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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기도]
사랑의 하나님! 생명 주심 감사드리며 찬양 드립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지혜와 의로움을 뽐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자랑하는 하나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연약함은 용서하여 주시고 굳게 세워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써주시옵소서. 군대에 가 있는 청년들 … 상함이 없도록 지켜 주시기 원합니다. 객지, 외국, 병상에 있는 성도들 …
영상으로, 음성으로 기둥교회 예배에 함께 하는 이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의 복을 주옵소서. 말씀 전하는 종을 붙드셔서 능력의 말씀, 치료와 회복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주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943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은 구리를 탄피제작에 모두 사용하여 동전을 찍어낼 재료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리로 만들던 1센트짜리 동전을 강철에 아연을 도금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조 과정의 실수로 몇 개의 동전에 구리가 사용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때 1943년에 제작된 구리 동전 중 남은 것이 현재 12개로 추정된답니다.
그 동전이 몇 개 안되다 보니 우리 돈 약10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 그 1센트짜리 구리동전이 경매에서 170만 달러, 약 19억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희귀 동전이 있습니다.
- 1970년 제작된 10원 짜리 동전 (70~80만원에 거래)
- 1972년에 만들어진 50원 짜리 동전 (15만원에 거래)
- 1974년에 제작된 100원 짜리 동전 (30만원 거래)
- 1998년에 제작된 500원 짜리 동전 (50~100만원 거래) 된다고 합니다.
혹시 주머니나 지갑, 저금통에 집안 구석에 이런 동전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2017년 4월 27일 daily mail 기사 “Is there one in your wallet?” 및 2017년 4월 29일
파이낸셜 뉴스 온라인 기사 “희귀 동전의 놀라운 가치들” 참조. >
액면가가 정해진 동전 값이 오르는 이유는 희소성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늘 듣는 말씀, 매주 듣는 말씀이라 생각하면 귀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강단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새로운 말씀,
내 삶을 바꿀 말씀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오늘 말씀의 값어치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말씀입니다.
<기억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도 … 살다 보면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지금’여러분이 후회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1)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뜻대로 …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명령을 지켜 … 행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살 수 있다 하셨고, 번성할 것이라 약속하셨고 선조들이 약속받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쉽지 않은 이 일을 위해 한 가지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신 8: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광야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뜻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부족한 땅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보낸 시간과 경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냈던 사십년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살았던 시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그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힘들었어도 … 어려웠어도 …그 오랜 시간은 결코 후회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갔던 길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과 그때의 경험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속도에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방송을 듣고,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면서 막히지 않는 길로 빨리 가려고 애를 씁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속도도 점점 빨라집니다. 정말 이렇게 빠른 것들이 다 좋은 것일까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한 시장에서 노인 한 분이 양파를 팔고 있었습니다.
여행 갔다가 시장 구경을 하던 분이 그 노인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 드릴까 해서
팔고 있던 양파를 전부 사면 얼마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팔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노인이 말하는 이유는 자신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그곳이 좋고 시장에서 손자들 얘기, 농작물을 얘기하는 것이 즐거움인데
낮부터 양파를 다 팔아버리면 즐길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 2016년 10월 9일 국민일보 25면 겨자씨 ‘삶을 사랑한다는 것’ 기사 참조. >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느냐, 아니냐입니다. 영원한 생명 길로 가느냐 죄와 사망의 길로 가느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함께 가는 시간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꿔서는 안되고,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과 바꾸어 버립니다.
1980년 작품, ‘부시맨(Bushman)’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두 국가 보츠와나(Botswana)와 나미비아(Namibia)에 걸쳐 있는 칼라하리 사막(Kalahari Desert)에 사는 부쉬맨 부족의 한 남성이 지나가던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줍게 됩니다. 그 남성은 콜라병을 망치로 사용하면서 신의 선물이라 여기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부족 사람들이 서로 콜라병을 먼저 쓰려고 하는 바람에
평화롭던 마을이 시기와 질투, 분쟁의 장소로 변합니다. 부쉬맨 족 남성은 마을의 평화를 위해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준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내용입니다.
< 영화 The Gods must be crazy(1980년작) 참조. >
태어나서 콜라병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콜라병도 소중할 수 있습니다.
귀한 물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물건도 평안, 화목, 사랑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접하는 사건, 사고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 화목, 사랑 …등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 때문에 일어납니다. 평안보다 돈을, 화목보다 높은 자리 … 가정의 사랑보다 집이라는 건물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뜻, 내 판단, 내 계획, 내 욕심, 내 이익만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우리는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값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능력,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으로 구원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롬 3:24)
그러므로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하라 하셨고, 예배를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사로운 일 때문에 하나님 만나는 것을, 예배를 제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예배보다 다른 일을 우선시 여깁니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예배에 빠집니다.
<형통함의 길>
‘형통’…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형통’은 ‘모든 일이 뜻하던 대로 잘 되어 감’을 뜻합니다.
모세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사십년 동안 머물렀던 광야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명기 8:4) 40년 동안 길을 걸었는데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동안의 광야 여행은 형통한 것입니까, 형통하지 못한 것입니까? 형통한 길이었습니다.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먼 광야길을 걸었지만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광야 같은 곳에 서 있을 때… 자신의 삶은‘형통’과는 관계가 먼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살아 있으면 소망이 있는 것이고, 지금 옷 입고 있어서 사람들 틈에 낄 수 있는 것이고 지금 발 부르트지 않아 걸을 수 있다면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먹을 것 있다면 힘쓸 수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지켜주신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형통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 어떻게 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쓴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갑니다. (창37:28) 열심히 일했지만 모함을 당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창3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창41:41), 자기를 팔았던 가족들까지 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창 45:7) 세상의 형통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 내 처지가 어떠하든지 …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면 그것이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기록한 때를 살펴보면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으로 팔려간 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을 때 (창 39:2) 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였습니다. (창 39:23)
요셉이 걸은 길만 보면, 당한 일만 보면 … 형통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혔는데 … 어떻게 형통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삶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출 39:2)
요셉 같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문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형통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제한하신‘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편하지만 … 비좁지만 …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지만 …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생명으로 향하는 그 길은 ‘문만’ 좁습니다.
일단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문 뒤에 펼쳐지는 길은 ‘천국 가는 길’이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크고 넓은 문은 문에 이르는 길이 편합니다.
문도 커서 지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만’ 크고 좋습니다.
일단 그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이후 펼쳐지는 길은 좁은 길이며 죄와 사망으로 향하는, 망하는 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내가 주의 진리를 따라 걷겠습니다. 나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주소서. 내가 주의 이름을 높이고 존경하겠습니다.”(시 86:11)
같은 말씀을 쉽게 번역된 성경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가르쳐 똑바로 걷게 하소서. 내가 주님의 참된 길을 따르겠습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모아 주소서. 온전한 마음으로 즐거이 경외하며 예배하겠습니다. (메시지 성경) ‘똑바로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어도 ‘참된 길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부모의 간섭을 불편해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잔소리로 여깁니다.
부모 세대는 자신 같은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됩니다.
‘왜 그 때 부모님/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후회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하심이 싫을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방식만으로는 살기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 후회하기 전에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야구를 좋아합니다.
야구에서 전력의 상당 부분은 투수의 능력이 차지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투수도 한 시즌 내내 완벽한 투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슬럼프가 옵니다.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이면 마음먹은 대로 던질 수 없습니다.
그럴 때 투수들은 공 던지는 패턴을 바꿉니다. 소위 ‘맞춰 잡는다’고 합니다.
일단은 포수가 제시하는 대로 던지고 타자가 공을 치면 동료 수비수들에게 게임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히12:1~2)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공을 던져도 대적하는 마귀들은 우리 공을 쳐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간단하게 우리 공을 받아주실 예수님의 싸인을 믿고 우리는 그대로 던지면 됩니다. “믿고 순종”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세상이 순하지 않습니다. 세상길이 원만하고 순탄합니까. 웃을 일만 넘칩니까. 마귀는 입 벌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여러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잘 싸워서 이기세요’라는 뜻도 있지만 ‘넌 이길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싸우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가는 길이 순탄하든지 어렵던지 … 마귀가 큰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해도 우리는 끝내 싸워서 이길 것입니다.
때때로 바뀌는 주변의 일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잔잔한 강가를 걸을 때에는 물론이고 풍파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길이 불편하여 힘들고 어두워서 두려워하며 … 멀어서 낙심하는 삶이 아니라
그 길이 어디든지 목자 되신 하나님과 함께 가면 형통입니다.
그 승리의 길의 주인공이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귀가 큰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해도 순탄하지 않고 어렵더라도 끝내 우리의 길은 승리의 길임을 믿습니다. 잔잔한 강가를 걸을 때에는 물론이고 풍파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었고 그 중에 십일조를 구별하고,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여러 가지 제목으로 예물 드렸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기도제목에 응답하여 주시고 승리의 간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말씀을 듣고 고개만 끄덕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가슴에 품고 승리의 삶을 사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