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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님 저작물> 1995년 - 의식혁명 (Power vs Force) 2001년 - 나의 눈 (The Eye of The I) 2003년 - 호모 스피리투스 (I: Reality and Subjectivity) 2005년 - 진실 대 거짓 (Truth vs Falsehood) 2006년 - 의식 수준을 넘어서 (Transcending the Levels of Consciousness) 2007년 -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 2008년 - 현대인의 의식 지도 (Reality, Spirituality and Modern Man) 2009년 - 치유와 회복 (Healing and Recovery) 2012년 - 놓아버림 (Letting Go) |
이제부터
스트레스, 알콜 중독, 여러가지 병, 우울, 두려움, 커다란 상실같은
인간의 다양한 문제들을 의식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의식지도를 되풀이해서 언급할 것이다.
특히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언급할텐데,
이는 자기치유와 관련해
의식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문제와 상관없이
의식지도 자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모든 문제에 의식지도를 적용했을때
이것이 어떤 효용과 의미를 지니는지 먼저 설명한다.
의식지도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수십년간의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만든
(10을 기본으로 하는) 지수급수 모델이다.
(즉 의식지도는 마음속 감정이라는)
다양한 에너지 장을 수치로 측정한 것이다
의식을 말할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이 에너지 장이다.
의식지도는 의식의 일반적인 장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처럼 의식의 장이 향하는 방향은 물론이고
그 힘까지 측정해서 보여준다.
200대인 용기 아래에 있는 장들은
아래로 향하고 용기 위의 장들은 위로 향한다.
에너지 장이 향하는 방향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정적인 방향의 에너지 장(200이하)은
삶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삶에 반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진리의 긍정적인 방향을 향하는 장들은
삶을 지지하고 보살펴준다.
지도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진리와의 합일에 가까워지며
수치가 높아질수록 에너지의 힘도 강해진다.
에너지 장의 수치는 0에서 시작되며,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상태는 600에서 1000에 이른다.
깨달음은
이원성과 개인적인 나와의
같다는 것을 초월한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지도에서
개인적인 나의 단계들은
우리가 나를(me) 이나 나 자신(my self)에 대해 말할때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나를이나 나자신은
지도의 맨 위에 있는 큰나와는 다른 것으로
작은 나(즉 에고)를 의미한다.
에너지 장의 오른편에는
각 단계와 관련되어 있는 감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오른쪽 맨끝은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지도의 왼편은
의식의 각 단계에서 개인이 신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나타낸다.
(200을 넘는) 보통사람이라면
근육테스트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이 수치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들어
누군가 두손가락으로 여러분의 팔을 누르면서
"두려움이 50을 넘나요?
아니면 60? 70? 80? 90? 100을 넘나요? 라고 묻는다.
그러면 팔의 힘이 100에서 약해진다.
수십년 동안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측정법의 타당성을 입증해보였다.
덕분에 근육테스트는
임상은 물론 연구에서도 실제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지도 맨 아래는
수치심(20)과 죄책감30의 에너지 장이 있다.
이 단계에 동반되는 감정은 자기혐오이며
의식에서는 자기파괴의 과정이 진행된다.
이 에너지 장과 관련된 세계관은 죄와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의 신은
궁극적인 잠재적 파괴자로서 인간에게까지 분노를 느끼고
인간이 지닌 불멸의 영혼을 지옥으로 영원히 던져 버린다.
(구약중에 분노한 신은 이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을 지은저자는 의식수준이 2-30수준인 것이다)
신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면 사실상 악마가 필요없기 때문에
신에 대한 관점에서 악마를 넣지 않았다.
이런 인식자체가 신을 악마처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수동적인 자살의 문제로 다가온다.
무의식적인 죄의식과 자기혐오때문이다.
자살은 자신을 돌보지 않거나
마주 달려오는 버스를 피하지 않거나
차를 타고 구르거나
돌발적인 약물을 과다 복용하거나
위험성이 큰 행동을 저지르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무감정 50도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다.
무감정과 관련된 감정은 무기력과 절망, 포기, 우울이다.
이런 감정들은 에너지를 상실한 결과다.
무감정은 세계를 희망없는 곳으로 보고
신이 죽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수많은 회의론자들과 무신론자, 철학자들은
실재를 부정하는 특정한 입장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변호해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신이 죽었다거나
삶의 조건과 인간이 절망적이라는 생각은
삶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에 파괴적이라고 할수 있다.
무감정은
아들이전사했다는 오보를 받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면서
앞뒤로 움직이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파와도 같다.
대륙은 물론 아대륙까지 세계의 많은 지역이 무감정상태에 빠져있다.
이곳 사람들은 희망과 기회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다.
세계인구의 약 삼분의 일이
두려움과 슬픔, 무감정의 하위단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노파의 머리속에는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의식지도에 "두뇌의 화학작용" 항목도 첨가할 수 있다.
무감정의 에너지 장이 신경전달물질을 이동시켜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노파가 울면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노파의 상태는 슬픔(75)이라는 에너지 장으로 상승한다.
이 에너지 장의 정서적인 특징은 후회와 상실감, 그리고 낙담이다.
이때 의식에서는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과정이 일어난다.
우리는 슬픔때문에 삶의 의지와 영혼, 생기를 상실한다.
삶의 의지를 상실하면 우주가 주는 에너지를 받지 못해 결국 우울증에 빠진다.
슬픔에 빠진 사람은 세계를 슬픈 곳으로 보고
신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움(100)도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다.
그러나 점수가 100이기 때문에
이 상태는 에너지가 좀더 크다.
두려움이 있을때에는 더욱 멀리 달릴 수 있다.
두려움은 전세계에서 넓은 범위를 지배하고 모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광고업체들은 두려움을 이용해 제품을 팔아먹는다.
슬픔은 과거와 연관이 있지만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두려움은 미래와 관련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걱정이나 불안, 공포 등의 형태로
일상에서 두려움을 경험한다.
이때 의식에서는 기가 꺾이는 과정이 일어난다.
동물들이 겁먹을때 움츠러드는 것도 한 예다.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질문을 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덩달아 몸을 움츠리며 그 학생뒤에 숨던 장면이 기억하는가?
두려움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에너지가 큰 감정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면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는 사실 유익하게 작용할수도 있다.
미리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지도가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위쪽의 에너지 장을 직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우울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울의 저변에 깔린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나는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렸어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용기 아래의 단계들은 모두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갖고 있다.
이런 에너지 장들은 전부
행복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생존을 외부의 무언가에 의존하면
힘의 원천을 외부에 투사해 결국 나약함과 피해의식, 무력감에 빠진다.
우울의 저변에는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슬픔은 상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면 우울증을 빠르게 극복할 수 있다.
의식이 두려움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또 두려움을 소진시켜 우울한 감정이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
두려움의 에너지 장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 구체적인 방법도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두려움 위의 에너지 장은 '욕망(125)"이다.
욕망 역시 부정적인 에너지 장인데 일상에서는 갈망으로 경험한다.
열망과 갈망의 일반적인 느낌들은 중독이라는 에너지 장의 일부이기 때문에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형태로 변할 수 있다.
의식에서는 노예화의 과정이 일어난다.
욕망의 지배를 받고 행복의 근원이 외부에 있다고 여긴다.
광고는 이러한 심리를 이용한다.
무의식적인 연결을 통해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다.
요컨대 광고는 욕망을 창조하는
무의식의 원형적인 무언가를 기호화한 것이다.
욕망은 전생애를 지배할 수 있다.
성공이나 명성, 부나 유명세, 특별한 관계처럼
행복을 줄 듯이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원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바람과 갈망은 충족에 불과하다.
충족이 불가능한 에너지 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더욱 많은 욕망을 창조해낸다.
하지만 이 에너지 장은
잠재력과 내적인 목적을 실현하려는 동기나 의도처럼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반면에 목적을 내면화하는데 실패하면 좌절과 분노가 일어난다.
분노(150)는 큰 에너지를 동반한다.
화난 사람이 이 에너지를 파괴적으로 쓰는 대신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면 진보를 불러올 수 있다.
미디어 인터넷과 텔레비전 덕분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목격하게 된 제 3세계 국민은
욕망이 불이 붙으면서 좌절감과 분노를 키웠다.
극에 달한 감정들은 총체적인 사회운동과 입법부의 개혁,
사회의 발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데 이용되었다.
이처럼 분노는 결의와 결단력을 강화하기도 한다.
매일의 삶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는 분노는 보통 미움의 형태로 나타난다.
더 심각하게 발전하면 분노는 증오나 불만, 불평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살인이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때 의식에서는 일종의 확장과정이 진행된다.
동물이 화났을때 몸을 부풀리는 것이 한 예다.
고양이도 화가 나면 보통때보다 두배 가까이
꼬리를 부풀려 위압적인 존재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런 확장의 생물학적인 목적은 적으로 보이는 상대를 위협하려하는 것이다.
분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활용해서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면 자부심의 단계로 상승할 수 있다.
자부심(175)은 하위 단계들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적은 얕보면 반드시 패한다라는 경적필패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자부심이 상당히 취약한 정서상태임을 보여주는 유명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다.
그러나 낮은 단계의 의식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수도 있다.
자부심은 일상에서 오만이나 경멸,냉소 등으로 나타난다.
자부심의 부정적인 면은 부정이며,
의식속에서 팽창의 과정을 일으킨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거만하고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며 배우려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며 마음이 닫혀있다.
이런 의식상태는 편중된 견해를 갖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올바른 것을 끊임없이 변호한다.
세상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부심의 근원은 저변의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면 자부심도 내려놓을 수 있다.
부정적인 장들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혼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장이 지배하기만 해도 사실상 모든 장들이 서로를 키워준다.
그래서
분노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고,
자부심으로 인해 분노를 느끼며,
슬픔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처럼 모두가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정서적인 혼란은 대개 모든 부정적 에너지 장의 결합에서 생겨난다.
부정적 에너지 장의 극복과 이에 필요한 기법은
"의식수준을 넘어서"에서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부정적인 에너지 장들은
에고의 나르시즘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정서적 결과다.
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들을 기꺼이 내려놓으면
진정한 힘의 첫단계인 용기(200)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용기에 어마어마한 힘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미합중국을 안정시킨 것도,
온갖 위대한 산업체를 만들어낸 것도, 달 탐사의 발판이 된 것도 모두 용기였다.
해병대원들도 자부심의 단계에서 시작해
가장 안정적인 용기의 단계로 올라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큰 차이이긴 하지만 단순히 25점이라는 수치가 증가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에너지 장이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거짓보다는 진실에,
일시적인 이득보다는 진실성에 가치를 두게 됐기때문이다.
200이상의 단계에서는 더이상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에너지장이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장을 안테나로 본다면
용기 아래에서는 안테나가 부정적인 것에 맞춰져 있어서
고난을 에너지 장속으로 끌어당긴다.
200단계에서는 에너지가 긍정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우주로부터 더이상 부정성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부터 전혀 다른 조건속에 놓인다.
상황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스리며,
처음으로 적합한 존재가 된다.
용기의 단계에서 약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에너지들을 처리할 힘이 있다.
힘을 부여받는 중요한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힘을 다시 얻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회복과정에서 확실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협회 회원들의 회복과정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인 회복을 위해 거쳐야 할 첫단계와
모든 기본적인 과정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근육테스트에서 약한 반응을 보이기는 커녕 갑자기 강한 힘을 드러낸다.
하지만 자부심에서 생긴 오만을 버려도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용기의 단계에 있는 사람도 상사에게 연봉인상을 요구할때는 긴장할 수 있다.
분노를 느낄수도 있고, 연봉인상이 가망없는 일이라고 체념할수도 있다.
또 거만하게 굴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용기의 단계에 이르면
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힘이 충분해진다.
문제를 직시하고 이겨내 세상에서 효율적으로 제 몫을 한다.
다음의 주요단계는 중립(250)이다.
이 단계의 에너지 장은 긍정적이며 진실과 훨씬 크게 부합한다.
중립단계의 주요 감정은 자기 신뢰다.
예를들어 취직을 하건 못하건 괜찮다라고 생각한다.
이때 의식에서는 풀려나는 과정이 진행된다.
특정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더 이상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훨씬 더 많은 힘을 갖게 되며 혐오나 열망에 지배당하지도 않는다.
이 단계의 좋은 면은 삶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반면에 무애착의 부정적인 결과로 냉담해지거나 권태를 느낄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감정들 때문에 더이상 힘들어 하지 않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럼으로써 훨씬 강력한 상태에 존재한다.
또 세상을 만족스러운 곳으로 보며 신도 자유를 주는 존재로 여긴다.
중립단계의 좋은 점은 저항을 내려놓음으로써 더욱 큰 힘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발성의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자발성(310)의 단계는 훨씬 강력하다.
이 단계의 감정은 긍정적인 생각을 동반한다.
삶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결합하고 공감하며 참여하고 어울린다.
이단계에서는 목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중립단계의 사람에게 오늘 밤 영화를 보러가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글쎄 가도 좋고 안가도 좋아" 열정과 활력이 부족하고 풍요와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집착이나 두려움, 비통, 무감정, 분노에 빠져 있는 사람보다 훨씬 편안한 상태임은 확실하다.
반면에 자발적인 사람은 활기와 목적을 가지며 긍정하고 첨여하고 공감한다.
진정한 힘은 자발성에서 시작한다. 저항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다음은 수용(350)의 단계다.
수용은 능력과 적합성,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에너지 장이다.
의식의 변화도 이 단계에서 시작된다.
이런 변화는 행복의 원천이 자신이며
자신안에 그 힘이 있음을 재인식하는 것과 관련있다.
이 단계의 사람에게는 큰 기업체에서 믿고 일을 맡긴다.
현실적인데다
자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스스로 인정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정을 의미하는 자부심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들의 약함과 단점들을 고려할 줄 안다.
이 단계의 직장인이라면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아시다시피 아르헨티나에 있는 그 직원하고 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습니다.
제이크를 보내는 편이 더 나을거에요.
자신의 한계를 알려주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인정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 휘말리지 않음으로써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한다.
변화는 자신의 힘을 다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자신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창조하리라는 것을 안다.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공익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릭 웨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도 이 단계를 잘 설명해준다.
이 단계에서 주어지는 기회들을 활용하면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위치나 존재방식, 자신의 힘을 다시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고 나면 태도가 대체로 느긋해지기 때문에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을 다시 인정하고
에너지를 우주속으로 되돌려보내는 일을 지속하다보면
이성(400)의 에너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성, 논리, 지력은 인류의 주요한 진화적 특성이다.
이 특성들은 상징적인 생각과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지성의 산물이다.
이 단계는 관찰가능한 세계 및 그 흐름들과 조화를 이루는 정비된 체계를 나타낸다.
그래서
욕망과 혐오를 포함한 감정들을
비인격적인 사실들에 비해 의미가 작은 것으로 경시한다.
이성은 자기애적, 감정적 왜곡의 한계들을 초월해 준다.
이런 왜곡은 어디에나 영향을 미치는 호불호나
끊임없는 갈망같은 개인적 정서와 유치함의 특징이다.
이런 정서가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잡음들을 잠재우면
차분한 계산도 가능해지고, 일을 처리할때도 주로 사실과 확실한 자료들에 근거한다.
추상적인 상징들과 이성간의 연관성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정보들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고 분류하고 깨닫고 흡수하는 능력도 생겨난다.
지력과 이성은 의미와 가치, 중요성을 해석하는데도 필요하다.
이때 해석을 돕는 것이 바로 "철학"과
철학의 지류인 형이상학, 인식론, 존재론, 과학이다.
지력의 진화사를 다룬 책으로
그레이트 북스(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가 있다.
이 책을 보면 고대 그리스의 고전주의 시대에
지력의 진화가 정점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종교개혁화 그 영향으로 지력이 다시 부활하고 현대과학이 태동했다.
철학적 태만을 수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성의 진실성없는 조작을 나타낸다.
최근 몇십년 동안 학계에 나타나고 있는
철학의 수준격하와 상대주의적 이론(190)들의 등장,
이로 인한 사회적 불화 등이 '수사'의 좋은 예다.
가장 순수한 단계의 이성과 지력은 현실검증력을 증가시킨다.
또 진실과 진실을 분별하는 수단을 객관적으로 존중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상태에서 한층 더 진화하면
진리 자체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종국에는 500점의 의식수준(사랑)에서
패러다임의 비약을 경험한다.
이성이 선형적이고 객관적인 반면
사랑은 비선형적이고 주관적인 에너지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이성은 정신(두뇌)의 문제이며
사랑은 존재(심장)의 문제라고들 한다.
사랑이 싹틀때 그 사랑은 선별적이고 조건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은
모든 생명과 관계 맺는 하나의 태도와 생활방식으로 차츰 변화한다.
사랑은 큰나안에서 뿜어져 나오며 행복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생명을 부양하고 지지해주며, 드러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엔돌핀의 분비로 두뇌의 신경전달물질들도 변한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사랑의 에너지 장이 활성화시켜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백만의 뉴런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재 과학자들은 엔돌핀의 모든 활동영역을 연구하고 있다. 예컨대
옥시토신은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 사회화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무조건적 사랑(540)은 치유의 에너지 장이다.
12단계 프로그램 그룹들의 에너지 장도 이와같다.
이 단계에서는 생기의 에너지 장이 강렬해지기 때문에
이 단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들이 에너지 장 자체에 기운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식의 맨 아래 단계에서는
서로에게 실패를 불러들일게 분명한 부정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이런 상황과 연관있는 사람들도 실패를 경험한다.
또 이들은 실패의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사방의 문이 닫혀 있어, 이쪽으로 가도 실패할 거야.
이런 사람들은 삶을 손해가 뻔한 사업처럼 여긴다.
한편 중간점수대의 사람들은
삶을 이기지 않으면 지는 문제로 본다.
자부심과 극단적인 분노로 인해 세상을 경쟁과 갈등의 장소,
이기지 못하면 지는 곳으로 본다.
내가 이기고 너는 질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보복을 끊임없이 두려워한다.
이 게임에서 이겨도 영원히 이기는 것은 아니야.
언젠가는 그가 친구들을 데리고 나를 찾으러 올테니까.
그러니까 한시도 마음을 놓아선 안돼
500단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으로 삶을 개념화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자신이 이기면 가족이나 회사 등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가 돈을 많이 벌수록 직원들도 좋다.
회사들도 500단계의 사람들을 채용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자리를 찾을 필요도, 초대장이나 관계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고용주들이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희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마케팅 담장부사장으로 오시는게 어떨까요?
이렇게 고용주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높은 단계의 사람들을 찾는다.
540대를 향해 가면서 내면의 기쁨과 고요, 내적인 이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에너지 장에서 우리는 영원히 현존하는 단단한 무언가와 연결된다. 의
식의 변형이 일어나고 내면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며 연민의 마음도 열린다.
560단계에 이르면 황홀경을 경험한다.
황홀경은 내면의 정교한 이해와 의식의 변형단계이며,
600에 가까워질수록 빛비춤의 상태로 우리를 인도한다.
연민의 에너지장은 선택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존재방식에 헌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이나
신학적이고영적인 체계가 없어도 연민은 가능하다.
사랑을 향한 이런 헌신은 온갖 표현을 통해 생명을 부양하고 지지해준다.
만물 속에서 신성을 보고 더욱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모든 생명이 완벽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연민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드러남과 변형의 단계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이로 인해 자각이 일어나고 자신과 또 다른 자신 사이의 분리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하나가 되고 생각이 아닌 존재방식으로서의 이해가 싹튼다.
500대후반에 경험하는 드러남의 단계에서는 변형과 연민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이 변형과 연민은 황홀경과 600에 가까운 상태로 우리를 인도한다.
기쁨의 상태, 빛비춤과 깨달음이 시작되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태들은 흔히 빛의 느낌을 동반한다.
가령 익명의 알콜 중독자 협회의 빌 윌슨은 영적인 체험의 순간
무한한 현존에 의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600의 에너지 장에 다가간 것이다.
이 빛은 12단계 프로그램의 형태를 띠고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익명의 알콜중독자 협회는 이 프로그램으로 수백만명의 사람을 회복시켰다.
지복의 에너지 장은 중독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장이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연히 삼매에 빠진 사람은
600이나 그 이상에 도달할때 초월적인 상태로 들어간다.
보통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임사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600너머의 장들과 고차원적인 자신을 경험한다.
이 단계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혼의 스승들이 존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단계들에서 계속 올라가면 무한에 이른다.
크리슈나와 그리스도, 부처의 에너지 장은 1000이며,
이 장은 무한까지 계속이어져 있다.
이 단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아바타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3년동안 아바타로서 복음을 전했다.
이를 통해 이후 수천년 동안 인류의 의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삶을 수직은 물론 수평의 차원에서도 변화시킨 것이다.
두차원 모두 엄청난 힘을 지닌 장이다.
의식수준과 사회적 문제의 상관관계
의식수준 | 비고용률 | 빈곤율 | 행복률 | 범죄율 |
600이상 | 0% | 0% | 100% | 0% |
500-600 | 0% | 0% | 98% | 0.5% |
400-500 | 2% | 0.5% | 70% | 2% |
300-400 | 7% | 1.0% | 50% | 5% |
200-300 | 8% | 1.5% | 40% | 9.0% |
100-200 | 50% | 22.0% | 15% | 50% |
50-100 | 75% | 40.0% | 2% | 91.0% |
50이하 | 97% | 65% | 0% | 98% |
상대적으로 낮은 에너지 장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 같다.
구름을 거둬 내면 언제나 빛나는 태양을 체험한다.
그러나 중독에 바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름을 거둬냈기 때문에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독증을 다룬 장에서 더욱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어떤 것에든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a, b, c가 선형적으로 유발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좌뇌형의 사고방식과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제거하는 것이
영적인 작업의 온전한 목적이다.
다시 말해 큰 나의 빛을 체험할 수 있게
구름을 거둬 내는 것이 영적인 작업의 목표인 것이다.
에너지 장들은 우리의 지각을 지배할 정도로 아주 강력하다.
이 에너지 장은
우리가 세계를 내다보는 문과도 같다.
흔히들 이 세상은 거울들의 세계에 불과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인식과 경험의 형태로 우리를 되비추는
우리자신의 에너지 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식이나 세계관,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런 다양한 에너지 장에서 나온다.
처음에 말했듯이
자기 혐오와 파괴적인 에너지의 장에서 죄책감(30)에 사로잡혀 있으면,
세상을 고통과 죄가 가득한 곳으로 본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들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주변에서 고통만을 목격한다.
신문을 펼쳐들고도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만을 확인한다.
가망없음과 절망의 에너지 장(50)에 있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희망없는 곳으로 본다.
신문을 펼치면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와 끊임없는 전쟁, 빈곤, 범죄들을 확인한다.
실제로 지각과 시각, 청각 등 모든 감각을 통해 가망없는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 신은 죽었다고 생각한다.
슬픔과 후회, 상실감, 낙담 등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삶을 향한 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거리를 걸을때도 세상을 슬프게 보고 실제로 그렇게 경험한다.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기때문에 거리에서 아이나 노인들을 마주쳐도 슬프기 그지없다라고 느낀다. 건물들을 바라보면서도 신문에서 여러소식들을 확인하면서도 삶이 너무나 슬프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모든 것에 색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색안경을 쓰고 있어서 모든 것을 색안경과 같은 색으로 보는 상태와 같다.
두려움에 지배받는 사람들은 세상이 위험하고 위협적이며 언제나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고 감지한다. 도처에 강도같은 위협적인 존재들이 있다고 믿으며 침대밑에 강간범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읽을때도 위험과 위기로 점철된 무서운 소식만을 확인한다. 그래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며, 차를 차고 안에 처박아 두고 차고의 문을 잠근다. (두려움은 신중함처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경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에 강도가 들었을때 경찰이 어디 있을지 알수없고, 도시의 반대편 끝에 있어서 도움이 전혀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 애써도 두려움의 에너지는 누그러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에너지 장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두려움위에는 욕망의 에너지 장(125)이 있다.
욕망의 에너지 장은 끊임없는 결핍감이 지배하는 불만스러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 장에 지배받는 사람들은 태양신경총, 고착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거리를 걷기만 해도 갖고 싶은 온갖것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탐나는 차, 예쁜 물건들, 지위나 위치, 살아보고 싶은 건물에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이런 끝없는 욕망과 갈망, 많은 돈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좌절하고 만다. 5000만 달러라는 거금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더 강한 힘을 향한 욕망과 허기는 결코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의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좌절하고 분노한다.
분노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너와 내가 대립하는 경쟁적인 곳 갈등과 투쟁이 지배하는 곳으로 본다.
숲에 가서도 큰 나무들과 작은 나무들이 햇살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가해자, 희생자에 대한 정치사회적 시각의 기본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있다.
이런 생각은 경쟁같은 것이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영역에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이런 사람은 투쟁과 갈등의 가능성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 살며
모든 것을 협력이 아닌 경쟁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자부심의 단계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사회적 계급이 지배하는 곳으로 본다.
그래서 거리를 걸을때도 명품 신발이나 옷의브랜드,
상대방의 지위, 갖고 싶은 차, 살고 싶은 집같은 것들을 눈여겨 본다.
모든 것을 신분의 관점에서 분류하며,
자신의 사회적이미지를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할지에 사로잡힌다.
진실과 용기의 단계(200)에 이르면 세상은 이제 기회의 장소처럼 보인다.
세상을 성장과 확장을 위한 신나는 도전의 장소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신문을 읽으면서도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들을 본다.
도전을 직면하거나 이겨내고 그 과정에서 배움의 기회들을 확인한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삶에 흥미를 느낀다.
중립의 단계(250)에서는 삶과 세상이 만족스럽다.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저 만족스러울 뿐이다. 세상을 느긋한 시각으로 보게 되므로 이렇게 말한다.
"음!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삼라만상이 돌아가는 이치야. 궁극의 어떤 목적을 섬기는 거지"
자발성의 단계(310)로 올라간 사람들은 세상을 호의적인 곳으로 경험한다.
이들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무수한 호의를 목격하고, 무엇을 갖고 있건 우주가 호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조화롭고 자애로우며 언제나 힘을 준다.
수용의 단계(350)로 올라간 사람들은 삶의 조화로움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또한 동시성을 깨닫고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함께 흐르는지 이해한다.
또 이들의 에너지 장에 협동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협력적인 곳으로 경험한다.
이런 경험은 열정(390)과 사랑(500)의 단계로 올라가는데 도움이 된다.
더불어 우주속에서 따뜻한 지지를 경험하고 우주속에 사랑의 에너지가 무한히 존재함을 느끼게 해준다. 35
빛비춤의 상태(600 이상)는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삶의 완전함,
창조의 절대적인 완벽성을 드러내주고,
모든 생명의 본질과 신성한 전수를 실제로 경험하게 해주며,
이 본질이 지닌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도 보여준다.
그것은
오감을 즐겁게 하는 미학적인 아름다움인 동시에 창조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이 단계의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이는 골목을 걸을때도
삶의 활력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삶의 믿을 수 없는 완벽함을 경험한다.
그래서 모든 삶이 활짝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불완전성이 아닌 과정을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우주가 완벽하게 펼쳐지고 있다고 본다.
신에 대한 시각과 묘사도
다양한 에너지 장과 연관되어 있다.
무감정과 절망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은
신을 무심한 존재로 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신을 믿기는 하는데,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것 같아.
난 벌레같이 무가치한존재거든.
너무 하찮아서 신도 나를 무시하기만 해라고 생각한다.
또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은
벌을 내리는 두렵고 끔찍한 신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좌절감속에 사는 사람은 신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신이 끊임없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신을 비협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한편 분노속에 사는 사람은
신을 복수와 징벌을 일삼는 존재로 본다.
분노와 복수는 함께 붙어다니기 때문에 인간을 증오하며
지옥에 던져 넣겠다고 협박하는 악마적인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신을 궁극적인 파괴자, 처벌자, 복수심과 질투에 가득찬 존재로 여긴다.
발작적으로 질투심에 불타기도 하며,
죄인들을 증오하고 파괴성이라는 극단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는 존재로
신을 의인화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자부심의 단계로 올라가면
부풀려진 에고의 오만으로 두가지 성향이 나타난다.
한편에는 무신론자가 있고,
균형을 잃은 다른 극단에는 괴팍한 광신자가 있다.
진실의 차원인 용기로 올라가면
신은 주로 의문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진실의 단계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실 난 신을 잘 몰라.
내가 아는 신은 그동안 읽고 듣거나
수많은 종교적 스승들이 가르쳐준 내용들이 만든 소문같은 것인지도 몰라.
다른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다른 사람들의 경험인 거지.
증인대에 서면 신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거야"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내적인 경험과 이해가 만들어 낸 신 안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중립의 단계에서는
만족스러운 세계를 경험하고, 신도 자유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처벌하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부정적인 신같은 건 없음을 깨닫는다.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확장과 탐험, 되어감을 허용하고
잠재력을 실현하게 해주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의 의미로 신을 받아들인다.
자발성이라는 호의적인 단계에서는
믿음직하고 희망적이며 긍정적이고
간혹 도움을 주기도 하는 존재로 신을 경험한다.
의식지도의 아랫부분에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이 단계에서는 솔직함과 자유를 받아들이며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 단계의 사람은 삶을 조화로운 것으로 경험하고
신도 더없이 자애로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신을 만나며,
언제나 현존하는 신의 사랑이 행복과 삶의 근원임을 안다.
기쁨의 단계로 올라가면
아름다움과 완전성이
신의 일체성과 통일성 속에서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신성한 본질임을 자각하면서
지도의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이때의 신은 존재, 존재성, 실제, 진리, 존재의 영원한 근원이다.
이 단계에서는 개인의 영적인 작업과 진보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길과 바탕을 제시해주는 맥락을 지닐 수 있다.
또 자아라는
커다란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방법과
치유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연민의 에너지 장은 540에 있으며,
이 단계의 사람들은 너그럽고 자애롭다.
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학생들은
흔히 400대의 단계를 완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단계에서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지식과 헌신적인 배움을 얻는다.
그런 후에는 500대에 이르기 위해서 습득한 원리들을 실행에 옮긴다.
기적수업이나 12단계 프로그램 그룹같은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사랑의 능력을 완성하는 일에 전념하기도 한다.
이들은 상승을 통해 에고라 불리는 것을 초월하고
돈과 부, 권력, 성욕, 세속적인 성공 등에 대한 집착도 버린다.
요약하자면 의식지도의 하위단계는 소유의 단계다.
소유물을 중시하고, 이 소유에서도 지위가 파생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타인이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어하며,
가진 것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
지위의 중간은 행위의 세계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타인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지,
타인의 입장과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들에게 소유는 더이상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낮은단계에서는 소유를 갈망하고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과정에서 발전을 거듭할수록 소유는 더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두가지 작업을 갖고 일주일 내내 일하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가질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이상 소유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지도의 맨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소유나 행위가 아닌 존재의 차원으로 옮겨간다.
타인들은 이제 이들의 존재를 보고 이들을 알아본다.
존재 자체야말로 이들이 자신을 알리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는 이유도 이들의 존재때문이며,
이들이 갖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도 이런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데 실제로 이들의 직업조차 모른다.
이런 인식을 활용하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편협한 자아를 치유하는 길은
옳지 않으면 틀린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편협한 자아를 우리의 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 사랑과 연민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어린아이같은 본질적인 순수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먼저 ①어린아이같은 의식의 순수성을 보고
그 다음에는② 이 위에 덧입혀진 프로그램을 본다.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은 사랑과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없이 혐오스러워보이는 사람의 내면에서도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마음을 연민의 눈으로 보면
자아안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순수와 만난다.
그리고 이런 사랑과 연민이 우리의 자아를 치유해준다.
자신과 타인들의 됨됨이를 사랑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비난하는 대신
"당시에는 그게 타당한 것 같았어"라고 말하게 된다.
이를테면 분노와 화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음 당시에는 화를 낼수밖에 없었어"라고 생각한다.
미움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삶에 그토록 열의를 쏟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노하거나 증오를 느낄 정도로
삶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감각의 하위단계에 눌러앉는다.
용서와 연민의 관점에서 인간성을 바라보면
우리의 인간성도 우리의 위대성으로 사랑하고 품어올 수 있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우리의 편협함을 받아들이고
이해와 연민을 통해 그 편협함을 치유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매우 강력한 치유의 에너지 장이 우리에게서 퍼져나간다.
연민과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때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의 어떤 부분을 용서하면,
그러한 부분이 우리안에서도 용서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도 사라진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색깔이 전혀 다른 색안경을 쓴 것처럼 세계가 이전과 달라보이면서
완전히 다른 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의식지도의 목적은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맥락을 창조해서
저절로 열리는 완전히 새로운 길들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치유하는 능력과 의도를 지닐 수 있으며
진실을 깨달으면서 앞으로 나가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력도 실현하게 된다.
다음페이지에 나오는 "두뇌의 기능과 생리학적 지표"는
의식의 단계가 두뇌의 생리현상과 이
에 수반하는 신경전달물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요한 점은 200이상에서는
엔도르핀이 분비돼 즐거움과 행복의 감정이 동반되지만
200아래에서는
아드레날린과 동물의 본능적인 생존 반응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200이상의 의식단계들은 행복한 감정들로 명명할 수 있다.
영적 에너지의 발생과 궁극적인 우세를 알려주는 자애로운 감정들이기 때문이다.
<의식지도 끝>
첫댓글 죄책감과 수치심에 동반된 감정 들
자기혐오, 자기비하, 죄와 고통 가득한 곳
무감정 수반 감정들
무기력, 절망, 포기, 우울
회의론자 무신론자 실재를 부정하는 철학자들
슬품의 동반 감정
후회, 상실 낙담
우울증
모두 과거와 관련이 된다.
두려움 동반 감정
걱정 불안 공포
모두 미래와 관련이 된다.
욕망의 감정
갈망과 중독
충족(밑빠진 독과 같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구이다)
욕망의 반대편 감정에는 혐오가 있다.
분노의 수반 감정
미움 증오 불평 불만
자부심의 수반 감정
오면 경멸 냉소 거만 편중된 견해(자신만이 옳음)
용기의 기본과제
진실을 인정하는 것
중립의 감정
자기신뢰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
자발성의 감정
솔선수범,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인 참여
수용의 감정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 휘말리지 않음
자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알고 적절히 대처
이성이 감정
현재의 과학이 낳은 형상의 최고 단계로서 지략임
사랑의 감정
사랑은 큰나에서 뿜어져 나오며 행복의 표현
무조건적인 사랑의 감정
치유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