으로 중국(中國) 명(明)나라 왕래를 9번, 대제학을 6번 지내고, 선조 14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명신이다. 고려 우왕 6년 이성계와 이두란(李豆蘭,李之蘭)이 황산(荒山)에서 아기바투(阿只拔都,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격퇴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10년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南原郡 雲峰面 花水里)에 세워진 귀상견립식(龜上堅立式) 석비(石碑)의 비문은 당시 대제학이던 김귀영이 지은 것으로, 명문 으로 꼽혀 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서는 김순경(金舜卿), 김우경(金禹卿)형제가 충북 귀산(鬼山)에서 적을 토벌해 공을 세웠고, 합천(陜川) 의병대장이던 김준민(金俊民)은 성주(星州), 안언(安彦) 전투에서 적 500여명을 죽이고, 진주대첩(晉州大捷)대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도와 외곽에서 적을 공격해 패주시켰으나 끝내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면서 순절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준민(金俊民)에게 병/형조(兵/刑曺)판서의 관직을 내리고 진주 창열사(晉州 彰烈祠)에 봉안하게 했다.
조선조 말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등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서장관(書狀官) 김명0(金命0)은 임란때 충주목사로서 성을 끝까지 지켰다. 또 김헌(金憲)은 안령(鞍嶺)전투에서, 김홍면((金弘勉)과 김지룡(金志龍)은 곽재우와 함께 활약해 선무1등(宣武1等) 또는 2등원종공신(2等原從攻臣)이 됐다.
김일(金鎰), 김세인(金世仁), 김시길(金時吉)은 상주에서, 김형진, 김석천(金石泉)은 청주(淸周), 금산(錦山)에서, 김몽희(金夢禧)는 청주(淸州), 금령(金嶺)에서, 몽희의 아우 김몽단(金夢端)은 진주에서, 김남수(金楠壽)는 금산(錦山)에서, 김신(金紳)은 거로산(距蘆山)에서, 김경근 (金景謹)은 토동(兎洞)에서, 김봉승(金鳳承)은 0산(0山)에서,김안성(金安性),김0(金0), 김응호(金應虎),김응추(金應秋)등은 곽재우와 함께 각각 활약하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김재택(金載澤), 김재지(金載池),김재연(金載淵) 3형제와 김경눌(金景訥),김봉(金鋒),김유성(金有聲),김인제(金仁濟)등도 한결같이 지역방어에 힘써 성을 지켰다.
이들 중 인조때 청백리에 뽑힌 김덕함(金德言咸)은 일찌기 문과에 급제, 대소 관직을 지내면서 녹봉(祿俸)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털어 주고 겨우 생계만을 유지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겸(金德謙)과 함께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광해군때는 이항복과 함께 페모론을 반대했다가 북청(北靑), 남해(南海), 사천(泗川) 등지에 7년간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인조 반정으로 풀려난 그는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했다. "성옹집(醒翁集) 4권"이 전한다. 시문(詩問)으로 명성을 떨쳤던 김덕겸(金德謙)은 그의 형이요, 숙종때의 형조판서 김우석(金禹錫)은 그의 손자다.
김우석(金禹錫)은 당쟁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건의했으며, 그의 아들 김연(金演)은 경종대 호조판서를 지내면서 청(淸)나라에 사은사서장관(謝恩使書狀官)으로 가 외교적으로 공헌하기도 했다.
김연(金演)의 조카 김동필(金東筆)은 판서, 판돈령을 역임했고, 4색 당쟁으로 부패된 관기(官紀)를 숙청하고 재정을 절약해 백성을 구휼할 것을 만언소(萬言疏)로 주청도 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도와 당쟁완화에 힘썼으며, 영조 4년 이시애의 난땐는 남한순무겸 동로경략사(南漢巡撫兼 東路經略使)로 출정해 역신을 토벌하고 종묘사직을 지킨 공로로 구무원종공신(舊武原從功臣)이 됐다.
조선조에서 상산김씨는 모두 55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상산 김씨는 조선조의 조정뿐만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을 적지않이 배출했다. 영조조의 김광수(金光遂, 號:尙古堂)는 문장과 서화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는 이조판서 김동필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고 서화에만 몰두했다. 인품도 고결해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사물을 보는 눈이 신통하다하여 중국대륙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그는 한때 운석에다 생광명(生鑛銘)을 새긴적이 있는데 이것은 전황석(田黃石)이라 불리며 보물로 알려져 있다.
김범(金範, 호: 后溪)은 중종, 명종조의 명유(名儒)다. 중종35년 문광에 등제한 그는 이퇴계, 조남명(曺南冥)과 함께 미사(微士)로 뽑혔고, 玉果縣監을 지냈다. 성품이 고매한데다 주자학에 전념해 제자가 많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사제문과 부물(賻物)을 하사하고 감사로 하여금 護喪케 했다. 상주 옥성서원에 배향됐고, 문집이 전해진다.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은 선조 때 문과에 합격, 副修撰, 吏曹政郞을 지내고 聞慶 近岩書院에 배향됐다. 그의 아우 省克堂 金弘微도 선조조에 문과에 등과해 이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했으며 尙州 鳳山書院에 배향되었고 각각 문집 5권씩이 전해진다.
三淸堂 金0은 성균진사로서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해 조정에서 부사직을 제수햇으나 사양하고 三嘉鄕校를 재건했다. 그의 사후 유림들이 향교동쪽에 별묘를 세우고 지금까지 4백년간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의 아우 及古齊 金0 또한 학문이 높고 후진양성에 공이 거대하여 후학들이 그의 사후에 유집을 발간하고 두릉서원과 목계서원을 지어 배향하고 있다. 같은 김미의 아우들인 삼휴당 김0(문과한림), 삼매당 김0(성균생원), 눌민제 김0(성균진사), 만각제 김0, 삼족제 김준(성균진사),양간제 김칠 등이 모두 문과 학에 명성이 높아 <김씨팔군자>로 불렀다.
김린섭(단계)은 20세때 문광에 올라 정언장령을 역임했고 퇴직 후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의 유집 15책의 판각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보관돼 있으며 두곡서당에서 석다례가 봉행되고 있다.
물천 김진우는 유학자로서 저작과 교육에 진력, 유림의 宗匠이 되었다.그의 문집 22권의 판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장판각에 보관돼 있으며 물천서당에서 석다례가 봉행된다.
김상0은 서산 김흥락의 제자로 성경현전과 백가제자를 두루 탐독해 세인의 사표가 되었고 문집20권을 남겨 놓았다.
소당 김기효,기간 김기용, 수제 김재식, 중간 김재수, 홍암 김진문, 평곡 김영0 등도 모두 유학자로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각각 문집 10여 권씩을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기용, 재식, 진문, 영0 네 사람은 특히 인품이 고결하고 뛰어나 세간에서 그들을 <상산사호>라고 칭송했다.
조선 말기와 한일 합방 시기에 상산 김씨의 활약상과 관련 한말의 의병대장 김용구는 수천명의 의병을 모아 본거지인 전남 장성을 비롯, 전라도 일대에서 왜적들을 격멸했다. 그는 고종이 죽었음을 듣고는 음독자살해 충절을 지켰다. 해방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기미(己未) 3.1 운동때에는 김영0, 김상문, 김상호, 김상종 등이 경남 산청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김용환은 해외의 독립지사들과 연락해 광복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로서 활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고 광복후 귀국해 별세한 김성숙(金星淑)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일제 시대에 대표적인 인물인 김달호(金達鎬)는 대학재학중 일본고등문관(日本高等文官) 사법행정 양과(兩科)에 동시 합격하였다. 함경도 청진의 유지(有志)마작도박사건 담당판사때에 일인 지원장이 무죄해결 청탁을 하자 지원장이 본청탁사유(本請託事由)를 법정에서 해명하여야 된다고 지원장(支院長)을 증인으로 채택한 일로 법관(法官)을 사직하고 만주(滿州)로 가서 광산업을 경영하다가 8.15 해방이 되자 재봉천조선인 자치회장( 在奉天朝鮮人 自治會長)을 하였다. 1947년에 귀국하여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경북안동보궐선거에서 임영신(任永信) 당선자에게 관권개입여부를 조사하다가 사직하였다. 변호사로서 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향토 상주(尙州)에서 출마하여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북진 전쟁통일론에 대하여 평화통일론(平和統一論)의 최초 발론자로서 정면도전하였다. 당선후 조봉암(曺奉岩)을 당수로 한 진보당(進步黨)의 부당수(副黨首)로서 평화통일 정책을 추진하다가 소위 진보당사건(進步黨事件)으로 투옥(投獄)되어 1,2,3심에서 모두 20년 구형에 무죄언도를 받았다. 1심 재판 진행중 김달호는 국회부의장인 임철호(任哲鎬)를 증인으로 신청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본건 즉 조봉암 제거 (本件 卽 曺奉岩 除去) 날조지시의 증거로서 "任이 나에게 4천万원의 평생선거비용과 법무장관 임명을 약속한 회유책과 이에 불응이면 10년형을 주겠다는 협박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며 아무리 무거운 압력으로도 내 마음을 굽히지 못할 것이다. (万金誘惑不能動吾心 万釣壓力不能屈吾志)라는 고어를 인용하여 거절하였다"고 폭로하고 임철호(任哲鎬)은 부의장을 사퇴하였다. 4.19이후 혁신계가 단결하여 서상일(徐相日)을 당수(黨首)로 김달호를 부당수(副黨首)로 한 사회대중당을 조직하였으나 진보당계가 주동이 된 중앙위원회가 김달호를 당수로 추대하자 서상일(徐相日, 윤길중(尹吉重), 이동화(李東華), 박기출(朴己出)등이 탈당하여 각자 신당을 조직하므로써 사회대중당은 와해되었다. 5.16군사정권이 평화통일론을 용공(容共)으로 인정하여 김달호는 투옥되어 전후 10년 옥고를 겪었다. 박정희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박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어 유신구호에 맞게 법률을 개정하거나 법률을 고치지 못하면 유신구호를 폐지하라고 항의하였다. 양촌(梁村) 선영하에 장사하였고 묘비가 있다.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화백은 우리 근대 미술사의 거목이었다. 북종화(北宗畵)의 전통을 이은 마지막 화가인 그는 인물과 화조(花鳥)에 뛰어났으며, ?潔씰떼굼? 고종,순종의 모습과, 이순신, 논개,춘향의 모습과 영국 여왕의 초상화, 그리고 '승무(僧舞)', '풍악추명(楓岳秋明)'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