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채화반 동호인클럽 이름을 大慶實色水彩畵班으로 지었습니다.
원래 대경실색(大驚失色)이란 '놀라서 얼굴 빛이 하얘지다'의 뜻이지요. 여기서는 대경상록봉사단의 이름을 따고 한자 실(實)의 뜻 중에서 내용과 바탕, 본질을 취하고 색(色)의 뜻 중 빛, 빛깔, 색채, 기색, 모양, 상태를 합쳐 이 모두를 아우르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쳐 기성작가들만큼 달라져 보이겠다는 수채화반을 맡은 저의 각오를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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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감명 깊게 읽고 소개한 글. 수채화반에 오셔서 새로운 마음으로 그림을 시작하는 분들께 다시 전합니다.
그림이나 글 모두 결국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닐까요.
(새내기를 위한 붓방아 경남신문 2015. 2. 27- 오피니언 '한판암 작가칼럼'에서 퍼옴)
모레면 춘삼월이다. 이 봄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울 다양한 새내기들에게 말 부주를 해 볼 요량으로 붓을 들었다가 옴짝달싹 못하고 붓방아를 찧으며 밥만 축내던 ‘밥쇠’의 독백이다. (♡밥쇠: 밥만 축내는 사람을 이름. 절에서 끼니때를 알리기 위하여 다섯 번 치는 종. 두리봉註) 그림을 업으로 하는 동네의 얘기이다. 처음 입문하면 무조건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임모(臨模)단계에 머문다고 한다. 그 경지를 끝없이 반복하다가 남의 그림에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가감하는 방작(倣作) 단계로 진일보한다는 얘기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남의 색채가 옅어지고 자기 특징과 때깔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지나면 완벽하게 자기 주관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고유한 화풍(畵風)을 이룩해 하나의 화가로 탄생한다는 천명에 공감한다. 검술과 그림은 차원이 다를 법한데 맥을 같이한다. 검술하는 이들이 들려준다. 검술에서 단련(鍛鍊)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단(鍛)’은 같은 동작을 1000번, ‘련(鍊)’은 1만번 반복 연습을 뜻한다는 얘기이다. 단순한 검술동작 하나를 익히는 데도 피나는 노력이 따라야 함을 웅변한다. 이러한 이치는 어찌 그림이나 검술에만 국한되리오. 세상만사 투철한 도전정신이나 자기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존재할 손가. 그렇지만 새내기들에게 천금 같은 삶의 지혜나 지식도 슬기로운 전수방법과 때가 있는 법이다. 병아리가 부화를 시작하면 일정한 시간 내에 달걀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새 생명을 얻는다. 이에 부합한 행위가 ‘줄탁동시(啐啄同時)’이다. 부화란(孵化卵)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고 연약한 부리로 죽을힘을 다해 쪼아대는 행위가 ‘줄(啐: 쪼을 줄)’이다. 이때 어미 닭은 병아리가 쪼아대는 소리를 알아채고 바깥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며 돕는 행위를 ‘탁(啄: 쪼을 탁)’이라고 한다.
(♡원문에 줄啐자가 빠져 있었음. 찾아 수정하면서 고사성어사전의 풀이를 읽어보니 “닭이 알을 깔 때에 알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 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행하여지므로 師弟間(사제지간)이 될 緣分(연분)이 서로 무르익음의 비유로 쓰임. 啐이 ‘쵀’나 ‘줄’로도 읽히나 啐啄同幾(줄탁동기)보다 '쵀탁동시'라고 읽는 게 중국 원음에 가깝고 바르다는 설명 있었음.♡ 두리봉註)
이 숭엄한 찰나에 아귀가 맞아야 할 철칙은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병아리와 어미닭이 함께 껍질을 쪼지만 어미는 도우미에 머물 뿐이다. 결국 어미는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알을 깨고 광명천지로 나오는 탄생의 환희는 병아리 자신의 의지와 도전이 낳은 결실에 따른 보상이며 축복인 셈이다. 모든 세상사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새내기들이 새겨 두었으면 좋으련만. 어떤 삶을 겨냥해야 할까. 인술을 펼치는 의사에게서 답을 찾는다. ‘의학 지식을 가까스로 터득’한 소의(小醫)는 ‘기껏해야 병을 고치’는 치병(治病)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식견을 어느 정도 구비’한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치인(治人)이 한계 능력이다. 그들에 비해서 ‘하늘의 천리나 자연의 섭리를 달통’한 대의(大醫)에 이르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치국(治國)이 가능하기에 세상도 너끈하게 바꾼다는 인식이다. 우리네 삶이나 하는 일도 다를 바 없을진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화두에 대한 되새김이 필요한 걸까. 가을에 파종할 보리나 밀을 봄에 파종하면 결실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을에 파종해 겨우내 혹독한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생물학적으로 형질이 변형되는 버널리제이션 과정을 거쳐야 결실에 이른다. (♡vernalization : 개화 결실을 촉진하다, 춘화(春化) 현상을 일으키다. 춘화처리. (두리봉註) 우리의 삶도 같은 맥락이라는 견지에서 ‘맥(脈)도 모르는 터수에 침통(鍼筒) 흔드는’ 짓을 하면서 외람되게 새내기들에게 응원가를 부르고 싶었다. ‘훨훨 날아라! 하늘 높이’라고.
첫댓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