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10)
하얀 거짓말
국제문단문인협회 회장 김 장 곤
내가 어떤 아이와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반 초겨울 어느 날이었다. 중대장으로 부임한지 10여일 후쯤으로 기억된다.
그 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중대 취사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등병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 아이는 그곳에서 한 달 남짓 아빠와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이는 4살, 성(姓)은 차(車)씨요 이름은 있었지만 큰 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대복(大福)’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원래 이 부대는 그 전신(前身)이 모두 월남으로 떠나고 각 부대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재편성을 한 후 훈련과 정비를 하면서 오랫동안 비어있던 넓은 기지에 일개 중대만 주둔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인원 차출이 있게 되면 대부분 부대에서는 기록이 좋지 않거나 성격에 모가 나고 다루기가 힘든 병사들을 주로 보냈었다. 물론 이 부대 역시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인사장교로 있으면서 보냈던 병사들을 바로 이곳에서 만났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부대 개편 초기에는 지휘체계가 잘 잡히지 않아 탈영이나 여러 가지 사고가 많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전임(前任) 중대장이 보직에서 해임이 되고 내가 대타로 가게 된 배경도 모두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직 간접적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지만 다음 날에는 차(次)상급 지휘관 까지 전화를 하였다. 결국 명령과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뒷날부터 나의 주소는 임진강 변 어느 기슭에서 용문산근처 어느 외딴곳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대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다. 초겨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내무반 분위기는 너무 싸늘하였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막사에는 아직까지도 곰팡이 냄새가 많이 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는 정리정돈이 되지 않아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이곳 주둔이 한시적(限時的)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내무반 분위기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뒷날 내무반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고 창문에 밝고 연한 분홍빛 커튼(curtain)을 달았다. 그러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온화하게 느껴졌다. 막사 주변을 계속하여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였다. 중대원들을 면담도 하였다. 피면담자 가운데에는 실제로 딱한 병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 위치와 능력으로 모두를 해결하여줄 수는 없었다. 가장 시급한 한 명이라도 해결하여 보기로 하였다.
차(車)이병은 입대할 당시 남자 아들이 두 명이 있었으며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다. 편지도 대필(代筆)을 하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대부분이 어렵게 살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 역시 의지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를 이웃집 일을 거들면서 세모자(三母子)가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이가 임신 중에 유산이 되었고 심한 후유증으로 두 살 먹은 작은 아이만 데리고 입원을 하였다. 네 살 먹은 큰 아이는 이웃집에서 돌보아주고 있었다. 말이 돌보는 것이지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는 때가 많았다. 집도 남의 집에 도배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입원은 하였지만 이제는 병원비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차(車)이병은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대 역시 재편 부대로서 훈련과 정비가 끝나기 전에는 휴가 외출 외박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하니 무단이탈(無斷離脫)을 해서라도 집에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회를 벼르고 있는 중에 인사계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느낌이 이상하니 한 번 더 면담을 하여 달라는 건의였다.
중대장으로서도 어떤 조치를 독단으로 할 수가 없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차(車)이병에게 집에 갈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출장증과 교통비를 주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5일간의 기간을 넘기지 말고 꼭 귀대를 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일단 귀대 후에 중대장과 같이 노력하여 보자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3일후 인사계를 불렀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현지 확인을 하고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확실한 실정도 알아볼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부대로 돌아오지 않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준비도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닷새째가 되는 날 오후 어두움이 깃들 무렵 차(車)이병은 한 아이를 안고 부대로 돌아왔다. 나는 반가웠다. 무엇보다 약속을 지켜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인간거래의 기본은 신뢰(信賴)가 아닌가? 나는 이 때 차(車)이병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대복’이는 그 날부터 취사장에서 아빠와 같이 있게 되었고 군번 없는 4살짜리 부대원이 되었다. 중대의 간부들이 너도 나도 옷을 가져와서 입혀주고 과자도 사다주면서 자식처럼 귀여워하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인사계와 같이 또 출장을 보냈다. 차(車)이등병 가족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퇴원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병원비는 직접주지를 않고 그 지역 면장이거나 경찰서 지서장이 있는 곳에서 전달을 하되 성금을 전달하는 장면을 반드시 사진을 찍어 수원시 소재 어느 한 신문 보급소와 협의하여 이 내용을 기사화 (記事化)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꼭 지켜야 할 조건이 있었다. 이 병원비와 모든 조치는 중대장이 아니고 대대장과 연대장의 관심과 배려에서 이루어 졌다는 내용이었다. 만일에 중대장의 이름이 한번이라도 언급이 된다면 나의 순수한 의도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간의 비용에다 병원비 반환은 물론이고 앞으로는 조금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당부를 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남한강변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군 정보기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있었으면 사전에 자기들에게도 정보를 왜 주지 않았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몇 시간 후 연대장으로부터 차(車)이병이 우리 중대에 있느냐는 확인전화가 왔다. 훈련이 끝나고 귀대 이틀 후 참모를 대동하고 대복이의 옷과 장난감을 사가지고 중대를 방문하였다. 물론 대대장도 수행(隨行)을 하였다. 이 때 중대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여 주었다. 며칠 후에 확인을 하여 보니 모 중앙일간지 사회면에 성금을 전달하는 사진이 나오고 이 성금은 대대장 연대장이 하였으며 특히 앞으로도 이 가족을 계속하여 도와주기로 하겠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그로부터 차(車)이병은 중대 취사장에서 대대 취사장으로 근무처를 옮기고 가족들도 부대 주변에서 생활을 하면서 매달 쌀 두말을 지원을 받고 부대 잔반으로 돼지를 기르며 영외거주자의 옷을 세탁하는 등 열심히 살아 제대를 할 당시에는 장사를 할 수 있는 종자돈을 가지고 고향인 화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대 역시 재편부대로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중대원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가장 골치 아픈 사고부대에서 반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골육지정으로 뭉쳐 중대 시험 우승, 군대 가정 최우수 중대, 환경우수부대, 기타 여러 분야에서 선도 부대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얻을 수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때의 차(車)이병도 이제는 고희(古稀)를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중대원들에게 가족의 사랑과 삶의 어려운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대복’이도 어쩌면 군대에 간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려운 이웃에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큰 그릇으로 감싸주고 도와주셨던 그 날의 두 지휘관님께 이제나마 감사와 더불어 용서를 빌면서 그래도 작은 보람을 주었던 하얀 거짓말은 나에게는 아름다운 추억과 조촐한 행복으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장곤:
학위: 법학박사, 수필가.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료 발굴위원.
(사)국제문인협회 부이사장. 동국대학교 법대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총동창회 상임부회장,
한국 전례원 수석부원장,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SK건설 상무. [국제문단문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