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 그리고 나
고등학교 입학후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 시절 동급생 십여명이 동아리 모임을 만들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에 장래 무엇이 될것인가 하는 포부를 토론하는 기회가 있었다. 남들은 꿈같은 프로젝트를 그리는데 비해 나는 집안에서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대부분 같은 중학을 졸업한 동료회원들도 나의 발표에는 별로 주의를 집중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너는 의과대학 갈텐데 뭐 말 할 것이 있느냐 그냥 넘어 가자는 것을 한쪽에서 그래도 들어보자 하여 겨우 발언의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겄으로 기억한다. 물론 의사가되어 가업을 이을 것이며 마흔이 되면 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물리학을 공부해 보겠다고. 어린 생각에 순수과학에 대한 욕심은 있었던 것 같았다. 십육세 소년에게 마흔은 아득하게만 느껴졌건만 그 나이가 넘어 쉰을 바라보는 지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 세월이 두 번이나 지나서야 내가 어찌하여 이 길을 택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본다.
개업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환자가 지출한 의료비로 분유값부터 대학등록금까지먹고, 쓰고, 배우고 자랐으니 시냈물이 바다에 이르듯 자연스럽게 별 작심의 결정도 없이 이 길을 온 것인가?
배냇짓을 할 때부터 내아버지의 진찰실은 나의 놀이터였고, 책가방을 들고 등교 할 때도 대기실에서 지나치는 환자분들은 당연히 의업을 계승해야지 하는 말씀을 덕담처럼 빼지않고들 했다. 그래도 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르고 속옷까지 흠뻑 적시듯 나를 이 길로 몰아낸 잔물결 같은 기억들이 내앞뒤를 차곡이 쌓으며 떠오른다.
40년 전 환자 앞에서 의사의 위상은 취학전 어린아이의 눈에도 괜찮아 보였다. 초등학교 초년생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온 할머니는 학교의 선생님 말씀을 순종하듯 병원에선 의사 선생님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고 계도하던 모습이며, 아침산책에 선친을 따라 나서면 동네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대문시장의 모든분들이 정말 반갑게 인사하던 것, 명절이면 계란꾸러미며 사과궤짝,소갈비짝 같은 그 당시의 대단한 선물들이 지하실 광을 꽉 채웠다. 아버지께서는 누구에게 선물하는 것 못봤는데 그렇게 받기만해도 되는 것인지, 아뭏튼 고맙다는 인사오는 사람이 많으니 보기에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모가 배가 아파서 우리집에 입원했다가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쓸개를 떼어 내는 수술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대학병원이라는 곳을 구경했다. 지금 생각하면 60년대의 초라한 대학병원 모습인데, 아버님께서는 세브란스가 크게 잘 지었는데 촌구석(신촌)으로 옮겨서 환자들이 갈지 모르겠다면서 당신 대학시절에는 서울역에 비해 이곳원남동은 변두리 외진 곳이란 생각이었는데 하셨다. 신촌에 옮겨 간 세브란스병원은 필자가 입학해서 처음구경했으니 초등학교때 가 보았던 그 당시의 대학병원이 그 규모나 권위면에서 어린 마음을 압도했고 이런 곳에서 한 번 의사노릇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기억 외에도 당시 어려운 중에 의과대학 다니던 팔촌형님, 종로에서 산부인과 하시던 고모,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동대문 밖에서 개업하시던 작은아버지 등 여러분이 계셔서 가내외 제반사로 집안 식구들 모이면 무슨 의사회 하는것 같았으니 중학졸업 이전에 이미 집안 분위기가 나의 갈 길을 그어 놓은것 같다.
그렇지만 선친께선 한 번도 내게 의사가 됬었으면 하는 말씀을 직접 하신 적이 없다. "어느 직업인들 안 그렇겠는가만 본인이 싫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시며 "나는 다른 재주가 없어 의원 노릇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야. 그래도 개업할 때마다 찾아주는 환자가 많아 다행이었다." 라며 그 때는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말씀을 종종 하셨다. 단조로운 진찰실 지키기에 무료함을 어린 아들과의 대화로 메우시기도 하시며 언젠가 당신께서 의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경위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오 형제씩이나 되는 살림인지라 할머니께서 남달리 근면하셨어도 넉넉할 수가 없었고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진학을 포기하고 소정의 자격시험을 거쳐 소학교(초등학교)교사가 됬었다.안정된 경제여건과 평안한 생활이었으나 이 때의 사회생활이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다 하는 생각을 굳히게 했고 의과대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신다. 교사생활 삼 년여의 저축으로 입학금이 마련되어 입시를 위해 상경하였는데 이때 뒷이야기가 할머니께선 학자금 걱정에 시험에 떨어지면 고향에 내려와 돈이나 벌지 하며 낙방했으면 하셨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시며 은근히 자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결정을 내려 주었으면 하셨던 것 같으며 항상 부지런히 그 길을 가시던 모습을 닮고 싶어 나 역시 이렇게 이 길을 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