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첫 순교자인 윤지충의 본관은 해남이며, 자는 우용(禹用),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그의 가문은 남인의 명문세족집안이었고, 6대조가 윤선도(尹善道)이며,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증조부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경(憬)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실이 조신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가문의 학풍은 개방적이었고,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몰두하여 1782년 가을 고종사촌인 정약전(丁若銓), 약용(若鏞) 형제와 함께 서울 봉은사에서 공부하였다. 1783년 봄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에는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784년 겨울 서울로 올라간 윤지충은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천주교인들이 자주 모이던 김범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실의’와 ‘칠극(七克)’ 등을 빌려 필사하여 연구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3년동안 은밀하게 연구와 묵상을 계속하다, 1786년 무렵 정약전에게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배운뒤, 이듬해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고종사촌 매형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지헌(持憲)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홍산, 고산, 고창, 무안 등지서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또 윤지충은 이웃에 살던 외사촌 형인 권상연(權尙然, 1751∼1791)에게도 자신이 탐독하던 서학서를 빌려주어 신앙에 눈뜨게 했다. 얼마뒤 윤지충은 권상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1790년말 윤유일(尹有一)이 북경에서 가져온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사목 서한에는 가성직제도를 금할 것과 함께 조상제사금지조항이 들어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양반 신자들이 떠났지만, 윤지충은 교회의 명령을 충실히 준수하였다.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그 재를 집 뜰안에 묻었으며, 신주를 넣었던 빈 궤(櫃)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그런 가운데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빈을 했다가 8월에 가서야 장례를 치렀다. 그는 장례절차를 고민하다 상주로서의 예의범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권상연도 그의 결정에 동의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상례(喪禮)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더우기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의 행위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이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이들을 불효한 아들이며 윤리를 어긴 죄인이라 비난하였으며, 마침내 이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의 소문이 중앙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홍낙안(洪樂安)은 진산사건을 접하자 9월 29일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보내 윤지충의 집을 수색하고 체포하도록 촉구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0월 26일 진산군에 자수했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그의 굳센 믿음과 결의를 꺾을수 없어, 그들을 10월 29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하였다. 전라감사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도 못한 짓이라 꾸짖고, 이는 국가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신문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그는 서학서를 보고 천주가 우리들 모두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조물주임을 알았다고 말하고, 천주교는 참된 마음으로 천주를 섬기는 종교이며 중국의 경서에서 가르치는 충성과 효도도 천주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윤지충은 “죽은 사람에게 술이나 밥을 올려 제사지내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며, 혼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형체가 있는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혼은 덕으로써 음식물을 삼습니다”라고 오히려 유교적 체계와 가치관을 정면으로 공박했다.
또 윤지충은 “비록 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하지 않습니다”고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던 사회체제에 저항하였다. 이처럼 그가 유교가 요구하는 제례행위를 거부한 것은 곧 양반계층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이었고, 전통문화와 가치질서에 도전하는 패륜이었으며, 양반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된 것은 당연했다. 결국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기존의 사회와 정치체제에 대한 반항세력으로 몰아갔다.
윤지충은 모진 심문을 받아 살이 헤어지고 유혈이 낭자해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말끝마다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주의 가르침은 극형에 처해질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마침내 11월 8일 정조(正祖)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역적죄나 강상죄(綱常罪)를 적용하지 않고,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와 발총죄(發塚條)를 적용해 처형하도록 명했다.
사형 판결문이 전라감영에 하달되자 전라감사는 집행을 서둘렀다.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낯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군중에게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고, 권상연은 모진 태형으로 초죽음 상태였지만 “예수, 마리아”만 되뇌며 걸어갔다.
마침내 윤지충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참수 당하기 전 그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번 부르며 태연하게 형리의 칼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들의 시신은 9일 동안 방치되었는데 전혀 썩지도 않고 굳어지지도 않았으며, 목을 올려놓았던 말뚝과 죄상을 쓴 널빤지 위에 흐른 피도 겨울철인데도 조금도 엉기지 않고 흐른 그대로 있었다. 교우들 가운데 어떤 병자는 말뚝과 널빤지에 흐른 피를 씻은 물을 마시고 회복됐고, 어떤 이는 그들의 피가 적셔진 수건을 만지기만 했는데 즉시 건강이 회복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한편 윤지충은 옥중에서 진산 관아에 자수한 후 11월 7일 최후 진술까지의 일을 한문으로 기록하여 신자들에게 전했다. 후대에 압수된 초기 천주교인들의 서목에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초기 신자들은 그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이를 한글로 번역하고 여러번 필사하여 전하면서 애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기는 1839년 정하상이 지은 ‘상재상서’의 대본이 되었다.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인 가운데 처음으로 나름대로 확고한 논리체계를 지닌 공술기와 옥중수기를 남겨 천주신앙의 정당성을 증거했던 인물이며, 이후 수많은 신도들의 신심을 고취하고 격려한 ‘신앙의 수호자’였다. 나아가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박해인 진산(珍山)사건의 주동자로서 최초로 ‘순교자의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의 씨앗’이 되었다. 그의 열렬하고 의연한 신앙심과 죽음을 불사한 거룩한 순교정신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순교터에 전동 본당이 세워져 ‘순교 1번지’로 알려져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다.
/김 탁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