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고양”
강 기 덕
군대에서 일어난 이야기 중에 선임이 신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고양입니다 라고 대답하기에 재차 고향이 어디냐니까? 넵 고양입니다. 라고 대답해서 빳따를 맞았다는 유머가 생각난다.
고향과 고양이 발음이 비슷해서 생긴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내 고향은 경기도 고양시(옛 고양군)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결혼하고 부산으로 올 때까지 쭈욱 살았으니까 이웃집과 이웃에 살던 사람들 이름과 논둑 밭둑길과 큰 다리 작은 다리, 산, 고개, 이웃마을 지명도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작은 다리에서는 어릴 적 여름이면 또래가 모여서 다이빙도 하던 곳이다. 큰 다리는 높아서 다이빙은 엄두도 못 내고 냇물에서 시원하게 놀고 미꾸라지도 잡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살던 고양군 원당면 주교리는 능곡이 저 멀리 보이고 맑은 날은 행주강도 보였다. 능곡 장날이면 어른들은 장을 보러 가시곤 했었다. 빤히 보이는 곳이긴 해도 십리길이니 멀다면 멀다. 예전에는 능곡을 가려면 걸어서 가야만 했었다 장을 보러 갈 때는 무거운 곡식을 이고 가서 물건 값 대신 곡식을 주고 오기도 했었다.
아주 어릴 때 여덟 살 위 언니와 여섯 살 위 오빠를 따라 능곡으로 서커스 구경을 하러 간적이 있었다. 언니가 멀어서 다리 아프다며 나를 안 데리고 가기에 울고 떼를 쓰며 언니 오빠의 먼발치에서 울면서 따라 가는데 길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서 일하던 어떤 언니가 왜 우느냐고 소리를 꽥 질러서 나는 너무 놀라 울음을 그치고 능곡까지 따라 간 기억이 있다.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밭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고 소리를 질러 대던 그 언니 모습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다리가 아파도 참았다 울며불며 따라 갔는데 다리 아프다고 엄살 부리는 것은 어린 나이에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능곡까지 가서 언니 오빠와 서커스를 구경 하는데 너무 지루해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밖에 나와서 장난치며 언니 오빠 속을 썩이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이는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어느 날 행주 강에서 재첩을 잡는다고 언니가 언니친구들하고 간다고 해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강물이 위험해서 절대 안 된다고 언니가 데리고 가지 않아 어린 마음에 무척 서운 했었다. 그 후 행주 강이 오염으로 재첩을 잡을 수 없었기에 그때 못 따라 간 것이 두고두고 서운 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는 방물장수가 오면 물건 값 대신 집에서 농사지어 거둔 곡식을 대신 주기도 했는데 봄여름에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가을에 그 값을 곡식으로 주면 곡식을 받은 장수는 무거운 짐을 우리 집에 맡겨 놨다가 가져가기도 하고 집이 길옆이라서 이런 저런 사람들이 묵어가기도 했었다. 그 당시 6,25 로 집들이 대부분 불에 타서 없어지고 우리 집만 유일하게 폭격을 면해서 방도 몇 개 있었고 길가 집이라 행인이 빈번이 들락거렸다. 가설극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방을 빌리자고 하면 그냥 빌려 준다.
그 분들은 고맙다며 극장표를 몇 장 주면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세월은 변하고 TV도 극장도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가설극장도 인기가 시들해져 오지를 않았다. 영화도 상영 했었지만 연극하는 사람들도 와서 묵고 갔었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연극도 많이 봤다.
몇 년을 봐도 내용이 같아서 대사를 외울 정도였다. 당시에는 대사를 가림막 뒤에서 누군가 읽어 주면 배우들이 듣고 대사를 따라 하는데 관객도 다 들리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그래도 그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나날이 발전하는 시대에 밀려 다시는 구경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집 바로 옆 원당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낯선 또래들과 사귀면서 다른 동네도 많이 알게 되었는데 내가 사는 주교리 인근에 원당리, 성사리, 식사리, 신원리, 원흥리, 대장리등 다른 마을도 알게 되었다. 배다리는 우리 동네지만 윗배다리, 쇠기, 왕능골 ,성황당고개. 살쿠지, 삭은절, 독구지, 박자궁, 왕지산, 베라산... 정 깊은 지명들이 많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기억은 여기까지다. 내 고향 주교리舟橋里는 먼 옛날에 비가 많이 오면 행주 강이 넘쳐 우리 동네까지 물이 밀려와서 배가 다리가 되어 사람들이 배다리로 이동을 하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입학하기 전엔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학교에 가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3학년이 되었을 때 왕능골에서 온 명숙이를 알게 되어 제법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여럿이 어울려 명숙이네 집에 놀러 가서 하룻밤씩 자고 오기도 했었다. 명숙이는 맏이로 동생들이 많아서 매일 아기를 보는 착한 언니였다. 그 시절 왕능골에 살던 명숙이네 집에 놀러 갈 때는 작달 고개를 통해서 가게 되는데 그 작달 고개에는 고려장 무덤이 있다고 해서 무서움에 그 고개를 지나갈 때는 겁에 질려 앞만 보고 뛰어가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명숙이가 말하던 썩은 다리라고 하는 곳을 지나갈 때 도대체 그 다리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봤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썩은 다리는 다리가 아니고 그냥 지명이었는데 나는 무슨 썩은 다리인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지명이란 것을 알았고 지금도 그 썩은 다리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난다. 우리 학교에서는 봄, 가을에 잔디가 아주 고운 서삼능으로 소풍을 가곤 했었다.
그러나 서삼능은 거리가 멀어 걸어서 다녀오면 다리가 무척 아팠다. 집에 올적에는 중간지점인 쇠기라는 동네에서 쉬면서 이곳 쇠기가 우리 동네면 좋겠다고 중얼 거리곤 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유년의 추억으로 이젠 세월이 많이도 흘러 할머니가 된 명숙이와 나는 분당과 부산에서 카톡 대화로 끈끈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직업이 의사 선생님이셨다. 병원 건물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집 방 두 개를 사용하여 환자를 보기도 하셨는데 육이오 직전까지 방이 다섯 개는 되었다고 한다.
육이오 전쟁 통에 피난을 가시면서 약을 어디 숨길까 고민 하시던 아버지께서 땅을 파고 약을 묻으시고 흙 담벼락을 파내서 약상자를 넣고 다시 땜질해서 숨기고 피난을 가셨다고 하는데 피난 후 다시 와서 보니 다른 집들은 불타 없어지고 우리 집만 남아 있었는데 땅속에 묻었던 약 등을 대충 찾았지만 정말 귀한 약은 찾지를 못하셨다고 한다.
그 후 내가 여덟 살 되던 초등학교 1학년 몹시도 추운 겨울날 아버지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세월이 지난 후 담벼락이 낡아 허물어지게 되었는데 담장을 보수 하다가 그 속에서 아버지께서 생전에 찾지를 못했던 약이 나왔다. 어느 날은 김장을 해서 땅에 김장독을 묻으려고 오빠가 땅을 파다 삽에 약병이 깨져 나오기도 했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도 그 약들은 약효가 변함이 없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또한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육이오 때 피난 갔다 우리 집에 오니 다른 사람들이 집을 점거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집 주인이 집에 왔으니 방 두 개는 비워 줬지만 다른 사람들이 집을 구해 나갈 때까지 여러 가구가 함께 살며 어려움도 있었다고 들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너무 아프기만 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린다.
내가 기억하기엔 아버지는 방에 누워 계신적도 많고 기침을 심하게 하시고 왕진 가시다 되돌아 오신적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으로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슬슬 피한 기억이 난다. 큰오빠가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아버지께서 큰소리로 야단치실 때가 많았는데 그게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플 때면 주사를 놔주시곤 했는데 그것도 무서웠었다.
하지만 간혹 옛날얘기도 들려주시고 고양이랑 장난도 치시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분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거실 벽에는 오빠 언니들 보라고 이것저것 공부에 도움 되는 글과 그림을 붙여 놓으신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성적표를 받아 왔는데 “수”가 많았던 그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칭찬해 주신 아버지의 기억이 물기처럼 젖어온다 그 성적표에는 아버지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 도장이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이 될 줄이야...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삼능”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 집으로 오는 길이 너무 힘들어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에 작은 오빠가 마중을 나와서 나를 업고 집에 온 기억도 있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셨었는데 작은 오빠한테 마중을 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프신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해 주신 것은 막내 딸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이별이었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직도 겹겹이 나를 감싸고 있으리라...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 손길로 가꾸시던 노란국화와 붓꽃이 철따라 피었었는데 육십년이 지난 지금도 노란 국화를 보면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이웃집 사람들 그리고 철길과 큰 개울 작은 개울이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정겹던 시골 마을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도시화 되어 너무 변한 고향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살던 고향 “고양”은 천리 길인 부산에서 손자 손녀 여섯을 둔 할머니가 된 지금도 유년의 추억이 그립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